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artistry �) <1Cust187.tnt6.ta> 날 짜 (Date): 200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08시 54분 04초 제 목(Title): 한겨레/인터뷰 홍윤기 [인문학데이트] ⑥ 홍윤기 정미옥=반갑습니다. 선생님이 <당대비평>에 관여하시듯이 저도 <고대대학원신문>이라는 매체를 만드는데, 먼저 <당대비평>에서 출발하는게 좋겠습니다. 이 매체가 지금 같은 위상을 얻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홍=위상이라니 부끄럽습니다. 매체가 일정 궤도에 이르려면 사명감, 그리고 독자와 시대를 상대로 한 승부근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점에서 문부식 주간을 비롯한 우리 편집위원들이 노력도 했지만 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자 개성이 강한 편집위원들이 서로의 다름을 자신의 보완점으로 수용하는 넉넉함도 다양한 기고자 확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다르더라도 합치점이나 지향점은 있지 않습니까? 홍=우리는 동인그룹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좀먹는 모든 반이성적인 것을 전방위적으로 비판한다는 공통의 문제의식은 분명히 있습니다. 계간지의 한계상 나날의 정세에 대한 논평은 불가능한 대신, 사회 전반에 뿌리박힌 반이성적인 것의 코드를 인문사회과학적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판독하고 자각시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박정희 체제'에서 유래했지만 현재의 사회경제구조나 일상에서 끈질기게 작동하는 이 사회의 `주도적 지배권력'과 각 사회영역의 `국지적 권력'들이 그 일차적 타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발전의 추진력을 내부에서 갉아먹으면서도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퇴행성 권력'들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지요. `진보에도 자기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희의 확신입니다. 진보운동권 출신들의 최근 작태에서 이런 가설이 너무 허망하게 일찍 입증되어 좀 허탈하긴 합니다만. 정=<당대비평>에는 유달리 `야만성' `퇴행' `허약함'이라는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군부독재시대와 비교해서 오늘의 모습을 `야만으로의 퇴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지는데요. 홍= `오늘'에만, 그리고 우리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진보인사들이 그렇게 됐다는 주장일 뿐만 아니라 진보를 거론하는 방식 자체에도 퇴행적 증상, 허약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정=가령 선생님이 <당대비평> 9호에 쓰신 `김지하론'도 그런 예입니까? 그 글의 제목이 `우리의 허약한 현대, 그리고 야만으로의 퇴행'이었는데, 김지하 비판으로서는 뒤늦은 편으로 보이는데요. 홍=뒤늦다니요. 김지하씨는 한번도 제대로 비판받아 본 적이 없어요. 김씨의 경우는 퇴행 증상의 한 표본입니다. 그는 `6·3 사태' 당시 박정희가 내세웠던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사지내는 자리에서 그 조문으로 한 시대의 이정표를 마련한 분입니다. 그런데 수십년 뒤 그가 비판했던 것과 별 차이 없는 담론틀 안에 처박혔습니다. 일종의 상상력 고갈에다 급변하는 현실을 직시할 투지의 상실까지 겹친 진보권 최대의 비극입니다. 하지만 김씨는 내가 자랐던 시대의 일부입니다. 사실 그 글은 내 안에도 있을 수 있는 그런 퇴행 가능성을 스스로 성찰하는 심정으로 쓴 글이었습니다. 정=그래서 김지하 시인을 비판하면서도 애정을 보이셨던 건가요? 홍=글쎄요. 70년대 김지하씨가 박정희 체제와 정면으로 싸웠던 것은 바로 그것이 가시적인 성과에 대한 도전이었다 라는 측면에서도 우리 현대의 계몽적 성과입니다. 그런 점을 인정하지 않는 비판은 불공정합니다. 정=<당대비평>이 9호와 10호에서 연거푸 제기한 `우리 안의 파시즘' 문제는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반론도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11호 독자합평회에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 문제이지만, `우리 밖의 파시즘' 또한 여전히 강고하다”는 문제제기였습니다. 모든 것을 미시 파시즘으로 돌리는 환원론 아닙니까? 홍=사실 그 용어 판권은 동료인 임지현 교수한테 있지만 저는 파시즘으로 지칭된 사회 전반의 권력망에 야합한 이들이나 그것을 상대로 싸우는 이들에 대한 성찰적 개념으로 수용했습니다. 실제로 권력의 변신술은 아주 교묘하여 그에 대한 별도의 반성력이나 대응력이 개발되지 않으면 모든 가치를 퇴화시킵니다. 현실적으로는 결국 불가능하더라도 우리 생활의 건강성을 위해 `탈권력적 긴장'은 필수적입니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우리 밖의 파시즘'이 기승을 부릴 기회를 주는 `트로이의 목마'입니다. 정=몇몇 진보 지식인들이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행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홍=사실 곤혹스러운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권력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였습니다. 권력체로서의 <조선일보> 비판은 그 신문의 극우체질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단지 거기에 기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이의 활동 전체를 과도하게 의문시하는 것은 권력비판의 초점을 흐릴 우려가 있습니다. 권력비판에는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인간비판에는 동반자적 긴장이 필요합니다. 정=전국 철학 교육자들이 모인 <철학연대>에도 활동하고 계신데, 왜 그런 모임이 필요했습니까? 홍=국민윤리교육과가 독점했던 중등학교 도덕·윤리 교사 양성권을 철학과뿐만 아니라 교육학과에도 나누어준 교육부의 정책이 계기인데, 한심한 일이죠. `철학'과 `윤리'를 따로 가르치고, 윤리 교사를 그 분야와 별 상관 없는 학과에서 양성해도 좋다는 그 무지함에 철학계가 발끈했는데, 교육학과 출신들이 장악한 한국의 교육권력 문제가 철학계의 안이함을 각성시킨 것이죠. 정=선생님은 한국사회의 부패 문제나 시민사회에 대한 제언 등 현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 많은 논문을 써오셨는데, 공부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비판적 발언은 안하는 것이 관례가 아닌가요? 홍=지식인의 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공부가 당대 사회에 갖는 의미에 대해 지적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학술적 성과가 최우선이다'라고 말하는 분치고 제대로 된 성과를 낸 분이 주위에는 없어요. 일종의 학문폐쇄주의인데, 지식사회의 미성숙을 보여주는 또다른 양상입니다. 가령 자연과학을 하는 분들이 핵문제나 환경문제를 외면하고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놀라운 학문적 성과를 내면서 동시에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아인슈타인의 경우를 보면 이게 왜 잘못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적으로 철저하다면 당연히 그와 관련된 현실의 문제, 나아가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발언할 책무가 우리 학자들에게는 있다고 믿습니다. 정리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yws@hani.co.kr 홍윤기가 말하는 홍윤기 나이 마흔이면 헤매지 않는다는 <논어> 말씀이 아니더라도 사십대쯤 되면 이런 일, 저런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 일은 좋아하더라도 삼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단지 철학을 공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을 진정 하려고 하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내가 20대를 보낸 70∼80년대를 돌아보면 당시 철학한다는 것은 억압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 해방의 무기를 준비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철학'을 철학으로 고수하려고 하면 행동주의적인 동료들에게 약간은 거리감을 느껴야 했다. 철학, 아니 인문학 전반이 한 사회의 생동하는 영혼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것은 유학 생활을 하던 베를린 자유대학의 강의실에서였다. 1988년 10월 겨울학기가 시작되던 첫 날, 한다 하는 철학과 교수들이 강의실에 들어와 수업을 시작하면서 주정부의 대학기구 조정안에 반대하는 교수시위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당부하는 말을 듣고 나의 독일어 청취능력을 의심했다. 그런데 이제 21세기 문턱에 선 오늘날 중고등학교 도덕·윤리 교과목은 `철학'과 별다른 연관성이 없으므로 철학 공부한 학생이 `도덕·윤리' 선생이 되려면 그 자격증을 따로 따야 한다는 대한민국 교육부의 야만적 유권해석에 또 다시 분노의 정념이 움직이니 아마 나의 40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든다. 60편 가까운 논문을 썼으나 바로 위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이런 저런 연유들로 쓴 습작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과연 신문에 날 정도의 인문학자일 수 있는지 내 자신 의심스럽다. 나는 철학이 `한 시대의 영혼'이라야 한다는 구태의연한 믿음을 아직도 갖고 있다. 많이 늦었지만 진짜 마흔 살이 되기 위해 나의 미혹을 정리할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홍윤기는 누구? △1957년 강원도 동해 출생 △서울대 철학과 석사 △베를린 자유대 철학·사회과학 연구소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철학과 교수 △<당대비평> 편집위원 △저서: <변증법 비판과 변증법 구도>(학위논문), <철학의 변혁을 향하여>(공저, 철학과 현실사), <이 땅에서 철학하기>(공저, 솔), <하버마스의 사상>(공저, 나남) △역서: 위르겐 하버마스의 <이론과 실천>(종로출판사), 막스 베버의 <힌두교와 불교>(한국신학연구소), 울리히 벡의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생각의나무)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