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호연지리 �) <PPPa62-ResaleTac> 날 짜 (Date): 2000년 5월 28일 일요일 오전 10시 15분 19초 제 목(Title): 신복룡/ 당쟁과 정당정치 출처: 전통과 현대 당쟁과 정당정치 신복룡 ----------------------------------------------------------------------------- --- 70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 졸업. 76년 동 대학 정치학 박사. 건국대 정치외 교학과 교수(현). "동학사상과 갑오농민 혁명", "한말개화사상연구", "한국정치사" , "전봉준 평전" 외 논저 다수. ----------------------------------------------------------------------------- --- ----------------------------------------------------------------------------- --- 1. 왜 당쟁을 거론해야 하는가? 현대의 한국사학사에 있어서 수없이 인구에 회자(膾炙)되면서도 그 실상에 있어서 는 아직 극복되지 않은 부분은 식민지 사관을 청산하는 문제일 것이다. 식민지 사 관이라 함은 일본이 한국의 병합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한국의 역사를 왜곡, 변조, 누락시킨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당쟁의 문제는 사실의 왜곡에 해 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쟁의 역사는 일제가 매우 집요하게 천착(穿鑿)했던 역사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사를 내정의 난맥과 외압에 의한 굴욕의 역사로 그림으로써 망국을 합리화하려는 것이었고 당쟁은 이러한 목적을 위한 호재(好材)가 되었다. 당쟁이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사학에서 보는 당쟁에 대한 시각에는 과장과 악의가 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쟁은 곧 악]이라는 역사 인식의 주입이 집요하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데에는 시간/노력/성찰의 면 에서 많은 부담을 주어 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일본 식민지사학이 내포하고 있는 당쟁에 대한 초점은, 당쟁이야말로 한국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쟁을 이해하는 것이 곧 한국을 이해하는 것이 라는 논리였다. 이러한 논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일본 사학자들은 홍경래(洪景 來)의 난은 물론이고, 임진ㅗ병자의 양란, 동학과 천주학의 발생뿐만 아니라, 3ㅗ1 운동까지도 모두가 당쟁에 의해서 빚어진 악의 결과들이라고 보고 있다. 동경제대 (東京帝大) 출신으로서 경성제대 예과부의 교수와 조선총독부 시학관(視學官)을 역 임한 오다 쇼코(小田省吾)에 의해서 제기된 이러한 논리들은 당쟁을 악으로 설명하 려는 식민지 사관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그것이 끼친 해독 또한 적지 않았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일본 사학자들이야 조선 침탈을 위해 위와 같은 주장을 했다고 하지만, 이러한 논리를 전수한 한국 사학계의 미망(迷妄)과 맹종의 시간이 의외로 길게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예로서 여염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학계에서조차 당쟁을 사갈시(蛇蝎視)하는 견해가 무리 없이 수긍되고 있어서 당쟁 이야말로 [시기(猜忌), 중상, 대립, 충돌, 아첨, 질투,사리, 사감, 암투, 살벌] 등 의 용어로 표현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넓게는 조선조 역사나 좁게는 17- 19세기의 조선 후기의 정치사가 결코 당쟁이란 하나 범주로 엮어질 수는 없는 것이 며, 당쟁사의 새로운 체계화와 평가가 없이는 조선 중ㅗ후기의 정치사는 물론 사회 경제사의 체계 화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 --- 2. 식민지 사학과 당쟁의 인식 1) 한국인은 민족성이 나쁘다는 논리 고대에 있어서나 현대에 있어서 피정복자에 대한 통치를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서 는 피정복자를 멸시받을 존재로 타락시키거나 그렇게 묘사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민 화(愚民化) 정책을 쓰는 것이 가장 통상적인 예였다.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총 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통하여 이러한 작업을 구체화하였다. 일본의 이와 같은 역사 왜곡은 이미 대한제국 말기의 일본인 고문관을 통하여 집요하게 추구되어 왔 는데 그러한 작업을 선도한 인물은 시데하라 다이라카(幣原坦)였다. 대한제국의 학 정참여관(學政參與官)으로 1900년에 내한한 그는 그의 대표적 저술인 {韓國政爭志} (1907)를 씀으로써 조선당쟁사에 대한 식민지 사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훗날 대만(臺灣)제국대학 총장까지 지낼 만큼 영향력이 컸던 시데하라는 한국사의 모든 악이 당쟁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는 유사 이래로 사권(私權)의 싸움이었다. 정가가 일단 어떤 국면을 당하여 일을 행할 때는 온갖 의견이 백출하여 떠도는 말이 떠들썩하고 음모가 이어 져 암살로써 대를 물리며 권력을 잡고, 정적에게 그러한 기미가 보이면 일망타진의 참화를 일으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조선 사람의 오늘의 상태를 이해하려 면 그 원인을 과거에서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사실의 근본 요체(要諦)이며 고질적인 원인은 당쟁이었다고 단언해도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당쟁은 음험하면서도 비밀스러워 겉으로 보기에는 춘풍(春風)이 부는것 같 아도 갑자기 뼈를 자르고 시체를 매질하는 참화를 연출한다.] 시데하라가 진심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쟁이야말로 조선조 정치의 고질적인 병 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폐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 작업을 이어받은 인물이 호소이 하지메(細井肇)였다. 그는 당쟁의 원인을 민족 성과 관련하여 설명하려 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혈액이란 경화(硬化)된 채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곡(丁?) 을 사상(思想)에 묶어 두고 태연히 사는 내지인(內地人: 朝鮮人)이 많다. 조선인의 몸에는 특이한 더러운 피[?血]가 섞여 있다는 것도 조선의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하 기 위해 반드시 구명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떠한 위대한 영웅도 하룻밤 사이에 그 국민의 피부 색깔이나 눈빛을 바꿀 수 없 다. 수천 년,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인격과 국민성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것을 변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그 더러운 피를 어쩔 것인가 ? 이는 경세가가 모름지기 숙고해야 할 점이다.] 호소이가 1926년에 쓴 81면 짜리의 {朋黨ㅗ士禍の檢討}는 당쟁에 대한 대표적인 교 본으로 되어 있다. 호소이가 이 글에서 피력하고자 했던 논지는 한국인이야말로 피 [種子]가 더러워서 살륙을 생태적으로 자행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 은 무모하며 혈전(血戰)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이러한 논리에 대하여 당시 한국의 식자들 사이에도 동조 현상이 일어났다는 점인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광수(李光洙)였다. 이광수는 이미 1922년에 발표한 {민족개조론}에서 조선 민족이 쇠퇴한 근본 원인은 타락한 민족성에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그것이 정치로 나타난 현상으로는, (1) 자기 일신의 권세를 누리고자 했고, (2) 자기 친척ㅗ붕우의 출세를 도모했으며, (3) 당파 싸움을 했다 고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어디에서 암시를 받은 것일까? 아마도 그는 당대 일본의 최고 지식인이었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의 사상에 심취했을 것이다. 동경제국대학 총장, 일본철학회장, 귀족원 의원을 지낼 만큼 저명했던 가 토는 평소 일본인이 왜소(矮小: 倭는 矮와 어원이 같음)하므로 서양인과 혼혈함으 로써 인종을 개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천황제를 부인할 만큼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광수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즉, 그 가 민족개조론을 주장한 데에는 일본 민족에 대한 연민과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 러나 이광수의 그것은 한일합방의 구실로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양자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이광수의 민족 개조의 논리는 호소이를 비롯한 [조선인망종론](朝鮮人亡種論)과 더 불어 상승(相昇) 효과를 일으키면서 한국인의 당파성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했 다. 동일한 내용일지라도 일본인들의 주장은 민족적 거부감으로 인해 한국인에게 설득력이 부족했던 점과 비교해 볼 때, 당시 한국 이광수와 같은 지식인들의 민족 개조론은 한국인들의 마조히즘적 인식 체계에 더 많은 해악을 끼쳤으며, 당쟁과 민 족성을 연계시키는 논리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망종의 논리는 그렇게 간단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조 시대의 한국인은 하천문화권의 농경 민족으로서 그들의 사상은 범신론적이며 자 연주의적이다. 그들은 절대자인 하늘에 대하여 경외(敬畏)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 다. 한국인은 종교적 신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인간의 운명에 있어서의 업보(業報)를 연상하기 때문에 애타심과 죄의식이 행위의 중요한 인자를 이루고 있 으며, 이를 사상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평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에는 영국의 청교도혁명이나 프랑스대혁명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대량 학살이 보이지 않 는 것은 한국인의 민족성이나 심성이 근본적으로 사악(邪惡)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 다. 바꾸어 말해서 한국인의 정치 행태는 다소는 감상주의적이며 때로는 인도주의적인 데 앞의 것은 자연주의적인 정향에서 나온 것이며 후자는 불교의 영향이었다. 따라 서 당쟁을 한국인의 민족성과 연결시켜 영원히 구제할 수 없는 저주의 대상으로 보 려는 것은 한국인에 대한 악의적인 해석이다. 당화(黨禍)로 인한 일부의 인명 피해 는 민족성이 잔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조선의 정치인들이 정적을 공격할 수 있었 던 것은 당시의 당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과오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일 만큼 관대했 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당쟁을 민족성에 기인한 것으로 볼것 이 아니라 사회경제사적인 측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당쟁의 시한성의 확대 구체적인 학설이나 전거(典據)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조 500년 의 당쟁사]라는 말에 매우 익숙해 있다. 이러한 표현은 비학술적 공간에서 흔히 오 고가는 말이어서 일단 접어 둔다고 해도, 일본 사학자들이나 그 추종자들이 주장하 고 있는 당쟁의 시한은 의외로 길며 그 시폭(時幅)도 또한 다양하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 230년 설: 동인과 서인이 나뉘어진 선조 초기(1575)부터 영조 말엽까지 * 290년 설: 1575년부터 광해군 15년(1622)의 동인 집권기 50년과, 인조 원년(162 3)부터 현종 15년(1622)까지의 서인 집권기 50년과, 숙종 원년(1675)부터 同 20년 (1694)까지 동인ㅗ남인이 싸우던 20년과, 숙종 20년(1694)부터 경종 4년(1724)까지 의 노론ㅗ소론이 싸우던 30년과, 영조 원년(1725)부터 정조 24년(1800)까지 노론이 집권한 80년, 그리고 순조 원년(1800)부터 철종 말년(1864)까지의 노론 집권기 60 년을 합산한 기간 * 310년 설: 1575년부터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까지 * 410년 설: 무오사화(1498년부터 1910년까지 * 520년 설: 조선의 개국(1392)부터 멸망기(1910)까지 * 900년 설: 고려 초부터 조선조 말까지 등이 있다. 위의 주장 중에서 특히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당쟁의 기점으로 보려는 시데하라의 입장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은 한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심사(深査)가 없이는 자칫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 다. 사화를 당쟁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시데하라의 입장은 당쟁의 참극의 정도를 과 장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화를 당쟁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바꿔 말해서, 이러한 논조는 당쟁의 참극의 정도를 과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한을 길게 잡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사학으로서는 이중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 나 사화는 그 역사적 의미에 있어서 당쟁과는 다음과 같이 확연히 다른 성격을 가 지고 있었다. 첫째, 사화는 훈구파(勳舊派) 대 절의파(節義派: 士林)라고 하는 확연한 구분이 가 능한 집단 간의 옥사(獄事)였으나, 당쟁은 같은 정치 무대 위의 권력 투쟁으로서 집단 구분이 확연하지 않았고 노선도 훈구파와 절의파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둘째, 사화는 대체로 왕위 계승과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승계 이후의 기득권을 위 한 투쟁이었기 때문에 서구적 개념으로 말하면 왕당파 대 재야파의 싸움이라는 성 격이 강했지만, 당쟁은 대체로 왕위 계승과는 무관한 조정 내 정치 집단 간의 권력 투쟁이었다. 셋째, 사화의 가담자 중 사림들은 절의를 중시했던 관계로 연산군(燕山君)과 같은 군주의 포악이나 부도덕성이 쟁점이 되었으나, 당쟁에서는 왕의 도덕성이나 정통성 이 쟁점이 되지는 않았다. 넷째, 사화는 옥사였으므로 패자는 죽고 승자는 살아남는 zero-sum game의 흑백 논 리로서 투쟁의 결과가 매우 참혹했고 싸움도 대체로 당대에 끝났지만, 당쟁은 그 나름대로의 공존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집단의 계보가 전승될 수가 있었 다. 그렇다면 당쟁의 시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당쟁의 시한을 늘려 잡는 이유가 당쟁 의 해악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면, 당쟁의 상한선도 실제로 당쟁이 부 정적인 면을 보이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기산(起算)해야 한다. 즉 당쟁은 발생 당 시인 선조 초에서부터 소위 식민지 사학자들이 지탄하는 해악을 저지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쟁이 보는 이에 따라서 의미 없는 싸움이라고 볼 수 있는 최초의 사건 은 1680년의 경신대출척(庚申大黜斥)이었다. 따라서 의미 없는 일로 허적(許積) 등 남인이 추방당하고 김수항(金壽恒) 등 서인이 득세한 경신옥사를 [해악으로서의 당 쟁] 의 기점으로 보고 탕평책이 실시된 1725년을 마침의 시기로 볼 경우 실제로 당쟁이 의미 없는 싸움을 한 것은 50년에 지나지 않는다. 3) 참극의 과장 당쟁을 비난하기 위하여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구실은 그로 인한 인명의 피해 를 과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식민지 사학자들은 그 참극의 정도를 과장했다. 조 선왕조 후기에는 살육 행위가 결전처럼 전개되었다고도 말하고, 사원(私怨)과 보복 으로 피나는 참극이 일어났다고도 말한다. 사실상 이러한 참극이 조선사에 있어서 발생했던 사실은 있었으나 당쟁과 관련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쟁의 참상을 과장하기 위해 식민지 사 학자들은 조선왕조의 가장 비극적인 정치 현상이었던 사화를 당쟁에 포함시키고자 노력했다. 당쟁은 이미 사화에서 잉태된 것이며,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천주교도의 박해. 순교까지도 당쟁에 포함시킴으 로써 피해의 정도를 확대시키고자 했다. 카(E. H. Carr)의 주장처럼, 역사가가 정확을 기한다는 것은 미덕이기 이전에 하나 의 신성한 의무이다. 따라서 이 참극의 문제에는 좀더 정확한 자료와 논증이 필요 하지 피상적이고도 감정적인 표현으로 치부해 버릴 일이 아니다. 당쟁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무분별한 참극이 아니었음을 입증할 수가 있다. 첫째로, 조선조의 국법이 그와 같은 무분별한 참극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선 정치 적인 변혁에 있어서 대신은 역모가 아니면 죽이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었 다. 이를테면, 정여립(鄭汝立)의 난 당시에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이 연루되었으나 성혼(成渾)은 정철(鄭澈)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라 해서 그 죄를 감하여 귀양보낸 적이 있다. 물론 당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감정이 나 실수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대체로 볼 때 그들의 처신은 조운 륙(趙雲陸)이나 김상철(金尙喆)의 말과 같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 로 .....그들이 자신을 위하여 도모한 것은 적고 나라를 위한 것이 컸다.] 둘째로, 당쟁이 무분별한 참극을 유발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인명 피해를 실산(實 算)함으로써 입증될 수 있다. 당쟁에 관한 통사(通史)라고 할 수 있는 이건창(李建 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등장하는 인물을 헤아려 볼 때 그 이유를 불문하고 죽은 사람의 총 수효는 166명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역모로 죽은 사람이 63명, 기 군망상(欺君罔上)이 2명, 반정(反正) 처리로 죽은 사람이 9명, 그리고 장희빈(張嬉 嬪)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13명이다. 따라서 순수하게 당쟁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 은 79명이며, 여기에는 당쟁으로 인해 자살한 2명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생명은 최고 가치일 수 있다. 그리고 79명의 생명은 존귀한 것이다. 하물며 그들이 정치적 이유로 죽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홉스(Thomas Hobbes)적 사관을 굳이 빌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 간이 군집(群集)하면서부터 권력이 있었고 투쟁이 있었다. 당쟁도 그러한 권력 투 쟁에서 흔히, 그리고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한국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을 둘러싼 희생을 강조함으로써 당쟁을 비하하려 하지만, 인류의 역사상 권력이 있는 곳에 투쟁이 없는 경우가 어디에 있으며 투쟁이 있는 곳에 유혈이 없는 경우가 어 디에 있었는가? 참극의 정도를 말하기로 한다면, 서구라파의 정치사가 더 참혹했다. 이를테면, 프 랑스혁명의 경우를 보더라도 혁명의 와중에서 1792년 하루에 1,300명이 처형되었으 며, 1795년 7월 21일 하루에 왕당파 718명이 처형되었으며, 파리 콤뮨 기간 중 소 위 [피의 주간](Bloody Week)이라고 하는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1주일 동 안에 25,000명 이상이 피살되었으며, 제정 러시아의 암흑기의 소위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이라고 하는 1905년 1월 22일 하루 동안에 150여명이 피살되었다. 정당과 의회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논의함에 있어서 우리는 영국의 헌정사에 지선 (至善)의 가치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영국의 헌정사도 미추(美醜)에 있어서는 우리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토리(Tory: 당시 노상강도단의 이름)와 휘그(Whig: 숫 말)의 발생 배경이 그렇고, 챨스 I세(Charles I)의 처형과 크롬웰(Oliver Cromwel l)의 철권 정치가 또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서구 역사는 민주주의의 역사이고 우리의 역사는 추한 역사라고 스스로 비하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 대목에 관하여 맹자(孟子)의 말씀을 빌리면, [무릇 인간은 반드시 스스로가 스스로 를 모독한 연후에 남들도 그를 모독한다.](人必自侮然後人侮之) -------------------------------------------------------------당쟁과 정당정치 ----------------------------------------------------------------------------- --- 3. 탕평책의 진의 당쟁이 그토록 해악한 것이 아니었다면 당쟁을 무마하기 위해서 시도된 영조(英祖) 의 탕평책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며, 좀더 구체적으로, 탕평책을 시도한 영 조의 진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것은 조선왕조사 또는 당쟁사 전반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조의 즉위 전후의 정치적 상황과 영조의 정치적 입지와 관련된 문제였다. 영조의 선왕인 경종(景宗)은 후사가 없는 데다가 다병(多病)하였으며, 정치적으로 는 노론의 천하이던 시절에 왕위에 등극하였다. 후사를 걱정하던 노론의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현명(李顯命), 판중 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은 왕에게 간하여 연잉군(延?君: 후의 영조)을 세제로 책 봉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대파였던 소론에서는 목호룡(睦虎龍)으로 하여금 노론 4대신의 역모를 조작하여 극형을 받게 함으로써 정가는 다시 소론의 천하가 되었 다. 이를 신축ㅗ임인사옥(또는 신임사옥: 1721-1722)이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세제(世弟)로서 왕위에 등극하게 된 영조는 자 신이 책봉될 당시에 자신을 지지해 준 노론에 대한 [정치적 빚]을 생각하게 되었 고, 기회만 있으면 노론을 신원(伸寃)하고 그들을 다시 등용할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인간적으로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당시에 영조가 노론 재등용의 명분 으로 착상했던 것이 바로 탕평책이었다. 그는 당파를 고루 쓴다는 논리로써 노론을 부상시키고 싶었고 그것이 즉위 원년(1725)의 탕평조(蕩平詔)로 나타났다. 영조는 재위 3년이 되는 1727년에 지난날 임인사옥의 진상을 다시 조사하여 당시 소론의 주모자 목호룡 일파를 처형하고 노론 4대신의 관직을 추복(追復)하는 한편 노론의 정호(鄭澔), 민진원(閔鎭遠) 등을 등용하여 세력을 형성했다.[정미환국] 그 럼으로써 그는 당초에 의도했던 대로 노론을 득세시켰으나 등극 초기에 이들의 정 치 세력은 매우 불안했다. 노론은 외형적으로는 비대하고 강성하면서도 내면적으로 는 취약했다. 더구나 영조는 즉위 초에 선왕인 경종의 사인(死因)에 대한 의혹과 이인좌(李麟佐)의 난(1728) 등으로 인하여 왕권에 대한 심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 다. 그리하여 영조는 제거되었던 소론의 일부 중 이광좌(李光佐) 등을 다시 등용시킴으 로써 외형적으로 강성한 노론을 견제하고 실질적으로는 불안한 정계를 충원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개편을 탕평이라는 어휘로 설명하려고 했다. 요컨대 영조의 탕평책은 그의 왕권 유지를 위한 관심의 표현이었지, 학계에서 보편 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쟁에 대한 혐오감이나 우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남다른 영명함과 정치적 야심, 그리고 사직의 강건함에 관심이 있었던 그로서는 당쟁이란 존재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고, 일당(노론)이 득세할 때에도 왕권이 도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는 노론이 지나치게 득세했을 때 오는 보복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 등극을 전후하여 누구보다도 깊이 당쟁에 연루되었던 영조가 조정의 분열에 대하여 일말의 우려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당쟁에 관한 그의 궁극적 관심은 왕권의 수호였다. 그는 왕권이 약화된 선왕의 치세가 어떠한가를 직접 목격했고,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당쟁의 정치적 후광을 통해서 왕위에 올랐던 자신의 등극 이 그로 인해 약화되는 것을 걱정했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러한 방편으로서의 최선의 선택으로 나타난 제도가 탕평책이었다. ----------------------------------------------------------------------------- --- 4. 당쟁망국론의 허구 당쟁 때문에 조선조가 멸망했다는 주장은 식민지 사학자들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 던 말이며 식민사관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들의 주장인 즉 당쟁은 진실로 국가의 안위나 민생의 평화나 근심[休戚]에 관해서는 걱정한 바 없이 국가를 어려 움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그들이 당쟁망국론을 주장하는 근거는 당쟁이, (1) 사회 계급의 형성과 단합심을 결핍시켰고 (2) 인물 표준의 기준을 상실했고 (3) 윤상(倫常)을 파괴시켰기 때문 이라고 한다. 본시 당쟁이 국가에 어려움을 주었다던 시각이 식민지 사학자들에 의 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당쟁이 발생했을 무렵 전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죽음 을 앞두고 선조에게 보내는 유소(遺疏)에서 [이러한 허위지풍(虛僞之風)을 힘써 제 거하지 않으면 끝내 국가가 구하기 어려운 근심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 고, 이를 들은 이이(李珥)가 그럴 리 없다고 부인했다가 그후 당쟁을 걱정한 바 있 으며, 이중환(李重煥)도 {택리지}(擇里志)에서 당쟁을 개탄한 바 있다. 이들이 우 려한 바가 전혀 근거 없는 사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다소 빗나갔거나 아니면 기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우려는 그후 식민지 사학자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위와 같은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가 하면 당쟁의 긍정적인 가치를 일찍이 인지한 사 람도 여럿이 있다. 이를테면 윤휴(尹紡)는 이미 당쟁의 호오(好惡)가 시비의 대상 이 될 무렵에 붕당을 꺼려 이를 없애 버리려 하다가는 나라가 망하리라는 논리를 편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일제 시대의 일본 학자들 중에서 당쟁을 높이 평가한 예도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나바 키미야마(稻葉君山)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 면, [본시 당론은 사회 문화의 발달에 따라서 생기는 보편적 산물이며 당론이 발생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그 민족의 문화가 저급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론은 문화의 보급에 따라 발생하는 여론 그 자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논리는 당 쟁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특성을 갖는 여론 정치의 한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보다 더 구체적으로, 위에서 말한 당쟁망국론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 한 두 학자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이시이 토시오(石井壽夫)이다. 그의 주장에 의 하면, [붕당의 출현으로 조선은 회춘을 맞이했다.... 그러므로 붕당의 출현은 현대 로 일보 전진한 것]이라고 한다. 그의 논리는 당쟁이 심하여 나라가 기운 것이 아 니라 당쟁이 사라지면서 정론이 없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나라가 기울었다는 주장인 데 식민지 사학자들의 당쟁망국론과는 전혀 다른 시각의 당쟁 평가인 것이다. 당쟁망국론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또 다른 인물은 안자산(安自山: 廓[확])이 다. 1920년대 쓰여진 그의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에 의하면, 당쟁은 인민의 정 치적 성숙을 의미하며 따라서 근대 정치는 당파로 인하여 발전을 이룩했고, 오히려 당파가 진보하지 못하고 두절됨으로써 정치가 쇠퇴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논 리의 근거로써 그는, (1) 당쟁은 군권을 약화시키고 정치인의 권리를 진작시켰다. (2) 당쟁으로 인한 인사의 경질은 정치적 충원을 원활하게 해 줌으로써 정치 무대 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3) 당쟁은 폐해를 구제하고 가부(可否)를 상대하며 중정(中正)의 도(道)를 얻게 하여 결국 진보를 이룩하게 했다. 고 지적하고 있다. 이상의 논거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은 당쟁을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정치 과정론이나 정치발전론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다. 어느 시대의 정치 제도든지를 막론하고 그것은 당대에 부분적인 모순을 내포할 수도 있고, 후대의 사가의 눈에 부정적인 것으로 비칠 수도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당쟁도 마찬가지로 역기능의 측면이 전혀 없었다 고는 말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러한 부정적 측면의 정도인데, 당쟁은 그의 긍정적ㅗ 순기능적 역할에 비한다면 그의 부정적 요소는 통상적인 정치 현상의 범위를 넘어 서는 것은 아니었고, 따라서 당쟁망국론으로까지 확대시킨 것에는 식민지사학의 독 소가 개재된 것이었다. 한국의 통사적 고찰과 사회사ㅗ경제사ㅗ법제사 등 분류사에서 그와 같은 오류가 있 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의 정황으로 볼 때 있을 수 있는 오류였다. 그러나 당쟁이라고 하는 주제에 가장 근접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학에서조차 당쟁의 본의를 진실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타의 분류사가 저지르게 되는 오류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당쟁망국론은 일본 식민지 지배 체제가 한국의 병합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으며, 따라서 당쟁의 논의 과정에서 차지하는 강도도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 --- 5. 당쟁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 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당쟁은 당시의 조선조 사회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언로(言路)였다. 당시의 삼사(三司), 즉 의회 제도가 없던 당시에, 부패한 관리를 탄핵하던 사헌부(司憲府) , 왕의 비리를 간언하던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왕의 자문에 응하던 홍문관(弘文 館)은 언로를 위한 최선의 정치적 구도였다. 이곳에서 오고간 정론을 당의(黨議: 당쟁)라고 말할진대 당쟁은 토론 정치의 조선조적 표현이었을 뿐이다. 그러기에 선 조(宣祖)는 이이와 성혼이 당의에 가담했다는 말을 듣고 전교(傳敎)를 내려 칭찬하 기를, [정말로 이이만 같다면야 당이 있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당이 적은 것이 걱 정이다. 나도 주희(朱熹)의 말과 같이 그대들의 당에 들고 싶노라] 했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 언로와 공론으로서의 당쟁이 탕평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을 때, 조정에서는 언로가 막혀 버리고 말았다. 정언(正言) 한현모(韓顯謨)가 탕평책 으로 인하여 [조정의 대신들이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놓게 된 현실]을 개탄한 것 은 당쟁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인식이었다. 그의 말을 미루어 볼 때 당쟁은 당시의 정치가 취할 수 있었던 유력한 언로였던 것이다. [2] 당쟁은 그 당시로서의 정치 발전의 한 메커니즘이었다. 그것은 당쟁이 활발하 던 시기일수록 그 시기는 태평성세였음을 의미한다. 당쟁이 활발했던 시기일수록 태평성세였던 것은 당의가 활발했던 때일수록 조정은 부패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 다. 그러한 주장의 논거로서는; 첫째로, 당쟁이 가장 활발했던 숙종 연간은 조선왕조 5백년 동안에 가장 흥륭(興 隆)했던 시기였으며, 백성들은 왕조 역사상 가장 평안했고, 그리하여 숙종 바로 그 인물은 왕조 역사상 가장 선정을 베푼 현군으로 숭앙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숙종은 조선왕조 중에서 가장 미약한 존재여서 당쟁이 더욱 심했 다]는 오다 쇼코의 논리는 사실과 다르다. 둘째로, 탕평책이 자리잡게 되고 당쟁이 사라지기 시작한 영ㅗ정조 이후의 시기는 곧 조선왕조의 낙조가 깃들이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 다. 오히려 조정에 추상같은 정론이 사라지고 삼정이 문란해지면서부터 순ㅗ헌ㅗ철 종의 몰락의 시대가 찾아 온 것이다. 탕평책은 조정에서의 무정치 현상(apolitical phenomenon)을 유발했다. 그러므로 당쟁이 심하여 나라가 기운 것이 아니라 당쟁이 없어지면서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3] 당쟁은 조선조의 정치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한국적 유형의 정당이었다. 역사적으로 유형은 달랐지만 각 나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정당 형태를 가지 고 있었다. 구양수(歐陽修)의 고백처럼 [붕당은 예로부터 있었던 일이며... 자연스 러운 이치였다.] 이 점을 가장 투철하게 인식한 사람은 율곡(栗谷)이었다. 그는 이 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 쓸 만한 선비는 모두 동서의 색목(色目)에 들어 있습니다. 이른바 <동인> (東人)이란 것은 대부분 연소한 신진을 가리키는데, 선을 행하는 데에 뜻을 두고 나랏일을 계획하는 데에 용감하여 성심이 바야흐로 성(盛)하니 이는 마땅히 이끌고 도와 부식(扶植)하며 재제(宰制)하고 말라서(裁成) 이루어 주어야 할 것이요 배척 하고 눌러서 그 뜻을 저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른바 <서인>(西人)란 것은 대 부분 선배 구신을 가리키는데 변고를 겪고 권간(權姦)을 힘껏 제거하여 공로가 사 직에 있으니 이는 마땅히 권대(眷待)하여 변하지 말며 결점을 감싸고 장점을 드러 내야 할 것이요, 멀리 배척하여 그 마음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율곡의 지적인즉 동인은 진보주의자이며 서인은 보수주의자라는 뜻인데, 그후 안자 산도 이에 동의하여 노론과 북인은 변통적 자유 방임을 추구하는 자유당과 같은 것 이고 소론과 남인은 절의적 고집을 지킨 보수당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당 쟁은 일본 식민지사학에서 지탄하고 있는 것처럼 망국적인 정치 악은 결코 아니었 으며, 한국정당사의 초기적 형태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