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2월 5일 월요일 오후 12시 52분 19초 제 목(Title): 이덕일/ 우당 이회영, 그 위대한 아나키스� 출처: 월간중앙 2 友堂 李會榮 그 위대한 아나키스트의 삶 현대사 발굴-구한말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 다한 百世淸風의 節義 이덕일 역사평론가 三韓甲族의 신분으로 부귀를 갖고 태어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바친 사람. 마침내 목숨까지 조국 독립의 제단에 바친 사람. 北京·上海·天津·大連 그리고 滿洲…. 이회영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역사의 길에서 만난 사람 역사를 전공하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기쁨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누리기 어려운 특혜일 것이다.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이미 고인이 된 사람 중 유독 마음에 끌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필자의 경우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선생이 그런 인물이다. 퇴계 이황 선생이 ‘고인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을 못뵈오니, 고인을 못뵈어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늘 아니 걷고 어이하리’라고 읊은 시조처럼 우당과 필자도 서로 보지 못했지만 일종의 영적 교감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난해 11월 말 우당의 발자취를 따라나섰던 현장답사가 필자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답사는 책에서 느꼈던 문헌적 교감을 공간적 교감으로 넓혀 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베이징(北京) 공항으로 마중나온 가이드의 일정표가 국내에서 필자가 보내준 일정표와는 완전히 다른 자금성·천단·만리장성 등 관광 일정표로 뒤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이번 답사가 그리 순탄치 않으리라는 점을 직감했다. 그러나 이회영의 험난한 전생을 따라가는 답사길이 어찌 순탄할 수 있으랴! 이회영이 유독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데는 이 시대의 탓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가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즉 지배층의 엄격한 의무는 간 곳 없고 특혜만이 횡행하는 시대이기에 더욱 이회영이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는 많은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부족에 있다. 영국의 명문 이튼스쿨 출신 지배층은 역시 이튼스쿨 출신 아들을 남보다 먼저 전쟁에 내보낸다. 그러나 한국의 지배층은 전시에는 물론 평화시에도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다. 6·25때 전선에서 총에 맞으면 빽이 없어 죽는다 하여 ‘빽’이라는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는 농담이 단순한 우스갯 소리가 아닌 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닌가? 지금도 장·차관이나 국회의원, 각 정당의 지도자들이나 심지어 군 장성의 자식들은 일반 국민의 아들들보다 훨씬 적은 비율로 군대에 간다는 것은 추측을 넘어 통계자료가 뒷받침하는 사실이다. 조선이 망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부족이었다. 물론 시종무관 민영환(閔泳煥)과 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시위대 대장 박승환(朴昇煥) 등 나라가 망하자 목숨을 던진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500년 장구한 사직의 지배층치고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이들이 너무 적었다. 평양대에 소속된 군졸 김봉학(金奉學)과 시골의 유생이었던 매천 황현 등의 순절이 더욱 빛나는 이유도 이들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을 돌아보면 기가 막히는 이유도 나라를 망하게 한 공로로 일본으로부터 상을 받은 지배층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1910년 10월7일 이른바 합방(合邦)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하는데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등 모두 76명이나 되었다. 이들 대부분이 합방 공로작이 아니라 나라와 운명을 같이해야 할 신분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중에는 이회영의 사돈 조정구(趙鼎九)나 민영달처럼 수작을 거부하고 자결을 시도한 인물들도 없지는 않으나 대부분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생을 호의호식하며 고종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 역시 오늘날까지 부와 영화를 잇고 있으니 한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족의 집단망명 이들 합방 공로로 작위를 받는 사람들이 일제로부터 받은 훈작과 상금의 희열에서 채 깨지 못한 그해 12월, 한겨울의 혹한 속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40여명의 대가족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는 이회영 일가였다. 그때 이회영의 나이 이미 44세였다. 그의 형 건영·석영·철영과 두 동생 시영·호영 가족도 포함한 대가족이었다. 이 대가족은 나라가 일제에 망하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혹한의 만주행을 결행한 것이다.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李裕承)은 고종때 이조판서를 역임했지만 이회영은 고종이 탁지부 주사를 제수했을 때 완강히 사양한 데서 알 수 있듯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의 멸망과 운명을 같이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온 형제를 설득해 전가족 집단망명이라는 희귀한 사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는 비록 벼슬하지 않은 백두였지만 그의 집안은 고종때 영의정이었던 이유원(李裕元)을 비롯해 영조때의 영의정 이종성(李宗城), 선조 때의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등이 있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이었다. 이회영은 비록 벼슬은 사양했지만 바로 이 삼한갑족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현하기 위해 전가족 집단망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회영 일가가 집단으로 이주한 이유는 만주지역에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꾸리기 위해서였다. 만주지역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은 1907년 발족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구상이었다. 이회영은 신민회의 창설멤버이자 핵심멤버였다. 신민회는 해외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창건해 적당한 때를 이용해 독립전쟁을 일으켜 무력으로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회영은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그곳에 망명중인 평생지기 이상설과 만나 국내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후 신민회를 조직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만주행을 결행한 것이다. 드디어 1910년 8월 일제가 합방이라는 명목 아래 나라를 강탈하자 이회영은 비밀결사 신민회와 협의해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행을 단행했다. 이때 이회영은 가산을 모두 정리해 거금 40만원이란 현금을 마련했다. 당시 쌀 한섬이 3원씩 했으니 쌀값이 당시보다 상대적으로 눅은 지금의 비율로 따져도 수백억원은 되는 거금이었다. 이들이 자리잡은 곳은 압록강을 건너 퉁화(通化)를 지나 류허(柳河)현 삼원보 서쪽의 추가가(鄒家街)였다. 추씨가 토호로 있는 지역이라 추가가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필자는 추가가로 가기 위해 만주철도의 시발지였던 다롄(大連)에서 선양(瀋陽)행 열차를 탔다. 선양에서 창춘으로 가서 퉁화행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러시아의 조차지였다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조차지가 되었던 다롄에는 옛 만주철도 본사가 있어서 지금도 일본인들의 기념촬영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의 기념촬영 모습을 씁쓸한 심정으로 바라보며 비 내리는 다롄역을 떠났다. 기차가 출발한 지 조금 지나지 않아 하얀 설원이 나타났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얀 들판과 눈을 맞고 서 있는 나무들뿐인 설국이었다. 기관차만 디젤이고 객실은 석탄을 사용하는 중국 기차의 추위에 떨면서 도착한 창춘(長春)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무려 9시간을 더 가야 퉁화에 도착할 수 있었다. 퉁화에서 추가가를 찾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체인도 사용하지 않는 20년은 더된 낡은 승용차를 타고 위태위태한 눈길을 달려 도착한 추가가는 우당 일가가 수십대의 마차를 타고 며칠은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오지에 있었다. 필자는 비자 덕택에 마음대로 중국에 올 수 있었지만 우당 일가는 그렇지 못했다. 일제의 감시 때문에 국경을 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신의주에서 동지 이선구(李宣九)가 주막으로 위장한 비밀연락소에서 몇시간 머무르다 새벽 세시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압록강을 건넜다. 한겨울의 살을 에는 압록강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황도촌(黃道村)을 거쳐 도착한 추가가는 그러나 우당 일가를 반기지 않았다. 현지의 중국인들이 수십대의 마차를 동원한 집단망명에 의혹을 품고 정착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지인들은 ‘한국인들에게 토지나 가옥의 매매를 일절 거부하고, 한국인들의 가옥 건축이나 학교 시설도 역시 금지하며, 한국인과의 교제까지 금지하자’고까지 결의하였다. 그러던 하루는 중국 병사들이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무기가 있는지 조사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점차 만주에 온 것을 낙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그러나 이회영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회영은 펑톈(奉天)(지금의 선양)으로 가서 동삼성(東三省) 총독 자오얼셴(趙爾巽)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오얼셴은 우당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 우당은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이회영은 베이징으로 가서 총리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동삼성 총독 면회도 실패한 상황에서 총리대신을 만나겠다는 우당의 계획을 무모하다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회영은 베이징으로 떠났다. 일개 망명객이 중국의 총리대신을 만나려는 무모한 계획은 예상과 달리 성사되었다. 위안스카이가 국내에 있을 때 이회영의 아버지 이유승의 집에 들르는 등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성사된 일이었다. 이회영은 위안스카이에게 한인들이 집단으로 만주로 이주한 이유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면서 협조를 요청했다. 설명을 들은 원세개는 “이대인(大人)은 한국의 참다운 의사이십니다”라고 답하면서 자신이 신임하는 비서 후밍천(胡明臣)에게 우당과 동반해 동삼성 총독을 찾아가도록 했다. 위안스카이의 전갈을 들은 동삼성 총독 자오얼셴은 비서 자오시슝(趙世雄)을 보내 화이런(懷仁)·퉁화·류허의 세 현장(縣長)에게 명령을 내렸다. 서간도 일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사업과 생활에 협력하고 편의를 제공하라는 지시였다. 총독의 명령을 받은 세 현장은 ‘한국인들과 친선을 도모하고 분쟁을 야기하지 말 것과 이를 위반할 경우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의 게시문을 붙였다. 드디어 만주에서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었다. 독립군의 배출지, 신흥무관학교 이회영은 이듬해(1911) 4월 이시영·이상룡(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 등과 협의해 류허현 삼원보 고산자(孤山子)에서 노천(露天) 군중대회를 열고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다. 경학사는 표면적으로는 재만 한인의 자치단체를 표방했으나 실상은 민족독립을 위한 혁명단체였다. ?img src="http://monthly.joins.com/contents/2001년02월호/images/306_1.jpg" align="left">戀剋榮?설립과 아울러 그 산하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추가가에서 현지인들이 의심하던 시기여서 옥수수를 저장했던 허술한 빈 창고에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1911년 음력 5월경에 무관학교는 문을 열었다. 학교 이름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라고 지었는데, 신민회의 ‘신’자와 민족이 다시 일어선다는 ‘흥’자를 붙여 지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외부에는 무관학교라고 하지 않고 신흥강습소라고 내세웠는데, 현지인과 일제 관헌의 의혹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만주에서 한인들을 군사교육시킨 효시로서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이회영이를 만난 후에도 추가가는 추씨들이 여러 십대를 누리고 살던 곳이라 토지를 팔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추가가 인근의 삼원보가 교통의 요충지여서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지역을 물색했다. 여러 지역을 물색한 결과 퉁화현에서 100여리 떨어진 허니허(哈泥河)가 적당한 지역으로 떠올랐다. 둘째 이석영이 2만석 토지를 매각한 자금을 대 1912년 7월 허니허에 새로운 교사가 신축되어 낙성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이전의 옥수수 창고에 비하면 군사훈련을 시킬 수 있는 시설을 갖춘 무관학교로 발전한 것을 뜻했다. 허니허는 중화민국 시기에는 신안바오(新安堡)라고 불리다 지금은 광화전(光華鎭)이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퉁화에서 100여리 험한 산길을 가야 나오는 곳이다. 눈 덮인 산길을 미끄러질까 마음 조이며 찾아간 이 길을 이회영은 말을 타고 갔을 것이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李恩淑) 여사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에는 우당이 말을 타고 추가가를 찾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우당장은 말을 자견(自牽)하여 타고 차와 같이 강판에서 속력을 놓아 풍우(風雨)같이 달리신다. 나는 차 안에서 혹 얼음판에서 실수하실까 조심되었고, 6~7일 지독한 추위를 좁은 차 속에서 고생하던 일을 어찌 다 적으리오.’ 신흥무관학교는 중학반과 군사반이 있었는데, 곧 중학반은 폐지해 인근 중학에 인계한 후 군사반에 전력을 기울였다. 신흥학교 생도들은 ‘요동 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동명왕과 이지란(李芝蘭)의 용병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후렴)나가세 전쟁장으로…삼천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라는 내용의 ‘독립군 용진가(勇進歌)’를 불렀다. 신흥무관학교는 국내와 만주 각지에서 애국 청장년들이 몰려들어 1919년에는 류허현 가오산쯔졔(孤山子街)로 이전했는데, 1920년 가을 폐교될 때까지 약 2,1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 대부분은 독립군이 되었다. 1920년에 있었던 봉오동·청산리 승첩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전투 참가자 중 상당수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고, 이들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무관학교 출신들이 가담했기에 일제의 정규군을 상대로 전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안투(安圖)현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洪範圖) 부대와 연합하였고, 김좌진부대의 뒤를 따라 미산(密山)에 도착해 여기에서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없었다면 봉오동·청산리 승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국내 잠입 1911년과 1912년 잇따라 흉년이 들면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는 커다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수많은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무관학교를 꾸리는 일은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붓기였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찾아온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을 수는 없었다. 대신 노동력을 제공했지만 극심한 운영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1913년초 수원에 사는 동지 맹보순(孟普淳)으로부터 이회영·이시영·이동녕·장유순·김형선 등을 암살하거나 체포하기 위해 형사대를 만주로 파견하니 속히 피신하라는 비밀 연락이 왔다. 이동녕 등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이상룡과 합류하기로 했으며 이시영은 펑톈으로 갔다. 그러나 이회영은 다시 특유의 정면돌파 수법을 택했다. 기왕 위험할 바에야 도망다니느니 국내로 잠입해 자금을 마련하겠다며 비밀리에 귀국했던 것이다. 국내 잠입에 성공한 이회영은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자금을 모금했으나,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잠행하는 동안 종로경찰서에 귀국 사실이 탐지돼 이회영은 드디어 체포되었다. 이회영이 만주로 간 것은 농장 개척을 위해서이며, 귀국한 것은 도적이 선영(先塋)의 나무를 도벌했기 때문에 묘소를 수리하기 위해서라고 맞섰다. 일제가 우당의 이 말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별다른 증거가 없었고, 명문가의 후손인 그를 증거도 없이 무작정 구속할 수도 없어서 석방한 후 엄중한 감시를 계속했다. 일제는 1915년 8월20일경 또 다시 이회영을 체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흥학교에서는 3일간 휴교하면서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주도면밀한 이회영은 아무런 증거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3주일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극비계획 '고종망명' 이회영은 이런 상황에서 움츠러들기는커녕 그만이 추진할 수 있는 묘책을 생각해냈다. 바로 고종을 망명시키는 일이었다. 고종을 해외로 출국시켜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이었다. 그가 고종 망명이란 묘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고종과 남다른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국내에 잠입해 비밀활동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인 이규학(李圭鶴)도 국내로 잠입했는데, 이때 아들 이규학을 조계진(趙季珍)과 결혼시켰다. 조계진은 조정구의 딸이었는데, 한말 학부대신을 지낸 그는 대원군의 사위였으므로 조계진은 고종의 조카가 되었다. 따라서 이회영과 고종은 사돈지간이었던 것이다. 고종 망명 계획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15년경 이상설을 중심으로 망명 계획이 추진되었는데, 이를 위해 국내에 잠입한 성낙형·김사준 등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다.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을 통해 의사를 타진하자 고종은 선뜻 망명 계획을 승낙했다. 고종이 해외 망명이란 위험한 길을 선뜻 받아들인 것은 합방이란 명목으로 빼앗긴 나라를 뒤찾으려는 의도 외에 세자이자 순종의 동생인 영친왕을 일본의 왕족 이방자와 혼인시키려 하는 일제의 의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것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고종이 측근인 민영달에게 망명 결심을 알리자 민영달은 “황제의 뜻이 그렇다면 분골쇄신하더라도 따르겠다”며 거금 5만원을 내놓았다. 민영달은 호조판서와 좌참찬 등을 지낸 후 일본이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항의 사직하고 일본이 내린 남작 작위도 거부했던 5만원은 베이징에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마련할 자금이었다. 베이징행궁은 이회영이 물색하기로 역할분담을 했다. 고종이 망명하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커다란 파장이 일 사건이었다. 이른바 한일합방의 허구성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국내에서는 목숨건 봉기가 일 것이었다. 해외의 군주제 국가에서는 황제가 망명해 세운 망명정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고종이 망명해 일제와 맺은 합방 조약은 강제에 의한 무효라며 만백성이 일어나 일제와 싸우라는 개전 조칙을 내린다면 조선 전역은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금이 준비되고 행궁 마련 계획까지 세워져 구체화되던 고종의 망명 계획은 의외의 사태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고종이 갑자기 급서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고종이 사망한 1919년 1월에 열린 국민대회에서 “그들(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은 출로가 막히자 후일을 두려워하여 간신배를 사서 시해하기로 하였다. 윤덕영·한상학 두 역적을 시켜 식사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올려 시해했다”고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데서 알 수 있듯 독살설은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있었다. 고종의 급서가 전국민적 항거가 일어나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데서 알 수 있듯 이회영의 계획대로 고종 망명이 성공했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다. 베이징으로 망명 고종 망명 계획이 무산되자 이회영은 1919년 2월경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출국했다. 이회영은 망명전 한용운(韓龍雲)을 만나 국내외에서 대규모 시위와 조직을 건설하기로 의논하고 준비차 미리 베이징으로 떠난 것이었다. 이회영은 베이징에서 동생 이시영과 이동녕을 만났는데, 이때 비로소 이상설이 1917년 니콜리스크에서 죽은 사실을 알고 밤새 통곡하며 “운(運)이며 명(命)이여!”라고 부르짖었다고 전한다. 국내에서 드디어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회영은 이시영·이동녕·현순(玄楯) 목사와 함께 상하이(上海)로 가기로 했다. 상하이에는 국내를 비롯 러시아와 간도·일본 등에서 온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었다. 이회영은 상하이에서 조완구·신익희·조성환·손정도·신채호 같은 지인들을 만나 독립운동 방안에 대해 의논했다. 이 과정에서 이회영은 임시정부를 조직하려는 당시의 대세와 다르게 정부 조직을 만드는 것을 반대했다. 이회영은 정부라는 행정적 조직형태보다 각 독립단체들이 중복과 마찰 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조직을 세우자고 주장했다. 이런 조직은 정부라는 행정 조직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정부라는 조직 형태를 취하면 정부 내의 지위와 권력을 다투는 내분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도 정부 조직을 반대한 이유 중 하나였다. 상황은 이회영의 우려대로 돌아갔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 발표한 지 반달도 채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도 한성정부를 세우고, 한성정부와 상하이정부로 나뉘어 다툼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회영은 정부라는 조직 형태를 취한 것이 바로 이런 내분으로 이어졌다며 각 독립운동단체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게 조정하는 운동조직을 만들자고 거듭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해 5월 중순 임시정부 참여를 거부하고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이회영은 베이징 자금성 뒤 거대한 고루(鼓樓) 근처인 후고루원의 소경창이란 곳에 거처를 정했다. 뒤이어 이시영·조완구·이광(李光)·조성환·김규식·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베이징으로 모여들었다. 베이징에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한 그룹이 형성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박찬익(朴贊翊)을 특사로 파견해 이들을 설득했고, 약 반년 간에 걸친 설득 끝에 이시영·이동녕·조완구는 1923년경 다시 상하이로 갔으나 이회영과 신채호는 끝내 상하이행을 거부했다. 이것이 바로 이회영이 그 역할이나 치열했던 삶에 비해 일반에 알려지지 않게 된 주된 요인이 되었다. 이회영은 평생 감투 쓰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임시정부로 갔다면 그의 비중으로 미루어 볼 때 동생 이시영이 선임된 초대 법무총장 이상의 자리가 돌아갔겠지만 그는 끝내 상하이행을 거부하고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베이징의 아나키스트들 이회영의 거처는 베이징을 드나드는 독립운동가들이 반드시 들르는 요지가 되었다. 이회영은 이곳에서 이을규·이정규·유자명 등 젊은 아나키스트들과 만나 아나키즘에 뜻을 같이한다. 이 무렵 국내에 잠입해 거대사건을 일으키려다 체포돼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의열단 단원 유석현(柳錫鉉)도 베이징에서 이회영과 자주 만난 사람이었다. 유석현은 권총 5정과 폭탄 36개, 독립선언문 3,000장을 휴대하고 비밀리에 입국해 총독부·경찰서·동양척식회사 등을 폭파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인물이다. 이회영의 베이징 집에 여러달 거주했던 시인 심훈(沈熏)은 “…만두 한 조각 얻어먹고/긴긴 밤을 달달 떠는데/ 고루에 북이 운다/뎅뎅 종이 운다”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회영의 베이징 거처는 유석현 같은 열혈 의열단원이나 심훈 같은 시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거쳐간 곳이었다. 이회영과 김창숙(金昌淑)·신채호 3인은 베이징의 독립운동 3거두로 불렸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처를 같이하다 보니 베이징 시절의 이회영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한달에 들어가는 쌀만 해도 매월 200근, 즉 100Kg이나 되었으니 여기에 부식이나 다른 것들을 합치면 막대한 자금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에게 밥값을 받을 수도 없어 중국 상회의 외상이 늘어갔고, 나중에는 2,000∼3,000원의 거금이 되어 도저히 갚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25년 빚 받기를 포기한 중국 상인이 스스로 빚을 탕감해 주기까지 약 2년간 이회영의 딸 규숙과 아들 규창은 중국 상인에게 갖은 욕설과 구타까지 당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회영의 항일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베이징 거처에는 김원봉(金元鳳)과 유자명(柳子明)도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원봉은 그 유명한 의열단 단장이었고, 유자명은 의열단의 총참모격이었다. 신채호가 ‘의열단선언문’을 작성하게 된 소이도 유자명의 부탁을 받아 한 일이었다. 이회영은 젊은이들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1924년 4월 말에는 이을규·백정기·유자명·정화암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간했다. 정의공보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한편 당시 해외 독립운동에 큰 파장을 일으킨 흥사단(興士團)의 무실역행론(務實力行論)의 부작용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1921년 이래 독립운동 전선에서 이탈해 일제에 투항하는 자들이 속출했는데 이들이 투항하는 이론적 근거가 무실역행론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이석영의 아들 이규준(李圭駿)과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유자명 등이 다물단(多勿團)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회영이 이 조직의 이념과 조직요령을 지도했다. 이회영은 유흥식(柳興湜)과 상의해 베이징에서 의열단과 다물단이 합작하도록 지도했다. 다물단은 1925년 일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해 중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김달하는 중국 단지루이(段祺瑞) 정부의 고관으로 있는 한인이자 친일파였는데 다물단이 처단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회영의 딸 규숙이 1년 동안 공안국에 구류되었고, 이규학은 상하이로 탈출했다. 이규학이 상하이에서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낳은 데에는 이런 사연이 담겨 있는 것이다. 1925년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아들 규학은 격일로 딸 둘을 잃는 비극을 겪었으며, 김달하 처단사건 이후 공안국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발이 꽁꽁 묶여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우당과 함께 지낸 아들 이규창은 이 시절을 “1주일에 세번 밥을 지어먹으면 운수가 대통한 것”이라고 회상할 정도로 궁핍에 시달렸다. 이규창은 이때 이회영이 달 밝은 밤에 밥도 굶은 상태에서 퉁소를 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1925년 7월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두 사람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톈진에서의 나날들 이회영은 1926년 톈진(天津)으로 이주했다. 성암(醒菴) 이광(李光)이 허난(河南)성 군벌 독판(督辦) 후징이(胡景翼)의 행정고문으로 취임하면서 자금을 일부 가져왔던 것이다. 톈진의 프랑스조계지에 집 두채를 구해 한채는 이회영과 아들 규창이 살고 다른 한채에는 이을규 형제, 백정기·정화암 등 상하이에서 오는 아나키스트들이 묶게 되었다. 이들은 톈진으로 10여 정의 권총을 반입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톈진에서도 곧 극심한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활동계획도 중국 내 사정으로 연기되고 보니 동지들도 베이징과 상하이로 떠나고 말았다. 혼자 남은 이회영 일가는 집세가 비싼 프랑스조계를 떠나 대흥리로 이사했다. 이때 혼자 남은 이회영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말해 주는 기록이 있다. 베이징으로 갔던 정화암은 상하이로 가기 위해 톈진의 이회영 거처를 방문했다가 이런 회상을 남긴다. “남개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규숙이의 옷까지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회영은 이런 톈진에서도 피신해야 했다. 1926년 12월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동양척식회사를 공격하면서 뒤쫓는 일인들을 사살한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사용된 권총은 이회영이 유자명으로부터 받아 보관했던 것이기 때문에 일제의 수사망이 언제 덮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규숙 등 딸 둘은 톈진의 빈민구제원에 맡기고 아들 규창과 함께 걸어서 상하이로 수천리 길을 향했다. 이때 허베이(河北)성을 지나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시와 타이안(泰安)부를 거쳐 숙현(宿縣)까지 수천리 길을 걸어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이 무렵 김좌진 장군의 조카인 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이 찾아와 이회영과 여러 날 묵으면서 앞으로의 운동방향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김종진은 이회영의 베이징 거처에 여러달 거처하다 윈난(雲南)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가기 직전 이회영을 다시 찾은 터였다. 이때 이회영은 “장차 독립을 전취(戰取)한 우리 민족은 어떤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까?”라는 김종진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자유·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 국가와 민족 간에 민족자결의 원칙이 섰으면 그 원칙 아래 독립한 민족 자체의 내부에서도 또한 이 자유·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어야 할 테니 국민 상호간에 일체의 불평등·부자유의 관계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자유 합의로써 활동한 운동자들의 조직적인 희생으로 독립이 쟁취된 것이니 독립 후의 내부적 정치구조는 물론 권력의 집중을 피하여 지방분권적 지방자치제의 확립과 아울러 지방자치체의 연합으로 중앙정치구조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관계에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 재산의 사회화를 원칙으로 함과 동시에 사회적 계획 아래 관리되어야 한다. 교육도 사회적으로 공영(公營)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회영은 공산주의가 보이고 있는 권력집중 현상에 대해 강한 비판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회영은 베이징에 있었던 조소앙(趙素昻)을 만나 1920년에 소련에 다녀온 그의 견문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 냉혹 무자비한 독재정치가 과연 만인에게 빈부의 차이가 없는 균등한 생활을 보장한다는 이상을 성취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처럼 자유가 없는 인간생활이 가능할까? 그들이 말하는 평등생활이 하루에 세끼 밥을 균등하게 주는 감옥생활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한 독재권을 장악하고 인민을 지배하는 정치는 옛날의 절대왕권의 정치보다 더 심한 폭력정치이니 그러한 사회에 평등이 있을 수 없으며, 마치 새 왕조가 세워지면 전날의 천민이 귀족이 되듯 신흥 지배계급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이처럼 공산당의 권력집중을 반대했던 이회영은 김종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나키즘은 공산주의와 달라서 획일성을 꼭 요구하는 것은 아니니 그 민족의 생활습관 또는 전통과 문화적·경제적 실정에 맞도록 그 기본원리를 살려 나가면 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 이번에는 만주로 김종진은 이회영의 이런 구상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군관학교를 졸업했으나 중국군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북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한 터였다. 김종진은 1927년 김좌진과 함께 북만주로 가서 신민부(新民府)에서 활동하였다. 약 1년 후인 1928년 상하이에 있던 이을규도 만주로 가서 김좌진과 협의해 신민부를 해체하고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이하 한족총련)를 발족시켰는데 김좌진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김좌진과 아나키스트들이 연합해 세운 한족총련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갔다. 아나키스트들은 이에 대거 만주로 가서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운동자금이었다. 이때 국내로 잠입했던 아나키스트 신현상(申鉉商)이 미곡상을 경영하는 친지 최석영(崔錫榮)과 함께 호서은행에서 5만8,000원이라는 거금을 빼내는 데 성공해 베이징으로 왔다. 이 자금은 북만주에서 운동을 전개하는 데 필수적인 자금이 될 것이었다. 국내 신문에는 ‘호서은행 대금(大金) 사기사건’이라고 대서특필되었는데 일제는 이 자금이 해외로 흘러가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중국 경찰을 앞세워 베이징에서 아나키스트들이 회의하던 장소를 덮쳤다. 이때 신현상과 최석영은 물론 이을규·김지강 등 많은 아나키스트들과 톈진으로 가 동정을 알아보라는 이회영의 명령을 받고 온 이규창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중국대학을 졸업한 아나키스트 유기석(柳基石)이 당시 베이징시장 장인우(張蔭梧)와 동창이었던 관계로 그나마 불행중 다행으로 신현상·최석영만 국내로 압송되고 나머지는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때 송순보(宋淳甫) 등이 톈진 일본조계 내 중심가인 욱가(旭街)의 중·일 합자은행 정실은호(正實銀號)를 강탈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감시가 심한 일본 조계 중심가의 중·일 합자은행을 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비상한 방법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 1929년 장기준(莊麒俊)·양여주(楊汝周)·송순보 등 5인은 권총을 휴대하고 정오에 정실은호에 들어가 은행을 터는 데 성공했다. 이튿날 “중국대공보”(中國大公報) 등 도하 각 신문에는 백주대낮에 권총강도단이 일본 조계 중심가의 은행을 강탈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질 것은 불문가지여서 이들은 빨리 톈진을 떠나 만주로 가기로 했다. 이들이 협의한 후 젊은 동지들은 만주로 가고 노구의 이회영은 상하이로 가기로 했다. 이회영은 상하이로 가서 이동녕·조완구 같은 과거의 동지와 동생 이시영·유자명 등 한인들은 물론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연합하기 위해 상하이를 택한 것이었다. 그래서 만주는 물론 과거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기반을 다져놓은 푸젠(福建)성에도 독립운동기지를 만들려 하였다. 이때 이회영은 딸 규숙을 장기준과 결혼시켜 현숙과 함께 만주로 떠나보내기로 했다. 일제의 감시망이 삼엄하게 펼쳐진 1929년 9월 중순경 정화암·백정기·오면직·양여주·김동우·장기준 등이 만주로 떠날 때 규숙과 현숙이 권총과 폭탄을 몸에 간직하고 북만주 해림으로 간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이들이 가세하자 만주의 한족총련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한족총련은 농번기에는 동포들의 농사일을 거들었으며, 농한기에는 자녀 교육을 맡는 한편 지방조직, 사상계몽, 생활개선과 지도에 노력했다. 각 부락을 돌며 강연을 갖고 학생들과 교사들로 극단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하며 상호부조와 자주·자치의 정신을 고양하면서 이것이 200만 재만동포의 살길이며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 길이라고 강조한 것이 큰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자 세력 위축을 느낀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제어하기 위해 암살 같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왔다. 공산주의자 김봉환(金奉煥:일명 金一星)은 수하인 박상실(朴尙實)을 시켜 한족총련이 수익사업의 하나로 운영하던 방앗간에 있던 김좌진을 암살했다. 1930년 1월의 일이었다. 김종진은 아나키스트 엄형순 등과 함께 김봉환을 체포해 처단했으나 독립운동의 거성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한족총련은 한편으로는 일제와 맞서 싸우는 한편 공산주의와도 맞서 싸웠다. 그러나 김종진 역시 1931년 8월경 중동선(中東線) 하이린(海林)역 부근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일제는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일대를 장악해 버렸다. 한족총련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소탕작전을 피해 목숨을 걸고 만주를 탈출해야 했다. 韓·中·日 아나키스트 공동전선 이회영은 1929년 10월 말경 한이 서린 톈진을 떠나 기선(汽船)을 타고 1주일만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임시정부의 김구·이동녕·조소앙·조완구·김두봉 등 여러 인사들이 모여 이회영이 상하이에 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앞길이 한층 더 희망을 지니게 되었다는 환영사를 해 주었다. 이회영은 상하이에서 젊은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움직였다. 이회영은 유자명·정화암·백정기·엄순봉·오면직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이하 남화연맹)을 결성했다. 이회영을 의장으로 추대했으나 이회영은 이 조직은 젊은 동지들이 이끌어 가야 할 것이라고 사양하며 유자명을 대신 추천해 그가 의장이자 대외책임자가 되었는데, 남화연맹은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訊)을 발간했다. 한편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점령함에 따라 중국 내에 항일 기운이 더욱 드높아갔고, 이를 계기로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이 공동전선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높아갔다. 드디어 그해 10월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이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회영이 의장이 되어 열린 회의에는 정현섭·백정기·유자명 등 한국 동지 7명과 왕야챠오(王亞樵)·화쥔시(華均實)·첸리팡(千里芳) 등 중국인 동지 7명, 그리고 전화민(田華民)이란 가명을 쓰는 일본인 사노(佐野)와 오수민(吳秀民)이란 가명을 쓰던 또 한명의 일본인(伊莊) 등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였다. 항일구국연맹은 선전·연락·행동·기획 등 5개 부를 두었는데, 이회영은 중국인 왕야챠오와 함께 기획위원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중국군 19로군의 배후실력자인 왕아초가 재정과 무기 조달을 책임지기로 한 것이었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싸울 의지는 있었으나 무기와 자금이 없어 커다란 애로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항일구국연맹은 프랑스조계 밖의 중국거리와 조계 안에 인쇄공장과 미곡상을 차려 일제의 눈을 속이고 비밀리에 행동했다. ‘적 군·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조사 파괴, 적 요인 암살, 중국 친일분자 숙청’등의 행동방침을 정한 이들은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들은 흑색공포단이라 불리며 일제를 공포에 떨게 했다. 중국인 화쥔시 등은 상하이 북역에서 대일굴욕외교의 주역으로 지목한 국민당의 외교부장 왕징웨이(汪精衛)를 저격했으나 그 부관을 맞추는 데 그쳤으며, 푸젠성 취안저우(泉州)의 동지들과 연합하여 샤먼(厦門)의 일본영사관을 폭파하기도 하였다. 백정기·원심창·이강훈 등은 중국인 동지 첸리팡, 일본인 전화민 등과 함께 일제의 화북(華北) 수송 요충인 톈진으로 폭탄과 총기를 반입해 갔다. 1932년 1월 톈진의 일청기선부두(日淸汽船埠頭)에서 일제의 육군과 군수물자를 싣고 입항한 1만t급 기선에 폭탄을 던져 선체를 파괴하고, 많은 수의 사상자를 냈다. 또한 톈진 일본영사관에도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폭파시키고, 일본군 병영에도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이런 행동들은 항일구국연맹의 활약이라고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이런 눈부신 활약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32년 2월 일제가 상하이사변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략하자 중국군 19로군이 강력히 저항하면서 일본군을 몰아냈다. 그러자 일본은 난징(南京)의 국민당정부에 압력을 넣어 19로군의 해산과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본국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1만여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군사력을 증강했고, 결국 고립무원의 19로군은 패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제는 이 승전을 기뻐해 일황(日皇)의 생일인 1932년 4월29일 상하이의 홍커우(虹九)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기념식을 겸한 승전축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이 행사에는 임시정부와 남화연맹측에서 각각 폭탄 투척을 준비했는데, 임정측의 윤봉길은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입장한 데 비해 남화연맹측의 백정기는 중국인 왕야챠오가 구해주기로 했던 입장표를 끝내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동안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대장 등을 처단해 버렸다. 이는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드높인 쾌거였으나 일제의 상하이 점령 자체를 무위로 돌릴 수는 없었다. 항일구국연맹의 왕야챠오는 19로군과의 관계 때문에 난징정부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고, 국민당 비밀조직 남의사(藍衣社)의 두웨성(杜月笙)과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끝내 왕야챠오와 화쥔시는 홍콩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는 결국 항일구국연맹의 재정과 무기 조달에 결정적인 약화를 가져왔다. 운명의 다롄行 그러나 이회영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회영은 정화암과 중국 국민당의 거물로 역시 아나키스트였던 리스쩡(李石曾)·우지후이(吳稚暉)를 찾아가 항일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협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스쩡과 우지후이는 이회영의 협조 요청에 흔쾌히 동의하면서 만주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했다. 만주에는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으니 만주에서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같은 항일활동을 전개한다면 광범위한 한·중연합전선을 결성할 수 있을 것이며 장래에 중국 정부도 만주를 당연히 한인들의 자치구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에 이회영은 “한·중 공동전선 결성은 가능하지만 무기와 재정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 이것이 없다는 것을 그대들이 잘 알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우지후이와 리스쩡은 “그대들처럼 물욕과 영예를 모르는 담백한 아나키스트들이 중심이 되어 싸울 결심이 있다면 우리가 동북군의 장쉐량(張學良)에게 연락해 자금과 무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장쉐량의 심복으로 아직 만주에 남아 있는 인물들과 비밀연락이 되도록 주선하겠다”고 답했다. 이때가 1932년 9월이었다. 이에 고무된 남화한인연맹은 활동 무대를 다시 만주로 옮기기로 하고 젊은 동지를 파견하려 했으나 뜻밖에도 이회영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했다. 젊은 동지들이 적극 만류하자 이회영은 이렇게 답했다. “내 늙은 사람으로서 덥수룩하고 궁색한 차림을 하고 가족을 찾아간다고 하면 누가 나를 의심하겠는가? 또 나는 만주의 신징(新京:창춘)에 사위 장기준이 있으니 주거문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내가 먼저 만주에 가서 근거지를 마련해 놓을테니 그대들은 내가 통지하면 뒤따라 오기 바란다.” 이때 이회영이 동지들과 세운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1)만주에 조속히 연락 근거지를 만들 것. 2)주변 정세를 세밀히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할 것. 3)장기준을 앞세워 지하조직을 만들 것. 4)관동군사령관(武藤)의 암살 계획을 세울 것. 이런 목적을 지닌 이회영은 드디어 1932년 11월초 다롄(大連)행 기선에 몸을 실었다. 달이 환한 밤에 아들 규창은 홀로 이회영을 황포강 부두의 기선에 승선시킨 후 절을 하고 떠나보냈다. 이회영이 근거지만 만들면 상하이에서는 리스쩡·우지후이 등과 연락하여 장쉐량과 연결을 맺은 후 한·중·일 세 나라 동지들이 만주로 갈 계획이었다. 만주에서 한·중·일 공동 유격부대를 조직하고, 각 도시에 편의대(便衣隊) 파괴부대를 배치해 도시와 촌락을 연결하며 결사항전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2년 11월17일 창춘에 있던 딸 규숙은 다롄수상경찰서의 연락을 받았다. 황급히 다롄으로 달려가니 이회영은 수상경찰서에서 이미 숨져 있었다. 일제는 이회영이 자살했다고 꾸며댔지만 규숙은 이회영의 몸에 핏자국이 아롱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문사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안면을 확인하니 선혈이 낭자하였고 대포(大袍:중국식 겉옷)에도 선혈이 많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국내 신문에는 이 사건이 ‘다롄 수상서 유치중 괴(怪)! 의사(縊死:목매어 죽음)한 노인, 배에서 내리자 경찰에 잡혀 취조중 유치장 창살에 목매어 죽은 이상한 노인’이란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그러면서 ‘○○운동의 중대인물’이라는 부기를 달았다. ○○은 독립이란 말을 검열 과정에서 지운 것이다. 66세, 삼한갑족의 신분으로 부귀를 갖고 태어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끝내 목숨까지 바친 것이었다. 우당 이회영이 다롄 부두에 내리자마자 수상서에 체포된 데는 엄청난 내막이 담겨 있었다. 밀고였다. 이회영은 자신의 만주행을 중형 이석영(李石榮)에게는 말하지 않을 수 없어 그를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였다. 이석영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만주로 간다고 답했는데, 그 자리에 이태공(李太公)과 연충렬(延忠烈)이란 두 청년이 있었다. 연충렬과 이태공은 모두 임정 요인들의 친척이었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말했던 것인데 이들이 일제에 밀고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탐지한 남화연맹에서는 두 청년을 유자명이 관리하던 상하이 근교의 남상(南翔) 입달학원(立達學院)으로 유인했고, 자백을 받은 후 처단해 고인의 한을 달랬다. 1932년 11월28일 새벽 화장한 고인의 시신이 고국 장단(長湍) 역에 도착했다. 변영태(卞榮泰)·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유진태·이득년 등 수백 여명의 인사들이 모여 한줌의 뼈로 돌아온 노 혁명가를 맞이했다. 이 자리에서 이회영은 비로소 부인 이은숙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은숙이 품에 안은 6세의 규동(圭東)은 그때까지 아버지 이회영을 한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이 모녀의 슬픈 호곡을 뒤로 한 채 이회영은 경기도 개풍군 선영에 안장되어 파란만장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