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10일 토요일 오후 01시 12분 47초 제 목(Title): 인문학데이트/ 안대회 출처: 한겨레 인문학데이트] 21. 안대회 전통고전은 삶의 지표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지금 세태에서 국학정신을 떠받치는 주춧돌이다. 이번 데이트의 주인공 안대회(40)씨는 옛 선현들이 남긴 한문고전의 바다 속에서 생생한 현실의 지혜를 건져올리고자 애써온 젊은 학자다. 실학자 박제가에 매료되어 `외로이 도리를 지키며 갈길 가는' 벽(癖)의 정신으로 한적읽기에 매달린 그는 대학원 재학중 낸 <균여전> 국역본과 <한서열전>의 국내최초 번역 등으로 일찍 두각을 드러냈다. 최근에는 <조선후기 시화사연구>와 <윤춘년과 시화문화> 등의 역작들로 한시연구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대중과 호흡하는 한문학을 주창해온 그가 대동문화연구원의 동료인 정은진(31·성대 한문학 박사과정)씨와 만나 자신의 학문세계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편집자 정은진=연구실에서 함께 옛 문헌들과 씨름하다가 이렇게 만나니 좀 어색하군요. 적절한 이야기 상대가 될지 걱정입니다. 안대회=인문학의 그늘자리에 가장 오래 잠겨온 분야가 바로 한문학 아닙니까. 방담 자체가 인문학 발전을 위한 좋은 계기가 되지않을까 싶습니다. 정=옛 문헌을 연구하다 보면 문(文)·사(史)·철(哲)이 결코 나뉜 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그만큼 옛 선현들의 사유와 학문이 이들 셋을 아우른다는 것이겠지요. 특히 최근 선생님의 조선시대 한시나 시화연구 작업에서는 역사적으로 바라보고 고찰하려는 거시적 안목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조선시대 시화사> 서문에 `무릇 저작이라 할 만한 것은 모두 사학'이라는 청나라 학자 장학성의 문구를 빌려쓴 것도 이런 뜻이 아닐런지요. 안=말씀대로 저는 문학연구에서 역사적 분석에 비중을 두어왔고, 당분간 그런 태도를 지키려 합니다. 그것은 한문학이 연구방법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현실과 연관되지요. 50년 고전문학 연구사에서 한문학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은 일천합니다. 한문학의 세계상과 현재 삶의 거리가 갈수록 커지는데도 학계는 객관성을 잃은 채 막연히 오래 된 것을 좋아하는 취미 또는 조상을 기리는 차원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주의적 균형감각이 연구에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인문학을 포함한 대다수 학문에서 역사적 관점은 학문하기의 기본입니다. 현단계로서는 학계가 수많은 학문의 작은 영역에서 작은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한문학으로만 본다면 비평사 산문사 소설사 한시사 전기소설사 등의 세부장르를 시기별 흐름으로 나누어 고찰한다면 전통문화를 훨씬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정=거시적 안목만 강조하면 작품과 작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놓칠 수 있고, 선입견에 따른 시대구분의 맥락 안에 작품들을 작위적으로 끼워넣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생기는데요. 안=현재 한문학쪽은 지나치게 주관적 작가론에 매몰되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풍토가 일반화되지 않았습니까. 산문사 소품사 등 작은 영역을 진중하게 다루되 어떤 식이든 역사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나름대로 거시적 시각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겠지요. 정=당론이 조선후기 정치, 사회, 문화 등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선생님도 저서 곳곳에서 조선후기의 문학적 특질과 관련해 당파성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요, 지금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남인 연구자는 남인의 관점에 치우치고 노론 연구자는 노론의 관점에 치우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런 당파성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안=저서를 낸 뒤 `당신은 노론이냐, 남인이냐'고 묻는 이들이 있어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제가 당론에 치우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한문학계가 그런 파당의식에 지금도 은연중 젖어있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학자가 나름대로의 독특한 시각과 정치적 견해를 지닌 것은 탓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 역사를 평가하고 문학을 자리매김하는 데 지나치게 빠지면 역사를 왜곡하고 문학성을 호도할 가능성이 있겠지요. 주의깊게 자신의 관점을 검열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조선중기 이후 문학과 학술을 다룰 적에 경계해야 할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조선후기 남인의 총수 채제공의 평안감사 시절 기행시를 두고 노론문인들은 경망하다고 혹평한 반면, 남인계열의 문인들은 위대한 기상이 엿보인다고 파당에 따라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비평이 당론에 따라 갈린 것이지요. 정=한문학 가운데서도 유난히 시와 시화, 그리고 18세기라는 시기에 주목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18세기는 조선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각별한 세기였습니다. 근래 18세기학회까지 결성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 그럴만한 세기가 아닐까요?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흥미를 느끼는 최성대, 이용휴,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정약용 같은 분들이 모두 이 때 위인들입니다. 이 시대만큼 많은 문제적 작가와 학자들이 탄탄한 자기 목소리를 낸 시기도 드뭅니다. 시대적 간격이 있기는 하지만 당대 학자들의 폭넓고 자유로운 세계관과 풍부한 감성, 날카로운 지성, 인간애 등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게다가 그들의 고민은 근현대사 굴곡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요. 우리 학문은 외세침략에 의해 이후 타의적으로 단절되는데, 그 연결 가능성을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거죠. 내가 제일 존경하는 박제가처럼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의식과 그 당시 지성인의 문제의식은 연결되어 있어요. 개인적 기호탓도 있겠지만 한문학 작품만 해도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작품이 19세기에는 별로 없고 18세기에 오히려 많아요. 제가 번역한 책이지만 박제가의 짤막한 소품문(요즘 수필) 같은 데서 현대적 감수성을 읽을 수 있었지요. 정=한문학이 21세기 어느 즈음까지 지속될 수 있을 지 가끔 자문해보곤 합니다. 인문학의 지평에서 한문학의 기능과 필요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안=우리 인문학은 서구담론에 기초한 학문과 한국적 현실에 바탕한 국학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외세침략에 따른 식민통치로 국가운명을 자율적으로 개척하지 못한 탓에 인문학 자체가 서구 콤플렉스에 오염되는 것을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죠. 따라서 학문의 뿌리는 근대와 그 이전 학문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그때 기초로서 중요한 영역이 한문학입니다. 전통문예 차원이 아니라 고전언어인 한문자체를 다루는 한문학이 담당할 몫은 대단히 큽니다. 백년간을 제외한 국내 전적 가운데 95%이상이 한문이라는 현실을 과장할 필요도 없지만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학술가치가 있는 한문자료들을 갈무리하지 않고는 인문학의 주체적 발전은 불가능합니다. 고전을 텍스트로 해석하는 문제에 소홀하면 인문학의 취약구조는 심화될 뿐입니다. 분야별 학문사에 대한 통사조차도 정리된 한적자료가 없어 못 쓰는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서는 한문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셈입니다. 서양인문학자들의 라틴어 그리스어 수준이 우리의 한문실력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유념해야겠지요. 정=박제가의 수필을 번역한 <궁핍한 날의 벗>을 지난 설날 읽었는데, 현대적인 번역문장을 통해 은은한 숯불처럼 시류 비판적인 그의 메시지가 잔잔하게 다가옴을 느꼈습니다. 사실 한문고전은 딱딱하게만 인식되는데요, 한문학 유산을 좀더 친숙하게 대중과 만나게 하는 방법론은 없을까요? 안=지금 말한 주제에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 한문학자들이 사명감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요. <궁핍한 …>은 한양대 정민 교수와 한국 고전을 새롭게 번역하자며 시작한 첫 결실이었는데, 독자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어요. 2세기 이전 우리 학자의 아름다운 산문을 통해 산 인간의 체취와 고민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시대 문제가 현실의 문제와 연계됐음을 깨닫게 됐다는 것이었죠. 고전을 현대적 언어로 가공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런 작업이야말로 인문학에 관심있는 고급독자를 확보하는 길임을 확인하게 됐어요. 한문학자는 인문학에 무관심한 대중을 탓하기 전에 그들이 가까이할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급독자의 관심을 일깨울 다채로운 고전독서물 개발이 시급하다 하겠지요. 번역시스템의 마련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열쇠는 인문학자들 자체의 자기혁신에 있습니다. 물론 저도 힘 닿는 대로 노력할 생각입니다. `두터이 쌓아 조금씩 덜어낸다'는 `후적이박발(厚積而薄發)'의 각오로 정진해야겠지요. 정리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사진 이정우 기자@hani.co.kr 안대회는 누구? △ 1961년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남. △ 85년 연세대 국문학과 졸업. △ 94년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 98년~현재 계간<문헌과 해석> 편집위원. △ 서울대 연세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강사. △ 2000년~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책임연구원 △ 쓴책:<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1999, 소명출판), <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2000, 연세대 출판부), <조선후기시화사>(2000, 소명출판), <윤춘년과 시화문화>(2001, 소명출판), <7일간의 한자여행>(1999, 한겨레신문사) △ 옮긴책:<소화시평(小華詩評)>(1994, 국학자료원), <선집 한서열전(漢書列傳)>(1997, 까치), <궁핍한 날의 벗>(2000, 태학사). 안대회가 말하는 안대회 그저 한문이 좋고 학문이 좋아서 시작한 공부가 이제는 업(業)이 되고 벽(癖)이 되었다. 국문과에 적을 둔 대학 초년시절 철학에 더욱 관심을 두어 비트겐슈타인 등을 좋아했었는데 그리스 비극에 탐닉하면서 문학으로 회귀하였다. 우리 문학의 깊은 이해는 한문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게걸스럽게 한문책을 들여보았는데 구두가 달리지 않은 <경서(經書)>를 외우고, <서유기>와 <수호지>를 고생하며 독파한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4학년 때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영인본을 사서 읽은 것이 한문학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였다. 대학원에 들어간 뒤 한적을 다양하게 많이 읽으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러면서 얄팍한 자신의 국량을 감추지 못하고 번역도 하고 논문도 써서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는데 섣부른 짓임을 갈수록 느끼고있다. 공부, 그 자체는 즐거운 노동이라 어려울수록 쾌락이 배가하기도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을 직업으로 갖는다는 것은 사서하는 고생이다. 문명의 변모만이 아니라 제도와 인간관계가 채충(##채=病에서 丙글자뺀 부수부분을 祭글자 위에 덧씌운 것##蟲·억울하게 옥살이한 사람에게서 태어나 사람들의 장기를 파먹고 산다는 전설상의 벌레)이 오장육부를 파먹듯이 공부하는 즐거움과 의의를 갉아먹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뻣뻣하게 목을 세우고 이 길을 가야 한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지사 장이(張怡)는 그가 저술한 많은 저작을 보여달라는 이에게 "나는 저술하며 한 평생을 마치겠소. 벌써 단지 2개를 마련해놨으니 하관할 때 함께 묻을 것이오"라며 거절하고 저서를 자기와 순장하였다. 장이의 가혹한 처신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