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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김 태하 ) <1Cust43.tnt3.tac> 
날 짜 (Date): 2000년 7월  2일 일요일 오후 06시 56분 24초
제 목(Title): 이청/ 달라이 라마를 찾아서 


티베트 망명村 인도 다람살라의 달라이 라마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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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 때 고향을 등진 그는 이젠 60代 노인 , 그는 살아서 티베트에 다시 갈 수 
있을까? 

李 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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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방식의 독립운동 / 『티베트의 독립은 시간의 문제일 뿐』 



3월10일, 「티베트 저항운동」 41주년 기념 일이다. 1959년 이날, 중국의 무력 
强占(강 점)에 저항하여 수도 라사에서 대규모 저항 운동이 일어났고, 중국 
인민해방군은 총과 칼로써 티베트인들의 자주 독립운동의 싹 을 밟아버렸다. 그 
직후 달라이 라마는 티 베트를 탈출, 당시 인도 수상 네루의 배려 로 다람살라에 
정착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했 고, 10만이 넘는 티베트인들이 그의 뒤를 따라 나와 
인근의 인도, 네팔 등지에서 돌 아갈 기약 없는 난민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40여년, 중국 통치 하의 티베트에 서는 120만명의 티베트인들이 희생되었고( 
티베트 망명정부측의 주장), 6000개가 넘는 불교 寺院(사원)이 폐지되거나 
파괴되었다 . 동시에 수많은 승려들이 그들의 사원으로 부터 쫓겨나거나 
투옥되었다. 망명 티베트 인들은 敵(적)을 증오하는 대신 이해하려고 스스로의 
마음을 淨化(정화)하고, 끝없이 화해와 대화의 메시지를 중국측에 보내고 있다. 
이리하여 그들의 화해정신은 보편적 인 평화운동의 한 방식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미국, 유럽 등지 에 피난 나와 있는 약 20만명의 
티베트인들 과, 중국 치하의 티베트땅에 살고 있는 60 0만명의 티베트인들은 
누구도 그들의 독립 과 「자유 티베트 정부 수립」의 날이 오리 라는 사실을 
눈꼽만큼이라도 의심하는 사람 은 없다. 그것도 먼 훗날이 아니라 10년 또 는 
길어도 20년 안에는 이루어지리라는 꿈 을 버리지 않고 있다. 총도 칼도 없고, 억 
센 주먹도 없이 그냥 그렇게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의 한가운데에 달라이 라마가 
있었다. 그 달라이 라마가 연설을 시작했다. 

『… 지난 20세기는 전쟁과 파괴, 폭력과 피로 얼룩진 세기였습니다. 인류는 그 
부끄 러운 경험을 통하여 귀중한 교훈을 얻었으 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티베트의 독립은 시간의 문제일 뿐』

달라이 라마는 法衣(법의)로 감싼 몸을 좌 

우로 흔들면서, 티베트 승려들 특유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마치 앞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듯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 어갔다. 그는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거듭 대 화를 촉구하고 나아가 「중국의 형제 자매 들」에게 
티베트의 역사 및 문화, 그리고 운명에 대한 이해를 당부했다. 

『나는 새로운 세기를 맞는 올해도 티베트 인의 인권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슬픈 
사실 을 보고드려야겠습니다. 1999년 한 해 동안 티베트에서는 알려진 것만 해도 
6건의 고 문, 학대로 인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1432 명의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이 
그들의 사원 으로부터 쫓겨났고, 615명이나 되는 정치囚 들이 투옥되었습니다. 
1996년 이래 모두 1 만1409명의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사원에 서 내쫓겼습니다. 

존경하는 판첸 라마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열반하였고, 그분의 환생인 젊은 판첸 라마는 사실상 지 금 체포, 감금된 
상태입니다. … 중국은 교 묘하게 진실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시안적인 대처는 역효과를 낼 뿐입니다. 좁은 마음으로 증오심을 앞세워 
대응하면 인종적, 정치적 갈등과 위기만 증폭시킬 뿐입니다. … 위기 속에서도 
우리 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쿰붐수도원의 아카 린포체와 최근 카르마파 17代 
린포체의 용 감한 탈출이 그것입니다. 

나는 중국인 자신들이 古代로부터 이어져 온 티베트의 풍요한 문화를 파괴하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 인지 깊이 自省(자성)해 보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티베트의 풍요로운 문화와 靈性 (영성)이 중국 자신의 문화를 
풍요롭게 할 것임을 믿습니다』 

해발 1750m. 히말라야 산맥의 서남쪽 支脈 (지맥)인 다울라마르 산맥이 인도 
대륙으로 뻗어 내려오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칫 머물러 선 자리, 5000~6000m의 
萬年雪(만년 설)을 이고 있는 峻峰(준봉)들을 등에 지고 높은 산자락에 강력한 
생명력으로 달라붙 듯 티베트 난민촌이 형성돼 있고, 그 가운 데에 티베트 
망명정부의 수장인 僧王(승왕 ) 달라이 라마의 왕궁이 있다. 왕궁이래야 옛날 영국 
관리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던 집을 약간 개조한 건물이 숲 속에 숨어 있 고, 그 
정문 건너편에 왕궁사원인 남걀사원 이 있다. 티베트의 수도 라사의 포탈라宮과 
같은 형식의 배치다. 

왕궁과 남걀사원이 마주보고 있는 그 사이 에 1000여 평 남짓한, 광장이라기보다는 
넓 은 마당이 하나 있다. 평소에는 남걀사원의 승려들이 「논리 토론」을 하는 그 
마당에 티베트인과 외국인을 합하여 4000~5000여 명의 군중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운집하여 달라이 라마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억양이 
없으면서도 사람을 끄는 독특한 울림과 설득력을 지닌 목소리 로 연설을 끝낸 후 
자리에서 일어나 군중들 의 한가운데를 걸어나와 王宮으로 들어갔다 . 남걀사원에 
마련된 식장에서 왕궁까지 1 00여 m를 걷는 동안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 르거나 
합장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손을 잡아 축복하거나 위로의 말을 던지면서 지 
나갔다. 

66세, 티베트인으로서는 키가 큰 편인 이 스님은 부처님과 중생들에게 늘 고개 
숙여 절을 했기 때문일까, 몸이 앞으로 휘었고 , 짧게 자란 머리는 백발이 
희끗했다. 25세 의 젊은 나이에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 지 40여년, 그도 이제 
세월과 함께 늙어가 고 있었다. 


山中 시위 행렬 / 1989년 노벨 평화상 수상 




히말라야산맥의 깊숙한 골짜기에서 벌어진 이 행사는 그 규모가 보잘 것이 없었다. 
달라이 라마로 하여금 「왕」으로 실감케 하는 것은 광장 입구에서 들어오는 
사람들 의 소지품을 철저하게 검색할 때뿐이었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세상 
어디서나 흔하 게 볼 수 있는 高僧의 법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기념식이 
끝난 다음의 움직임은 이 것이 종교적인 집회가 아닌 정치적인 행사 임을 입증해 
주었다. 달라이 라마가 퇴장하 고 식이 罷(파)하자, 참석자들은 행렬을 지 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했던 피켓 이 군중들의 머리 위에 나부끼고 구호가 
산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11代 판첸 라마를 구하자. 카르마파의 부 모를 구하자』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티베트를 돕자』 

『티베트의 독립은 인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한다』 


『영원하라, 달라이 라마. 영원하라 인도 - 티베트의 우정』 


『유엔은 어디 있나』 행렬의 중간 중간에 끼어 선 청년들이 핸드 마이크나 
肉聲(육성)으로 구호를 선창하면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팔을 치켜세우며 복 
창했다. 

시위 대열은 티베트 망명정부와 난민들이 모여 사는 해발 1700~1900m 산등성이 
맥레 오드 간즈를 출발하여 다람살라의 아랫동네 로 향해 느릿느릿 움직였다. 
고도는 500m 차이지만 산허리를 감고 도는 길을 따라가 면 10㎞가 넘는 먼 길이다. 
두 시간 넘게 산길을 걸어 시위 행렬은 마침내 인구 2만 명의 다람살라 시가지에 
들어섰다. 다람살라의 인도인들은 윗동네에 사는 티베 트인들의 이같은 시위를 
자주 보아온 듯 무 심한 표정들이었다. 길가에 할 일없이 모여 서 있던 
백수들(인도 천지 어딜 가나 이런 사람들로 득시글거린다) 중 일부가 장난스 럽게 
시위 군중 속에 섞여 들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의 넓은 공터에 도착하자 한 가 게 
앞에 임시로 연단이 마련됐다. 그 위에 올라간 연사들 몇 사람이 예의 그 티베트 
독립의 당위성과 중국의 시대착오적인 식 민주의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1989년 노벨 평화상 수상

달라이 라마는 全세계 어디든지 자신을 초 청하는 곳이면 찾아간다. 하버드 대학의 
초 청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세계적인 학자, 학 생들을 앞에 두고 불교를 강의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서양문명과 동양사상의 거리를 이처럼 좁힌 사례가 
역사상 없었다 고 한다. 1989년에는 공산독재에 대항하여 非폭력 독립운동을 
전개한 공로로 노벨평 화상을 수상했고, 1994년 9월 중순에는 런 던의 미들섹스 
대학에서 사흘 동안 기독교 의 성서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런 그가 패쇄된 
공산국가를 제외하고, 가 고싶은데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가지 못했던 나라가 한 
군데 있다. 바로 한국이다. 이 미 두 차례나 불교단체 등의 초청을 받았으 나 한국 
정부의 不容(불용)으로 「한국에 가고싶었던 마음」을 접어야 했던 그는 올 4월 
하순 일본에 들르는 길에 4월22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한국을 방문하기로 계획되 
어 있었다. 초청자는 서울대학의 불교학생 단체. 한국 정부는 『나는 모르는 
일』이 라고 뒷짐을 지기로 하고 달라이 라마의 한 국행이 성사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나 온 뒤였다. 

그러나 티베트 망명정부의 공보관계자에게 이 일을 물어보니 한 마디로 
『어렵다』고 고개를 저었다. 『한국 정부가 많은 생각 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며칠 전 한국을 떠나기 전에 달라이 라마의 한국행 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반가운 보도를 읽고 왔다』고 하자 그 관계자는 『우리도 그러 한 보도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 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의 느낌이 정확하다 면 한국 
정부는 끝내 부정적인 결정을 내리 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예측이었다. 이 
예측은 적중하여 달라이 라마는 4월 중 순 일본에 들러 예정된 행사를 마쳤으나 지 
척에 있는 한국行은 좌절되고 말았다. 


달라이 라마의 前生은? 




달라이 라마는 1935년 티베트 고원의 중국 과 맞닿은 동북쪽 변방인 암도지방의 
탁처 라는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 릴 때 그의 이름은 라모 
톤둡이었다. 톤둡 이 태어나기 두 해 전인 1933년 제13代 달 라이 라마가 
서거했다. 티베트에서는 달라 이 라마를 관음보살의 化身으로 믿는다. 보 살이란 
대승불교에서 自利利他(자리이타)의 정신을 구현하는 최고의 이상형이다. 바로 그 
관세음보살이 이 세상에 화신한 존재인 달라이 라마는 일단 세상에서의 生을 마감 
하고도 열반에 들지 않고 중생 구제의 願力 (원력)에 의하여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다는 것이 티베트 불교의 독특한 믿음 중의 하 나이다. 
보통 달라이 라마나 판첸 라마와 같은 高僧 들이 서거하면 그로부터 2~3년 후에 
환생한 인물이 세상에 태어나므로 이때쯤 티베트 정부는 그들 특유의 방법에 따라 
환생한 달라이 라마를 찾는 작업을 시작한다. 라모 톤둡은 두 살이 조금 넘었을 때 
13代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되어 일정한 교육을 받은 후에 1940년 
得道式(득도식) 을 가지고 삭발하여 예비 수행자가 되었다 . 그와 함께 그는 
정식으로 티베트의 정신 적인 지도자, 즉 제14代 달라이 라마로 공 식 취임하게 
되었는데 이때 俗名(속명)을 버리고 잠펠 가왕 롭상 예쉬 텐진 갸초(줄 여서 텐진 
갸초라 부른다)라는 새로운 이름 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티베트 최고의 종교적인 지도자를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다. 달라이는 몽골語로 「 큰 바다」라는 뜻이다. 라마는 
스승이므로 달라이 라마는 몽골말로 「큰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라는 
뜻이 된다. 티 베트語로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뜻이다. 결국 달라이 라마는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현재의 달라이 라마, 즉 14代 달라이 라마 의 前生(전생)인 
13代 달라이 라마 - 톱텐 갸초는 생전에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티 베트의 독립을 
선언했다. 청나라의 國運(국 운)이 기울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티베트의 독립은 큰 
장애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 러나 1949년 공산당이 중국 천하를 통일하 고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자 사정은 달 라졌다. 

1950년, 중국은 티베트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이며 티베트 정부는 외교 사절 
파견의 권한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어 중 공군은 티베트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티베트로 진군했다 .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한 중국은 티베트 의 일부에 티베트족 자치구 인민정부를 수 립했다. 이같은 
급박한 정세 속에서 달라이 라마는 1951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親政( 친정)에 
임했다. 그때까지는 섭정이 있어 정부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어린 달라이 
라마에게는 형식적인 裁可(재가)를 받을 뿐이었으나 이때부터는 모든 결정을 직접 
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섰다. 





네루와 毛澤東 비교 




이때부터 거대한 중국의 힘 앞에서 티베트 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달라이 라마 
및 티베트인들의 항거가 시작되었다. 중국의 지도자인 毛澤東(모택동)과 
周恩來(주은래 ) 등은 달라이 라마를 몇 번 北京으로 초청 하여 티베트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주었다. 당시의 느낌을 달라이 라마는 그의 자서전 「유배된 
자유」에서 이렇게 기술 하고 있다. 
<나는 중국과 티베트가 제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고 몹시 마음이 들떴다. 
마르 크스의 사상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만인에 대한 
평등과 正義 (정의)에 기초한 사상으로서 全세계적인 병 폐에 대한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듯했다. 지 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정치를 하는 데 있어 효율적인 
방편이 될 마르크 스주의의 순수한 교의와 불교를 융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보살道의 실현을 정치의 제일 목적으로 하 는 젊은 불교 지도자가 
공산주의 사상에서 인류 구원의 빛을 발견한 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뒷날 달라이 
라마는 『나는 불교의 진리 구현을 통하여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나은 공산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젊고 순진했던 티베트 
高原의 지도자는 공산주의 이론에 신뢰를 보냈고, 중국 지도자들에게 도 아울러 
믿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 러나 그 믿음은 조만간 무참하게 깨졌다. 같은 
회고록에서 달라이 라마는 중국 지도 자들에 대한 평가를 인상 깊게 남겨놓았다. 
<인도의 네루 수상은 잘 웃지 않는 사람이 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언 제나 진실이었다. 중국의 毛주석과 周 수상 등 지도자들은 언제나 웃으면서 
희망을 불 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그 말들은 모두 거 짓이었다> 

티베트인들의 항거가 거세지고, 중국군의 진압도 잔인해졌다. 마침내 저항운동이 
대 규모 유혈폭동으로 치닫고 그것을 빌미로 대량살상의 위기가 임박하자 1959년 
3월18 일 달라이 라마는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인도였다. 네루 
수상은 그에게 망명처를 제공하고 티베트인들의 정착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달라이 라마 의 나이 25세 때였다. 

그로부터 40여년, 젊었던 달라이 라마는 6 0代 중반의 노인이 되었다. 그를 통하여 
티 베트 불교는 全세계, 특히 미국과 유럽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전파되었고, 
非폭력적 인 독립운동의 大家로 노벨평화상의 영예가 주어졌다. 그리고 중국 
치하에서 탈출하여 망명한 티베트인들은 다람살라를 비롯한 인도 여러 지방과 세계 
각지에 안전한 피난 처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 티베트」 망명정부의 
중앙정부 기관 은 달라이 라마를 頂點(정점)으로 내각과 최고심판위원회, 망명의회 
등 3權분립제도 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물론 달라이 라마는 선거로 뽑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 나 망명 의회는 주민들의 선거로 선출하여 민주주의의 바탕을 
구축해 놓았다. 내각에 는 종교와 문화, 가정, 재정, 교육, 안전, 정보 및 
국제관계, 건강 등의 7개 부서를 두고 각 부서에 장관을 두고 있다. 


달라이 라마 이후의 티베트가 걱정된다 


국가 업무를 달라이 라마가 전횡하고 있는 것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로 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중요한 사안들이 결정되고 집행된다. 神政체제의 
산물인 달 라이 라마 제도가 없어지지 않는 한 완전한 민주주의 제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전통적인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민주주의의 폭과 
깊이를 최대한 확대하려 는 노력은 멈추지 않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중국으로부터 되 찾는 날」 고국에 돌아가 실현할 민주정치 의 기본 틀을 갖추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조국으로 돌아가는 날 이 오면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하여 달라이 라마를 사임하고 싶다는 뜻을 비친 적도 
있었다. 앞으로는 달라이 라마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면 달라이 라마의 꿈은 티베트의 지도 자라는 한정된 
틀을 떠나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꿈이란 세계 를 「善한 
의지」로 통합하고 역사의 물꼬 를 그 쪽으로 트는 역할이다. 그 진원지가 
다람살라의 맥레오드 간즈다. 맥레오드 간즈에서 짧은 시간 동안 만나본 티베트 
불교는 결코 「완벽한 불교」는 아 니었다. 스님들은 많았으나 제대로 수행하 는 
스님들은 많지 않았고, 린포체들을 중심 으로 신비적인 요소들을 세속적인 권능의 
지렛대로 삼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게룩파 , 닝마파, 사캬파, 가큐파 등 네개의 
파로 갈라져 있는 종단 간의 미묘한 갈등도 한 국 불교의 종단 분규를 연상케 하여 
미심쩍 은 의문을 남겼다. 금강승이라고 자랑하는 密敎의 敎義는 명상의 단계를 
지나치게 세 분화함으로써 큰 깨달음의 길을 잘못 오도 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같은 비판 적인 생각도 老莊哲學(노장철학)의 세례를 받아 형성된 
禪宗(선종)에 오랫동안 길들 여진 필자의 선입견에서 비롯된 단견일 수 도 있다. 
달라이 라마 이후의 티베트와 티베트 불교 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인간 달라이 
라마의 지혜와 수행의 깊이는 측량하기가 어려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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