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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reumi (구르미)
날 짜 (Date): 2001년 1월 13일 토요일 오전 02시 43분 31초
제 목(Title): [ 펌] 박종철 열사가 살아온 길. 

이 글은 '박종철 평전'에 실린 내용을 참고한 것입니다

박종철 열사는 1965년 4월 1일 부산에서 한 공무원 가정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서울에서 1년 재수를 하고 1984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였다.  
1984년은 '학원자율화 조치'가 시행되는 첫해였다. 80년 5월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대학생들의 민주주의 요구를 탄압하였다. 대학 구내에는 
항상 경찰들이 있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학생들의 대화를 엿듣고 위압감을 
풍기며 무리를 지어 다니다가 시위가 벌어지면 폭력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하고 학생들을 구타하며 연행하였다. '자율화 조치'로 시위관련 제적생들의 
복학 조치와 이들 경찰들의 철수가 이뤄졌다. 1984년 3월 '서울대학교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아크로에서는 자유로운 집회가 열리고, 많은 대자보들이 
나붙기 시작했다.  
활기찬 분위기의 대학사회에 들어온 그는 친구를 통해 한 지하서클에 가입하였다. 
매주 서클의 모임에 참석하여 학습을 하는 한편, 학교에서 열리는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학습, MT, 농활, 산행훈련 등에 참가하며 운동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켜나갔다. 
2학기가 들어서면서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새로운 목표를 향해 바삐 움직였다. 
학도호국단 대신에 총학생회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자신들의 진정한 
대표기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진정한 학생대표기구를 
만들고자 했던 관악 2만의 열망이 정권의 치졸한 방식들로 탄압받게 되자, 관악은 
들끓기 시작했고, 대다수의 동의를 얻어 시험거부를 결정했다. 전경들이 학내에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험거부는 90%이상의 참여로 승리하였다. 
그는 시험거부투쟁에의 주체적인 참여와 서클에서의 학습, 그리고 
학생투쟁조직들의 건설로 부쩍 늘은 가두투쟁을 겪으면서, 자신을 점점 
대중활동가로서 정립하기 시작했다. 
1985년은 2.12 총선으로 시작되었다. 다음날 전국에 배포된 호외에는 "신민당 
제1야당으로 부상. 민정당 참패"라는 제목이 박혀 있었다. 투표를 한 국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1984년부터 전개된 학생들의 투쟁의 결과,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총학생회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학생대표기구로 인정받았다. 
어느덧 2학년이 된 그는 과 학회와 과학생회 홍보부, 그리고 서클에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였다. 바쁜 생활을 하게 된 그는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의 
자취방은 후배들과의 세미나를 위한 장소가 되었다. 당시 세미나는 아무데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85년은 학생 운동은 이전과 달리 공세적인 투쟁을 벌였었다. '전학련', '삼민투' 
등의 연합조직들이 선 결과이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권은 학생운동을 막기 
위해 '학원 안정법'이라는 법을 세우려 하였으나, 국민들의 투쟁에 의해 
실패하였다. 하지만 법이 아니더라도 탄압의 방법은 많았다. 조직사건들을 
터뜨리면서 학생운동 탄압은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85년 2학기 
학생운동은 '민중 민주화 운동 탄압 저지'의 깃발로 시작되었다. 
박종철은 이러한 시기에 과학생회 홍보부 활동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과회지에 담아내었다. 회지에 담은 글의 마지막부분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학우여! '파쇼 헌법 철폐하여 군부 독재 타도하자'라는 명확한 슬로건을 앞세우고 
우리 삼민 운동의 승리의 그날까지, 승리의 그날까지, 승리의 그날까지 투쟁하라!!!" 
1986년 초, 야당인 신민당은 기습적으로 개헌 서명 운동을 개시하였고, 대학 
교수들은 잇달아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3월 2일, 서울 대학교 입학 시장에는 
헌법과 관련한 서명 운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곧 서울대학교 1학년 학생들의 
문무대 입소 훈련을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다. 그해 초 총학생회 선거는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총학생회장 후보의 유세 내용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본 
경찰은 유세가 시작되면 즉시 학교 안으로 들어와 후보자를 연행하려 하였다. 
헌법 문제에 대한 언급과 반미 주장이 빌미였다. 
그에 비해 자유로왔던 과 학생회장 선거에서 박종철은 언어학과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얼마후 4월, 청계피복노조의 왕십리 노학연대투쟁과정에서 
연행되었다. 그의 이전 구류경력들 때문에 그는 구속이 결정되었고,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3개월 후 7월 그는 집행유예로 출소하게 되었다. 구치소에 있는 동안 
열사가 두 명 탄생했다.  
1986년 4월 28일, 신림 4거리의 한 건물 옥상에서 두 청년이 "반전 반핵 양키 고홈" 
"미제의 용병 교육 전방 입소 결사 반대"를 외치며 반제 투쟁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김세진과 이재호. 이 둘은 당시 서울대학교 4학년이었다. 
구치소에서 나온 그는 유기정학 처분이 내려진 상태였다. 이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학습으로 보냈다. 새롭게 제기된 이론들을 접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와 혁명'의 
복사본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였다. 
1987년 1월 13일, 박종철은 귀가 중 매복하고 있던 형사들에 의해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찾기 위한 참고인 조사였다. 그러나 강제 연행된 다음날 박종철은 
고문 끝에 숨지고 말았다. 
이 사실은 중앙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탁치니 억하며 
죽었다'라는 유명한 경찰발표의 주인공이 바로 그이다. 하지만 숱한 왜곡과 은폐에도 
불구하고, 암울한 군부파쇼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학생들과 재야운동진영은 '진상 규명'과 '호헌 철폐', '민주헌법 쟁취'라는 
구호로 거리를 가득 매웠다. 
5월 18일, 명동성당 광중민중항쟁 추도미사에서 박종철 의문사에 대한 은폐사실이 
교도관과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를 통해 폭로되었다. 곧 재수사가 착수되고 
수사결과가 생중계로 발표되는 등 국면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6월 10일, 집권당인 민정당이 전당 대회를 열어 노태우를 간접선거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던 그날,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 대회'가 전국에서 열렸다. 전국 22개 지역에서 40여만 명이 참여했다. 
이후 6월 한 달 동안의 전민중적인 투쟁으로 '6.29선언'이라는 항복을 
정권으로부터 얻어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박열사의 죽음이라는 
기폭제가 더해져 얻어낸 소중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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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ula.co.kr/

학교를 그만두고 조금 지나서 같이 일하게 된 사람들이 바로 박종철 열사 추모사업회에서 일하던 열사의 동지,친구들이었다.
나에게 진정 바람직한 인간관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그리운 사람들..

그들 중 한 형이 부르던 진혼곡이 아직도 생생한데...

"포연이 자욱히 피어오르는 저 언덕 묘지위에
비에 젖은 흐느낌 울려퍼지어
살아 귓가에 넘실거린다
피분수 솟구쳐 붉게 드리운 흰옷의 꽃망울
상처 남은 가슴 위로 분노의 염원이 숨쉰다
떨리는 저 몸부림 목메인 그 함성으로
쓰러져 간 그대 원혼 가슴에 남아
타올라라 복수 복수를 위해 굽이쳐라 해방을 위해

총성이 아련히 멀어져가는 메마른 흙무덤에
핏발서린 눈동자 잠들어있고
깊은 어두움만이 고였다
불꽃에 휩싸여 재가 되버린 흰옷의 옛사랑
타다 남은 잿더미에 피의 이산천이 숨쉰다
떨리는 저 몸부림 목메인 그 함성으로
쓰러져 간 그대 원혼 가슴에 남아
타올라라 복수 복수를 위해 굽이쳐라 해방을 위해"

열사여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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