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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1Cust157.tnt4.se> 
날 짜 (Date): 2000년 9월 18일 월요일 오전 04시 59분 57초
제 목(Title): 서평/노형석 조광조와 송시열. 뿌리는 같지


문학] “조광조와 송시열 둘다 뿌리는 같지만…” 

 그들만의 나라? 유교이념을 나라의 기본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왕국이라기보다는 
사대부 공화국이었다. 공맹의 가르침에 바탕한 대의명분과 인의예지의 도가 모든 
현상에 두루 통한다는 사대부들의 투철한 이데올로기 앞에는 왕권조차 기를 펴지 
못했다. 많은 사가들이 조선의 정치체제를 신권(臣權)정치로 규정하도록 만든 이 
원칙주의는 사대부의 아성이던 조선이 체제개혁을 기피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쟁과 사화는 이런 사대부 정치체제의 경직성과 
시대적 모순이 충돌한 산물이었다. 선초 중종때의 개혁파 정암 
조광조(1482~1519)와 조선 중기 효종~숙종때의 실력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그 정점에서 부각되는 것은 그들이 파행의 정치역정을 엮은 주역으로서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문제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재야사학자 이덕일씨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펴냄)와 정두희 서강대 
사학과 교수의 <조광조>(아카넷 펴냄)는 그들의 행적에 얽힌 논쟁적 단면들을 
흥미롭게 부각시킨 저술이다. 후학의 칭송을 걷어내고 들여다본 두 거물의 
정치사상을 지은이들은 권력관계와 당대 사회적 흐름과의 연관성아래 꼼꼼하게 
해부한다. 

두 저작의 접근방식은 다소 다르다. 평전형식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는 `영원한 
집권당' 노론의 영수로서 우암의 성장사와 정치편력을 사론에 바탕해 조망하고 
있지만 <조광조>는 관직에 오른 조광조의 정치적 행위를 주시한 당대 정치사 
연구에 가깝다. 그럼에도 두 책을 맞세워 읽는 재미가 쏠쏠한 것은 둘의 이념적 
동질성과 차이점을 명확히 드러내어 당시 정치체제의 한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조광조와 송시열은 사상적으로 철저한 원리주의자였다. 만물의 도를 
널리 펴서 백성을 교화하는 유교정치의 이상을 꿈꿨던 조광조는 중국 고대 
왕도정치 재현을 설파한 공자의 숭배자였고, 송시열은 `주자의 도는 틀린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주자학에 행동반경을 철저히 고정시켰다. 정치를 도덕적 우위를 
판가름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본 그들의 저돌성은 이런 배경아래 비롯됐다고 
책들은 지적한다. 

하지만 현실정치에서 실천방식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만물의 도를 밝히는 
`명도(明道)'를 정치의 본질로 보았던 조광조는 학문과 정치의 일치에 골몰했다. 
30대 나이에 중종의 제동을 무릅쓰고 도교 제사기관인 소격서 폐지와 
인재천거제도인 현량과 실시 등의 개혁조치를 밀어붙인 것은 도덕적 가치 실현이란 
의지의 소산이었다. 세조의 정권찬탈과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으로 정권의 
도덕성이 추락한 상황에서 도덕적 명분론은 상당한 힘을 발휘해 조선조 전무후무한 
기득권층의 개혁신화를 만들었다고 <조광조>는 풀이한다. 

송시열은 유년기 아버지 송갑조로부터 조광조 선생을 배우라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상황인식은 역설적으로 정반대였다. 잇따른 국난과 상업경제 발달로 신분질서가 
흔들렸던 당대의 위기상황을 그는 복고적인 의리명분론으로 다잡으려 했다. 이런 
의도는 효종의 죽음 뒤 그의 어머니가 상복입는 기간을 놓고 정권다툼까지 빚은 
`예송논쟁'과 유교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이단으로 탄압하는 배타성으로 
나타났다. 명분론은 기실 나라와 왕권의 존속보다는 그의 당파인 노론과 사대부 
계급의 권익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효종의 청나라 북벌론과 공납폐단 시정을 위한 
대동법을 한사코 반대했던 이율배반적 처신또한 그러했다. 결국 200년 시차를 두고 
유교이념은 진보와 수구라는 상반된 노선에 적용된 셈이다. 

당연히 두 저술의 평가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정 교수는 조광조의 개혁은 
권력투쟁의 속성을 너무 단순하게 본 탓에 좌절을 맞지만 보수적 유교이념을 
개혁이데올로기로 전화시켜낸 역량을 높이 사고있다. 정치의 도덕성을 강조한 
개혁실험이 이후 조선왕조의 이념적 방향을 뚜렷히 다지는 성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송시열…>의 비판은 준엄하면서도 논쟁적이다. 예송논쟁에서 
보이듯 사회변화에 대한 요구를 반동적 담론으로 억누르고 기득권 옹호에만 
급급했던 우암은 권세가의 면모를 벗지 못한다. 그래서 지은이는 송시열이 
노론후학들에 의해 성인의 반열인 `송자'로까지 칭송됐지만 실제로 만인에게 
추앙받는 군자는 아니었다고 혹평한다. 

타협을 몰랐던 두 정치가는 결국 반대파의 탄핵으로 사약을 받는 비운을 맞는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금언대로 개혁과 보수의 기로에서 좌초한 그들의 행적은 
여전히 편견과 아집이 가득한 지금 정치판에도 반면교사가 됨직하다. 이씨의 책 
말미에 언급된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으나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는 <논어> `위정(爲政)편'의 인용구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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