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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illes (reverseyed)
날 짜 (Date): 1999년 10월 15일 금요일 오후 06시 03분 55초
제 목(Title): [캡쳐]진중권/전쟁,대지의 핏자국을 지워야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 肝膽相照)  
날 짜 (Date): 1999년 10월 15일 금요일 오후 04시 07분 27초
제 목(Title): 진중권/ 전쟁,대지의 핏자국을 지워야한다 


②전쟁/대지의 핏자국을 지워야 한다 
광기와 오만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세계대전… 정신적 미성숙을 어떻게 극복할 건가 



오토 딕스의 그림으로 3단 제단화 <전쟁> 중 가운데 장면. 원래 이 그림의 왼쪽엔 
새벽안개를 뚫고 전장으로 향하는 병사들의 모습, 오른쪽에는 동료의 시체를 
끌어안은 딕스의 자화상, 그리고 아래쪽으로는 밤에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새벽안개를 뚫고 출정하여 오후에 저 아비규환을 
연출하다 저녁에 쓰러져 밤에는 시체가 되어 무덤에서 잠드는 병사의 일상. 그림 
속엔 한 병사의 시신이 포탄에 날려 철근골조에 걸려 있다. 기관총 자국으로 
벌집이 된 병사들. 인간의 핏물과 하늘의 빗물이 하나로 어울어져 대지의 흙탕을 
이룬다. 


인간은 왜 그런 부조리극을 연출했나 


1차대전은 참호전이었다. 철조망이 깔린 기다란 참호 속에 적의 공격을 예고하는 
포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호루라기 신호와 함께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소총과 기관총 사격. 공수를 바꾸어가며 벌이는 이 무의미한 공방전 
속에서 쓰러진 시체들은 쏟아지는 폭탄을 맞아 사방에 흩어지고, 잘 그을러진 
내장과 고깃덩이들은 새까맣게 몰려드는 쥐떼들에 풍성한 만찬을 마련해준다. 
구역질날 정도로 즉물적인 묘사. 그림을 왜 이 모양으로 그렸느냐는 질문에 딕스는 
대답했다.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 

1차대전은 ‘수수께끼’ 같은 전쟁이라고 한다. 사실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과 
유럽의 주요 국가가 벌인 대살육전 사이에 무슨 필연적 연관이 있단 말인가? 어떤 
이에게 이 전쟁은 자본주의의 본질에서 비롯된 역사적 필연이겠지만, 사실 내게도 
전쟁은 그야말로 ‘부조리’다. (하긴, 세상에 합리적인 전쟁도 있단 말인가?) 왜 
인간은 이 부조리극을 연출했던 걸까? 여러 가지 변명이 있을 게다. 독일에 
러시아와 프랑스의 접근은 자기를 양쪽에서 압박하는 군사적 도발일 테고, 영국과 
프랑스엔 프로이센의 군국주의가 군사적 협박이었을 게다. 그리고 물론 양측 
모두에 상대방의 군사행위는 도발이며 자기 행위는 정당방위일 테고…. 

나는 그보다는 그 부조리극의 정신적 요인에 주목한다. 가령 1914년 독일의 
대학교수들이 발표한 성명서의 한 구절. “군복무는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의무감을 
길러주고, 자의식을 주며, 자신을 전체에 복종시키는 진정한 자유인의 명예감을 
준다.” 당시 유럽 전체는 이렇게 광적인 애국주의적 전쟁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술집의 노인들은 장군이나 된 양 그날의 전세를 논하고, 교단의 선생은 학생들에게 
조국을 위해 펜 대신 총을 잡으라 선동하고, 젊은이들은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마냥 
들뜬 마음으로 전장으로 향했다. 지식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낭만주의적 
기사문학 속에 나오는 전쟁의 이미지를 머리에 담고, 올해 성탄절은 승리한 전쟁의 
영웅이 되어 가족과 함께 보내리라는 야무진 꿈을 갖고…. 

4년을 끈 이 전쟁의 불 속에서 탄생한 것은 결국 볼셰비즘과 파시즘이라는 두개의 
극단이었다. 역사의 필연을 믿는 사람들에게 볼셰비키 혁명은 세계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가 끊어지는 현상일 게다. 하지만 러시아 민중은 어쩌면 혁명을 원한 게 
아니라 그저 전쟁에 신물이 났을 뿐인지도 모른다. 외려 필연적인 것이 있었다면, 
종전의 염원을 교묘히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시키려면 독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아니었을까? 어쨌든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동시에 그것을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연성으로 보는 이데올로기적 해석의 승리이기도 했다. 

한편, 독일인에서는 다른 극단이 성립한다.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패배의 경험을 그들은 엄청난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공하게 된다. 
복수의 타깃은 먼저 위대한 조국을 패배로 이끈 내부의 적, 즉 계급을 위해 민족을 
저버린 공산주의자들, 국가를 깡통으로 보는 이기적인 자유주의자들, 이 두 흐름의 
배후인 유대인들에게 돌아갔다. 새로운 영웅 지그프리드(=승리를 통한 평화)를 
만난 독일은 민족단합을 해치는 자들을 제거한 후, 그 순도 높은 획일성을 가지고 
재무장의 길을 걷게 된다. 독일민족의 지도자는 베르사유 체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자기에게 철십자 훈장을 주었던 그 전쟁의 패배를 실천적으로 
보복해나가기 시작한다. 


참호전은 끝나고 무자비한 전격전으로… 


2차대전에서 프랑스가 싱겁게 무너진 것은 기술의 열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낡은 
전쟁관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군사전문가들은 강철과 속도의 예술, 미래파의 
그림을 보고 거기서 다가올 전쟁의 이미지를 파악했어야 했다. 그들이 무한한 
자부심으로 ‘위대한 전쟁’이라 부르는 1차대전은 참호전이었다. 그래서 다음의 
전쟁 역시 그들은 참호전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철옹성으로 믿었던 
‘마지노선’이라는 이름의 기다란 참호는 항공기와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전격전(電擊戰) 앞에선 무용지물이 되고, 위대한 프랑스의 절반은 나치에 
협력한다. 1차대전의 영웅에서 파시스트 부역자로 전락한 페탱은 이 치욕의 
상징이다. 

전차와 항공기의 기동성을 이용하여 번개처럼 때리는 전격전. 프랑스에 이어 
영국에 대한 공격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또 하나의 전격전을 
결심한다. 전쟁수행을 위해서는 바쿠의 유전지대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볼셰비즘에 
대한 광신적 수준의 이념적 적대감이 그 무모한 공격의 동기였다. 어쨌든 이로써 
1차대전이 낳은 두개의 극단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다. 
소련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한 히틀러의 전격전은 그 황량한 러시아 벌판의 눈보라에 
휩싸여버린다. 광신적 인종주의와 반공주의의 아성은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된다. 

2차대전은 파시즘에 대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승리였다. 엘베강에서 만나 
악수를 나눈 뒤 미국과 소련은 곧바로 적대관계로 돌입해 전후 냉전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냉전(冷戰)은 열전(熱戰)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려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소규모의 대리전을 수반한다.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 불렀다. 전쟁은 극단을 낳는다. 세계대전 속에서 탄생한 극단들 중 
하나는 2차대전으로 몰락했다. 냉전이라는 이름의 극단은 최근에 비교적 조용하게 
몰락해갔다. 하지만 이 극단의 시대가 인간의 정신에 새겨놓은 흔적은? 전쟁은 
극단을 낳고, 극단은 정신에 극단주의를 남긴다. 적과 아를 가르는 이 
진영나누기의 멘털리티는 쉽게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성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에게 세계대전으로 시작된 20세기는 회의의 시기였다.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믿었던 과학기술이 외려 인간을 압살하는 수단으로 
입증되지 않았던가. 속도와 기술발전을 맹신했던 세기초의 미래파 예술가들은 
앞으로 펼쳐질 이 눈먼 세기의 예언자들이었던 셈이다. 가령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간 독가스의 발명자 하버는 전후에 전범(戰犯)으로 기소되는 동시에 노벨상 
수상자로 지명된다. 또 2차대전중에도 효율적인 유대인 시체 소각로를 개발한 어느 
과학자는 자신의 발명을 과학적 업적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고도의 
과학기술과 원시신화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정신의 이 현격한 괴리. 기술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는 정신적 발전의 낙후성. 우리 세기를 각인하고 있는 이 괴리와 
모순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다음 세기의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인간 말종들의 농담, ‘전쟁불사론’ 


다시 그림으로. 저 그림은 양차 대전의 사이에 그려졌다. 종전 후 10년, 독일의 
보수신문들이 열심히 플랑드르의 참호 속에서 그 허구성이 입증된 영웅주의를 
재탕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등장한 나치 정권은 딕스의 그림을, 민족의 단합과 
전투력을 해치는 ‘퇴폐예술’로 낙인찍었다. “과거에는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꼭 
총을 들고 나갔다.” 독일사람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농담이다. 최근 일본에서 나온 
<전쟁론>이라는 만화책을 보니 똑같은 농담이 나온다. “전쟁은 해외여행”이라는 
것이다. 근데 저자는 이를 농담으로 의도한 게 아닌 듯하다. 그 만화책엔 딕스의 
그림을 성토하던 30년대 독일 보수파의 정신상태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소년대원 수준의 모험심, 무미건조한 소시민적 삶을 달래주는 낭만적 영웅주의, 
개인과 전체가 합일하는 황홀한 신비체험에 대한 진한 향수…. 

“전쟁은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연장”이라 말하는 이들에게 누군가 무너진 
베를린 장벽 어느 귀퉁이에 이렇게 써넣었다.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다.” 굳이 
전쟁이 하고 싶은 분은 수단을 바꾸어보시는 게 어떠실지?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 
아니다. 그것의 실패다. 아직도 클라우제비츠의 테제와 심지어 ‘전쟁불사론’과 
같은 끔찍한 농담을 들어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 우리의 정신은 아직 너무나 
군사적이다. 문제해결을 위해 전쟁부터 생각하는 이 원시적 미신을 깨고, 시민들 
사이에 평화주의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의 21세기의 과제로 남는다. 

진중권/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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