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호연지리 �) <ip216.tacoma18.w> 
날 짜 (Date): 2000년 5월 25일 목요일 오후 03시 47분 10초
제 목(Title): 한홍구/ 현대사의 치욕, 박정희


현대사의 치욕, 박·정·희 
베트남전 파병문제를 제쳐놓고선 그의 시대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 

 (사진/한홍구/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의 보도의 충격 뒤에 남는 것은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이 꼭 베트남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가에 대한 의문, 아니 
회한이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에 꼭 가야만 했는가?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압력을 
이야기한다.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당시의 한국 
상황을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설명이다. 그러나 역시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파병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마지 
못해 응했던 사실을 기억하자. 더구나 한국은 당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남북의 
대치 속에서 독자적으로 국방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외국군대에 의존하고 있는 
처지였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밀사 황태성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경위부터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먼저 
제안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당면 
과제는 미국의 신임을 얻는 일이었다. 미국의 신식민지적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인사들로서는 미국의 지원을 얻는 것이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일이었지만, 박정희의 경우는 그 이해의 정도가 남달랐다. 왜냐하면 
박정희의 좌익 전력 때문이었다. 쿠데타 성공 뒤 박정희는 자신의 좌익경력에 
의구심을 버리지 않는 미국의 신임을 얻는 데 전력을 경주했고, 마침내 미국의 
초청을 받아내어 1961년 11월 중순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의 일정을 잡는 데 
성공했다. 


 (사진/61년 11월14일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알현’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파병에 대한 미국의 압력이 있을 수 없던 이때,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다)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와 케네디 사이의 정상회담은 일부 외국언론에 의해 
종주국 황제의 식민지 총독에 대한 면접시험 같았다는 비아냥을 받았는데, 이 
회담을 코앞에 둔 1961년 10월 박정희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김일성이 
이북정권의 무역성 부상을 지낸 황태성을 박정희에게 밀사로 파견한 것이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으로 1946년 10월민중항쟁에 연루되어 살해된 
박상희(김종필의 장인)의 절친한 친구로써, 박정희가 어린 시절부터 몹시 따랐던 
인물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한-미정상회담을 앞둔 박정희는 황태성이 서울에 
왔다는 소식에 그를 만나는 대신, 그의 체포를 지시했다. 박정희는 황태성을 
만나지 않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미국의 정보당국은 박정희가 극비리에 황태성을 
3차례 만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에 
내밀 카드가 없어 고심하던 박정희에게 밀사 황태성의 등장은 악재 중의 악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케네디에게 제안한 것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었다. 
이때는 아직 미국이 베트남전에 전투병력을 파견하여 대규모 개입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기 이전이었다. 그러니 파병에 대한 미국의 압력이란 것은 있을 수 없는 
때였다. 그런 때에 박정희는 “미국이 너무 혼자서 많은 부담을 지고 있다”면서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 준다”는 명목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한 것이다. 이 뜻밖의 제안에 케네디는 박정희와 예정에 없던 
정상회담을 또한번 가졌고, 베트남 파병 제안으로 박정희가 자기를 아주 기분좋게 
해주었다고 치하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군부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였다. 5만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베트남의 정글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을 대신해서 피를 흘리고 있는 상황에서 3선개헌이나 1972년의 
유신친위쿠데타와 같은 박정희의 권력강화 기도는 미국의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박정희 정권 말기 한미관계가 악화된 뒤 열린 미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전 주한미국대사 포터는 중앙정보부와 박동선의 로비 등 
‘의심스러운 한국인들의 활동’에 대해 미국이 효과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했던 
것도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참작한 행정부 고위관리들의 관대함 때문이었다고 
증언했다. 

최근 들어 박정희에 대한 신화가 부활하는 우려할 만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 
복고적 향수의 핵심은 박정희만큼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다른 
전직 대통령들, 특히 IMF위기를 불러 잠자던 박정희 신화를 불러일으킨 김영삼과 
비교하면 박정희는 충분히 유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비교의 대상이 왜 꼭 
정상적인 헌정사를 거치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이어야 하는가? 더구나 
박정희 시대는 아직 연구가 잘 안 된 분야이며, 베트남 파병이라는 박정희 정권 
기간의 일대 사건,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사상자를 낸 이 사건은 놀라울 만큼 
연구가 되지 않았다. 과연 베트남 파병문제를 제쳐 놓고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베트남전 파병 결정의 도덕적 문제는 
잠시 미루어 놓더라도 박정희가 과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유능한 대통령이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를 예찬하는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 특수, 주한미군의 베트남 이동배치 저지, 
한국군 현대화 등을 들어 베트남 파병을 통해 한국이 많은 이익을 거두었다고 
주장한다.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한국은 이른바 베트남 특수를 통해 
약 10억달러 내외의 외환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재정적 수입에 대한 기대로 
군대를 파견한 것은 우둔한 상업주의”라는 당시 언론의 비판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우리가 벌어들인 10억달러를 강조하는 주장은 참 이상한 계산법을 
택하고 있다. 즉, 우리가 벌어들인 것만 계산할 뿐, 우리가 치러야 했던 대가나, 
파병을 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거둘 수 있었던 경제적 성과를 의미하는 
기회비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참전군인들의 핏값조차 덤핑처리 

 (사진/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박정희가 취한 태도는 국가의 위신을 책임지는 
통치자로서의 자질과 책임감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베트남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한국이 배타적으로 누린 수입은 아마 참전 
장병들이 피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받은 급여일 것이다. 한국군이 주둔비, 
인건비, 장비 등을 전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지급받은 사실은 국제사회에서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당시 외무장관 이동원은 
이미 한국은 비동맹국가로부터 미국에 예속된 국가라는 비난을 받아왔기 때문에 
더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런 강심장의 외무장관이었지만, 그는 
박정희에게 어차피 파병하기로 한 이상 미국으로부터 최대한 받아낼 것을 
받아내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미국이 어려운 틈을 타서 우리가 
타산적으로 나간다면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라는 입장을 보였다. 

누구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인지 모를 박정희의 태도가 낳은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군 사단장인 소장이 미국으로부터 받는 월 급여가 354달러인 반면, 
필리핀군과 태국군의 소대장인 소위는 각각 매월 442달러, 389달러를 받았다. 일반 
사병들의 경우는 남베트남군의 월 급여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또한 미국은 한국군의 파병으로 자기네의 인명손실을 줄인 것은 물론, 
좀더 많은 깃발을 추구한 정책에서도 큰 성과를 얻었다. 미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막대한 비용절감 효과를 보았다. 주월한국군 1인당 유지비가 연간 5천달러인 
반면, 미군 1인당 유지비는 1만3천달러였으니, 그 차액 8천달러를 한국군 파병 
연인원 30만으로 곱하면 미국은 무려 24억달러의 경비절감 효과를 본 것이다. 파병 
자체의 정당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단 자기나라 군대를 파병했다면 그들의 
생명보호와 정당한 처우 보장에 힘써야 하는 것이 대통령의 책무가 아닐 수 없다. 
젊은이들을 사지로 보내면서 그들의 피값조차 덤핑해버린 박정희가 유능한 
대통령일 수 있을까? 

그러면 박정희는 왜 동일계급을 비교할 때 필리핀군이나 태국군의 30∼40%에 
불과한 싼값에 우리 젊은이들을 베트남으로 보냈을까? 미국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정치적 이유 이외에도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면 당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한국이 외환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박정희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결정할 무렵 한-일국교정상화를 졸속으로 마무리했다. 박정희는 
36년간의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인 청구권 문제를 일본군 성노예(정신대)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은 채 무상 2억달러, 유상 3억달러의 형편없는 헐값에 끝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본으로부터 배상받았어야 할 금액을 받아내지 못하고, 
그걸 보충하려고 젊은이들을 사지로 보낸 박정희가 유능한 대통령일 수 있을까? 


주한미군을 붙들어매지도 못했다 


베트남 파병결정으로 주한미군의 베트남 이동배치 저지와 한국군 현대화를 
이루었다는 주장도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박정희는 1967년 대통령선거 
당시 우리가 베트남에 군대를 안 보내려면 안 보낼 수 있었지만, 그랬다면 
주한미군의 상당 부분이 베트남으로 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이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할 기회는 없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군의 
대규모 파병이 주한미군을 붙들어매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1970년 박정희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한국정부와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주한미군 1개사단의 철수를 통보하고, 이듬해 철수를 단행했다. 이 무렵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북한을 극도로 자극하여 1968년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이 일어나고, 군사분계선에서의 남북간의 
무장충돌이 급증한 직후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단행한 것은 박정희가 가장 주력했던 주한미군의 현상유지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증명한 것이다. 또 한국군 현대화도 베트남 파병으로 일부 이루어지긴 
했지만, 실제 현대화 작업이 단행된 시기를 보면 베트남 파병의 대가라기보다는 
주한미군의 일방적 감축에 대한 보상이라는 성격이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 파병으로 우리가 치른 대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파병이 없었다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5천명의 죽음, 1만명의 부상자, 2만명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 등 
인명피해이다. 최근 <한겨레21>의 보도로 인해 세상에 알려진 민간인 학살의 멍에 
또한 우리가 치르고 있는 엄청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사상자 문제는 박정희가 
인명피해를 ‘무릅쓰고’ 파병을 단행했다고 치자. 고엽제 문제는 당시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다고 치자. 그러나 민간인 학살은? 

수만명의 전투병력을 보내면서 민간인 학살의 발생가능성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런 통치자는 바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군은 일본군의 유격대 
토벌전술을 이어받아,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이른바 공비토벌 과정에서 
광범위한 대비정규전(對非正規戰) 경험을 가진 군대였다. 박정희가 미국에 대해 
베트남 전장에서의 한국군의 유용성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군의 대비정규전 경험은 거창, 산청, 함양 등 숱한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의 쓰라린 역사를 겪으며 축적된 것이었다. 자기 나라에서조차 민간인에 대한 
오인 학살이 빈발했던 한국군의 전술적 특성상, 낯설은 남의 땅에서 민간인 학살 
가능성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부락에 대한 수색과 섬멸작전은 베트남의 
미군들이 극력 기피했던 작전이었다. 그러나 용병이라는 위치상, 나아가 미국에 
대한 파병의 정치적·군사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박정희의 의지 때문에 한국군은 
“부락은 모든 적활동의 근거지”이며, “게릴라의 보급, 인적자원 및 정보수집의 
근원은 부락에 놓여 있으며 베트공 하부구조의 기반은 부락과 주민”이라는 전제 
아래 이 작전에 적극 투입되었다. 


참전군인 전체가 학살자 취급 받아선 안 돼 


그러나 박정희나 한국군 수뇌부가 민간인 학살의 가능성을 전혀 예상치 못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훈령의 존재는 이를 시사한다. 그러나 설혹 우발적으로라도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을 때, 박정희가 적극적으로 이의 재발방지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달랑 이 훈령으로 학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는 좋게 말하면 
순진한 것이고,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군통수권자로서의, 그리고 국가의 위신을 
책임지는 통치자로서의 자질과 책임감이 의심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박정희가 민간인 학살을 전혀 몰랐다면 이는 박정희의 군에 대한 장악능력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만에 하나 박정희가 민간인 학살을 
충분히 예상하고서도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고 파병했다면, 또는 주로 한국군의 
파병 초기에 발생하여 수천명의 희생자를 낳았다는 수십건의 민간인 학살을 수년간 
방치했다면, 이는 박정희 자신의 말처럼 그의 무덤에 침을 뱉는 것으로 끝날 일은 
결코 아니다. 

지금까지 약 80여건의 학살 사례가 발굴되었지만, 참전용사 전체가 학살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 공포와 혼란과 광기의 현장에서도 대다수의 참전용사들은 
민간인 보호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월한국군사령부의 ‘3훈5계’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김 소령이나 최 일병이 잘한 일도, 박 대위나 이 병장이 잘못한 
일도 다 따이한이 잘했다 못했다라고 불리어지게 되어 있다. 민간인 학살이 
보도되면서 본의 아니게 학살자의 의심을 받게된 30만 참전용사들의 이 한맺힌 
절규에 지하의 박정희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누가 우리를 그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는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