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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Tao ( 烏有先生)
날 짜 (Date): 2000년 3월 22일 수요일 오전 12시 07분 40초
제 목(Title): 변상섭 신규탁 대담에 대한 효산스님 기고


 
본지 제1758호에 실린 ‘선어록, 해설 대상인가 아닌가’를 주제로 
한‘변상섭·신규탁 대담’에 대해 느낀 바를, 인천 연수난야에서 안거중인 
효산스님과 충주대 박영록교수가 각각 본지에 보내왔다. 건전한 토론·논쟁 문화가 
교계에 정착되기를 기대하며 글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공안의 의지를
破說하여 손상시키지 않고
선어록을 온전히 번역·해설해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해설해도 무방하다”

선어록은 해설의 대상인가 아닌가. 이에 대한 변상섭거사와 신규탁교수의 논지는 
우선 선어록을 번역할 수 있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해설할 수도 있는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서로 엇갈린다.

변거사는 선의 세계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이고 언어도단(言語道斷)과 
심행처멸(心行處滅)이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가 나아갈 구경처이므로 화두는 
해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신교수는 인간의 언어와 문자로 쓰여진 문헌은 다른 사람의 언어와 문자로 다시 
환원(번역)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그 의미를 바로 전달하려면 그 말의 배경이나 
시대상황을 알아야 하므로 해설이 불가피함을 재천명하였다.

이러한 두 분의 견해는 나름대로 일면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공안에 대한 
모든 해설을 파설로 인식하여 본참공안을 참구하는데 저해되는 요인으로 보고 있는 
변거사는 수행자가 실참실수(實參實修)하는 입장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간화선의 수행관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변거사에게서 일관되게 느껴지는 점은 화두를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한정하여 언어의 접근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담의 모두에서 “스스로 수행해서 도나 선의 세계를 보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라고 밝혔듯이, 이를 뒤집어 보면 도를 체달한 사람은 선어록을 
설명할 수도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에 신교수는 학문적인 입장에서 선어록의 정확한 이해를 확장시키는데 뜻이 
있기 때문에 번역과 해설에 정당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만일 공안의 
의지를 파설(破說)하여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선어록을 온전히 번역하고 해설하여 
그 뜻을 독자에게 바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해설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둘을 다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하나를 선택하여 깃발을 
들어주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대담에서 인용한 공안, 곧 마조스님이 남악스님의 회상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보림한 경계를 드러낸 부분을 보면, 
“자종호란후(自從胡亂後) 삼십년불소염장(三十年不少鹽醬)”을 “호란을 겪은 
뒤로부터 30년 동안 소금이나 장은 부족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변거사는 “난리통 30년에 소금과 장은 줄여 본 적은 없습니다”라 번역하고, 
신교수는 30년을 일생으로 해석했다. 나는 여기에서 30년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회양선사는 서기 744년 68세를 일기로 열반하셨는데, 
당시 마조선사의 나이는 36세에 불과했다.

이 두 분이 간접적으로 문답한 시기를 최대한 늦춰서 회양선사가 입적하신 해로 
잡아도 이 30년을 마조선사가 보림한 기간으로 가정한다면 6세 때에 견성한 것으로 
된다. 

6세에 견성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여기에서 30년이란 
마조대사가 보림한 기간과 일치시켜 이해할 수는 없다. “난리통 30년에”라 
번역하면 호란, 곧 정신적인 갈등을 30년 동안이나 겪었다는 뜻이 되며, 30년을 
일생으로 해석하는 것도 너무 단세포적인 이해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30년이란 말에 다른 뜻이 숨어 있지만, 그 뜻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나의 분수 
밖의 일이어서 여기서 그만 두기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확실히 인식할 것은 선사들의 어록을 혜안이나 법안이 
열리기 전에는 바로 번역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변거사와 신교수는 선어록의 번역에는 공감하고 해설에는 견해를 달리 했으나, 
선어록은 안목을 갖추지 못한 학자라면 올바르게 번역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며, 더구나 범부의 분상에서 연지 찍고 분 바르며 이를 해설한다는 것은 
장님이 다른 장님에게 길을 인도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이상의 논지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선어록은 
깨달음을 증득한 종사들에 의해서만 올바르게 번역되고 해설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이나 선어록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불사에 참여하는 분들 가운데 안목을 
갖춘 종사를 갖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서는 차선의 방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안목을 갖추지 못한 학자분상에도 선어록을 해설하는 것이 
수행자에게 도움이 되는가 폐해가 되는가를 주안점으로 상정하고 이 토론에 대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도올선생은 동서양의 광범한 학문지식을 밑천 삼아 천박하고 삿된 불교의 이해를 
감추면서 〈벽암록〉 일부와 〈금강경〉을 해설한 바 있다. 그 번역본을 보고 
찬탄한 이도 있고, 분개하여 비방을 금치 못한 이도 있을 것이다. 

올바르게 번역한 공덕으로 도올선생은 천상에도 태어날 수 있을 것이요, 삿되게 
해설한 죄업으로 지옥에도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나는 범부들의 번역과 해설은 틀린 부분이 많이 있을지라도 화두를 
참구하는데 장애가 되는 폐해보다 신심을 일으키고 발심을 도와 조도(助道)하는 
역할이 더욱 크다고 생각하기에 선어록이 번역되고 해설되어 널리 유통되는 것을 
지지한다. 단지 겸허하고 신중한 자세를 갖추고 정성을 다하기를 요구한다.
효 산 인천 연수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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