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tide91.microsoft> 날 짜 (Date): 2000년 9월 22일 금요일 오전 03시 57분 20초 제 목(Title): 박노자/ 왜 아니오라고 못하는가? [박노자의북유럽탐험] 왜 “아니오”라고 못하는가 한국에서 승려생활했던 스칸디나비아 불교학자 헨릭씨의 한국불교와 한국론 <한겨레21>은 격주에 한번 러시아 출신 박노자(블라디미르 티호노프) 오슬로국립대 교수의 ‘북유럽 탐험’을 싣는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말과 글에 능통하고 한국역사에도 박식한 한국학 박사.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모스크바국립대에서 한국고대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경희대에서 강사를 지낸 바 있다. 지난 4월 초부터 노르웨이로 건너가 전혀 새로운 문화와 생활을 접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그가 처음으로 체험하는 북유럽 문화를 통해 한국을 조명할 것이다. 편집자 스칸디나비아 문화를 <한겨레21>의 지상에 짤막하게 소개해보라는 편집부의 주문을 받은 필자는, 오랫동안 깊은 고민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한국 잡지에서 스칸디나비아를 소개한다는 것은, 본의든 아니든 한국과 스칸디나비아를 비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양자를 비교한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제국주의 침략을 받아 지금도 외국 점령군을 ‘해방군’으로 부르면서 세계적 착취 체제를 충실히 받쳐주는 동아시아의 한 지역과, 제국주의 세력에 편승하여 세계 체제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를 누리고 있는 북유럽의 한 지역을 단순히 비교한다는 것은, 결국 동양의 ‘후진적 현실’과 서양의 ‘선진성’을 대조시키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서구 중심주의)으로 전락될 위험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이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는 필자는, 오랜 고민 끝에 ‘종교’라는 분야에서부터 말머리를 꺼내기로 했다. 왜냐하면, 세상 밖의 또 하나의 세계와 인간을 연결시키는 ‘종교’라는 분야에서는 적어도 원론적으로 빈부귀천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론상 짓밟히고 억눌린 자는 배부른 자보다 더 숭고한 종교 생활을 할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한국인의 종교 심성을 염두에 두면서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종교관을 한번 짚어보기로 마음을 일단 먹었다. 총을 든다는 건 무서운 ‘자기배신’ 그러다 웬 기연(奇緣)일까? 이번 9월 초순에 필자가 참석한 영국 한국학회(BAKS) 학술대회에서 고(故) 구산 스님(1901∼83)의 납자(衲子)였던 헨릭 소렌센(덴마크인·법명 秋光)이 ‘한국의 호국 불교 개념과 파시즘’이라는 조금 충격적인 주제로 발표를 했다. 그 발표를 들은 필자는, 그 내용보다 더 덴마크인의 종교관과 한국의 종교 현실을 잘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에 헨릭씨에게 접근하여, 스칸디나비아인의 종교적 모색에 대한 그의 이야기, 그리고 한국 불교계에 대한 회상을 좀더 자세히 들었다. 송광사에서 오랫동안 승려 생활을 한 뒤에 신라 불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로서, 한국 불교계에 대해서는 특히 할말이 많았다. 이 이야기를 공개해도 되느냐는 필자의 조심스러운 요청에, 헨릭씨는 “그렇지 않아도 한국인을 상대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서 쾌락하였다. 그의 발표와 개인적인 설명의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았다. 푸른 눈의 덴마크 청년을 승려로 만들어 송광사까지 오게 한 힘은 한마디로, 유럽의 ‘폭력’과 폭력으로 성립·유지된 ‘국가’에 대한 그의 혐오감이었다. 그때(60년대 말·70년대 초) 덴마크에서는, 의무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병원·학교 등에서 간호사·교사로 봉사하거나 특수 캠프에서 소방관 등의 훈련을 받아야 했다. 즉, 국가는 살생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에게 ‘살생 거부권’을 주되, 일종의 국가적 규율(사회봉사, 훈련 등)을 그래도 강요하였다. 헨릭씨에게는, 군대에 가서 살생을 준비하는 노릇이란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총을 든다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자기의 발로 밟아버리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자기 배신’이었다. 그러느니 죽거나 고국을 떠나는 편이 훨씬 나아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자유를 속박하는 의무인 사회봉사나 특수 캠프까지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어도 완전한 자유를 갈망하고 타인과의 합숙 생활을 싫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캠프에서 사회의 ‘강요된 집단성’을 참았다가 견딜 수 없어 무단 탈영하여 일본에 가서 비폭력·비강제의 종교인 불교 공부에 몰두하였다. 나중에 그는 덴마크에 귀국해 군 당국으로부터 ‘의식상 군역 부적합자’라는 다행스러운 판정을 받았다. 헨릭씨의 말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감과 관련해서 그 당시의 덴마크에서는 자신과 같은 폭력과 규율의 무조건적 거부자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의 한 친구는 징집 통지서를 받자마자 아기 예수가 그려져 있는 엽서에다 “예수의 사랑을 기억하라, 이 사람들이여!”라고 써서 병무청에 보냈다. 그래서 그 친구는 헨릭씨에 비해서 군역 부적합자의 판정을 훨씬 신속히 받았다고 한다. 폭력과 국가에 대한 태도 (사진/'한국의 호국불교 개념과 파시즘'이라는 충격적인 주제의 논문을 발표한 헨릭 소렌센)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덴마크의 현재 40대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폭력과 규율에 대한 완전한 거부를 주요 신념으로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과 동시에, 당시 공산권과 대치 상황에 있었던 약소국인 덴마크가 ‘국가성’을 거부하는 이들 반란자에 대해서 매우 관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당시에 국가 기관에서의 승진시 약간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었지만, 형사처벌이나 구타 등의 ‘물질적 폭력성’이 짙은 사회적 제재를 전혀 받지 않았다. 사실, 일체의 구속성과 폭력을 체질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헨릭씨와 같은 사람들의 행동이나, 소련과 동구권의 계속적인 위협에도 이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덴마크사회의 태도는, 그쪽 민주 문화의 심도와 성숙도,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생명 존중 윤리를 아주 잘 보여주는 예이다. 폭력과 약탈의 오명을 쓴 유럽 문화 전체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낀 헨릭씨는, 비폭력과 박애의 가르침으로 생각되었던 불교에 본격적으로 입교하기로 결심, 국제적 폭력의 희생자로 여긴 ‘한국’으로 가서 구산 스님의 문하로 들어갔다. 송광사에서 구족계를 받아 오랫동안 수행 생활을 했던 헨릭씨는, 구산 스님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헨릭씨의 말로는, 구산 스님의 문도 중에서 스승의 입적(入寂) 이후에 스승의 법을 제대로 이을 만한 계승자- 즉 새로운 스승- 를 찾을 수 없어서 자신도 다른 외국 제자들과 같이 결국 환속하였다고 한다. 한국 승려 자질의 점차적인 저하는, 헨릭씨와 같은 외국 구도자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한국 승려 사회, 그리고 나아가서 한국사회 전체의 폭력과 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였다. 승려들도 의무적으로 군대에 끌려가는, 일제 시대의 일본을 제외하고 어느 불교 국가에도 없는 ‘승려 징집제’부터 헨릭씨에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생사를 벗어나려는 수행자들에게 살생의 업무를 덮어씌우려는 국가란, 이것이 깨달음을 방해하는 마왕(魔王)의 국가가 아니겠는가? 국가의 세뇌 정책 영향으로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감을 가진 우민들이 아직 많지만, 현실적으로 ‘북한 남침론’이 남한 독재권력 유지의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헨릭씨는 잘 간파하고 있었다. 군대에 갔다온 승려들이 거기에서 약자·부하에 대한 폭력과 주색, 육식을 배워 이 버릇들을 절간에서도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헨릭씨는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 자신을 이토록 실망시킨 한국 승려 자질저하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승려의 군역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다 군대에 끌려간 승려들이 베트남에 건너가서 불교계 아시아 민족에 대한 유럽인들의 폭력·약탈에 가담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헨릭씨에게는 아예 어불성설이었다. 희생자로만 생각했던 한국이, 이제 가해자의 일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호국불교’는 일종의 파시즘 (사진/헨릭에게 한국 승가는 일종의 파시즘적 집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계종 분규 당시 최루탄에 고통스러워하는 승려들) 그러나 ‘마왕의 국가’인 박정희 정권의 승려 사회에 대한 폭력보다도 헨릭씨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승려 사회의 반응이었다. 생명까지 내놓을 각오로 부처님께서 내려주신 ‘불살생계’를 지켜야만 하는 승려들은, 오히려 악마적 국가에 영합하려고 ‘호국’에 안간힘을 썼다. 일제의 대동아전쟁 때 쓰던 표현들을 그대로 답습하여, 원시 경전에 보이지도 않은 ‘호국 불교’라는 괴상한 논리를 마치 불교의 주요 이념처럼 꾸몄다. 북한에 대한 무력 승리를 비는 기도와 법회라는 독신죄(瀆神罪)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한국 승가는, 결국 헨릭씨에게 일종의 파시즘적인 집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단지 등의 자해까지 해서 군역을 완강히 거부했던 몇명의 비범한 한국 승려들을 헨릭씨는 매우 존경했지만,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나중에 환속하여 지금은 고국에서 저명한 불교 학자가 된 헨릭씨는, “폭력적인 권력에 ‘아니오’라고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을 지금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이상주의자들에게 종교(특히 불교)는 절대적인 비폭력과 폭력적 권력에 대한 완강한 거부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이 신념은 멀리는 식민지 약탈로 얼룩진 유럽 역사, 그리고 가까이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개인적으로 접한 절대 다수의 노르웨이 학생들이 군대에 가는 대신에 사회봉사를 택한 사실로 봐서는, 이러한 생명 존중의 정서들은 여기에서 매우 보편적인 것 같다. 근·현대의 한국은 스칸디나비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폭력을 경험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로 폭력이라는 것은 한국사회 전체에, 그리고 한국인 각자에게 철저하게 내면화해 있다. 약자를 완력으로 짓밟아도 된다는 것은, 폭력 진압으로 ‘유명한’ 경찰, 구타로 악명 높은 군대 등의 기본 상식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국의 종교인들은 스칸디나비아인보다 더욱더 비폭력을 외쳐야 순리가 아닌가? 그러나 필자가 과문한 탓일는지도 모르지만, 한국 종교계에서 사회의 비폭력화의 필요성이 아직까지도 제기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폭력에 저항할 만한 민족혼이 이미 죽어버린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권력에 빌붙는 것을 일삼아온 종교계의 비참한 사정을 반영하는지, 필자도 잘 모른다. 어쨌든 ‘호국’을 내세우는 한국 불교를 일종의 파시즘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스칸디나비아 구도자들의 날카로운 눈빛이, 현대 한국의 비극의 한 단면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