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20.tnt3.re> 날 짜 (Date): 2000년 11월 9일 목요일 오전 08시 12분 19초 제 목(Title): 쾌도난담/ 재일 인권운동가, 임병택 [쾌도난담] 29년만에 돌아온 '위험인물' 한국 정부의 ‘위험인물’ 재일 인권운동가 임병택씨, 아버지가 떠나온 조국을 찾아 (사진/사죄서, 각서, 탈퇴증명서…. 임병택씨가 여권을 신청할 때마다 요구받은 것들이다. 지난달 27일에야 그는 ‘한장’도 쓰지 않고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임병택(54). 그가 조국에 돌아오는 데는 꼬박 스물아홉해가 걸렸다. 우주선 타고 태양계 밖에서 돌아온 것도, 짚신 신고 아마존 밀림에서 걸어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비행기로 두 시간 거리인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는 29년 동안 한국 정부가 세운 바리케이드 밖에 서 있어야 했다. 임씨는 20대부터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과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장외투쟁’을 해온 이른바 반체제 인사다. 지난 5월 광주민주화운동 20주년 심포지움에 참석하기 위해 여권 발급을 신청했다가 한국 정부로부터 거절당했다. 반정부 활동을 하고, 반국가 행위를 한 ‘위험인물’이라는 이유였다. 그가 조국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소명’이 필요했다. 나쁘게 살지 않은 그가 소명하지 않은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27일부터 ‘해외반체제 인사’들이 소명 절차 없이 들어올 수 있게 됨으로써 그는 ‘돌아온 해외반체제 인사 1호’로 11월2일 꿈에도 그리던 한국땅을 밟았다. 1928년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에 가서 결국 뼈를 묻은 임씨의 아버지도 돌아오는 길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을 것이다. 대담은 통역을 두고 진행됐다. 71년 ‘민단간부후보훈련’의 기억 김규항: 선생님께서는 동포 2세로서 두 가지 일을 해왔습니다. 재일한국인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싸워왔고 또 하나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활동을 했는데요. 지금 한국은 절차적 민주화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상황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재일한국인들의 인권문제는 어떤 수준인지 저희가 잘 모릅니다. 외국인등록법이 개정돼서 지문날인은 폐지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문제가 남아 있습니까? 임병택: 지문날인은 없어졌지만(작은 신분증을 꺼내보이며) 이게 외국인등록증이거든요. 외국인만 갖고 다니는 신분증인데 언제나 휴대해야 합니다. 외국인등록증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예를 들면 성인이 아닌 청소년 때부터 신분증 등록을 해야 된다든가, 또 신분증 자체도 빈번하게 갱신을 해야 된다든가 하는 문제가 있지요. 또 어떤 일이 터졌을 때 벌칙 규정이 일본인보다 훨씬 무겁다든가 하는 외국인등록법상의 문제도 아직 많구요. 일본 사람들이 재일동포들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느냐 라는 부분에 있어서도 의식적인 차별이 있습니다. 도쿄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발언이 그런 문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예가 될 수 있겠지요. 최보은: 언론보도에 따르면 29년 만에 귀국을 했다는데요. 그 전에는 한국을 자주 왔나요? 왔다면 어떤 일로 방문해서 주로 누구를 만났는지 궁금합니다. 임병택: 1971년에 딱 한번 왔는데요, ‘민단간부후보훈련’이란 이름의 프로그램에 참가했습니다. (웃음) 그때 제가 소속됐던 한청 동료들과 같이 왔는데 중앙정보부에서 진행하는 일방적이고 단순한 행사였습니다. 그 프로그램이 끝난 뒤 사회 분위기를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없는 돈을 내서 서울, 대구, 부산을 돌아다녔지요. 다방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곳인가, 극장은 어떨까,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많이 했습니다. 매우 가난하다는 인상이었는데 그 속에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김규항: 한국 내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법률이 일본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법률 이상으로 악랄하다는 거는 아는지요. 임병택: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이번에 참가한 일본 내 외국인등록법 개정 관련 심포지움에서 한국의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의 외국인 차별상황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죠. 일본에도 그런 상황이 일찍부터 있었고, 한국도 그런 문제가 심각하니까 양쪽의 인권운동가들이 힘을 합해서 노력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보은: 이번에 오기 전에도 입국하려는 시도를 여러 번 해보셨나요? 임병택: 한국 정부가 해외에서 한국민주화운동하는 사람을 적대시하고 있고, 저보다 훨씬 ‘약하게’(?) 운동한 사람조차 입국을 거부당하고 좌절하는 것을 주변에서 많이 봤기 때문에 지난 5월까지는 구체적으로 시도한 적이 없었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5월 광주 심포지움에서 발표 의뢰가 없었으면 아마 입국 시도를 하는 시기가 더 늦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명’이 뭐지? 유치원 이름인가? 최보은: 같은 이유로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고국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과 연대나 평상시 네트워크가 있는지요. 임병택: 네트워크까지는 아니지만, 인간관계는 있죠. 그래서 얘기를 하게 되면 이런 입국과 관련된 인권문제 이야기가 반드시 나오지요. 예를 들면 어디어디에 누구누구가 한장 쓰고 이번에 들어갔다더라 그런 따위의…. 김규항: 한장 쓴다는 게 ‘소명’이란 건가요? 임병택: 준법서약서라고 해도 상관없고. 김규항: 해외반체제 인사들이 소명 절차 없이 들어올 수 있게 됐다고 기사에 나왔는데 ‘소명’이라는 말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소명 유치원, 소명 여고 이런 게 나오더군요. (웃음) 소명 절차가 뭡니까? 최보은: 반정권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걸 해명하는 경위서 같은 걸 쓰는 거지. 임병택: 제가 요구받았던 소명 절차에 대해서 소개를 드리면, 지난 5월에 여권발급 거부를 당했을 때, 대사관에서는 ‘사죄서를 쓰라’고 했고, 영사관에서 표현하기로는 ‘각서’라고 했습니다. 여권발급 거부 취소 소송 재판중에 외교통상부에서는 ‘한통련에서 탈퇴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내용의 한마디를 쓰라’고 했구요. 그리고 이번에 여권발급을 받으면서 영사관에 다시 갔을 때는 한통련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것을 증명하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웃음) 최보은: 쉽게 얘기한다면 한통련이라는 단체가 한국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빨갱이 단첸가요? 임병택: 제가 볼 때는 해당 안 되는 것 같지만, 한국 정부가 볼 때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김규항: 좌파 성격의 단체는 아니죠? 임병택:(우리 말로) 사회주의 아니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 김규항: 조총련이 아닌 민단 계열의 동포들이 하는 운동이죠? 임병택:(우리 말로) 그렇죠. 김규항: 한국말을 하시네요. (웃음) 임병택: 조금밖에 못해요. 김규항: 재밌는 건 80년에 김대중씨가 이 단체의 수괴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었죠. 임병택: 한민통 의장으로 정부에서 조작했거든요. 김규항: 한민통이 한통련의 원래 이름인가요? 임병택: 한통련의 전신이 한민통입니다. 최보은: 한통련이 지금도 활동을 하나요? 선생님도 하고? 임병택: 저는 한통련과 같은 계열쪽에 있는 한청에서 일하다가 94년 연령적인 이유로 탈퇴를 했습니다 김규항: 더이상 청년이 아니라서요. (웃음)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운동가로 임병택: 그 이후 조직적으로는 관계를 안 하고 있구요. 그렇지만 지난 5월 영사관에 갔을 때, “조직적으로는 지금 활동을 안 하지만, 인간적인 관계는 유지한다, 도쿄에 가면 거기 있는 친구들하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신다”고 이야기했더니 영사도 “그건 그렇죠, 한국인의 미풍양속이니까” 말은 이렇게 하더라구요. (웃음) 김규항: 현재 삿포로시 시정연구소 사무국 차장으로 일하시는데, 어떤 일을 하시는 겁니까? 임병택: 한국에는 공무원이 노조를 안 만드니까 감이 올지 모르겠는데, 삿포로시 공무원 노조가 2년 전에 설립한 연구소예요. 시의 정치가 시민들에게 좀더 다가갈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연구 활동을 위해 설립한 곳입니다. 예를 들면 삿포로시의 가츠라 시장이 수행했던 시정평가를 하기 위해 정보공개의 수준, 외국인에 대한 정책 등 다양한 데이터를 만들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지적하는 거지요. 최보은: 그러면 현재 일을 하기 전에는 재일한국인인 인권운동과 한국 민주화운동 외에 생업으로 하는 일이 있으셨나요? 임병택: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딴 일이 있기는 했는데, 일본의 경제불황으로 인해서 쫄딱 망했어요. (웃음) 치아를 치료하는 데 쓰는 금속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도쿄에서 운동을 하던 선배가 같이 하자고 제안해서 한동안 그 일을 했지요. 최보은: 한국사회 내에서 운동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동구권 몰락이나 문민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기득권의 삶으로 돌아가서는 ‘이제는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태도를 바꿨거든요. 그리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정권이 바뀌면서 권력계층으로 편입도 됐고요. 그런데 외국에서 그렇게 오랜 기간 운동을 할 수 있었던 힘이라면 그게 뭘까요? 임병택: 한국도 일정 정도 민주화가 되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인간의 권리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의 과제는 아직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운동을 그만둘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는 거는 뭐라 그럴까, (잠시 머뭇거리다가) 변절(웃음)하는 거 아닐까요? 어쨌거나 저는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활동가로 살아갈 생각입니다. 김규항: 한국에서의 외국인 차별은 주로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육체노동자, 경제적으로 하층민을 대상으로 하죠. 심지어는 같은 뿌리인 중국 조선족 동포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 본질은 결국 자신보다 못사는 사람에 대한 경멸인데, 일본은 어떤가요? 임병택: 기본적으론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지요. 한국인이 왜 차별당하는가, 즉 일본인에게 한국인은 어떤 존재였는가를 생각해보면 2차대전 이전에는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면서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한참 아래에 있는 저변의 노동력에 불과했습니다. 전후 역시 여러 가지 제도적인 차별로 인해서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저변 노동력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지요. 최근 들어서는 한국에서 유명한 손정의 같은 사람도 부각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아직도 일본인 평균에 비하면 어려운 경제 상황에 있구요. 빈곤으로부터 차별이 온다는 건 맞는 이야기입니다. 최보은: 우리나라 언론이 그동안 정권의 이해에 따라서 움직이면서 언로가 많은 부분 차단되어 있기는 했지만 얼핏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재일한국인 운동권이 심하게 분열돼 있고, 서로 치고받기 바쁘다는 식으로 보도 되고, 그게 한국인의 국민성 아니겠나 하는 뉘앙스로 소개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정말 국민성하고 관련이 있는지 (웃음) 실상도 그렇게 분열적이고 파벌싸움하기 바쁜 건지, 실제로 그런 현상이 있다면 그 이유는 왜 그런 건지 말씀해주세요. 임병택: 어떤 부분이 그런 식으로 소개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분열이 있으면 어디에나 있는 정도의 분열일 것 같아요. 한국인이니까 분열한다기보다는 남과 북의 분열이라고 해야 맞겠지요. 남북 갈등은 일본의 민족단체 안에서도 있겠지만 조국 현실의 반영이므로 재일한국인사회라는 집단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국이 갈라진 것 때문에 분열한다는 것도 민족성보다 냉전의 문제이겠지요. 김대중 석방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이지만… (사진/임씨의 외국인등록증. 이 등록증은 일본에서 외국인이 지니고 다녀야 할 ‘멍에’다) 최보은: 분열적인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 (웃음) 풍문으로는 일본 내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하는 인사들 대부분이 친북이나 좌파다, 이렇게 들었거든요. 실상이 그렇습니까? 임병택: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별로 좌파적이지는 않은 것 같고요, 혹시 친북적인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많은 사람이 반독재민주화 성향인 것은 맞는 사실이구요. 최보은: 물론 남한 정권에서 조작된 게 대부분이지만, 정경모씨나 한국에 알려진 인사들이 대부분 그런 분들이어서 선입관 같은 게 생겼을 텐데, 선생님은 한국에 오기 전에 북한에 왕래를 하셨나요? 임병택: 간 적 없습니다. 김규항: 그런데 민단 계열의 주류가 독재정권에 좀 협조적이었던 건 사실이지요? 임병택: 사실입니다. 김규항: 한국에서는 극우세력이 아주 극단적인 형태의 반공주의로 오랫동안 나라를 장악했는데, 지금의 청년 세대들에는 그들의 선동이 별로 통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극우는 극단적인 국가주의가 문젠데요. 현재 일본 청년들은 극우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요. 임병택: 옛날보다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일본사회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극복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줄어든 측면이 있기 때문에 구세대의 의식이 요즘 젊은 세대들한테도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부분도 있지요. 최보은: 일본 내에 한국민주화운동을 하는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김대중 정권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그리고 이번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서 어떤 식의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하네요. 임병택: 김대중 정권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겠지요. 민주적 정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제 경우는 김대중씨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홋카이도 안에서 석방운동을 가장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닌가 싶은데, 아직 해결해야 될 문제가 너무 많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구요. 최보은: 임 선생님은 일본에서 나서 어릴 때부터 일본인들로부터 많은 제약과 차별을 받고 자랐는 데 비해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본문화에 굉장히 열광을 하거든요. X-Japan 같은 록그룹은 한국 가수들보다도 인기가 높고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 대해서 다른 어떤 나라의 문화보다 더 큰 갈채를 보내고 있는데, 평생 일본 정권과 싸워오신 분으로서 그런 현상을 보면서 느끼는 특별한 감회는 없으십니까? 임병택: 오늘 재미있는 장면을 봤습니다. 지하철 환승역에서 중학생쯤 돼보이는 아이들이 교복차림으로 지하도 계단과 바닥에 주저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일본에서는 이런 풍경이 사회현상이 될 만큼 눈에 띄게 많은데, 거의 비슷해보여서 ‘야 이런 것까지 수입이 됐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문화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에서 그렇지 않은 나라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니까 당연한 것 일 수도 있겠지만 저 같은 사람은 굉장히 구식이기 때문에, 글쎄요…, ‘참 그렇군…’ 하는 수밖에요. 김규항: 저는 일본 민족과 한국 민족 전체에 모순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점기가 있었지만 그것도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한국 민중간의 모순이었을 뿐이죠. 일본 민중 역시 제국주의의 피해자입니다. 저는 한국 정부나 언론이 늘 요란스럽게 선동해온 반일감정이란 게 실은 그들과 여전히 남아 있는 일본의 극우세력과의 야합을 감추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정희나 전두환 등 역대 독재정권은 일본 극우세력의 구체적인 지도를 받아왔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나기도 했고요. 그런 맥락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를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해당되는 동남아시아 몇개 나라 중에서 한국 정부가 가장 비굴하고 치졸한 태도를 지금까지 보여왔는데 말이지요. 활동가가 아니라 ‘활동가의 남편’이었군! 임병택: 전후책임이라든가 그런 정리해야 할 것들을 방기한 채 한국 정부가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나가자고 하니까 일본에서는 굉장히 좋아하지요. 특히 DJ 정권은 일본 안에 숨겨진 욕구를 잘 바라보고 거기에 대응을 해주기 때문에 최근 한-일관계가 가장 사이가 좋은 상태이기는 하지요. 저는 민족문제에 관해서도 원칙적인 청산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보은: 그리고 이건 제가 여자라서 저쪽에 앉아 계신 부인께 한마디 묻고 싶은 건데, 활동가의 삶이 어렵습니까? 활동가 부인의 삶이 어렵습니까? 김정례(임씨 부인): 저도 활동간데요. (웃음)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관련된 활동을 주로 합니다. 한국의 할머니들이 오시면 같이 시위도 나가고. 그래서 활동가를 뒤에서 받쳐주는 활동가의 부인보다는 한 사람의 활동가이고 싶고, 저도 남편과 더불어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최보은: 정답이네요. 백점입니다. (웃음) 임병택: 한청활동하다가 아내를 만났습니다. 김규항: 활동가인 줄 았았더니 활동가의 남편이셨군요. (웃음) 최보은: 한국에서의 빡빡한 일정으로 피곤하실 것 같은데, 진지하게 답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오늘의 결론으로 한국에 와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씀 한마디 하시죠. 임병택: 한국으로 오기 위한 길이 이렇게 먼줄은 몰랐습니다. 최보은: 한 가지 더. 한국의 운동가들이 갈 길은 아직도 멉니다. 통역·강혜정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