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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Konzert (#$%&~_^\{})
날 짜 (Date): 2000년 1월  3일 월요일 오후 01시 45분 49초
제 목(Title): [펌] 상고사 연구가 崔泰永 박사 



<특별대담>상고사 연구가 崔泰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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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연구가이자 서울대 법대 초대 학장을 지낸 최태영(崔泰永)옹의 주민
등록번호 앞자리는 000328이다.  1900년 3월 28일생.  새천년에 1백수(壽)를 
맞는 그는 현역 최고령 학술원회원으로 한국상고사연구에 젊은이 못지 않은
정열을 기울이고 있다.  최옹의 삶은 20세기 한국 격동사 그 자체이다.  황해도 
은율출신으로 백범 김구선생의 광진학교 제자인 그는 1919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또 김구, 정인보, 안재홍, 언더우드 등 굵직굵직한 인물들과 친분을 나누었던 
그는 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깊숙이 간여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는 일본 메이지대에서 법철학, 상법을 공부하고 보성전문학교 법과 
교수, 경신학교 대표설립자 겸 9대 교장(1939∼46), 부산대 인문과학대 학장
(1946년), 서울대 법대 초대학장(1947∼49), 청주대 대학원장(1966∼77)을 
거치며 후진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역사연구 저서로는 두계 이병도박사와 
함께 쓴‘한국상고사입문’(1989),‘한국상고사’(1990) 등이 있다.  
한국상고사 연구가로 반(反)식민사관에 앞장서고 있는 최옹을 손보기
(孫寶基·72·단국대 박물관장) 전연세대 석좌교수가 만나, 지난 20세기 
역사와 새천년에 우리 민족이 가져야할 역사의식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 1백수를 눈앞에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정하십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글을 읽긴 하는데 돌아서면 잊어버리는게 많습니다.  사람도 아니지요. 
  얼마전 중국정부가 언제든 광개토왕비를 조사하러 오라고 초청했는데도 
  장거리 여행은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지난 85∼88년 일본을 방문했던 
  것이 마지막 해외여행이었지요.  이제 3월28일이 되면 만1백세가 됩니다. 
  우리 집안에 원래 장수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97세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김도 매고 바느질, 등산까지 하셨지요.  아내는 25년전 먼저 
  갔지요.” 


- 법학자로서 상고사 연구에 몰두하시게 된 점이 특이합니다.  특별한 계기
  라도 있었습니까. 
       
  “간단해요.  해방직후 고시법령 제정작업에 참여하게 됐는데, 나는 미래의
  법조인들이 역사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선 시험과목에 국사를 첨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요.  나와 가까웠던 백낙준씨도 반대했는데,이 문제를 
  두고 1년을 싸워 결국 뜻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최근 고시에서 국사과목이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6.25전쟁도 상고사 
  연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통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월북·납북·
  사망하는 바람에 후학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사람이 너무나 부족했고, 
  그나마도 일본역사를 공부한 사람뿐이었지요.  그것이 내가 역사학을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잘못된 학설과 거짓을 바로잡기 위해선 차라리 내가 
  차고 나서야겠다는 심정이었던 셈이지요.  법학을 버리고 역사학 연구를 
  공식 선언한 것은 77세때입니다.” 

       
- 역사학 중에서도 굳이 상고사와 단군을 연구주제로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린시절부터 단군이 사람이란 것을 의심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상식이었습니다.  역사학자이자 
  친구였던 이병도씨도 사망전에 결국은 내 주장을 인정했어요.” 

       
- 성장기는 어땠습니다.  한국 법학의 선구자이면서도 공직을 전혀 갖지 
  않았던 전력이 이채롭습니다. 
       
  “내가 9남매 중 맏이인데 어린시절 꽤 공부를 했던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에게 내 공부를 끝까지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셨지요. 
  그래서 책은 마음놓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법학을 공부한 것은 사실 
  아버지의 뜻이었지요.  일본 유학을 떠나기전 내게 서양철학과 영미법을 
  공부하고 돌아오라고 명령하시더라구요.  앞으로 세상은 영국과 미국의 
  세상이 된다고 하셨는데 돌이켜보면 참 선견지명이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계속 있었다면 선생이 됐을텐데, 일본에 대해 정떨어져 결국은 
  귀국했지요.  이승만 전대통령이 법무장 관직을 맡으라고 제안한 것을 비롯해 
  여러차례 관직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는데 내 성질에 안맞아 모두 거절했고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입니다.  주변 친지들은 내가 살살 잘 피해다닌다고 
  재미있어 하기도 해요.  해방후 혼란기와 6.25전쟁때에도 막다른 골목에서 
  거짓말을 해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지요.  내가 특별히 한것도 없는데 
  우파로 몰려 처형직전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살아남아 
  비루하긴 해도 좋다는 사람도 있어요.  거짓말해서도 천당갈거라나요(웃음).” 
       

- 해방후 헌법제정 과정에도 깊숙이 참여하셨지요. 
       
  “그렇습니다.  1948년 9월 법전편찬위원회가 조직됐는데 민법, 상법, 형법,
  소송법 등 기초법전의 초안작업을 담당했습니다.  초대 위원장은 김병로
  (金炳魯·1887∼1964) 초대 대법원장, 부위원장은 이인(李仁·1896∼1979) 
  초대법무부 장관으로 일제시대 항일지사들의 무료변호를 많이 하신 분들
  입니다.  두 분이 나를 위원회에 끌어들였지요.  위원회는 직제상 대통령 
  직속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애당초 내가 헌법초안을 작성하게끔 되어
  있었는데, 국회 통과과정에서 이승만 전대통령의 영향으로 내용이 바뀔 
  것이 뻔했으므로, 내 소신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헌법이 제정될 바에는 
  차라리 처음부터 손을 안대는 것이 속 편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법전
  편찬위원회의 하부조직으로 구성된 헌법기초 분과위원회 위원 유진오
  (兪鎭午·1906∼87)씨가 헌법초안을 작성하게 된 것입니다.  유진오씨는 
  내가 보성전문학교 교수였을 때인 1932년 전임강사로 들어왔던 사람입니다.” 
       

- 우리 민족의 지난 1백년 역사에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한일합방, 6·25전쟁 등 많지요.  그러나 내가 특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8·15 독립과정입니다.  그 때 우리가 단호하게 밀고 나갔더라면 
  분단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공, 소련과의 관계도 지금과 달라졌을 
  겁니다.  그것이 아쉽지요.” 
       

- 최근 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면서 단군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로서 단군을 어떻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단군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보시나요. 
       
  “앞서 밝혔듯이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민족이면 누구나 어린아이때부터 배웠던‘동몽선습’이나
  ‘세종실록’ 등 각 고전에도 단군기록이 나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역사기록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판소리할 때도 그 긴 내용을 한자도 바꾸지 않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역사기록은 더욱 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 이병도박사와의 관계를 좀 자세하게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이박사와는 일본 유학시절 경신학교 동창생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서울대 
  법대학장으로 있을때 그는 사학과 교수로 있어서 더욱 가까워졌지요. 1977년 
  출간한 ‘서양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의 서문도 이병도 박사가 썼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단군조선 등 한국사에 대해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1989년 펴낸 
  ‘한국상고사 입문’은 둘이 함께 쓰기도 했습니다.” 
       

- 일본에 남아있는 단군관련기록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여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젠 일본에서도 단군을 한민족 역사의 시발점으로 인정하는 학자가 
  많습니다.  우리 학술원에서도 몇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내 의견을 
  지지하는 분위기입니다.  최근 학술원회보를 통해 일본에 단군기록이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어요.  송곳 끝이 들어간 셈이지요.  1988년 일본 
  후지산 기슭 대밭속 지하에 민간학자가 조성한 철제 문고(일명 궁하문고·
  宮下文庫) 안에 들어가 일본사람이 작성한 단군관련 비서(秘書)가 한자도 
  상하지 않은채 보관돼있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1천2백여년전 단군 후손인 백제인이 일본에 와서 일본 천황이 됐다는 것
  이었어요.  그러나 그 학자 후손들은 현재 문고의 존재자체를 딱 잡아떼면서 
  내가 망령이 들어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 왕실소장 
  기록에도 단군 73대손이 일본 신무천황이 됐다고 나와있습니다.” 
       

- 2000년대를 맞이한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식민사관 청산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조금만 더 산다면 다른 것 다 그만두고 식민사관을 청산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회고록 집필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지요.  내가 직접 
  쓰기는 어렵고, 평소 알고 지내던 언론인 출신 작가에게 구술하는 형식으로 
  작업 중입니다.” 
       

- 역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사란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민족에게 참고가
  되기도 하고 긍지가 되어야 하지요.  요즘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무조건 
  일본을 모방하려 하는데 그래서는 제대로 역사가 설 수 없습니다.  한가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새 천년을 맞이해 우리의 고대사를 복원하고 우리가 
  주인으로 시작한 역사, 곧 환웅단군의 역사를 제대로 찾아서 세계에 전하는 
  일입니다.  고대사부터 일제식민통치까지, 그리고 나아가 통일까지 왜곡되지 
  않게 책으로 써서 2002년 월드컵때 한글, 영어, 불어, 독일어, 일본어 등으로 
  출판해야 합니다.  그 작업을 위해 고대, 중세, 근세의 역사학자, 사회학자들이 
  힘을 합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 내 있는 힘을 다하고 싶습니다.”  
       

  <정리=오애리기자> 







Lingua Franca [It. = 'Frankish tongue']: a mixed language or jargon used in 
the Levant, consisting largely of Italian words without their inflexions.  
Also, transf., any mixed jargon used for intercourse between people speaking 
different langu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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