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22일 목요일 오전 03시 29분 26초
제 목(Title): 박노자/ 한푼한푼을 아끼는 쾌감 


출처: 한겨레 21 

[박노자의북유럽탐험] 한푼한푼을 아끼는 쾌감!

지나칠 정도로 ‘덜 쓰는’ 노르웨이인들의 절약정신… 국제원조는 아끼지 
않는다 


 
사진/오슬로의 한 쇼핑센터. “줄일 수 있는데도 안 줄이는 소비는 부끄러운 
낭비”라는게 노르웨이인들의 투철한 관념이다.(SYGMA)


한 국가나 한 시대의 집단 심리를 가장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돈과 소비에 대한 관념인 것 같다. 자신의 노동력 즉, 자신의 몸과 마음을 
노동시장에 내다 팔아서 얻은 ‘경제적 매체’를 어떻게 이용하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공동 의식의 윤곽이 매우 명확하게 보인다. 한 예로, 필자가 기억하는 
옛소련에서는 지식인끼리 ‘돈 이야기’가 성에 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개인·사회의 ‘치부’로 취급되어 철저하게 터부시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돈도 소비품도 풍부치 못한 그때의 사회에서, ‘돈’과 ‘소비’(그리고 성)에 
대한 욕망은 억제되었을 뿐, 내면적으로 그것들이 극복·초월되지는 못하였다. 
구체제가 무너지자 터져나오듯이 전 사회를 덮쳐버린 배금주의, 소비주의, 
그리고 성 개방의 거센 파도가 이 사실을 잘 증명한다. 

구체적인 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의 내면은 ‘터부시’와 
‘절대시’의 양극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잇속을 너무 
밝히면 치사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아직도 입사 때 초임을 묻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일부 계층은 국제적인 소비의 ‘봉’이나 
‘큰손’으로 대두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나 한국도 자본주의를 
자발·유기적으로 잉태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이식당한 사회로서 경제·소비 
윤리에서 한 가지 특징을 공통점으로 한다. 즉 중세적인 금욕주의를 완전히 
배제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자본주의적인 물신숭배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것이 
봉건적인 과시 지향과 결부돼 비정상적인 소비 윤리를 낳게 된 것이다. 
모스크바를 ‘세계에서 벤츠가 가장 많은 도시’로 만든 러시아 졸부들이, 
프랑스산 고급 마차를 유럽에서 가장 많이 소비했다는 19세기의 러시아 
귀족들의 ‘미풍약속’을 이어받았듯, 외제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는 한국의 
일부 부유층은 공교롭게도 명나라의 물건을 탐냈던 고려 말·조선 초기의 일부 
사대부의 풍토를 좀더 왜곡된 모습으로 재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는 교수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 필자가 목격하는 것은, 소비하려는 욕망보다는 오히려 
소비를 되도록 줄이려는 구두쇠식 욕구이다. 예를 들어서 점심시간 때, 
비교적으로 값싼 학교 식당을 찾는 교수들이 돈을 내고 사는 것은 고작 차나 
커피 한잔이다. 거의 예외없이 도시락을 집에서 준비해 가져와서 먹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자신의 인스턴트 커피를 가져와서 공짜로 주는 뜨거운 물로 
커피를 만들어 마시면서 “오늘 나는 돈을 하나도 안 썼다”며 동료들에게 
자랑한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들은 케이크 등의 고급 음식까지 집에서 만들어와 
동료와 나누어 먹으니, 식탁은 그리 엉성해 보이지도 않는다. 교수들이 이 
지경이니 학생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집에서 싸온 음식을 학생 휴게실에서 
나누어 먹으면서 끼니를 때우는 것은 그들의 일상이다. 외식할 사람이 없어서 
캠퍼스 안에 몇 군데의 값싼 ‘할인 식당’은 있어도 학교 근처에는 변변한 
중·고급 레스토랑은 전혀 없다. 한국의 거의 모든 대학들을 둘러싼 소비문화와 
레스토랑과 주점들이, 학업에 정진해야 할 학생들에게 과연 어떤 것을 심어주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정 소득을 보장받는 교수들과 학비가 무엇인지 모르고 생활비까지도 
국가로부터 특수 대출의 형태로 받으면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왜 값싼 ‘할인 
식당’의 점심 비용까지 그렇게 과시해 가면서 아끼는 것인가. 노르웨이의 
전체적인 고물가 현상으로 인한 평소의 심리적 압박감도 작용하겠지만, “줄일 
수 있는데도 안 줄이는 소비는 부끄러운 낭비”라는 노르웨이사회의 투철한 
관념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리고 본인들도 의식하는지 필자로서 잘 알 수 
없지만 ‘자급자족(?)’형 습관의 커다란 장점은, 음식쓰레기가 거의 안 생기는 
것이다. 자신이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샌드위치를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먹게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상정일 것이다. 


고급 관료들, 지하철을 타다 



 
사진/노르웨이 사람들이 드문 외식 시간 때 즐겨 찾는 간단한 멕시코 요리. 
주식은 메뚜기 요리다.


북유럽 사람들의 지나친 ‘절약 집념’이 가장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자동차에 대한 것이다. 전체의 약 60%의 가구들이 승용차를 보유하고 있는 
노르웨이의 자동차 보급 비율은 한국과 큰 차가 없지만, 보통 자동차를 
10∼15년 동안, 혹은 완전히 폐차될 때까지 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하나의 
개인적 자랑으로 삼는다. “내 차가 이미 녹슬고 있죠. 완전한 폐물이죠”라고 
자랑을 하면서 필자를 자신의 고물 자가용에 태워준 대학교 한 학과의 학과장의 
모습은 지금도 필자의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남아 있다. 

차를 오래 쓰거나 아주 낡은 차라도 돈을 받고 팔려는 욕심 못지않게, 출퇴근과 
같은 일상적인 일에는 자동차를 안 쓰려는 욕심은 매우 강하다. 보통 
400∼500명의 직원이 있는 중간 규모 기업의 주차장에는, 20∼30대의 차밖에 
보이지 않는다. 절대 다수의 임·직원들은 웬만하면 도보로 출퇴근하거나 
자전거·대중교통을 사용한다. 그리고 고급 직책이나 관료일수록 자동차를 
출퇴근 수단으로 이용할 확률이 적다는 것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노르웨이를 방문한 한국 외교통상부 장관을 접대하는 노르웨이 정부의 공식 
조찬에 필자가 학계 대표로 초청을 받아 가서 목격한 몇 가지 장면들이다. 
노르웨이 외무부 장관이 주최하는, 그리고 정부 각 부서의 부장관급 인사와 
산업계 대표 등이 참석하는 의례적인 조찬에서, 노르웨이의 일반인들이 즐겨 
먹는 감자 요리와 약간의 생선, 야채, 수프, 딸기밖에 별다른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필자로서 이미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은 행사의 폐막 이후에 시작되었다. 한국 귀빈들은 물론 
외무부의 공무 차량으로 모셔져 갔는데, 노르웨이 고급 관료와 기업인들은 거의 
모두 행사 장소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는 것 아닌가. 국내의 최고 기업인 
석유공사의 고급 임원 몇 사람은 필자와 같은 지하철 객차에 타기도 하였다. 
고소득자인 그들에게 자가용이 없는 것이 아니었겠지만, 자가용 없이도 갈 수 
있는 시내 장소에 자가용을 끌고 간다는 것은, 그들의 윤리관으로 거의 윤리 
위반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특히 동료들 보는 앞에서 자가용을 
‘남용’한다면 직장사회에서 배척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개인 소비에서는 ‘군살 도려내기’를 즐기는 노르웨이 
‘자린고비’들이 국제 원조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이다. 원칙적으로 해마다 
국내총생산의 약 1%는 주로 노르웨이개발기구(www.norad.no)를 매개로 하여 
최빈국들의 기아 구제, 개발 등에 쓰여야 한다(참고로, 서방 선진국가들의 
국제원조 대 국내총생산의 평균 비율은 0,22%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도 
제3세계들의 비극의 규모에 비한다면, 불난 집에 단지 물 몇 방울을 떨어들이는 
정도일 것이다. 이외에도, 보통 개인 기부자 약 5만∼6만명씩을 두고 순수 
민간기부금만으로 1년에 약 2천∼3천달러의 예산을 만드는 
교회원조기구(www.nca.no), 아동구조기구(www.reddbarna.no), 
개발재단(www.u-fondet.no) 등의 민간원조기관들이, 노르웨이 사람들의 일상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부를 하거나 이들 
민간원조기관에 자원 봉사한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적인 일이 됐기 때문이다. 


‘배부른 자’들의 가책? 



 
사진/서부 노르웨이의 음식전통을 대변하는 특식 ‘구운 양고기’(pinnekjot). 
성탄절이 되면, 약 70%의 서부 노르웨이의 주민은 이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값비싼 이 전통 음식을 평소에 먹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불평등한 무역과 채무 관계를 통해서 북유럽을 받쳐주는 제3세계의 
구조적인 빈곤에 대한 자신들의 양심의 가책을 이와 같은 수법으로 잠재우려고 
하는 면도 있을 수 있지만, 그나마 그러한 가책이라도 느낄 줄 아는 것은 
다행이 아닌가 싶다. 세계 어디서든지 우리가 볼 수 있듯이 ‘배부른 자’로서 
그런 가책을 느껴 실행한다는 것은 그나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덜 쓰기’와 ‘제대로 쓰기’를 최고의 자랑으로 아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소비 관념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경제활동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간주하여 소비보다 저축과 투자를 장려하는 루터교의 영향도 있고, 
‘돈 자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민주주의 윤리의 영향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노르웨이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귀족층이 없고 
외국자본도 최근까지 비교적 외면했던 노르웨이의 사회·경제의 주역은, 국교인 
루터교의 목사들을 주축으로 한 관료층과 소도시·농촌의 영세 상인·농민 
출신의 중소기업인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관료들도 국가의 월급으로는 
사치를 누릴 형편은 안 되었고(특히 목사들의 경우에는 그럴 명목조차 없었다), 
몇대에 걸쳐 자본을 어렵게 모아 가업을 시작하여 그 유지·발전에 악착같이 
진력하는 영세 기업인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더군다나 노르웨이 루터교의 
상부상조 풍속으로, 각 동네와 마을의 빈민들을 해당 교구의 유산자들이 거의 
의무적으로 도와주어야 했기 때문에, 잉여자산을 사치에 쓴다는 것을 엄두도 못 
냈던 것이다. 결국 가장 부유한 오늘의 노르웨이를 사치의 병으로부터 구제하고 
있는 ‘약’은, 바로 그 과거의 ‘풀뿌리’식의 민중적 자본주의의 유습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노르웨이의 절약 정신을 봉건적인 잔재가 강한 
관치·관변 자본주의의 사회에 이식시키려면, 경제의 ‘탈관료화’와 민중의 
도덕적 자각, 그리고 정치세력화 등 수많은 진통을 거친 뒤에야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