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204.tnt3.re> 날 짜 (Date): 2000년 12월 21일 목요일 오후 04시 51분 16초 제 목(Title): 권혁범/ 인성평가를 반대함 [논단] 인성평가를 반대함 수능이 변별력을 상실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특히 올해에는 만점자가 60여명이라서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나로서는 만점자가 여전히 1천명도 안 되는 게 놀라웠지만). 그러나 변별력이 없었던 것은 상위 3%에 해당되는 수험생에 국한되었을 뿐 이번 시험 역시 대다수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만만치 않은 수준으로 출제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전국 평균이 270점대인 걸 보면 결코 쉬운 시험은 아니다. 그런데도 후자의 목소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한국의 언론은 3% 수험생의 학부모 그리고 그들과 신분적 학벌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언론 엘리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인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평상시 그렇게 학벌문화에 비판적이던 언론도 서울대의 지원 가능 예상점수를 전 학과에 걸쳐 보도하는 학벌주의적 편향을 노골적으로, 아니 아무런 부끄럼 없이 드러낸다. 신문에서 전혀 볼 수 없는 것은 ‘하위’ 97%의 운명에 관한 보도다(물론 ‘예의’로 전문대학의 ‘인기’학과에 대한 보도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상위 3%에 대한 변별을 할 수 없어 이른바 ‘명문’대학간의 고정적 서열과 그 안에서의 학과 서열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일정한 수준대의 학생들이 1개 대학이 아니고 대여섯 대학에 골고루 분포되는 것이야말로 대학간의 공정한 경쟁과 발전의 초석이 될지 모른다. 어떤 영문학자는 수백개 대학과 학과의 서열을 1, 2점차로 정교하게 매기는 수능 중심 입시제도는 세계적 특허감이라며 씁쓸해했다. 더구나 매년 100만명의 수험생을 일렬종대로 서열화하는 주체가 서울에 있는 몇몇 사설학원의 입시전문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대한민국 입시제도의 모순을 첨예하게 증거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수능 ‘변별력’이 아니다. 많은 수험생들이 지적하듯, 단 한번의 시험으로 자신이 들어갈 대학이 결정되고 또한 들어간 대학의 상표에 의해 영원히 자신의 지적능력과 인생이 평가받는 학벌주의적 문화 및 제도가 더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박사수준의 지식인들도 사석에서 털어놓는 속내에 따르면 청소년 시절에 각인된 대학서열화의 문화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학자들이 학문적 수준에 의해서가 아니고 출신 대학에 의해 평가받는 경향은 여전하다). 어쨌든 일부 대학에서는 ‘변별력’ 상실을 비판하며 교육부의 반대에도 본고사 부활을 검토하거나 면접점수의 비중을 높이는 방안을 모색중이라고 한다. 본고사 부활이 가져올 폐해는 끔찍하다. 여전히 학생들은 한번의 대학 시험으로 합격·불합격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거나 아니면 여러 대학의 본고사를 한꺼번에 준비하고 치러야 하는 살인적 부담을 안게 될 것이다. 사실 나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면접점수를 높이고 그중에서도 인성평가를 중시하겠다는 주장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인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아니 ‘인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예의바르고 공손하고 말 잘하는 수험생들이 머리에 물들이고 말 더듬거리고 불손하게 보이는 수험생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상식이다. ‘공손’과 ‘불손’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도덕과 예절이란 어른들의 좁은 가치관이나 통제 규범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초·중·고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성교육은 대체로 어설픈 인생철학, 전근대적 규범, 충효사상, 맹목적인 애국심, 어른에 대한 복종과 공손함,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하는 성차별 문화를 포괄하고 있다. 대학에서의 인성평가라고 많이 다를까? 도덕이나 인성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주관적이고 그만큼 자의적이며 무엇보다도 이미 그 자체에 다른 사람이 어떠 어떠해야 한다는 강력한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칫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개성과 다른 가치관을 완전히 ‘틀린 것’으로 배제하는 억압성을 수반한다. 많은 교육자들은 여전히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주류 규범에서 벗어나는 학생들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경향이 있다. 수직적 위계질서에 대한 순응 현재 인성교육을 통하여 강조되는 것은 수직적 위계질서에 대한 순응이며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자기형성이다. 전자를 통하여 교사-학생, 어른-아이, 윗사람-아랫사람, 선-후배, 남-녀간의 불평등한 질서가 강제된다. 후자를 통해서는 다양한 개성적 자아의 추구나 실현이 억제되고 집단의 요구에 자신을 맞춰가는 인간이 찬양된다. 이 과정에서 타자의 인권침해가 정당화되고 강자의 가치관이 약자에게 강요될 가능성이 높다. 성차별적인 교사와 교수는 성평등을 지향하는 학생들을 ‘훈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가? 권위주의적인 어른들은 ‘인성’의 이름으로 학생들의 도전적 몸짓과 이탈적 언행을 ‘불손’으로 매도하지는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내신과 면접을 통하여 인성교육과 평가가 제도화될 때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더욱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제 교육자들의 자의적 가치관과 이데올로기가 ‘인성’의 이름으로 강요될 뿐만 아니라 점수화되는 것이다. 인성평가를 반대한다. 권혁범/ 당대비평 편집위원·대전대 정외과 교수kwonhb@dragon.taejo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