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204.tnt3.re> 날 짜 (Date): 2000년 12월 21일 목요일 오후 04시 42분 29초 제 목(Title): 박노자/ 영어실력은 평등의 산물 [박노자의북유럽탐험] ‘영어 실력’은 평등의 산물 “경쟁력”으로 보는 건 어리석음의 극치… 영어 일상화됐지만 미·영식 신자유주의를 혐오 (사진/사교육 위주의 영어교육 방식으로는 신분계층간의 격차와 갈등만을 심화시킬 것이다) 노르웨이에 가기 전까지 노르웨이어를 배워본 적도 없는 필자는 적지 않은 고민을 했다. 동양사와 같은 난해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초기에는 영어로 해야 하는데 과연 충분히 알아들을 것인가? 이 복잡한 사학 전문 용어들을 그들이 영어로 다 알아듣는가? 그리고 전체적으로 노르웨이어를 모르면서 노르웨이 생활을 개척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모험이 아닌가? 한국에서 한국어를 잘 못하고 영어밖에 모른다는 죄로 나날이 고초를 겪어야 하는 외국인들이 워낙 많아서, 정말로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영어회화·토익 과목이 아예 없어 그러나, 첫 강의부터 놀란 것은, 학생들이 발음이나 속도에서 필자보다도 영어를 더 잘한다는 것이었다. “잘한다”라기보다는, 그들에게 영어는 단순히 또 하나의 모국어라고 느낄 정도였다. 한편으로 부끄러움, 또 한편으로는 고마움을 느낀 필자가, 한국 체류 때의 습관을 살려 학생들의 영어 실력을 칭찬하자 강의실은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다. 필자가 어리둥절해하자 학생들이 “영어하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 음식을 먹고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단순히 일상적인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런 설명을 들은 필자는, ‘동양사를 듣는 학생이면 조금 특별한 교육을 받고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망가진 자존심(?)을 달래면서도, 노르웨이인들의 영어교육에 대해서 알아보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그 결과, 학생들의 말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특수 교육을 받았을 법한 동양사 수강생뿐만 아니라, 필수 교육인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자전거 수리공이나 아시아계 택시 운전사조차도 한국의 교수나 외교관들보다도 훨씬 더 나은 영어를 구사하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필자를 처음에 그토록 놀랍게 한 동양사 수강생들이 대학교에서 아무런 특별한 교육을 받거나 특별한 자격을 가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노르웨이 대학에서는, 한국 대학생의 본업인 것처럼 돼버린 교양영어, 영어회화, 토익, 컴퓨터라는 과목이 아예 없다. 입시도 없으니까 영어 자격을 검증 받는 것도 아니다. 영어를 단순히 중·고등학교 때 하나의 과목으로 배우고 끝난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입시 때의 영어시험, 입사 때의 토익 점수의 몇점에 따라서 현대판 ‘귀족’이 되느냐 ‘백성’이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할 때, 못 믿는 듯한 표정을 짓는 학생은 많다. 영어에 대해서 “그저 아무나 하는 일”이라는 의식이 워낙 상식화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처럼 비대해진 사교육 기관도 없이, 10대 후반의 노르웨이 아이들이 이만큼 영어에 숙달할 수 있는 배경은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일차적으로 언어 자체의 구조적·어휘적인 유사성과 문화의 친근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럽 언어 중 하나인 영어가 국제 체제의 공용어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유럽인에 대한 일종의 ‘특혜’인 동시에 비(非)유럽 문화에 대한 타자화를 의미한다는 지적은 아주 타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태생적 특혜’ 이외에도 노르웨이 청년들의 영어 숙달 비결은, 성실하고 체계적인 필수 교육이라는 사회 제도에 있다. 15∼20명 넘지 않은 반에서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진리를 몸에 밴 교사와 영화 시청, 노래 듣기, 일대일 대화 등의 방법으로 흥미로운 영어를 배우는 이들 학생에게는, 영어가 ‘위협’이 아닌 ‘재미’로 느껴질 뿐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영어 실력 키웠다 (사진/노르웨이 대학생들은 학부생 교과서·참고서를 영어책으로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오슬로대 도서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영어교과서) 대학에 입시가 없고, 노동 시장에 실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학교 성적으로 서로 경쟁하는 일도,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등수’를 매기는 일도 전혀 없다. ‘체벌’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야단을 치는 선생님은 교육자로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권고 퇴직의 위기에 처한다. 언어 숙달이라는 것은 창조력의 발로이고, 아이의 창조력은 바로 경쟁과 폭력이 없는 환경에서 제대로 발전될 수 있다. 게다가 중·고생들이 교환 학생의 자격으로 국고의 지원을 받아 영어권 나라에 가서 몇 개월을 지내는 것도 일반적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알면, “영어와 같이 기본적인 것까지 대학교에서 왜 배워야 하느냐”는 노르웨이 대학생의 놀라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영어 실력을 유지시키는 것은 노르웨이사회의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분위기다. 유럽 공동체 시민이면 노르웨이에서 노르웨이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일자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직장에서 외국인 동료와 자연스럽게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필자가 속하는 학과에서 교수·직원들의 절반 정도는 외국인들이고, 그들과 노르웨이인들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결혼과 같은 문제에서, 노르웨이인들은 국경과 국적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러시아와 인접한 북부 지방에서는 약 10%는 러시아인들과 혼인하는가 하면, 오슬로에서 사는 필자의 주위에서는 칠레인, 타이인, 중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한국인 등과 결혼한 노르웨이인들이 많다. 이와 같은 ‘국제 가정’에서 배우자는, 노르웨이어를 구사하기 전에 영어로 일상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데다가, 모든 근로자들이 최소한 4주 이상의 휴가를 누리고 특수 휴가 수당을 받을 권리를 가진 노르웨이에서는 기후가 좀더 좋고 물가가 저렴한 외국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일상적인 매년의 일이다. 한마디로, ‘우리’와 ‘남’, ‘자국’과 ‘외국’의 뚜렷한 구분이 없는 노르웨이에서는, 영어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먹고 자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어의 실력 수준보다 필자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보통 노르웨이인들의 미국·영국에 대한 태도다. 미국인과 구별이 안 될 만큼 거의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노르웨이 지식인들이, 세계 군비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을 ‘현대판 군국주의의 대표자’ ‘세계 평화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치자. 그러나, 지식인들과 무관한 삼류 타블로이드 신문에서도, “1천명당 죄수의 수가 노르웨이보다 8배나 많은 미국이 스탈린의 수용소의 군도와 뭐가 다르냐”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을 때 필자는 자못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보다 더 당황한 것은, 일반 노르웨이인들의 영국 여행담을 들을 때였다. 그들의 눈에는 단기 비정규직 위주, 고용주 중심의 노동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거지, 졸부들의 과시적 사치 등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들이 ‘야만적인 초기 자본주의’처럼 비쳐졌을 뿐이다. 그들 중에 노동당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도 “원시적인 계급사회에 진저리쳤다”고 할 정도면, 노동당 지지자의 반응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겉으로는 역설적인 이야기로 보이지만, 유럽 국가 중에서도 영어 실력이 최상위권인 노르웨이는, 미·영식의 신자유주의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노르웨이인들의 영어 실력이 ‘학비 안 드는’ 공립학교, 국비 해외 수학 여행, 직장인의 해외 휴식을 가능하게 하는 4주 이상의 필수적 휴가 등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제도에 의해서 키워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전혀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한국 영어교육,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사진/결혼문제에서 노르웨이인들은 국경과 국적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이런 ‘국제가정’에서 영어는 일상어가 된다. 중동계통의 이민자와 사랑을 나누는 노르웨이 여성) 이러한 노르웨이의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출세와 생존을 위해서 평생을 시작도 끝도 없는 ‘영어 공부’에 바치도록 강요받는, 그리고 그러면서도 결국 영어 단어 몇 마디도 쉽게 연결시키지 못하는 대다수 한국인의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한마디로, 영어와 관련된 모든 의식과 제도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 같다. 영어 실력도 아닌 ‘영어 시험을 잘 보는 실력’으로 신분을 부여하는, 그리고 이 ‘영어 시험을 잘 보는 실력’(아니면, 이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돈과 여유)이 없어서 대학에 못 들어간 사람을 아예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사회 의식과,(요즘은 좀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영어 대신 폭력과 폭언, 감시와 규율을 가르치는 공교육도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멸시와 착취와 불안 속에서 떨면서 사는 한국의 비정규직 근로자가, 노르웨이에서 일체 국민이 누릴 수 있는 4주 이상의 휴가와 해외여행을 꿈이나 꿀 수 있는가? 혼혈아를 아직도 ‘튀기’로 부르고, 아시아 이민 노동자를 ‘산업 연수생’이라는 미명 아래 현대판 노예로 묶어 격리하는 일상적 인종 차별의 사회에서, ‘외국인과의 일상적 접촉’이 과연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근래처럼 ‘여유 있는’ 사회 귀족들이 3∼4살의 ‘자녀님’들에게 외국인을 붙여 ‘영어 환경’을 만든다 해도, 이는 비개방적인 사회에서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기 힘들며, 오히려 신분 계층간의 격차와 갈등만을 심화시킬 뿐일 것이다. 이러한 특권층·사교육 위주의 영어교육 방식으로는, 일체 시민들에게 같은 수준의 양질의 교육을 공급해주고 국적과 인종의 차별을 일소한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와는 결코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극우 신문이 영어를 ‘경쟁력’이라고 하지만 이는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사실 일반 대중의 영어 실력은, 사회 평등과 사회 정의의 산물일 뿐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