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21.tnt4.sea> 
날 짜 (Date): 2000년 10월 10일 화요일 오전 09시 26분 31초
제 목(Title): 이재광/ 조선말 국어학자, 서파 유희 


조선말 최고의 국어학자 西坡 柳 僖 

“諺文의 至妙함을 너희가 아느냐, 
배우기 쉽다 하여 어찌 이를 천하다 하느냐” 


글·이재광 월간중앙 학술전문기자·사회학 박사 
-------------------------------------------------------------------------------
-
 

유희 선생은 최초의 한글사전이라 할 수 있는 “物名考”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국어학 연구서로 인정받는 “諺文誌” 등을 집필한 조선말 최고의 
국어학자다. 그는 자신의 글을 멸시하는 풍조를 개탄하며 한글의 아름다움을 
뽐내줄 大문장가가 나타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바람을 무참히 
배반하고 만다. 우리 역사는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나도록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것을 천시하고 외래의 것을 숭배하는 中華사상이 
그만큼 지배계층의 골수까지 침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마침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른 
것인지도 모른다. 

영어에서 ‘look up’은 대략 다음 네가지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올려다본다거나 ▷누구를 방문한다거나 ▷무엇을 조사한다거나 ▷사전을 
찾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모든 단어에는 역사가 있는 법이다. 어느 시점에 처음 
탄생해 어느 시점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거나 의미가 바뀌기도 한다. look 
up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여서 18세기 이전까지 이 말은 지금처럼 다양하게 쓰이지 
않았다. 그저 ‘올려다본다’는 의미가 고작이었다. ‘look up’이라는 용법에는 
‘조사한다’거나 ‘사전을 찾는다’는 뜻이 없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 영국에는 17세기가 
되기 전까지 이렇다 할 사전, 즉 어휘집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전을 
찾는다거나 무엇을 조사한다는 행위가 필요 없었고, 따라서 그런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도 필요하지 않았다. 
17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도 적절한 단어를 찾을 만한 
단어집이 없었다. 혼자 단어를 찾아 헤맸고 적당한 용어를 찾으면 반드시 기억해 
뒀다가 작품에 활용했다. 그의 천재성을 말할 때 꼭 인용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17세기 들어서자 영국에서는 갑자기 어휘집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다. 경제가 
발전하고 문학이 발전하자 단어를 찾는 사람이 늘었고 또 돈벌이가 될 듯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전(辭典) 편찬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오죽하면 ‘사전은 한 
나라의 문화 척도’라는 말이 나왔을까. 이같은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 동안 
영국이 만들어낸 사전은 기껏 7종에 불과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천재 

 로버트 카우드리라는 한 교사가 1604년 만들어낸 어휘집이 ‘사전’으로 기록된 
최초의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사전이라는 명예를 주기에는 부족했다. 이 책은 
120쪽 분량의 작은 8절판 책자로, 담겨 있는 단어는 기껏해야 2,500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것들도 유사하다. 어휘의 수나 종류, 단어의 의미 해석 등은 여전히 
초보적인 수준을 넘지 못했다. 17세기의 마지막 사전이 수록한 어휘는 모두 
3만8,000여개. 현재의 포켓사전 수준이다. 

하지만 어휘수보다 편찬 방식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당시 사전은 일반인이 쓸 수 
있는 평범한 어휘보다 어렵고 까다로운 단어들의 해설서였던 데다 체계도 잡히지 
않았다. 영어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 언어인지도 모른 채 엘리트들에게 유용한 
단어들만 정리했던 셈이다. 영국에서 그래도 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으로, 이 사전이 실제로 시판된 것은 
1750년대였다. 4만3,500개의 표제어에 11만8,000 개에 달하는 인용구를 삽입해 
만든 이 사전은 분명 단순한 어휘 목록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새뮤얼 존슨은 유수한 영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천재 중 한명으로 여겨진다. 
그것도 아주 집요한 천재였다. 사전편찬이 돈벌이가 된다고 확실하게 믿었던 한 
출판사의 지원으로 1746년 시작된 그의 작업은 무려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햇볕을 봤다. 

어휘 수집 작업만 4년이 지난 1750년 끝났고 이후 5년 동안은 적당한 인용구를 
찾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단어 하나하나를 아주 집요하게 물고늘어졌던 
것으로, 이전의 편찬자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면모였다. 
‘take’라는 동사를 보자. 그는 이 단어의 용법을 찾기 위해 150년 동안 쓰여진 
책들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이 동사가 134종류로 쓰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잡다, 붙들다, 인기를 끌다, 주장하다, 실수를 포착하다…. 아마도 take라는 
동사의 새로운 용법을 하나라도 더 찾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우연이 아닌 
다음에는, 그는 존슨이 썼던 시간과 노력의 몇배를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do, go, set 등과 같은 동사의 인용문들을 찾아냈다. ‘노력하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전혀 부끄럽지 않다. 

새뮤얼 존슨 능가하는 조선의 천재 柳僖 

새뮤얼 존슨이 영어사전을 내고 20여년이 지난 어느날 극동의 한 작은 나라 
조선에서 그에 못지않은 언어의 천재가 태어났다. 조선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많은 
어휘를 알고 있던 존슨에게조차 생소한 나라였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유 
희(柳僖), 호는 서파(西坡)로 1773년 경기도 용인생이었다. 
이 천재는 분명 대영제국의 천재를 능가했다. 태어난 지 1년만에 말귀를 
알아듣더니 몇개월이 지나자 이번에는 한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난 지 3년이 
지나자 급기야 그 어려운 한자를 쓰기 시작해 어른들을 기쁘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달이 지나자 혼자 한시를 읽고 쓸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세살때 
이미 한시를 지어 조선 최고의 천재 반열에 올라 있는 이율곡이나 김시습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삶과 학문적 자세는 율곡이나 김시습과 분명 달랐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우리에게는 한자보다 훨씬 쉽게 쓸 수 있고 
한자보다 더 훌륭한 언어가 있는데 왜 그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는 사람이 없을까. 
한자와 우리 음은 분명히 다른데 왜 굳이 한자음을 써서 일상의 언어생활에 혼란을 
주는 것일까. 그는 우리말이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냈다. 우리말의 사용법을 
정리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단어의 사용이 중요하다고 봤다. 언어의 가장 기초적인 기능이 특정 
사물에 대한 지칭인데 그것이 언어 사용자 사이에 서로 다르게 쓰인다면 언어의 
기능이 상실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중국어와 우리말의 혼재를 우려했다. 
본래 우리말이었던 것과 본래 중국어였던 단어들이 뒤섞이면서 지역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형태로 말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쉬운 우리말을 두고 
어려운 한자로 사물을 표기해 시간이 지나면 표기 당시의 음가(音價)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만큼은 꼭 통일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사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정리하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전 편찬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단어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분류한 후 그 기원을 밝히려 했다. 현존하는 
“물명고”(物名考)는 그 결과물로, 현재 조선시대 국어사를 규명하는 가장 소중한 
자료 중 하나다. “물명고”란 사물의 이름, 즉 ‘물명’(物名)을 올바로 쓰게 
하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어휘 수는 모두 7,000여개. 한자로 된 표제어에 
한자 또는 한글로 해석을 붙였다. 해석의 내용도 다양하다. 외국어인지, 
중국어에서 파생된 것인지를 알려 주는 기본적인 분류에서 성질, 빛깔, 산지, 용도 
등 아주 상세한 내용까지 있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거울 ‘경’(鏡)자의 표제어 아래에는 
안경·현미경·다물경(多物鏡)·취화경(取火鏡)·취수경(取水鏡) 등 9가지의 하위 
단어가 제시돼 있고 단어별로 대략의 설명이 첨부돼 있다. 
철(鐵)은 모두 8가지로 분류했다. 연사(鍊砂), 생철(生鐵)·강철(鋼鐵) 등이 
그것으로 각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역시 분명하게 제시돼 있다. 샘을 의미하는 
‘천’(泉)의 경우에는 무려 15가지 분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돌에서 나오는 
석천(石泉), 옥이 있는 산에서 나오는 옥천(玉泉), 샘구멍을 나타내는 천안(泉眼) 
등이 그것이다. 또 당시 은(銀)은 아로파(阿路巴), 하천은 몰리(沒里)라는 
범어(梵語)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이 정도라면 아마도 서파는 새뮤얼 존슨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가 
수집한 어휘도 7,000여개 밖에 되지 않는다. 존슨의 “영어사전”에 수록된 어휘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더 생각해야 할 것이 한가지 있다. 서파가 
어휘를 수집한 목록은 비단 “물명고” 한권에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가 쓴 
책 중 어휘록으로 추정되는 책은 그 밖에도 많다. “시물명고”(詩物名考) 
“방편자구록”(方便字句錄) “만물류”(萬物類) 등 수편에 이른다. 문제는 
현존하는 책이 “물명고”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다른 저서들이 발견되고 
또 어휘집이 확실하다면 그 어휘 수는 존슨의 “영어사전”을 넘어설지 모를 
일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룩한 西坡의 업적 

하지만 존슨과 서파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점을 더 밝혀야 한다. 우선 
존슨은 그 이전의 선배 학자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으나 서파가 얻은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존슨의 사전편찬 작업에는 그 이전 150년 동안 축적된 선배들의 
노력이 중요한 근거가 됐다. 로버트 카우드리·핸리 콕커렘 등 최소한 7명 이상의 
편찬자들이 어휘집을 발행했다. 더욱이 셰익스피어와 같은 문인들은 영어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냈고 그의 시대 이후 영어로 감동적인 문학작품을 쓴 
문인들은 수백명에 달했다. 존슨은 영어의 쓰임새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들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서파의 환경은 열악했다. 그가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던 사람은 18세기말 학자 
이만영이 거의 유일했다. 지금도 학자들은 유희의 “물명고”가 1780년에 이만영이 
쓴 어휘집 “재물보”(才物譜)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론한다. 실제로 
“재물보”에는 자연현상, 신체 각 부위, 동·식물 등의 명칭이 수록돼 있고 편찬 
방식도 “물명고”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도움을 받을 
만한 선배 학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에게는 참고할 만한 한글책이 
없었다. 당시 한글은 사대부들에게 천대받던 글이었기 때문이다. 한글로 글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명고”에서 한글로 쓰여진 단어는 모두 
1,660개. 그는 거의 일상용어에서 한글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경제적인 측면이다. 존슨이 사전을 
편찬하겠다고 나선 이면에는 엄청난 ‘돈’이 걸려 있었다. 새 사전이 큰 돈벌이가 
될 것을 기대했던 런던의 서점상 그룹은 당시 빈곤한 문필가였던 존슨에게 
1,500기니(영국의 옛 금화로 1기니는 21실링에 해당했다)라는 거금을 내걸고 그를 
유혹했다. 무일푼이었던 존슨은 이 돈의 절반을 선금으로 받고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돈이 있었으니 쉽게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고 필요한 경우 사람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존슨의 “영어사전”은 자본주의 또는 자유시장의 위대한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서파가 돈을 목적으로 “물명고”를 쓰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당시 
그런 어휘집을 만들면 돈을 주겠다는 사람도 있을 리 없었고, 누군가가 수고했다며 
단돈 몇푼이라도 쥐어줄 리 만무했다. 더욱이 그는 관직에 있지도 않았다. 그는 
빈곤한 선비였고, 그것도 산 속에서 농사를 지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가난한 
선비였다. 그는 필경 생업과 어휘 채집을 병행했을 것이다. 생업에 쫓기다 보면 
학문은 더뎌지는 법이다. 게다가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기 어려웠다. 혼자 
생각해야 했고, 혼자 일해야 했으며, 혼자 어휘를 분류해야 했다. 그가 이 작업을 
시작한 것이 16세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의 천재성은 존슨을 앞선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서파는 왜 그런 짓을 한 것일까. 관직에 있지도 않았으며 돈벌이가 
되지도 않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한편으로 보면 그가 목숨을 걸고 
도전할 만한 동인(動因)은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추론해 보면 한가지 
답을 얻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세상이 잘못된 것을 알았고 그 일을 혼자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느껴진다. 사물을 나타내는 명칭이 쓰는 사람마다 
달랐고, 명칭과 그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현실 앞에서 그는 현실 교정의 
의무감을 느꼈음직 하다. 이 대목은 우리에게 그가 진정한 학자임을 알게 해 준다. 

인정은커녕 비웃음만 샀던 西坡의 노력 

그가 써서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언문지”(諺文誌)를 보면 그가 직면했던 
현실적인 문제와 사명감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언어현실을 고쳐 나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물명(物名)의 정리와 한글의 체계적인 분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물명고”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언문지”를 쓴 것은 20대 후반의 혈기 넘치는 나이로 알려져 있다. 
순식간에 써내려간 그는 몇개월후 책 한권을 완간할 수 있었다. 선배 학자들이 쓴 
책들을 소개하고 한글을 초·중·종성으로 나눠 사례를 들어가며 체계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곧 큰 실의에 빠지게 된다. 아무도 그의 업적을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정받기는커녕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무엇하러 그런 천박한 언어를 
연구하느냐”는 말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으니 인정은 
고사하고 이해하는 사람마저 없었다. 실망도 하고 화가 난 젊은이는 이 책을 상자 
속에 처박아 놓고 두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조선말 한글의 발전을 알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저서 “언문지”(諺文誌)는 두번 다시 세인에게 알려지지 못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서파는 그때 그 일을 후회했다. 소수의 선비에게 
글을 보여주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나 책을 처박아뒀던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너무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사명감을 
저버렸다는 것을 자책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해도 
길이 후손에 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는 5∼6년 전에 그의 시대로부터 300년 전인 조선 중기의 학자 최세진의 
“사성통해”(四聲通解)를 접했다. 모화(慕華)사상에 지배당하고 있기는 최세진의 
시대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 

다시 용기 심어준 최세진의 “四聲通解”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세진의 책은 중국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우리말을 연구하는 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줬다. 그는 
결국 다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한번 쓴 책을 다시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잃어버린 책은 묻어 두고 새로운 
주제로 새로운 책을 쓰는 것이 빠를 수 있다. 그래도 그는 20년 전에 썼다가 
잃어버린 그 책을 다시 쓰기로 했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이나 훌륭한 한글 
해설서를 만든 선배 학자 최세진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 책은 꼭 써서 우리말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렇게 해서 다시 쓴 책 “언문지”가 세상에 나온 
것은 1824년이었다. 책 서문에는 이 책이 어떻게 다시 쓰여졌는가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처음 책을 쓰고) 한번 보면 알 수 있도록 종횡으로 줄을 짜 후진들에게 보여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적었다. 화가 난 나는 마침내 이 책을 
상자 속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15∼16년이 지나니 결국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게 됐다.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한탄하며 또 다시 5∼6년의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그러다 최세진의 ‘사성통해’를 읽고 새로 책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옛날 기록을 엮어 내고 간간이 새로운 견해도 삽입해 마침내 이 책을 다시 세상에 
내놓게 됐다. 너무 고생이 심해 더디게 만들어져 겨우 완성하게 됐으니 때는 
갑신(甲申,1824년) 5월 하순이라, 비오는 날 서파가 이 글을 적는다.” 
180년이 지난 오늘날 “언문지”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유별나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국어학 연구서로 인정받고 있다. ‘ ’과 ‘ㅇ’을 구분해야 
한다거나, 불필요한 사성점(四聲點)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혁신적이었다. 또 
‘사이 ㅅ’이나 ‘ㅎ종성’‘중성ㅣ’에 대한 이론은 지금 다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의 이면을 살필 필요가 있다. 무수히 많은 연구서 
중 가장 탁월한 것이냐, 아니면 극소수의 연구서 중 가장 탁월한 것이냐의 차이다. 
“언문지”에 대한 평가는 후자쪽이다. 워낙 연구가 적어 미진한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 조선조 500년 동안 한글에 대한 연구는 거의 백지에 가깝다. 특히 16세기초 
쓰여진 최세진의 “훈몽자회”와 “사성통해” 이후 거의 200년 동안 조선 
학계에서는 국어학에 대한 이렇다 할 연구서를 내놓지 못했다. ‘국어학의 
암흑기’였던 셈이다. 국어학이 그나마 다시 관심을 끌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들어서였다. 주체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던 실학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 역시 소수였고 분명한 한계를 지닌 것들이었다. 박성원이나 
안석정·신경준·홍계희·이사질·황윤석 등의 학자들이 내놓은 연구서는 한자음을 
제대로 표현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순수하게 국어발전을 위한다는 
취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언문지”는, 불완전하기는 해도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언문으로 뜻을 전하면 잘못될 일이 없다” 

유희는 “언문지”에서 당시 한글에 대한 지배층의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글은 결코 천한 글이 아니며 나아가 중국어보다 훨씬 훌륭한 글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입에 담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그는 스승 정동유의 말을 빌려 이렇게 쓰고 있다. 
‘언문의 지묘(至妙)함을 아느냐. 한자음은 자꾸 바뀌어 옛 글자가 있어도 오늘날 
그 음을 살리기 어렵다. 하지만 이를 언문으로 기록한다면 아무리 오래 간들 어찌 
본음(本音)이 바뀌겠느냐. 더욱이 한문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오묘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실은 그렇게 간결하게 쓰면 또 잘못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언문으로 
뜻을 전하면 만에 하나라도 잘못될 일은 없다. 그러니 언문이 부녀자나 할 
학문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말라.’ 

이 말은 비록 스승의 입을 빌려 한 것이지만 당시 사대부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언문을 말 그대로 상스러운 말로 여겼다. 
세종대왕이 지식이 없고 배울 일이 없던 상것이나 부녀자들이 쓰도록 특별히 
배려한 말 정도로 여겼다. 지배층의 말과 생각은 언제나 중국을 향했다. 정신적 
모국(母國)이었던 중국의 역사를 알아야 했고 유교의 경전을 알아야 했다. 문장과 
관념론을 중시했던 주자학의 뜻에 따라 조선의 최고 사대부들은 이태백과 두보에 
비유됐고, 이기론(理氣論)에 대한 논쟁이 주류였다. 이같은 상황이니 서파의 글과 
주장이 배격됐음은 당연했다. 

엇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동·서양 언어학 분야의 두 천재는 이토록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갔다. 연구의 토대가 되는 선배 학자들의 업적, 연구환경, 경제적 지원 
등 유희는 존슨과 비교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두 천재는 
각자의 길을 걸었다. 평생을 모국어 연구에 바쳤고 남들이 쫓아가기 어려운 업적을 
이뤘다. 
그러나 그 결과는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다. 존슨은 부유해졌고 이름을 드날렸으며 
지금까지도 사전 편찬과 관련한 상세한 행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서파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확인된 그의 저작은 무려 70여편에 이르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고작 수편에 불과하다. 그의 행적조차 묘연하다. 그의 부인이 썼다는 간단한 
일대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상세하게 기록된 존슨의 행적은 지금도 그의 노고가 얼마나 고됐으며 그 대가가 
얼마나 달콤한 것이었는지 알려준다. 앞서 말한 대로 250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가 왜 사전을 편찬하게 됐는지, 그가 얼마의 돈을 받았는지, 또 어휘 
수집에는 몇년의 세월이 걸렸고 인용문을 구하는 데 몇년의 시간이 걸렸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에 대한 기록은 사전 편찬 작업에 몇몇 교수들이 무임승차하려 
했으며 존슨이 그들을 심하게 비판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해 준다. 그리고 후대 
학자들은 그 작업이 전적으로 그의 작품임을 인정해 주고 같은 학자로서 그의 
고통을 이해해 준다. 정확히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연구는 이후 영국의 사전 편찬 작업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후대 
학자들은 그의 작업을 칭송하는 한편 그가 보여준 한계 또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결국 존슨의 작업은 ‘미완성’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은 또 다른 
사전작업에 학자들이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고 영국의 학자들은 실제로 그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존슨이 “영어사전”을 펴낸 지 100년이 지난 1850년대에 
시작해 무려 70년 이상의 세월을 써가며 세계 최대의 사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유명한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존슨의 “영어사전”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규모 프로젝트였으며 완벽을 추구한 영국인의 개가였다. 존슨과 
영국인의 업적을 기린다는 의미에서도 사전 편찬 작업은 한번쯤 음미해 볼 만하다. 

편찬에 70년 세월 걸린 옥스퍼드 영어사전 

1857년 11월5일 런던 도서관에서는 역사적인 연설이 시작됐다. 웨스트민스터 주임 
사제와 더블린 대주교를 역임한 리처드 체네빅스 트렌치 신부는 영국 지배 계층을 
당황하게 만드는 내용을 서슴없이 발표했다. ‘우리 영어사전의 결함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은 실상 오늘의 우리 눈으로 볼 때는 평범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만들어졌던 영어사전들이 ▷지나치게 엘리트 위주로 편찬됐다는 점과 
▷언어의 역사성을 상실했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정도다. 이날 트렌치는 “사전 
편찬자는 역사가이지 비평가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며 “사전 편찬자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단어를 선정해서도 안되고, 단어의 실질적인 용법과 역사를 
함께 수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그가 했던 비판의 대상 중에는 새뮤얼 
존슨과 그가 만든 “영어사전”도 포함돼 있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그저 평범한 내용으로 보이는 이 연설이 당시 영국의 지도층에 
큰 충격을 준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세계의 공장’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세계를 지배하던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영어는 영국의 세계지배의 
첨병이었다. 세계 공용어가 될 날도 머지 않았다고 봤기에 영국의 지배계층들은 
영어의 토대 다지기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영어학의 
대가인 신부 한 사람이 그동안 그들이 기울인 노력이 잘못됐다는 것 아닌가. 영국 
엘리트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동시에 건드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듣고 보면 트렌치 신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를 지배하려던 
영국 엘리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입장이었다. 그들은 반문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트렌치 신부가 내놓은 대안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좋은 어휘, 나쁜 어휘를 가리지 말고, 또 세련된 귀족들이 쓰는 
단어든 천박한 하인 계층이 쓰는 용어든 가리지 말아야 하고, 단어 하나 하나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로 
불가능한 일로만 보였다. 

그들은 또 질문했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그 원대한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인가. 
트렌치 신부는 이 질문에도 답을 내놓았다. 영국 각지에서 자원봉사자를 구해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시킨다는 안이었다. 그렇다면 돈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영국이 자랑하는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는 사전 편찬작업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그것이 가능할까. 엘리트들은 여전히 의문을 제기했지만 결국 ‘할 수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왜?자신들은 영국인이었고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국언어학회는 이 프로젝트를 결정하는 데 몇달을 보내야 했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다’와 ‘해야 하지만 할 수 없다’는 의견이 극단적으로 대치했기 때문이다. 
특히 존슨의 사전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단순한 어휘의 수뿐만 아니라 어휘가 갖는 
역사를 밝혀야 했으며 바로 이 부분에서 많은 학자들은 ‘불가능’을 주장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영국언어학회 역시 
세계를 지배하는 영국의 자부심이 드높았기 때문이다. 최종 결정이 이뤄진 것은 
트렌치 신부가 연설한 다음해초. 초대 편집자였던 허버트 콜리지는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한편 이들이 보낼 카드를 분류하기 위해 방대한 카드철을 
만들어 놓았다. 

그가 첫권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 시간은 2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A’에 
해당하는 목록을 만들기도 전에 세상을 떴다. 실제 작업은 그가 예상했던 기간의 
10배가 넘게 걸렸다. 웬만한 국민이라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1879년 한햇 
동안 자원봉사자들이 보내온 자료는 무려 2t이 넘는 것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주변의 도움을 얻었으니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전(全)영국 국민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매달려 작업한 것이 무려 70년. ‘새 
영어사전”이라는 이름의 옥스퍼드 사전이 완간된 것은 1928년의 일이었다. 
영국인들은 이 사전에 국민적 사랑을 표했고 이 작업에 촉매 역할을 한 새뮤얼 
존슨을 칭송했다. 

“배우기 쉽다고 어찌 천하다고 할 수 있나” 

서파의 업적에 대한 평가와 후손들의 작업은 여기에 비하면 비참할 지경이다. 
당대에 그를 알아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 간 
천재들 중 사후 조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그가 죽을 
때까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도 충격을 주지는 못한다. 가난하게 살다 
가난하게 죽은 천재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정도가 
지나쳤다. 사후 100년 동안 그를 알아준 사람이 없었고 그의 저작은 뿔뿔이 흩어져 
겨우 이름만 남아 있는 탓이다. 

결론적으로 서파의 연구는 대(代)를 잇지 못했다. 아마도 조선시대 언문연구는 
그가 마지막으로 기록될 것이다. “언문지” 이후 그에 버금가는 연구서와 저자의 
이름은 조선시대가 끝날 때까지 등장하지 못한다. 그의 저작을 본 사람조차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것도 학자가 아닌 그 주변인들로 국한된다. 그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1930년대의 일이었다. 
1937년 이만규가 ‘한글’지에 ‘유희선생약전’(略傳)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한 데 
이어 다음해 국어학자 이승희가 조선어학회 이름으로 처음 “언문지”를 
발간함으로써 일반 학자들에게도 그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위당 
정인보와 육당 최남선이 서파의 책을 확보하고 필사(筆寫)했지만 그것은 극소수 
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다. 

전적으로 이승희의 덕으로 세상 사람들은 비운의 국어학자 유희가 “언문지”에 쓴 
마지막 글을 접할 수 있었다. 일제에 신음하던 당시 학자들은 유희의 한탄에서 
자신들이 처한 혹독한 시련의 원천을 발견했을 것이다. 모화(慕華)사상에 빠져 
남의 것을 자기 것인양 오해하고 자기 것을 천시하는 주체성의 결여. 서파의 글은 
마치 100년후 망국의 일을 예견이라도 한듯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고 있다. 
‘내가 비록 이 글을 쓰지만 보고서도 아는 사람이 적을 것이 두렵고 한탄스럽다. 
누가 말하기를 언문은 배우기 쉬운 것이어서 천하다고 한다. 슬프다. 내가 이 글을 
쓰며 무엇을 바라야 하는 것인가. 후세에 양자운(揚子雲, 한나라 때의 대문장가)이 
나타나기만 기다릴 뿐이다.’ 

그는 자기 말을 멸시하는 풍조가 사라지기를 기원했고 한글의 아름다움을 뽐내 줄 
대문장가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역사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가 타계한 1837년은 충청도에서 괘서사건이 발생했던 때다. 
그로 인해 그가 태어난 다음해 무수한 가톨릭 신자들이 죽어간 
기해교난(己亥敎難)이 발생했다. 이후 세상은 더욱 요동쳤다. 중앙에서는 
세도정치가, 지방에서는 민란이 기승을 부리더니 양이(洋夷)와 양이에 대한 모방에 
성공한 왜(倭)가 조선을 먹겠다며 으르렁댔다. 

그러기를 수십년. 결국 나라는 망국의 길을 걸어야 했다. 존슨을 배출한 영국의 
후원을 등에 업은 일본에 의해서였다. 조선이 일제에 병합된 1910년 
영국언어학회는 이미 옥스퍼드 사전 6권을 출간했다. 존슨의 업적이 더욱 빛을 
발했던 때다. 국내 첫 국어사전으로 평가되는 “큰사전”이 처음 완간된 것은 
1957년으로, 그가 죽은 지 꼭 120년이 지난 후였다. 하지만 이 사전은 서파와 별 
상관이 없다.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소개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 뿐 본격적인 
연구가 없다. 그가 쓴 책은 아직 누군가의 다락방에서 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서파와 새뮤얼 존슨의 사후(死後)는 이런 식으로도 대비된다. 

(※ 새뮤얼 존슨과 “영어사전” 편찬 과정에 대해서는 사이먼 윈체스트가 쓰고 
공경희가 옮긴 세종서적의 “교수와 광인”(2000)을 참고했음.) 

유희의 삶 / 미스터리의 연속 


관직 거부, 예지능력 그리고 그의 유작에 얽힌 미스터리까지

유희의 가문은 범상치 않다. 문간공(文簡公), 문성공(文成公) 등 고위 관직을 
엮임한 조상들이 즐비하다. 그의 증조부도 부친도 모두 현감을 지냈으니 
내로라하는 권세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의 모친쪽에 더욱 눈길을 줘야 
할지 모른다. 생모인 사주당(師朱堂) 이씨는 당시 여중군자(女中君子)로 통할 만큼 
덕이 컸던 데다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로,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씨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한권을 빼고는 모두 태워 없애라는 유언을 남겨 현재 
전하는 것은 태교를 위한 책 “태교신기”(胎敎新記) 한권뿐이다. 이씨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이던 아들을 직접 가르치며 기이한 주문을 했다. “너는 성품이 
근졸(謹拙)치 못하니 과거를 보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그리고 늘 “명산에 
칩거하여 하늘의 진리를 깨우치라”고 가르쳤다. 과거 급제를 통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최대의 가치였던 조선시대 사대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서파는 어머니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다. 16세때 소과(小科)에 합격하기는 
했어도 결국 관직을 포기하고 농사를 짓다 30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아예 산속으로 
들어가 속세를 멀리했다. 충청도 단양이 그가 머물렀던 ‘명산’이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온 것은 10년이 지난 뒤였다. 어머니의 노환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여읜 누이의 질책으로 52세의 나이에 과거를 봐 ‘진사’의 이름을 
땄지만 여전히 관직에는 뜻이 없었다. 

기록은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던 서파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사례는 모두 세가지. 우선 단양의 
산으로 들어간 때였다. 그가 누이의 온갖 만류를 뿌리치고 산으로 들어갔던 
1809년으로부터 6년째 되던 1815년은 엄청난 흉년이 든 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산 속에 있어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홍경래의 난을 예견한 그가 누이에게 서울의 집을 팔라고 했다는 것이 그의 예지 
능력을 입증해 주는 두번째 사례다. 1811년 산중에 있던 유희의 말을 듣고 집을 판 
누이는 간신히 홍경래의 난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예는 그가 자식의 죽음을 예측했다는 기록이다. 아이의 생년월일을 집어본 
그는 아이가 어린 시절을 넘기지 못한다며 슬퍼했고 그의 말대로 아이는 일찍 
부모의 품을 떠났다. 
그러나 유희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그의 유작(遺作)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는 
당대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학자였다. 별 관직도 없었으니 그의 책이 유실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100여권으로 추정되는 그의 유작은 해방 
직후까지 대부분 전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당 정인보가 유희의 후손으로부터 대부분의 책을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위당은 
이때 유희의 저서목록을 작성한 일도 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확인된 것만 얼추 
70여종. 하지만 이후 현재까지 일반에 공개된 것은 단 두종에 불과하다. 
“언문지”와 “물명고”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위당이 보관했던 유희의 책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항간에는 전란중에 소실됐다고도 하고 위당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오리무중. 최근 서울대 이병근 교수는 공개된 두권의 저서 외에 
여러 권의 저술을 새로 발굴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의 후손 유근영씨와 함께 예천 
대창고 교사를 역임한 정양수씨를 통해서다. 정씨가 보유한 책 중 2권은 위당의 
목록에도 없는 것이어서 학계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