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111.tnt2.re> 날 짜 (Date): 2000년 11월 1일 수요일 오후 02시 15분 30초 제 목(Title): 김영민/ 위기론으로서의 인문학 김영민 (jajaym@hanmail.net) 조회수: 768 , 줄수: 33 정신의 방랑과 배회: 위기론으로서의 인문학 인문학의 위기론을 둘러싸고 흔히 갖은 소문과 추측이 난무한다. 그러나 인문학이 전래의 자기성찰 속에서 그 고유한 이력을 가꾸어 왔고, 또 자기성찰이란 필경 기성의 지형과 역학에 균열을 내는 발본적인 것이라면, 인문학의 위기란 그저 인문학의 내생적 '조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인문학은 그 자체로 일종의 위기론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안없는 위기론에 편승한 반사이익" 운운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소한 비판이다. 마찬가지로, "지적 엄살"이니, 심지어 "담론적 헤게모니를 선취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니 하는 지적도 우리 인문학의 현실 지형과 역학에 충실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제 구태의연한 고답적인 주체성(탈식민성) 논의는 그만두어야 한다"는 어느 논자의 말이 단적으로 시사하는 것처럼, 정작 문제는, 우리 인문학의 모든 논의에서 실질적으로 이룬 것이 없으면서도 그간 비판과 대안을 위해 뱉아놓은 말의 업장(業障)이 너무나 큰 나머지 우리는 스스로 자괴하고 자멸해 간다는 사실이다. 구조와 제도의 업장은 몇몇 개인의 창의와 연대만으로 씻어낼 수 없을 지경이고, 그 창의와 연대가 어렵사리 생산한 토의와 논쟁은 무슨 스캔들처럼 불쑥 솟아올랐다가 필경 지리멸렬해지고 만다. 말하자면, 아무리 그 '위기'가 안팎으로 절박해도, 우리들은, 신실하고 아름다운 절망의 끝에서야 비로소 체감하는 실속있는 위기론을 들먹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강단 인문학이 거친 방랑의 세월에 등을 돌린 채 교과서와 체제 속으로 미라화하고, 따라서 우리 생활정치의 현장에 아무런 수혈과 통풍을 해줄 수 없는 주검으로 변했다는 사실은 인문학 위기론의 핵심 내인(內因)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문학이란 워낙 '정신의 방랑'을 주제로 삼아온 공부가 아니었던가. 따라서 인문학의 활로는, 그 근본적 차원에서, 정신의 배회와 방랑을 활성화하는 갖은 노력의 집산(集散)과 관련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구조주의의 정착과 발전을 주도한 프랑스의 학인들이 "제도적으로 대학교수들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로운 동시에 주변적이"었다는 사실. 탈식민성 담론의 연장선에서 우리 인문학의 활로를 선도하며 활발하게 개화한 이른바 '자생성 담론'은 어떠한가? 90년대 이후 학계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라 세인의 관심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우리 인문학의 위기에 기생하는 지적 순환고리를 내부에서부터 끊지 못한 채 그 스스로의 자생력을 시험해 볼 차분한 여유와 평가의 공간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사정을 일람하면 그것은 역으로 우리 인문학이 향후의 활로를 개척하는 데 필요한 노력들을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분배해야 하는 지를 예상케 해준다는 점이다. 혹자들은 '지적 콘텐츠'의 부재를 한탄하면서, 대안없는 비판보다 한 줄기의 이치라도 더 생산, 축적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현대인문학의 경우, 정작 문제는 담론의 부재가 아니라 담론의 과잉 속에서도 바로 그 담론이 부실(不實)해지고 공소해질 수 밖에 없는 학문의 구조와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쉽게 변하지 않는 그 구조와 태도를 끝없이, 메아리없이 비판하느라 우리는 하루 하루 지쳐가고, 또 그 사이, 그 비판의 소음에 지친 이웃들은 서둘러 대안의 부재를 다시 불만하는, 이 악순환은 언제, 어떻게 끊어질 수 있는 것일까? 첫째. 우리 현대 인문학사의 파행은 워낙 구조와 역사의 화근에 결부된 문제이므로 몇몇 개인의 창의와 결기로써 뒤엎지 못한다. 이것은 한편 지적 허무주의나 냉소, 그리고 섣부른 '콘텐츠 생산'에의 조급함이 틈입하게 한다. 둘째. 우리 내부의 학문적 노력과 실험들을 차분히 기록하고 평가하는 문화가 절대적으로 빈곤하다. 모든 면에서의 근대화가 서구화로 귀착되었던 사회분위기 속에서 서구의 '대가'가 생산한 '원전'이 아닌, 필경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이웃 동료들의 작업을 꼼꼼히 읽고 기록하고 평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 쪽으로는 신경질적으로 대안컴플렉스를 내비치면서도, 다른 쪽에서는 대안을 위해 선결되어야 할 비판에 쉽게 짜증을 내거나 심지어 국내학인들의 자구노력을 일방적으로 폄하하는 태도가 여전하다. <표현인문학>이든, <글쓰기로서의 인문학>이든, <비판적 문화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이든, 혹은 내 욕심처럼 <보행으로서의 인문학>이든, 이같은 학문구조와 분위기를 방치한 채로는 활로도, 대안도 과욕에 불과하다. 셋째. 기존 매체가 담론적 실험의 맥동(脈動)을 잡아주거나 소개하는 방식이 극히 피상적이고, 심지어 자주 사안을 왜곡하기도 한다. 진득하게 토의해서 논의를 정착시킬 수 있는 기회도 적을 뿐더러, 대체로 이러한 실험들은 학문의 기득구조와 잠시 마찰하다가 떨어져나가는 일회성의 삽화로 취급된다. 넷째. 자생성 담론 등, 우리 인문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작업은 그 성격상 개성적, 학제적인 면모가 도드라지고 다양한 문체실험을 거듭하게 된다. 가령 내가 인문학에 대해서 글을 쓰기보다는 인문학으로서의 글쓰기를 강조해온 것도 마찬가지다. 국내 인문학자들의 다수가 방대한 수입담론을 축적하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이 머리 속의 '뜻'으로만 구심화(求心化)되어 있을 뿐, '인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글로써 풀어내어 삶의 실제와 맞물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를테면 '인문학에 대해서 실증과학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오래된 집체주의 문화의 틀과 관성, 서구의 19세기를 겨우 벗어나려는 낡은 실증주의적 학문구조, 인식론중심주의의 강박, 그리고 방법론적 보편주의의 자폐성 속에서 다양성의 문화를 현양시켜 본 경험이 없는 우리 사회에서는 학제성의 노력과 문체 실험을 쉽게 폄하하려는 강박과 조급증을 드러낸다. 혹자는 인문학 위기의 외인(外因)으로 자본주의와 상업주의의 생리를 지목하면서, "시장원리로 지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정부와 공공기구를 통해서 보호"할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 호소는 모종의 원칙주의나 낙관주의에 의지한 듯 보인다. 내 판단에는, 앞으로 꽤 긴 세월을 정부와 공공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거슬러서' 인문적 성찰과 성숙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듯하다. 체제와 정책의 배려를 기대하거나, 이에 편승하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문적 지식인들의 정교하고 섬세한 글쓰기와 지적 연대를 통해서 독자대중과의 소통을 활성화하는 등의 본격적인 현실 참여가 한결 시원하고 효율적인듯 보인다. "기술문명이 현대화되면 될수록 인문과학은 더욱더 불가피해진다"는 전제 아래, "생활의 모든 영역을 식민지화하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한 인문과학은 '비판적 문화과학'의 형식을 취해야"한다는 주장이나,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문화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을 제안하는 것도 경청할 만하다. 다만 이같은 진단과 처방은, 남김없이 세계화한 삶의 터 위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진 제1세계적 학문의 보편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결국 서구학문의 틀과 문제의식을 우리 학문현실에 이식(移植)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또 몇몇은 "인간에 대한 질문을 쓸모없는 도락으로 몰아부치는 것"에서 인문학 위기의 실체를 보면서, "새로운 인간이해의 요청은 우리 시대의 고민으로부터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며, "다시 인간에 대한 일정한 해석이 설정되고 그 다음의 시기는 위기의 시기의 유산으로" 남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문주의의 핵심적 이념으로서의 인간을 재규정하는 것,"은 "인문주의의 숨겨진 잠재력을 진작하기 위하여 전통으로 복귀하는 경향"과 함께,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윤리도덕적 반성이나 심미적 체험의 충격없이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현대'에 대한 자성의 폭을 충분히 넓힐 수 없다"는 반성 아래, "윤리도덕적 반성과 심미적 체험을 우리의 전통으로부터 현재화시킬 수 있는 '인문학'이 특별히 요구"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전략은, 작금의 현실에서는 그 전략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겠지만, 워낙 학문의 원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당연한 주장마저도 쉽게 공소해지곤 하는 것은, 전술한 우리 현대 학문의 구조와 태도, 그리고 여기에 뿌리깊이 서식하는 열패감과 냉소주의의 탓이 크다. 나로서는, 비판과 수많은 미봉적 제안이 계속되는 외에, 뾰족한 대안이나 별스런 활로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대안과 활로를 재촉하는 소리가 의당 계속되어야 할 비판을 오도하거나 희석시키는 효과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한 권의 책을 넘어서는 길이, 그 책을 덮고 다른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책을 새롭게, 다르게 읽어내는 것 속에 있다는 비유가 유효할 것이다. '정신의 방랑과 배회'로서의 인문학의 성격을 각자의 사유와 글쓰기 속에 되새기고, 동료학인들의 학문적 실험에 주목해서 토의와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활성화하며, 끝없이 발목을 낚아채는 우리 학문구조와 역학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해가는 노력 밖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 인문학의 장래는 학인 각자가 자신의 인문학을 하면서 그 지평과 세계를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것 속에 있을 뿐이다. 이로써, 각자의 이치(一理)가 어울리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사상계가 나름의 결과 울림을 지닌 아름다운 무늬로 꽃필 수 있도록 점점이 각자의 노력을 보태는 일 뿐인 것이다. (sophy.pe.kr) (이 글은 <연세대학교대학원신문> 2000년 10월에 실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