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 <203.247.66.44> 날 짜 (Date): 2001년 1월 5일 금요일 오후 11시 24분 45초 제 목(Title): Re: 노르웨이 민족상징이 비폭력적? 마치 이분이 darkmam님의 글을 읽고 그에 대한 답글을 올린 것 같습니다. ^^ ==========================================================(여기부터) [박노자의북유럽탐험] 온건한 민족주의, 파시즘을 낳다 난센과 퀴슬링의 관계에서 보는 노르웨이식 ‘인본주의적 민족주의’의 어두운 그늘 노르웨이 민족영웅 '난센'의 제자인 키슬링은 괴뢰 친독 정부의 괴수가 되어 노르웨이 젊은이들을 나치의 군대에 보냈다. 1905년에 독립을 얻은 노르웨이는, 1917년에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핀란드와 함께, 유럽 역사의 무대에 가장 늦게 등장한 민족국가였다. 이미 그 시절에 유럽의 지성들은, 극단적인 배타적 민족주의의 폐단들을 상당히 잘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런데다 신생국가인 노르웨이는 해외로 팽창할 의도도, 그럴 만한 군사력이나 재력도 없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노르웨이의 민족주의적 정서나 이념들은, 침략주의·인종우월주의가 팽배한 당대 유럽에 비해서 오히려 종교적인 전통과 결부된 낭만적인 이상주의가 월등히 많았다. 그리고 초기부터 민족주의적 정서 속에서 인류 보편적인 인본주의적 이념들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난센, 그린란드 탐험의 결론 그러나 다른 유럽에 비한 노르웨이 민족주의의 상대적인 건전성에도 불구하고, 역시 특정 집단만을 중심으로 하는 배타적인 ‘국민 동원’ 이데올로기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결국 ‘온건한’ 주류 민족주의자들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계승자 중에서는, 상당수의 극우 파시스트적 분자들이 생기기도 했다. 믿기 어렵지만, 민족적인 이상주의와 극우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노벨 평화상의 초기(1922년) 수상자인 탐험가·석학 난센(Fridtjof Nansen, 1861∼1930)과 한때 그의 수제자로 꼽혔던 장래의 친독(親獨) 파쇼파의 괴수 퀴슬링(Vidkun Quisling, 1887∼1945)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민족 정신의 화신 (化身)’, ‘만고(萬古)의 노르웨이의 위인’과 같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당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난센은, 단순한 민족 영웅이 아니라 민족적인 모든 것을 한몸에 담은 ‘노르웨이 그 자체의 체현(體現)’이었다. 그래서 난센의 생애와 이념들을 통해서 노르웨이 민족주의의 이상의 명암들을 잘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노르웨이 민족주의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난센은 혈통적으로 덴마크 지배시기에 노르웨이에서 관료 생활을 했던 덴마크인의 후예였다. 난센의 측근 중에서도 폴란드·스코틀랜드 등지 출신의 귀화인들과 그 후예들이 꽤 많았다. 이런 것들을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혈통보다는 ‘문화’에 중점을 두는 노르웨이 민족주의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유복한 변호사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산과 숲에서의 오랜 탐험을 즐겼던 난센은, 처음에 동물학자로 명성을 얻어 매우 젊은 나이(26)에 박사학위까지 취득한다. 한때 대학 교수 생활도 했던 난센을, ‘박사님’이나 ‘교수님’으로 아무도 호칭하지 않은 사실에서는, ‘학력 질서’에 대한 노르웨이인들의 무관심과 무시가 느껴지기도 한다. 난센에게 젊을 때부터 명성을 안겨준 것은 학력보다는, 1887년의 그린란드의 스키 탐험으로 시작된 몇 차례의 북극지역 탐험이었다.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3년 동안(1893∼96)이나 북극해의 얼음 속에서 표류하면서 북극 해양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위한 기초 자료를 수집한, ‘프람’이라는 연구용 배의 전례없는 대탐험이었다. 그 대탐험의 과정에서 난센은 스키를 타고 한 동지와 함께 약 1년 동안 북극에 도달하려고 북극해의 북부를 배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연 학술적 정보 수집 이외에, 덴마크·노르웨이의 자본가들과 노르웨이 국회가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이와 같은 대형 탐험 프로젝트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그린란드 탐험의 경우에, 난센은 그쪽 원주민인 에스키모족의 생활과 신앙 등을 치밀히 현지 조사하여 한권의 인류학적인 책까지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대부분의 유럽인 탐험가·인류학자들과 같이 난센에게도, 에스키모족은 ‘열등문화’를 가진 연구대상이었지, 동등한 상대자는 아니었다. 덴마크의 식민지배로 멸종해 가는 ‘원주민’들의 비참한 운명은, 난센에게는 ‘원시문화의 현대문화에의 적응 실패’의 당연한 결론일 뿐이었다. 유대적 노동운동을 깨끗이 없애라? 결국 그의 탐험·연구의 상징적 결과는,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유럽문화의 ‘자연 정복’ 능력과, 원주민문화에 대한 우월성의 과시일 뿐이었다. 그리고, 북극해 대탐험의 경우 그 당시에 난센을 절찬하는 노르웨이 신문들은, 그가 “노르웨이 민족의 고유한 특성인 의지력과 진취성, 담력과 남성다움을 여지없이 발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난센의 본의는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세계를 앞서가는 바이킹 영웅들의 후예, 강력하고 용감한 노르웨이인’의 자기 도취적인 민족주의적 모습을 은근히 조장하고 있었던 노르웨이 언론 자본들에는, 세계의 신기록을 세운 대탐험은 절호의 기회이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타자’)의 사람들이 가지 못한 지구의 최북단에 ‘우리’의 깃발을 꽂은 난센은, 신생의 노르웨이 민족주의의 최고의 역할 모델(role model)이 되고 말았다. 그뒤 난센의 활동은, 민족주의적 언론의 기대를 몇배로 능가한 셈이었다. 해외 여론을 주도해 1905년의 노르웨이의 독립에 크게 기여한 난센은, 자신의 거의 절대적인 국내 권위로, 공화제를 주장하는 노동운동을 억눌러 입헌군주제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다음,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에 국제연맹(1919∼46)의 피난민 관계의 고등판무관에 취임한 난센은 포로 송환, 피난민 정착, 러시아 대기아(大飢餓: 1921∼22) 희생자 구제 등의 수많은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 나름대로의 순수한 인본주의적인 열의에 불타는 그의 노력으로, 약 700만명의 러시아 이재민들의 생명이 구제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바로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그가, 곧바로 상금 전액을 후속 구제사업에 투입했다는 것도 감동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 대통합의 필요성’과 ‘북유럽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해도 일정한 한도를 넘지 않았던 ‘인본주의적 민족주의자’ 난센 자신과는 다르게, 그의 원조사업을 보도했던 노르웨이 우파 언론은, ‘야만적인 러시아 슬라브족들의 무능력과 무책임’과 ‘영웅적 노르웨이인의 헌신적인 노력’을 확연히 대조시켰다. 바로 이것은 미래 비극의 뿌리였다. 슬라브인을 비하하는 보도를 제공한 사람 중에서, ‘민족영웅’ 난센을 충심으로 추종하면서 러시아 현지에서의 구제작업을 오랫동안 지휘해온, 퀴슬링이라는 젊고 야심찬 노르웨이 첩보기관의 한 장교가 있었다. 유대인들이 많이 섞여 있는 초기 집권기의 볼셰비키들에 의한 ‘반동숙청’ 등의 진통 시기의 러시아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 지켜본 퀴슬링은, 이를 인종주의적 입장에서 분석해 ‘슬라브인들이 천성적으로 자치능력이 없는 열등인종이고 유대인들이 인류의 적(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민족 내의 정신적 대단결’을 외쳤던 난센의 우파적 민족주의를 계승한 퀴슬링은, 아예 ‘민족 내에서 갈등을 조장하는 유대적인 노동운동을 깨끗이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난센의 죽음 이후에 노르웨이 우파의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퀴슬링은, 노동운동과의 대결 과정에서 점차 극우화되어 히틀러와 같이 ‘북방민족(게르만과 스칸디나비아 계통)의 동진(東進), 미개적 슬라브인의 정벌과 유대인 박멸’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독일군에 의한 노르웨이 점령시기(제2차 세계대전 때)에 괴뢰 친독 정부의 괴수가 되어 많은 노르웨이 젊은이들을 히틀러 군대에 보낸 퀴슬링은, 독일의 패전과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 처형되었다. 그 어떤 민족주의라 하더라도… 사진/난센이 보낸 편지들. 난센의 생애와 이념들을 통해 노르웨이 민족주의의 명암들을 잘 볼 수 있다. 진정한 인본주의자이면서도 민족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난센의 제자들 중에서, 파쇼의 대명사인 퀴슬링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종족적인 집단결속의 본능을 자극함으로써 그 효력을 거두는 민족주의에는, 본래적으로 배타성과 야만성이 내재되어 있다. 노르웨이와 같은 ‘평화천국’의 인본주의적인 민족주의라 해도, 또는 제국주의로부터의 자기 방어를 주요 과제로 삼는 세계 주변부의 ‘민족해방 투쟁형’ 민족주의라 해도, 그 ‘태생적’ 한계성을 극복하기란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해방 이후에 한반도의 남에서도, 북에서도 민족주의를 주장하지 않은 정치 세력이나 문화권력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개인을 체제에 종속시키는 것은, ‘민족해방’을 위한다는 북이나, ‘민족중흥’을 위한다는 남이나 거의 마찬가지이었다. ‘민족’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우리는 과연 20세기의 야만성과 광기로부터 우리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켜 우리의 자율적인 개인정신과 양심을 ‘중흥’시킬 수 있을까?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