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20.tnt3.re> 날 짜 (Date): 2000년 11월 9일 목요일 오전 08시 08분 47초 제 목(Title): 권혁범/ 김영삼과 장정일 [논단] 김영삼과 장정일 장정일씨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끝내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었다. 커밍아웃 하자마자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퇴출된 홍석천씨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참고인로서의 출석이 좌절되었다. 장씨의 소설은 ‘사회통념’에 비추어 ‘음란물’이라는 판결을 받았고 홍씨의 경우 동성애가 우리 사회의 대중적 정서에 비추어 아직 국회에서 다룰 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위원회 출석이 거부되었다. 각기 다른 이유에서이지만 이 두 사건은 결국 다수의 소수에 대한 횡포가 법과 문화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한국사회의 억압성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우리 사회에서 쉽게 수용되는 논리 중 하나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다. 그 밑에는, 어떤 사회건 모든 사람의 입맛을 맞출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최선은 다수의 결정에 소수가 따라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일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깔려 있다. 더구나 그것은 ‘다수의 지배’를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는 매우 왜곡되고 단순화된 가치관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심지어 ‘민주적인’ 생각을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조차 그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뿌리에는 소수가 다수를 뜯어먹고 지배했던 전제 혹은 독재에 대한 역사적 반발이 깔려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체제에서 신음했던 역사를 기억하는 우리로서는 소수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감이 강할 수밖에 없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강화되었던 것은 다수결의 원칙이 최선의 결정방식이라는 믿음이었다.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인민’의 지배이며 그 ‘인민’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독재에 대한 저항 속에서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사실 다수 지배가 아니라 소수의 권리존중과 보장에서 출발한다. 왜 이것이 반드시 요구될까? 역사적으로 보면 다수의 생각은 나중에 오류로 판명된 예가 수없이 많다. 또 집권층은 항상 ‘다수’의 이름으로 억압을 정당화했다. 가령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줘야 한다는 것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소수의 논리에 불과했다. 50년대의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사법적 처벌의 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컴퓨터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한 과학자는 실형을 살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이제 동성애는 사법적·문화적 제재에서 자유로워졌으며 동성애 커플을 정식 부부로 인정하는 나라도 꽤 생겼다. ‘음란함’에 대한 다수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 과부의 재혼은 ‘음란’으로 금기시되었다. 70년대만 해도 장발, 미니스커트는 ‘미풍양속’ 위반이었으며 동성동본간의 결혼이 ‘불륜’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오늘날이라고 다수의 의견은 무오류일까? 왜 꼭 다수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강요해야 할까? 소수가 존중돼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생각과 양심에 따라 살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대체로 사회문화적 압력 속에서 다수는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게 되지만 항상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혹은 동의할 수 없는 소수란 존재하게 마련이다. 아니 소수가 없는 곳은 전체주의사회일 뿐이며 소수없는 다수는 병든 닭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 수 있으려면 그러한 ‘다른’ 소수의 의견과 행위는 법적으로 문화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자신의 신념이나 양심에 어긋나게 표현하고 행동하도록 강제되는 경우 자기존중은 불가능하고 인격은 해체된다. 섹스에 대한 법관의 도덕 섹스에 대한 법관의 도덕은 장씨와 다를 수 있다. 보건복지위 소속 국회의원은 이성애자이며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동성애자를 싫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과 정서를 남에게 획일적으로 강제해서는 안 된다. 소설이 음란한지 아닌지는 성인 독자가 판단할 일이다. 설사 음란하다고 해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그것을 남에게 얘기할 통로가 봉쇄되어야 할까? (나는 개인적으로 ‘음란’은 인간의 소중한 속성이라고 믿는다). 홍씨의 동성애자로서의 삶은 자신의 본성에 의한 것이다. 성희롱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불이익을 받아야 할까? 다수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소수의 침묵과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집단의 이익과 공공질서는 위험한 핑계일 뿐이다. 나는 얼마 전에 쓴 글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 특강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만 수많은 장씨와 홍씨의 권리도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치챘겠지만 김영삼님은 현재 소수자에 속한다. 물론 내가 동의하지 않는 소수다. 자신과 ‘다른’ 소수의 존중, 다수와 소수의 평화적 공존이야말로 한 사회의 건강과 민주주의의 지표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 kwonhb@dragon.taejo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