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5일 월요일 오후 01시 31분 27초 제 목(Title): 조우석/서평 이종욱,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출처: 월간중앙 2 한국 고대사의 사라진 400년을 되살린다 조우석의 독서일기-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조우석 이종욱 지음/김영사/15,900원 본디 위력있는 본격 저작물이면서도 지식대중을 위한 읽을거리로도 쏠쏠한, 따라서 양수겸장의 성격을 가진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의 신간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김영사·1만5,900원)를 읽으면서 필자는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자명하다. 오랜 논란 속의 한국 고대사 연구라는 영역과 관련해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가 이른바 학계 기왕의 통설은 물론 연구의 패러다임 자체에 도전하는 파천황(破天慌)의 저작물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학계의 통념 내지 패러다임에 정면도전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시한폭탄’임에 틀림없는 이 책을 보면서 필자는 왜 조동일 교수를 떠올렸을까. 조동일 교수는 5년 전에 펴낸 “우리 학문의 길”(지식산업사)에 이런 근사한 구절을 포함시켜 놓고 있었다. 큰 학문에 뜻을 품고 있다면, 그리고 연구자가 모름지기 젊어서 남다른 대원력을 가지고 있다면, 불교에서 말하는대로 돈오(頓悟)의 과정부터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불교의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학문에는 점오점수나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아닌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방법을 택해야 한다. 젊음이 가기 전에 돈오해야 평생토록 점수할 그 어떤 밑천이 생긴다.” 과연 멋진 이 말에는 기성의 도토리 키재기식 학문행위, 고만고만한 학문행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깔고 있음이 분명하다. 학문이란 일상을 사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무엇인가 성찰과 체계적인 사유의 길라잡이가 돼야 옳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간의 우리 학문이란 직무유기에 다름없었다는 문제의식 말이다. 조교수는 또 학문을 스포츠에 비유하면서 학문에는 국내경기가 따로 없고 국제경기만 있을 뿐이라는 것, 때문에 외국 학문의 경향을 단순소개하는 식의 ‘유통업’이란 무의미하며 따라서 ‘진정한 제조업’으로 가야 한다는 원력을 다시 한번 강하게 표명한 바 있다. 이런 군말을 늘어놓는 이유를 일부의 독자들은 감지하셨으리라.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야말로 필자가 보기에 돈오 내지 돈오에 가까운 학문적 원력(願力)의 소산이라는 판단 말이다. 또 ‘진정한 제조업’의 열매에 해당하는 저술임도 분명하다. 그리고 필자에게는 어떤 징후로 읽혔다. 즉, 지난해 나온 역사학 관련 저작물인 경기대 이재범 교수의 “슬픈 궁예”(푸른역사),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등도 부분적으로 그러한 성격을 띠고 있지만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역시 많은 점에서 기존의 역사서와 차별성을 갖는다. 서적의 유통회로를 학계에서 지식대중 일반으로 바꿨다는 외양상의 변화와 함께 기존 학문의 통설이라는 구각을 깨는 예사롭지 않은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런 성격은 적지않이 격앙된 저자의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그가 허황한 국수주의에 물들기 십상인 재야학자가 아니고 제대로 코스워크를 거친 정통학자라는 점에서 신뢰감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자,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보자. “‘화랑세기’는 한국 고대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사료 부족을 크게 해결해 준다. 또 20세기 역사학계를 지배해온 통설의 벽과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같은 사료의 벽을 넘어, 한국 고대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게 해 주었다. 이제 우리는 신라 사람의 이야기를 통하여 신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다.…그동안 보통 위작(僞作)으로 알아온 ‘화랑세기’는 신라의 비밀을 푸는 암호다. 필자는 신라 여행의 외로운 안내자이다. 새로운 학설과 이론은 언제나 한 사람 또는 소수집단에 의하여 시작된다.” 신간의 서문 두어쪽에서 발췌한 이 글에서 보이는 이 교수의 발언은 자신이 ‘신라 여행의 외로운 안내자’라는 자임에서 더욱 강화되지만 ‘외로운 안내자’ 이교수는 과연 누구인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교수는 국내 대학(서강대)에서 고대사를 시작한 뒤 미국 캔자스대와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대에서 인류학·사회학·고고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인접학문에 대한 정보가 이례적으로 많은 편에 속한다. 즉, 인류학이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한 비교사적 연구가 강점이다. 그가 1999년에 펴낸 하드커버본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체계”(소나무)에는 “사회발전을 중시하는 역사적 관점과, 사회 전체를 중시하는 구조적 관점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는데,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대목이다. 이제 이 책의 세목(細目)을 들여다볼 차례다. 신간은 진본, 위서의 논란 한가운데 서 있는 기초사료인 “화랑세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전제 아래, 따라서 고대 역사서 중 가장 많은 정보량과 생생한 리얼리티를 자랑하는 이 책에서 솜씨좋게 신라인의 삶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화랑세기”라고 하는 텍스트는 AD 7세기경 신라시대 김대문이 지었다고 말로만 전해져온 바로 그 책이다. “삼국사기” 46, ‘열전’ 6조를 보자. “김대문은 신라 귀문의 자제다.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다. 전기 몇 권을 지었는데, 그 중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는 아직도 남아있다.” 따라서 1145년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화랑세기”는 고려인들의 수중에 있었음이 확실한데, 오랜 동안 자취를 감췄다 이번에 필사본이 튀어나오면서 학계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것이다. 현재까지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재 일본인의 손이나 조선시대 후기 혹은 근세의 어떤 재야 사학자들에 의한 의도적인 위작(僞作)으로 보기도 하고, 한켠에서는 도가(道家)류의 비기(秘記)문서 정도로 가늠해 보기도 한다. 이런 견해는 감정이 앞서는 것이 보통이며, 따라서 “화랑세기”에는 신라사회에 도덕적 흠집을 내려는 의중을 깔고 있다고 보는 시선이 깔려 있다. 그러면 이 책은 과연 무슨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렇게 논란일까.“화랑세기”는 사다함·김유신·김춘추 등 우두머리 화랑(花郞)인 풍월주(風月主) 32명의 전기를 모은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신라인들의 엽색(獵色)행각을 지금의 도덕관념과 성윤리를 잣대로 볼 때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이다. 신라 왕실에는 왕에게 섹스 서비스, 즉 생공(生供)을 바치는 여인집단이 있었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고대사의 주류적 시각을 대표하는 서울대 국사과의 노태돈 교수가 이를 정사(正史)로 수용할 수 없다며 그 내용의 신빙성에 진작부터 의문을 제기한 것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아무튼 이교수의 이번 저작은 “화랑세기”에 밝혀진 ‘신국(神國)의 도(道)’를 찾아내는 1차작업을 하고 있다. 신라는 자신을 신의 나라로 일컫고 나름의 제도와 원칙을 갖고 살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랑세기”에 낯뜨겁게 묘사한 각종 에피소드들은 그 ‘신국의 도’를 이해하는 길잡이일 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신간에 따르면 “화랑세기”에 나오는 새로운 사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복자’(摩腹子)란 존재다. 마복자는 고대 동서의 그 어떤 인류학적 집단에도 비슷한 유례를 가진 일이 없을 정도의 파격인데, 이교수는 아마도 서양 중세 때의 ‘초야권’(初夜權)과 비유하고 있다. 중세 영주들은 농민들이 혼인할 경우 그의 신부와 첫날밤을 보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초야권이다. 우선 마복자의 마(摩)는 문지르다는 뜻으로, 마복자는 배를 맞춘 아들 정도로 해석된다. 신하나 부하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왕이나 상관에게 바쳐 난 아들이다. 1세 풍월주였던 위화랑조에서부터 이런 이야기는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색공만 해도 그렇다. 사다함의 애인이었던 미실이란 여인은 진흥·진지·진평 3대 황제를 섹스로 섬긴다. 신라는 이를 공급하는 여자들의 계통을 정하였는데, 이런 여성들은 진골정통(眞骨正統)이거나 대원신통(大元神通) 출신이었다. 그래도 특이한 점은, 신라는 처첩을 분명히 구분한 일부일처 사회였으며 신분차별이 극심했다는 것이다. 이런 충격적인 인류학적 풍습은 그 자체로도 논란거리지만 필자에게는 이 책의 중간부분에 있는 화랑도 대목이 주목됐다. 무엇보다 “화랑세기”가 역대 화랑의 전기물이라면, 그 안에서 ‘우리 고대사의 예외적인 청년엘리트 조직’인 화랑도의 어떤 실체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짐작은 상식적이다. 놀랍게도 화랑도는 풍류도(風流道)와 함께 우리 고대사에 대한 과장된 해석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이 사실 아닌가? 그러면서도 막상 화랑도에 관한 연구는 일본인 미지나 아키히데(三品彰英)의 1943년도 연구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미지나의 경우 화랑제도의 원류를 삼한시대 청년집회로 본다. 이후 왕권이 증대됐던 법흥왕·진흥왕 시대에 들어 남자집회로서의 원래 기능을 잃고 왕권 아래 예속된 민간조직으로 모종의 전사계급과 사교가무의 성격이 가미된 조직으로 기능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후 국내 사학자들에 의해서도 반복되는 이런 논리는 화랑도를 ‘연령 차원의 그룹’으로 본다. 즉, 국가 형성 이전의 부족사회인 삼한시대의 사회조직이 발전해 화랑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은 삼한시대가 국가 형성 이전의 사회 발전 단계였다는 시선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런 견해를 뒤집는 이교수의 학설은 신간에 화랑도와 관련한 세밀화를 그려 보이고 있다. 즉, 요즘 군대의 사단장에 해당하는 대표화랑의 존재인 풍월주(風月主)가 있고, 그 밑에 부제(副祭)로 불리는 부사단장급이 포진하고 있으며, 휘하에는 모두 9개의 주특기를 각기 전담하는 상당히 방대한 조직이 있었다. 9개 조직은 도의(道義·도덕적 이데올로기) 문사(文事·문장) 무사(武事·전투임무) 현묘(玄妙·도가적 현묘도 사상으로 추정되는 활동을 전담하는 조직) 악사(樂事·음악그룹) 예사(藝事·예술활동) 유화(遊花·오락기능 조직) 그리고 제사(祭祀)·공사(供事)로 표현되는 제례기능 조직 등이다. 어떤가? 대단히 정교하게 분업화되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집단이 화랑도라는 판단이 퍼뜩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화랑도는 분명 전투집단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우리의 선입견대로 산천을 떠돌며 집단적 트레이닝을 거친 순국무사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갖고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은 화랑의 세밀한 계보와 함께 파벌의 옳고 그름을 논하겠다고 언급한대로, 화랑도의 일부 모습만 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다만 “화랑세기”에는 ‘우주에 있는 맑고 으뜸이 되는 기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즉, 11대 풍월주와 부제 사이에 알력이 생겨 헤게모니 다툼이 있었던 대목을 언급하는 부분과 16대 풍월주 보종공 서술에서 각기 이런 설명이 나온다. 따라서 앞으로 연구가 보충되어야겠지만, 이 대목을 통해 화랑도의 이데올로기와 교육상의 커리큘럼을 유추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고대사회의 원리를 파헤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보인다. “선도는 본래 우주의 청원(淸元)의 기(氣)에서 나왔다. 즉 시비로서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위를 버리고 도를 구하여 참된 생이 되도록 하라.” “우주의 진기(眞氣)를 깊이 살펴 어조(魚鳥)와 화목(花木)이 끊임없이 생기는 이치에 정통하고….” 자, 논란은 지금부터다. 얘기의 서술상 “화랑세기”와 이 책이 담고 있는 스토리만 언급했지만, 이교수의 이 책은 실은 고대사에 관한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흔든다. 즉 지금까지 고대사 연구자들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불신하고, 외려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의 ‘한전’(韓傳)을 중심으로 구축된 고대사 체계를 통설로 받아들인다. 그 경우 백제와 신라의 국가 형성 과정을 기록한 수백년간의 역사가 증발해 버리게 된다. 대신 고대국가가 없는 자리에 소국들이 분립해 있던 것으로 묘사된다. 이교수의 말을 들어 보자.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삼국지’ 한전이 보여주는 고대 한국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두 사서 가운데 어느 것을 따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고대사의 체계가 생겨난다. 일본의 황국사관은 ‘삼국사기’ 불신론에 기대 왜가 백제·신라·가야를 통치했다고 주장한다.”(“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체계” 머리말) 이에 따라 이교수는 300년 이상의 백제사와 400년 이상의 신라사를 한국 고대사에서 건져내려 한다. 고대사 재구성 작업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적용되는데, 즉 건국신화를 과감하게 끌어들여 재해석하고, 여기에 다양한 금석문 자료 등에 대한 해석을 더했다. 또 인류학적 이론을 토대로 초기 국가에 관한 새로운 정치·사회발전론을 대입하고 있다. 글의 모두에 필자가 ‘돈오’ 내지 ‘원력’이라고 표현했던 것도 이런 작업상의 진취성 때문이었다. 자, 이제 논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고대사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용시키고, 대학시절 스승(이기백 교수)과 다른 학설을 자유로이 발표할 수 있도록 하는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음을 자랑스럽게 고백하는 이교수의 승리로 이어질까? 아니면 만일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가 가짜로 판명나면서 ‘외로운 안내자’의 꿈이 무산될 것인가? 전문가가 아닌 이상 필자는 손쉬운 답을 내놓을 수 없다. 다만 이교수의 진취적 자세에 호감이 간다는 것, 따라서 승리는 그의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장기적인 전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 둔다. 궁금하시면 두 권의 책을 읽어 보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