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20일 화요일 오전 01시 57분 40초 제 목(Title): 정운영/ 3을 버리고 2.5를 출처: 중앙일보 독서칼럼 [정운영의 독서칼럼] 3을 버리고 2.5를 --------------------------------------------------------------------------------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코피 나게 싸우던 시절 ‘제3의 길’은 제법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붕괴된 오늘 그 ‘제3’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적잖이 의문이다. 누가 눈치 없이 제3을 되뇌더라도 그것은 자본주의의 별종이기보다는 그 변종이기 쉽다. 노동당에서 노동을 내친 블레어 영국 총리가 내세우는 제3의 길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제3이란 말인가? 대처 스쿨의 우등생답게 그저 자본주의의 길이라고 했더라면 쉽게 알아들었을 텐데, 제3이니 뭐니 엉뚱한 얘기로 주위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이런 혼동은 슈뢰더 정권도 예외가 아니지만, 그래도 사민주의의 뿌리 때문인지 독일의 제3은 다소 덜 민망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 별종 아닌 변종 그중 삐딱한 것이 프랑스이다. 다 같이 사민주의 계열이지만 조스팽 정부는 영국과 독일의 제3의 길 얘기를 흘려들으면서, 오히려 미국의 제1의 길 패권에 경계를 더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지식인의 밥벌이에도 좌파 깡통이 한결 편한데, 일례로 세계화 시비가 이 나라보다 요란한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알랭 투렌의 책 『 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당대 ·2000) 역시 세계가 돌아가는 꼬라지를 아주 마뜩찮게 바라본다. 자유주의로부터의 탈출? 그것만으로도 시대를 거스르는 불충인데, 한걸음 더 나가 그는 제3의 길마저 비판하고 나섰다. 비교적 가까이서 그의 이론을 접할 기회가 있었던 20년 전만 해도, 그의 저서는 좌파 목록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가 좌파 학자이기는 여전히 어려우나, 좌파라는 말이 고어 사전에나 나옴직한 요즘 새삼스레 좌파를 쳐드는 그의 용기는 정말 한번 돌아볼 만하다. 먼저 투렌은 세계화와 자유주의가 일란성 쌍생아라는 ‘상식’을 거부한다. 세계적으로 경제통합의 추세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세계화로 불리려면 구성원 전체를 설득할 모형과 이념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런 요건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비하지 못한 세계화는 명백하게 허구이며, 결국 “지구화 이념은 이데올로기적 공갈일 뿐이다”(49쪽). 이렇게 보자면 후쿠야마가 벌이는 ‘역사의 종말’ 푸닥거리보다는 헌팅턴의 ‘문명 충돌’ 점괘가 한층 그럴듯하다. 따라서 우리가 거역할 대상은 자본 운동의 비합리성과 자본의 세계화를 막무가내로 선동하는 자유주의이다. 그중에도 야만적 자본주의의 악행을 세계에 전파하는 금융 자본이 주적이다. 그렇다면 “세계화와 자유주의를 동일한 흐름으로 적대시하는 것을 멈추자. 금융자본주의를 비난하도록 하자”(48쪽)는 제의는 저자 나름대로 당연한 것이다. 이 현안 해결에 그는 네 개의 출구를 점검한다. 첫째 ‘뒤를’ 향한 공화주의적 출구는 이미 파산한 과거로의 회귀일 뿐이고, 둘째 ‘아래를’ 향한 인민주의적 출구는 “인민의 힘에 대한 주슬적 호소”(83쪽)로서 선동가들한테 이용당하기 쉬우며, 셋째 ‘위를’ 향한 세계화주의적 출구는 “지배적인 경제 세력(특히 금융 세력)에 봉사하는”(94쪽) 위험이 따른다. 따라서 ‘앞을’ 향한 넷째의 가능성 출구야말로 기대할 만한데, 그것은 국내 정치의 사회적 목표들과 세계화를 포함한 경제적 수단이 갈등나지 않고 양립할 수 있다는 자각 아래 모든 행위 주체들이 적극 동참할 때만 가능하다. 투렌은 이런 숙제를 놓고 결정적 시기에 용단을 내렸던 조스팽 정부의 노력에 상당히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자유주의로부터의 탈출에 자유주의의 ‘만수 무강’을 비는 우파는 나설 자리가 없다. 결국 좌파가 남는데 여기서도 질서와 제도의 원활한 작동을 강조하는 ‘우파 경향’의 공화적 좌파는 물론, 사회 갈등과 ‘인민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극좌파는 논의에서 빠진다. 이들 양극단을 피한 중도적 대안이 바로 ‘사회적 좌파’이다. 그런데 그 족보가 한참 복잡하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고전적 제3의 길’이 막을 내리자 신자유주의와 사민주의 사이에 ‘신판 제3의 길’이 뒤를 이었는데, 블레어가 피리를 불고 기든스가 곡을 붙인 ‘사회자유주의’가 여기 속한다. 이에 반해 투렌은 “낡은 사회민주주의와 제3의 길 사이에 존재하는 2.5의 길을 제안하고”(1백83쪽) 나섰다. 제3의 길이 중도 우파 노선이라면, 2.5의 길은 새로운 개념의 중도 좌파라는 것이다. 요컨대 2.5의 길 깃발을 앞세운 사회적 좌파의 주도와 투쟁으로 자유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이 책에 담긴 메시지이다. ▶이념의 자율, 행동의 여유 먼저 사회적 좌파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저자는 그것이 정당이나 정치 파벌 대신 “정치적 표현이 거의 배제된 시민 사회 바로 그 속에 존재하며”(1백74쪽), 이념의 자율성과 행동의 현실성이란 측면에서 어느 좌파보다도 한층 비교 우위의 이점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만 맥이 풀린다. 아니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씀인데…. 그래 시민 운동 얘기이다. 사실 그 정도의 훈수라면 구태여 사회적 좌파로의 신장 개업 없이 기존의 우파 간판으로도 충분히 따르고 남는다. 그리고 2.5의 길도 의심스럽다. 저자는 특별히 노동의 우선권, 지속 가능한 발전, 문화간의 소통을 우선적 과제로 고려하라고 당부한다. 이런 과제 역시 2.5의 길 따위로 부산을 떨지 않고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열심히 이 책을 읽은 이유는 프랑스의 삐딱함만큼도 삐딱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경직성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정운영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