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94.tnt2.sea> 날 짜 (Date): 2000년 10월 19일 목요일 오전 11시 23분 27초 제 목(Title): 박노자/ 노벨평화상과 한국에 대한 유럽인� [박노자의북유럽탐험] ‘김정일 제외’놓고 열띤 토론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박노자 교수가 전하는 ‘노벨평화상과 한국에 대한 유럽인의 시각’ (사진/지난 10월16일 기자간담회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김대통령) 10월13일 오후 1시. 오후가 돼서야 학교(오슬로대학교 동유럽 및 동방학과)에 도착한 필자에게,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는 직원들과 교수들이 뭔 까닭인지 갑자기 훤하게 웃는다. 그리고 “축하한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필자가 무슨 일인지 몰라서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기쁨과 기대가 섞인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한국 대통령이 우리 상을 탔잖아요! 이제는 여기에서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에 대한 관심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겁니다.” ‘민주투사’로서의 과거를 더 강조 (사진/10월13일 노벨평화상 수상자 발표모습) 그들의 말대로 10월13일 하루종일 노르웨이인과 노르웨이 언론들로부터 문의가 빗발쳤다. “김 대통령과 햇볕정책에 대한 한국 국내의 의식이 어떤가”, “남북 통일의 전망이 어떤가” 등의 주로 남북관계, 통일문제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었다. 남북정상회담 기간만 제외하고서는 여태까지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으로 저조했던 점과 좋은 대조가 되었다. 물론 250여명의 오슬로 동포사회도 일찍이 느껴본 적이 없었던 축제 분위기였다. 노벨위원회의 선언문에서도 분명히 나타난 점이지만, 필자와 이야기한 대부분의 노르웨이 사람들은 대통령으로서의 현재보다도 민주투사로서의 김 대통령의 과거를 강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군에 의한 점령기간을 빼고는 거의 200년 동안 전쟁이나 폭력 혁명이 없었던 이 ‘행복한 나라’의 시민들에게는, 암살 미수와 사형 언도, 감금과 온갖 박해로 점철해 있는 김 대통령의 생애는 하나의 ‘영웅 소설’처럼 읽혀진다. 그들은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라며 다른 시대의 환상적인 이야기와 같다고 하면서 김 대통령에게 진정한 존경심을 표현한다. 신문지상에서 김 대통령을 남아공의 만델라와도 많이 비교하지만, 필자가 만나 본 사람 중에서 폭력 게릴라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만델라보다 오히려 ‘손에 피를 전혀 묻히지 않은’ 김 대통령을 더 존경하는 사람도 있었다. 평화 지향주의, 비폭력주의가 국민 정서의 바탕을 이룬 노르웨이로서는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한다. 늦게나마 김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저항운동 전체에 바치는 상이라는 의미에서, 필자도 일종의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 만족감과 함께 “과거에 군에서 의문사를 당한 젊은 지사들과 지금도 공안당국의 박해를 받고 있는 젊은 사회주의자들의 희생이 국제사회에 의해서 이처럼 인정될 날이 과연 올 것인가”라는 생각이 왠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서양인에게 하나의 ‘설화’처럼 느껴지는 김 대통령의 ‘과거’와 함께, 대통령으로서의 ‘인권 추진’은 수상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유럽적 인권’보다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우려는 수많은 아시아 지도자와 달리, 김 대통령이 ‘맹자’까지도 인권 위주로 해석한다는 것은, 인권을 생명처럼 중요시하는 유럽인들에게 상당히 감격적인 이야기이다. 구체적인 정책 차원에서는, 장기수의 석방·북송이 노르웨이 언론의 관심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 노르웨이 지식인들의 ‘이중 잣대’ (사진/이번 수상으로 인한 한국의 '국가적잔치 분위기'는 많은 유럽인들에게 유럽에 대한 한국의 열등의식 표출로 보인다) 그러나 인권의 현실 차원에서 필자와 이야기해 본 대부분의 노르웨이 지식인들은 ‘김 대통령의 한국’에 대해서 일종의 이중 잣대를 사용하였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노르웨이 국내에서는 인권이라는 것은 거의 종교까지도 대신하는 ‘절대적 가치’다. 인권보호정책이 어디까지 가는가 하면, 군에 징집된 젊은이에게 “코에 달린 귀걸이를 빼라”고 명령한 장교가 나중에 법정에서 엄벌을 받을 정도다. 하지만, 아시아 신흥산업국과 같은 세계체제의 주변부, 준주변부에서 인권이 유럽처럼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대부분의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저 하나의 기정 사실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버마나 티베트, 체첸에서 노골적인 학살·민족 멸종 행위가 행해진다면 노르웨이 지식사회가 매우 분개하지만, ‘어느 선까지’의 일상적인 인권 유린과 권위주의를 “그 나라로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는 식으로 그저 당연시할 뿐이다. 그리고 ‘인권을 어차피 기대하기 어려운 나라’에서는 인권이 상대적으로 개선되기라도 하면, 이를 이미 성공시하는 사람도 많다. 한국의 인권 실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상대방은 보통 미국 국무성 인권 보고서에 나오는 대로 한국이 ‘아시아 매매춘, 매춘부 인신 매매의 중심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동아시아 연구의 관계자라면, 한국 내의 외국인노동자 인권 박탈이나 노조 탄압 등의 문제점도 어느 정도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면 미성숙한 후발자본주의 사회로서 어디든지 있는 일이 아니냐”, “그래도 김 대통령이 집권한 뒤에 상대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느냐”, “그 공로로라도 상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으냐”는 식의 ‘상대론’은, 필자가 한국 인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듣는 심사 논리의 설명이었다. 이번 수상 선언문에서 언급된 ‘민주 추진’의 공로도 마찬가지였다. 권위주의 시대나 지금이나 한국은 실제로 최고 통치자의 가신 집단과, 재벌과 결탁된 부패한 관료 집단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여기에서도 다 안다. 다만 김 대통령에 의해서 과거의 테러적 지배 방식이 거의 종언을 고하고 절차적 민주주의와 ‘어느 선까지’ 언론의 자유가 확립되었다는 ‘상대적 개선’의 사실을 매우 높이 평가했을 뿐이다. 물론 심사위원회로 대표되는 노르웨이 주류사회가 지론으로 삼고 있는 이 ‘상대주의’ 논리는, 유럽 국가들의 정치·언론·외교 인사들에게 필수불가결의 현실적 도구다. ‘저쪽’의 보스들이 졸개들을 대하는 방식에 너무 ‘과민’하면, 유럽의 번성을 받쳐주는 제3세계의 지배자와의 관계를 아예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의 생각으로라도 많은 인간들의 고통을 면해 주는 ‘상대적 개선’도 진정으로 기뻐해야 한다. 노르웨이에서도 많이 지적되는 이야기지만, 남한에서 당국에 의한 ‘고문’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최루탄 냄새가 종전에 비해서 거의 안 느껴지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진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그리고 나아가서 서양 전체의- 이러한 ‘상대주의’ 논리의 바탕을 이루는 심성에는, 한 가지 매우 시원치 않은 구석이 있다. 도덕적으로 남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껴야 하는 유럽인들에게는, 한국과 같이 ‘이국적이며 너무나 먼’ 아시아 국가의 소외층의 고통은 멀고도 먼 ‘남의 것’으로만 느껴진다. ‘쪽방’에 갇혀 주먹밖에 다른 언어를 잘 모르는 매매춘 여성의 신음소리나, 매일 인간적 무시 속에서 최저 생활비를 밑도는 월급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생 타령 소리는, 인생에서 모든 것이 이미 보장된 노르웨이 사람들의 귓가에 잘 들리지 않는다. ‘밑’의 고통을 몸으로는 모르는 사람들 (사진/남북정상회담.김대통령의 생애는 북유럽인들에게 하나의 '영웅소설'로 읽힌다) ‘세계체제’라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그들은, ‘밑’의 고통과 절망을 도식으로 알아도 체감·감성으로 잘 모른다. 그들이 외교하기에 매우 편한 ‘상대주의’를 쉽게 택하는 심성적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 제3세계의 인권과 민주에 대한 그들의 판단도 어느 정도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옛날 러시아 속담대로 “배부른 자는 배고픈 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주 투쟁’과 ‘인권·민주의 신장’과 함께, 이번 수상의 중요한 근거가 된 것은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햇볕정책의 가시적 성과들이었다. 냉전시대에도 대결의 논리를 초월하려고 애쓴, ‘냉전 광기’라는 병에 걸려 본 적이 없는 노르웨이로서는 김 대통령의 화해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번의 수상은, 단순한 ‘지지’ 차원을 벗어나 진행중인 한반도 평화 구축 과정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의미도 갖는다. 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여태까지 분쟁 ‘양쪽’의 지도자(이를테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지도자, 흑인 지도자인 만델라와 남아공 대통령 데클레르크 등)에게 상을 주곤 하였던 관례를 이번에 과감히 벗어나 김 위원장을 처음부터 사실상 고려에서 제외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는 과연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이 점들에 대해서 우리 학과의 아시아 전공 교수·학생들간에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쪽에서는, 폭력적이며 완전히 비민주적인 통치자에게 수상한다는 것은 노르웨이 일반 여론이 어차피 용납하지 못했으리라는 ‘원천불가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또 한쪽에서는 테러리스트로서 인생을 출발한 이스라엘 전직 총리인 베긴이나 비민주적 통치 방식과 부정부패로 누명을 쓴 팔레스타인 지도자인 아라파트에게 이미 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들어, “평화 정착을 위해서라면 과거보다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여태까지의 심사 원칙이 아니었느냐”고 반문하였다. 이 ‘미래 위주파’가 나아가서 김 위원장에게의 수상이 북한 고립의 극복, 북한 엘리트의 바깥 세계에 대한 피해 의식의 허물기 등에 많이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 위원장에게의 수상이 만약 이루어졌다면 노르웨이 언론의 반응을 상상해보라는 ‘원천불가론자’들의 비꼬는 투의 질문에는 ‘미래 위주파’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에서 북한에 대한 적극적인 적대적 감정은 물론 찾아볼 수 없지만, 폭력과 기만으로 다스려지는 후진적 ‘봉건 왕국’이라는 이미지는 정치적인 좌우를 불문하고 오래 전부터 사회 일반에서 정착되었다. 이 이미지를 바꾸려면 북한의 실태도 가시적으로 달라져야 하지만, 외세의 폭력과 친일·친미적 지배층의 반민족·반민중적 행각으로 얼룩진 한반도의 근·현대사도 이곳 사람들에게 좀더 객관적으로 알려져야 한다. 그래야 북한이라는 독특한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선비의 진정한 정신을 (사진/냉전의 광란에서 벗어나 차차 정상적 사회로 가는 한국의 성과들이 이토록 높이 평가된 것은 실로 기쁜 일이지만….서울 교보문고 노벨상 수상자 벽판에 첫선을 보인 김대중대통령) 여기에 부언해야 할 점은, 노벨평화상 자체에 대한 노르웨이 국내의 의견들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노르웨이와 같은 약소국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평화상을 준다는 사실을 노르웨이의 ‘도덕적 우위’의 증거로 보고 일종의 민족적 긍지를 느끼는 사람도 많지만, 아직까지 이 평화상이 평화 구축에 실제로 도움된 적이 없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특히 상을 두번이나 주었음에도 이스라엘-아랍간의 진정한 평화가 아직은 멀고도 멀다는 것을 대부분의 노르웨이 일반인들도 잘 인식한다. 또다른 차원에서, 자비스러운 테레사 수녀와 냉혈의 테러리스트였던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나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에게 똑같은 상을 준다는 것이 사랑과 살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그리고 이 상을 일종의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세계 정치 엘리트 일부의 지나친 집착도, 노르웨이 지식계에서 매우 안 좋게 비쳐진다. 한마디로 이 평화상의 실용성과 도덕적인 기반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수의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걱정거리이다. 결론적으로, 냉전의 광란에서 벗어나 차차 정상적인 사회로 가는 한국의 성과들이 이토록 높이 평가된 것은 실로 기쁜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이땅의 한 반쪽에서, 이번의 수상을 ‘민족의 경사’로 꼭 봐야 하는가? 피붙이 얼굴도 못 보고 죽어가는 수십만명의 이산 가족들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경사’가 과연 가족들과의 만남을 대신할 수 있을까. 아직도 본의 아니게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양쪽의 젊은이들에게, 이 상은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었는가. 그리고 필자도 결코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이번 수상으로 인한 한국에서의 ‘국가적 잔치 분위기’는 많은 유럽인들에게 유럽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등 의식 표출로만 보일 뿐이다. 오히려 이에 자제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면, 남의 찬탄과 비방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길로 계속 가기만 하는 옛날 선비의 진정한 정신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