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김 태하 ) 날 짜 (Date): 2001년 1월 30일 화요일 오후 03시 30분 10초 제 목(Title): 권혁범/ 개인주의가 부족하다 [논단] 개인주의가 부족하다 설 연휴 전날 우체국에 갔다. 사람은 많고 직원은 모자라고 줄은 뒤엉켜 있다. 기차역 창구에는 사람들이 가로로 서서 밀고 당긴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알기 어렵다. 함박눈이 오던 날 교차로에서 차들이 뒤엉켰다. 파란 불이 켜졌어도 교차로에 이미 차들이 들어서 있어서 전진할 수가 없다. 빨간 불이 들어오자 이번에는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폭발한다. 목욕탕은? 아이들이 냉탕에서 다이빙을 하고 아빠는 옆에서 박장대소한다. 사람들은 탕 안에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세수를 하고 어떤 이는 바닥에 침을 탁탁 뱉는다. ‘평화적 합의’가 잘 안 되는 이유 누구나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이다. 줄서기 같은 사소한 일을 하는 데도 우리는 매우 짜증스럽고 피곤한 과정을 의례처럼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공공적 질서의 부재 혹은 공중 도덕의 부재를 누구나 개탄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습관적으로 공동체의 붕괴와 이기주의의 창궐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뒤에는 서구에서 ‘무분별하게’ 들어온 지나친 개인주의 문화가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공공질서의 부재는 오히려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적 훈육의 결과라고 본다. 입만 열면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 애국 조회를 그렇게 수도 없이 서고 군대 갔다 온 사람이 그렇게 많은 우리 사회에서 공공질서는 왜 그렇게 쉽게 실종되는지 이상하지 않은가? 좀 재미없는 추상적 논의가 되겠지만 이 문제를 따져보기로 하자. 집단주의 문화에서 개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는 집단(가족, 학교, 회사, 군대, 국가)의 한 부속품에 불과하다. 개인은 집단에서 강제적으로 규정하는 규율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집단의 질서는 대체로 그 집단을 주도하는 소수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지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모든 구성원에게 부과된다. 모든 개인이 참여하는 협의나 타협을 통해서 질서가 만들어지는 법은 없다. 질서는 이미 전제되어 있고 단지 주어질 뿐이다. 그것을 위반하면 이기주의자나 ‘위 아래도 모르는 놈’으로 매도된다. 이런 문화 속에서 자라난 사람은 항상 강제나 감시에 의해 집단 규율을 준수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강제나 감시가 자리를 비울 때 규율은 금방 깨진다. 어둠이 깔리자마자 승용차들은 버스 전용차선으로 끼어들며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학생들은 커닝을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깨달음과 이해관계에 대한 인식을 통해 합의된 질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혹은 관계없이 주어진 타율적 질서이기 때문이다(물론 타율적 질서의 대부분은 힘센 자의 자기 특권 정당화 논리이다. 질서! 질서!를 외치는 대다수는 수상한 의도를 갖고 있다). 외부적 강제가 사라지고 자율적 민주적 결정의 공간이 주어졌을 때 우리가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서로 다른 개인들의 이해관계 및 의견 조정 훈련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선택하는 것은 또다시 ‘힘센 자’의 교통정리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제살 깎아먹는 야만적 아귀다툼에 빠져드는 일이다. 집단주의적 훈육에 의해 민주적 토의와 수평적 협의의 경험을 겪지 못한 한국인들이 이 순간에 최종적으로 무엇에 기댈 수 있는가? 자율적 민주적 질서가 없는 곳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욕망을 실현하려는 결심은 결국 언어적 물리적 폭력의 행사로 나아가기 쉽다. 삿대질, 욕설, 멱살잡기는 이제 우리의 ‘고유한 민속 전통’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한국사회에서, 국회에서의 여야간 투쟁과 길거리에서의 차접촉 사고로 인한 싸움에 이르기까지, 평화적 합의와 타협이 그렇게도 어려운 이유이다. 개인주의적 교육이 필요하다 집단주의와 이기주의는 한국인의 두 얼굴이다. 그 둘의 교묘한 연결을 어떻게 차단할 수 있을까? 필요한 것은 자율적이고 오히려 개인주의적인 교육과 문화다. 정치적 민주화의 큰 진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일상사는 여전히 집단주의적 훈육이 지배하고 있다. 대학의 엠티에서 태릉선수촌의 훈련에 이르기까지, 초등학교의 애국조회에서 회사의 극기훈련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집단적 규율에 대한 개인의 복종과 순응이다. 집단에 대한 헌신과 개인의 희생을 ‘이타적인’ 행동으로 찬양하는 문화, 개인의 권리 요구와 개성적 자아실현의 욕망을 ‘이기적인’ 행위로 매도하는 사회 속에서 자율적인 공공질서의 형성은 요원하다. 거기서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짓밟는 이기주의는 창궐한다. 개인을 존중할 때 타자의 권리와 자율적 질서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고 내 이익과 타자의 이익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을 때 공공질서를 위한 합의와 합리적 의사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개인주의의 지나침이 아니라 개인주의의 부족이 문제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kwonhb@dragon.taejo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