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illes (reverseyed) 날 짜 (Date): 1999년 10월 15일 금요일 오후 06시 01분 31초 제 목(Title): [캡쳐]방학연대/왜인의 기원을 찾아서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 artistry) 날 짜 (Date): 1999년 10월 15일 금요일 오후 03시 51분 17초 제 목(Title): 퍼온글/방학연대 왜인의 기원을 찾아서 한/일 고대사의 비밀을 찾아서 제1부 <왜인의 기원을 찾아서> 중국과 우리의 남은 반동가리인 북한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압록강 중류지역 길림성 집안현에 이르면 태왕대비가(太王大碑街)라는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 거리에 서 있는 好太王碑(광개토대왕비)가 우리 나라와 일본의 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72년 재일 사학자인 이진희씨가 다수의 광개토대왕비문 탁본과 사진 등을 비교 검토한 결과에 기초해 일본 참모본부에 의해 비문이 석회로 덧칠되었다고 주장하면서부터이다. 이어서 비문 탁본에 대한 논쟁과 비문에 나오는 왜, 왜구, 왜적, 임나에 대한 여러학자들의 탁본 논쟁에 대한 기록 필름을 나열한다. 이어서 나레이션 여기에서 우리는 이 비문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한가지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비문에 기록된 '왜'를 과연 일본과 동일시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먼저 집고 넘어가야 하는 까닭은 이 비문에 대한 한.일간의 모든 논쟁이 바로 왜를 일본과 동일시하는데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에서 '왜=일본'이라는 등식은 너무도 당연시되고 있고, 스스로를 '倭'대신 '和'라는 표현을 사용해 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왜라는 명칭이 사용된 중국의 고대 문헌들을 살펴보면 왜를 무조건 일본이라고 추정하기 힘든 요소가 있다. 먼저 산해경을 보면 "'개'나라는 '연'나라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고, '왜'는 '연'나라에 속해 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연나라는 당시 전국시대 강국의 하나로 현재 북경을 중심으로 발해만 북안에서 요동반도 근처까지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다. 연나라는 지금까지 漢민족으로 추정되고 있었지만, 최근에 밝혀진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의하면 하남성이나 산동성 등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인과는 상당히 달라 오히려 '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한 시대에 揚雄이 쓴 <方言>에도 연 나라는 언어상으로도 중국과 달라 소위 요녕문화로 알려진 청동기 문화의 주체인 예나 맥의 언어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비단 언어에서뿐만 아니라 물질.문화상으로도 중국보다는 오히려 예나 맥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산해경이 쓰여진 연대는 기원전 3세기 정도로 추정되는데, 당시 연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맥'이라는 민족이 있다. 맥은 하북성의 북부, 동몽골의 남부에서 현재 중국의 동북지구(옛 만주 지역)의 서남부 연안에 걸쳐 있던 민족이다. 그 맥의 동남방으로는 구만주의 동남부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조선'이 있었고 그 북방에는 '예'라는 민족이 있었는데, 이 예족은 맥족과 깊은 관계에 있어 '예맥'으로 통칭되어 불린 적이 있던 민족이다. 나중에 맥은 그들의 근거지를 구만주의 동부로 옮겨 '고구려'가 되었는데.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예는 퉁구스계, 그리고 맥은 몽골의 피가 섞인 퉁구스계 민족으로 추정된다. 동북아시아 민족 가운데 맥다음으로 그 존재가 중국 측에 알려진 민족으로 조선이 있다. 연나라 사람들이 요동반도의 북쪽 즉 구만주의 동남부에 상당한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었기에 조선도 그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산해경에서 말하는 개나라는 그 위치가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요동반도 등 조선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본다면 만일 왜가 개에 접해 있고, 연 나라에 속해 있다면, 당연히 왜도 구만주 동남부에서 조선반도 서북부에 위치한 나라로 중국에 알려져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산해경>을 제외한 진나라 이전 중국의 문헌 어디에도 왜는 맥이나 조선과 함께 나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 중국에는 구만주 및 조선보다 더 먼 지방에 있던 '부여'(맥 또는 예의 중간) 도 알려지게 되고, 그 후에는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도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 민족이 아직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던 전국시대에 그것도 머나먼 일본 열도에 살던 왜가 연나라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면, 우선 삼한을 통하고 이어서 조선 내지는 맥을 통해서 하북성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그러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당시 중국에는 삼한조차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산해경>에 나타난 왜를 일본 열도에 살던 왜와 동일시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산해경>에 이어 전한 시대에 쓰여진 <한서지리지>라는 책의 연지조를 보면 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나온다. 거기에는 "낙랑의 바다가운데 왜인이 백여 국으로 나뉘어 있어 세시를 따라 일정한 시기에 공물을 바치러 온다"고 기술되어 있다. 기원전 2세기말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 당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현재 북한의 수도인 평양 근처에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창구역할을 담당하는 방편으로 '낙랑군'이라는 식민지를 개척했었다. 바로 그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이 있어 공물을 바치러 온다는 것이다. 그 당시 삼한 사람들은 아직 낙랑과 직접적인 교역을 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의 한인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한 일본 열도의 주민이 육로를 통해 낙랑에 갔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지리적 순서로 보면 일본인보다 먼저 낙랑과 교역했어야 할 한인이 교류한 적이 없는 시대에 왜인이 낙랑의 바다를 통해 그곳에 왔었다는 명백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여기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한서지리지>가 쓰여질 당시 연나라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나라 이전에 세력을 가졌거나 혹는 경제적 교류를 갖고 있던 육상 또는 해상에 걸친 연나라의 세력권 내지 경제권을 <한서지리지>에서는 '연지'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중국에서는 중화사상으로 인해 예로부터 자국으로 무역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조공을 바치러 온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진귀한 재물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온 외국인은 중국에 소속된 식민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교역을 위해 바다를 통해 연 나라로 들어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연에 속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낙랑군에 왔던 것과 동일하게 2세기 정도전쯤 중국의 전국시대에 동북아시아에서 커다란 세력및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연나라에 왜가 해상을 통해 방문한 것으로 보면 <산해경>에 실린 왜의 기록을 조금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이후 후한 시대(1-2세기)가 되면 일본 열도의 왜인이나 한반도 남부의 한인들에 대한 기사가 중국의 사서(<후한서>의 동이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북큐슈 지역의 努國이나 이토오국 왕이 사신을 후한 시대의 조정으로 파견하여 금인(金印)을 하사 받아 한나라의 外臣이 된 사건, 후한시대가 지나고 위나라 시대 즉 3세기 전반기에 북큐슈의 히미꼬라는 女王國 즉, 야마토국의 사자가 위나라의 서울인 낙양을 방문해 여왕이 '親魏倭王'에 책봉되어 위나라 사자까지 일본에 갔던 일, 또한 한반도 남부나 북큐슈 연해지역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남부의 한인이 중국과 교통하기 5,6백년 전, 이미 왜인이 중국 본토에 살며 당시 발해만을 제압하고 있던 연나라와 통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그리고 삼한 사람들과는 달리 상당히 일찍부터 해상 교통 내지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왜인과 일본의 왜인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후한 시대에서 위진 무렵의 왜인이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삼국지> 위지동이전 왜인조에는 중국으로부터 왜인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는 여행코스가 잘 그러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경로를 통해 어느 정도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왜인조를 보면 위나라 수도인 낙양에서 지금의 서울 근처에 있던 대방군을 경유해 서안으로 내려가 대한 해협에 이르러 부산에서 아주 가까운 김해만에 위치한 구야 한국에 다다르는데 이미 그곳에서는 한인과 왜인이 접촉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위지 동이전 왜인조에 의하면 그 무렵 왜인의 분포는 한반도 남단 구야 한국에서 시작하여 대마도, 이끼를 거쳐 북큐슈에 들어와 마쓰로국(努國), 이토오국 등을 경유해 여왕국에 이른다고 기술되어 있다. 다만 여기에서 야마토국의 위치가 북큐슈인지 기나이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일본 내에서 많은 논쟁이 일고 있다. 주로 쿄토 대학을 중심으로 한 관서학파는 기나이설을 주장하고 동경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학파는 북큐슈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실은 양자 모두 위나라 시대 즉 3세기 중엽에는 일본 열도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단에도 왜인이 일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같은 사실은 김해만을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를 거쳐 북큐슈의 야요이 문화를 특징 지우는 合口옹관묘 매장 방식이 발견되고 있는 것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일본의 왜인이 한반도 남단에 진출했었다는 일본측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커다란 돌로 머리를 덮은 기반형 돌멘(지석묘)이 우리 나라 남부지역 특히나 동중국해를 면하고 있는 한반도 서안에서 대한해협 방향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이러한 기반형 돌멘이 2차대전이 끝난 후 일본의 북큐슈에 있는 야마구찌현 일부에 걸쳐 있는 야요이 유적에서 많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왜인이 한반도에 진출하고 있었던 것과 동일하게 한인들도 북큐슈나 혼슈 서남부 등에 상당히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분명해지는 것은 한인과 왜인은 각각 한반도 남부와 일본 서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국 모두 상대방 영토에 진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번엔 눈을 잠깐 돌려 사서에 나타난 이러한 왜인의 문화적 특징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후한서>의 선비전을 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왜인의 어법에 대해 언급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이 선비족은 후한시대의 동몽골에서 발흥한 몽골계 민족으로서 중국 북방을 점차 위협하고 동쪽으로는 구만주 지역까지 진출했었던 민족이다. 그들이 정복한 만주지역에는 烏候秦 -遼河支流의 老哈河- 이라는 하천 또는 호수가 있어 물고기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선비족은 유목민인 까닭에 고기 잡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선비족의 수령인 壇石槐는 왜인이 고기 잡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왜인의 나라를 습격해 포로로 잡은 왜인을 그 호수로 강제 이주시켜 고기를 잡게 하였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이 사건은 光和원년(178년)에 발생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선비족의 백성이 점차 급증하여 식량이 부족해 농경이나 목축, 수렵만으로는 도저히 백성의 식량을 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선비족의 수령 壇石槐는 식량을 구할 방법을 도모하고자 자국의 영토를 시찰하던 중 烏候秦水라는 호수에 이르렀다. 그 호수는 종횡으로 수백 리나 펼쳐져 있었는데 물은 흐르지 않아 정체해 있었고, 그 호수엔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유목민인 까닭에 그들은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왜인이 물고기 잡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에서 동쪽방면에 위치한 왜인이 사는 나라를 토벌하여 천여 가호를 포로로 잡아 그 호수 근처로 강제 이주시켜 고기를 잡게 하여 그 백성의 양식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문헌에 '倭人'이라는 표기가 '于人', 또는 '汗人'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여기서 '汗人'은 '于人'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于人'을 과연 '倭人'과 동일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다행히도 <후한서>보다 먼저 쓰여졌으며 <후한서>의 기자가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삼국지>의 선비전에도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지에는 고기를 잡는 것이 뛰어난 것은 汗人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그물로 잡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것이 뛰어나다"라고만 되어 있다. 게다가 삼국지의 주석에는 "汗은 于의 오기이고 于는 倭와 같은 발음이므로 汗人은 倭人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음운학 상으로 볼 때 倭(wa)와 于(wu)는 모두 w 발음이고 모음 a와 u는 유사한 발음인 까닭에 왜(wa)를 우(wu)로 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또한 이런 주장은 얼마전 소련의 한 학자가 시베리아 연해주 남부나 흑룡강 하류지역에서 발견한 일본 야요이 문화의 것과 흡사한 석기나 토기, 청동기가 출토된 농경군락지에 의해 점차 그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이처럼 왜인 구체적으로 북 큐슈의 왜인이 고기를 잡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은 다른 여러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위지> 동이전 왜인조에도 "왜인은 바다에 잠수해 고기를 잡는 기술이 뛰어나다. 그래서 남자는 어린이건 어른이건 할 것 없이 얼굴과 온 몸에 문신을 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남방의 회계(會稽)에 옛날 三皇五帝 때 우임금의 자손이라 불리는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되어 그곳의 풍습을 따라 문신을 하여 蛟龍(이무기)의 해를 피했다고 한다. 왜인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문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에 대해 우리는 중국 남방의 문신 풍습을 가지고 왜인의 문신을 해석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중화사상에 근거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거나, 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 기사는 중국남방에 대한 중국인들 자신의 지식으로 왜인의 풍습을 추측한 것일 뿐 아무런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신을 하고 물 속에 들어가 교룡(蛟龍)라든가 인어鱗(후카) 등의 해를 피했다는 것은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의 吳나라나 越나라에 그 실례가 있고 운남(雲南)지역의 애우(哀牛)라는 종족에게도 그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 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적은 커다란 육식성 물고기 예컨대 상어나 기타 그에 준하는 어류, 그리고 그들의 상상하는 바 교룡(蛟龍)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용의 문신을 함으로써 물 속에서 이들을 만났을 때, 그들 식인 고기들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시키려 했을 것이다. 따라서 액땜신앙 때문에 중국남방의 회계(會稽)사람들이 문신을 했다는 사실과 왜인이 바다에 잠수해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고 문신을 해 큰 물고기나 물 속에 사는 위협적인 존재의 해를 피했다는 사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만일 왜인에게 실제 그러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용의 문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신의 풍습은 오늘날에조차 동남아시아 제국이나 인도네시아계 민족 사이에 남아 있고, 이들은 모두 잠수를 해서 고기를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기를 잡을 때는 낚시나 화살을 이용하거나 그물을 이용해 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비해 잠수해서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방식인 것이다. 물론 우리 나라의 제주도나 서.남해안 지방의 해녀와 일본 서부의 해녀들에게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한국과 일본에서는 잠수를 통한 고기잡이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잠수어법은 세계적으로는 매우 희귀한 어법에 속한다. 따라서 선비족에게 끌려가 고기를 잡던 왜인이 일본 열도에 있던 왜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이제 무관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진 셈이다. 고기잡는 것과 관련해 중국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왜인 특유의 어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가마우찌라는 물새를 이용해 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가마우찌를 통한 고기잡이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수나라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이다. <수서>의 왜국조를 보면 "작은 금속고리관에 끈을 묶어 가마우찌 목에 걸어 물 속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7세기경이므로 일본의 야요이 시대의 기록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7세기경에는 일본에서 가마우찌를 통한 고기잡이가 실시되고 있었고 중국인들도 그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송나라 이후의 문헌에는 가마우찌를 통한 고기잡이가 자국내에서도 행해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명나라 무렵에는 중국에 온 외국인의 기록에도 양자강 유역에서의 가마우찌를 통한 고기잡이에 대해서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중국에서도 송대 이후에는 가마우찌를 통한 고기잡이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국의 가마우찌 어법이 일본의 가마우찌 어법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우리는 기록상으로 일본이 오래되었으므로 송나라 시대에 일본의 가마우찌 어법이 중국에 전해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록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특성에 비추어 만일 그들에게 그 이전 가마우찌 어법이 있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기록이 남아 있어야만 할텐데 그 기록이 없다는 것은 역으로 송나라 이전 중국에 가마우찌 어법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가마우찌 어법은 중국의 가마우찌 어법과 다르다. 일본은 가마우찌에게 금속고리에 부착된 끈을 끌어당기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끈을 달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에는 일본과 달리 끈이 없다고 해서 양자가 무관하다고 하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중국의 양자강이나 동정호 등은 모두 흐름이 완만하고 커다란 강이나 호수인 까닭에 끈이 필요치 않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하천이 매우 급류인 까닭에 끈을 잡고 있지 않으면 가마우찌가 떠내려가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중국에 가마우찌 어법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 될 수 있다. 적어도 후한시대에는 중국에서 가마우찌를 이용한 고기잡이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최근에 사천성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사천성은 양자강을 쭉 거슬러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그 주변은 커다란 산지이고 하천도 급류가 많은 지역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역에 후한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화상석(畵像石)이 많이 발견되었다. 화상석이란 돌 위에 그림을 새겨넣은 것인데 그 화상석 가운데 물새가 한 마리씩 목에 끈을 매단 채 물 속에서 헤엄치는 그림이 있는데 끈을 붙잡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이 화상석에 새겨진 물새의 모습을 보면 가마우찌라기 보다는 오히려 갈매기에 가까워 보이지만 가마우찌 이외에 다른 물새로 고기를 잡게 했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으므로 아마도 가마우찌였으리라 추측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수서>에도 가마우찌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라는 새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가마우찌와 동일한 기능을 하는 물새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림이 새겨진 돌이 만들어진 후한시대에 이미 중국에서는 가마우찌를 이용한 고기잡이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가마우찌 어법이 중국의 사서에 그처럼 늦게 등장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수나라 시대에 강남 지역의 생활 문화에 눈이 어두운 北朝계열의 사람이 일본의 가마우찌 어법을 매우 희귀한 일로 여겨 기록에 남긴 것일 뿐, 이미 강남지역에서는 이전부터 가마우찌 어법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런 강남지방의 가마우찌 어법이 그들의 수도농경 문화와 함께 일본의 서부에 전해진 것은 아닐까? 이처럼 가마우찌를 통한 어법은 오늘날에조차 중국의 양자강 유역에서 태국에 이르는 매우 넓고도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행해지고 있으며, 문신을 하고 잠수를 해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는 방법도 인도네시아에 걸친 여러 민족과 일본 그리고 우리 나라의 서남해안과 제주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나라 남부의 한인과 일본 서부의 왜인은 거의 공통된 문화권을 공유하고 상호간에 교역 내지 인적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양국은 모두 동남아시아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이는 수도농경 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강남지방에서 수도 농경 문화를 영유한 사람들이 강남에서 동지나해를 건너 한반도 남부나 북큐슈로 들어와 그들과 섞이면서 한반도에서는 한인이 되고 일본에서는 왜인이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원전 2세기 무렵까지 연 나라와 교역했었다는 왜인과 야요이 시대의 일본 열도의 왜인이 동일한 사람들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연 나라와 보다 가까운 지역에 있던 한인이 아직 연 나라와 교류하지 않은 시기에 이미 왜인은 연 나라에 진출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이 한인이 사는 곳을 경유해 연 나라로 갔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경로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시도해야만 한다. 야요이 시대에 한인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서일본에 진출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외 다른 곳으로 진출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에 반해 왜인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반도 남부에도 있었고 구만주 남부와 연해주 남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왜인이라는 것은 일찍이 동지나 연해 혹은 동해 연해에까지 폭넓게 활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왜인이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던 세력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한 번 다음과 같이 대담한 추측을 시도해보기로 하자. 그것은 왜인이란 원래 강남의 수도농경 문화인으로 그들은 원래 한반도나 일본에 거주한 것이 아니라 강남부근에 살면서 동지나해를 지나 중국과 교역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연나라 근처에 갔던 것이다. 즉 처음부터 한반도나 일본에 수도농경 문화를 갖고 이주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교역을 목적으로 해상에서 활동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처럼 무모하게 보이는 듯한 우리의 추측을 뒷받침해줄만한 자료, 즉 강남지방인 吳나 越, 또는 越나라 계열 민족이 배를 만들거나 또는 해상전투, 그리고 무역을 하는데 있어 뛰어났다는 사실은 멀리 춘추시대에서부터 전한 시대에 이르는 중국의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대에 양자강 하구에는 이미 吳나 越이라는 강국이 등장한다. 이들은 그 지방에 원래 살고 있던 비한인 계열의 민족이었다. 그들은 회하(淮河)지역을 중개지로 해서 은.주시대부터 어느 정도 중국 문화와 접하다가 춘추시대에 이르러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켜 훌륭한 나라를 건설해 중국 열강 가운데 들어가 주변의 민족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원래 수도경작민으로 그들의 살던 지역의 하천이나 호수를 이용해 관개농업을 발달시키고 조선기술을 습득하여 배를 타고 각지로 나아가 상업적 진출을 시도하였다. 또한 많은 섬들이 있는 연해지방에서 수상생활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상태는 오.월 시대로부터 진.한이 자신의 세력을 이 지역에 확대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까닭에 한나라 시대엔 이 지방의 수군을 한나라 해군의 주력부대로 삼기조차 하였으며 높이 10여장이 넘는 대형 군함이 있었고 그 사령관을 누선장군(樓船將軍)이라 불렀다는 사실이 전한 시대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커다란 대형 범선을 타고 강남지역 특히 연해지방의 어로 작업과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동지나해를 건너 발해만으로 들어와 화북의 연 나라 근처까지 왔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왜인들의 항해 경로에 대한 우리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최근 오끼나와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은 야요이 시대, 또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대로 추정되는 일본의 오키나와의 城獄(구스쿠다케) 패총에서 발견된 명도전이라는 화폐이다. 명도전이란 칼 모양을 한 청동으로 된 화폐인데, 이 화폐는 동북아시아에서는 지금까지 연나라의 세력권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요동, 압록강 중류, 한반도 서북부(대동강, 청천강의 상류)지역에서만 출토되었고 그 외 연나라의 경제권 밖에 있었던 한반도 남부나 일본의 혼슈, 큐슈, 시코쿠에서는 한번도 출토된 적이 없던 화폐이다. 그런데 일본에서조차 가장 뒤늦게 야요이 문화가 전파된 것으로 알려진 오키나와에서 종래에 연나라의 교역권에서만 출토되던 명도전이 발견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강남지역의 왜인이 연나라로 교역하기 위해 항해하다가 중간에 오키나와에 정박하면서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을 남겼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것은 그렇다면 과연 그 당시에 강남지역에 살던 대부분의 왜인이 이주할 만큼 커다란 대형선박이 존재했었는가?, 또한 근해도 아닌 험한 바다 한가운데서도 거친 파도를 이겨낼 수 있는 내구성이 강한 배가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의 선박은 죠우몽 시대에서 야요이 시대로 넘어가면서 엄청난 발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죠우몽 시대의 배는 수위가 낮은 하천용 배여서 밑바닥이 평평했었다. 그런데 야마토(大和)의 唐古(카라코)나 銅驛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에 묘사된 야요이 시대의 배는 해양에 나가 커다란 파도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선미와 선수 모두 우뚝 솟은 곤돌라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배에 많은 노가 부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커다란 배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무렵 강남지역의 배는 어떠한가? 당시 강남지역의 배는 준구조선이었다. 준구조선이란 배 밑쪽을 여러 개의 커다란 나무를 잘라 파내어 서로 연결해 묶고 그 옆에 판자를 대어 파도를 방지한 배이다. 그리고 갑판 위에는 지붕을 설치하고 배의 방향 조정은 노로 하는데 선미에는 노를 가지고 배의 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설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이 전한 시대 강남지역의 배인데 이러한 배의 모형은 장사지역이나 광동지역 등의 墓에서 출토된 목재로 된 명기(明器)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후한 시대가 되면 이러한 선박 조선기술은 거기에서 한층 더 진보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추정해볼 때 우리는 적어도 강남지방의 왜인이 일본으로 이주해갔으리라 추정되는 시기에 이미 강남지역에는 지붕을 갖추고 바다를 건너기에 적합한 많은 노와, 배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방향키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선수와 선미가 우뚝하게 솟은 곤돌라형의 준구조선으로서 최소한 20-30명 정도는 충분히 승선할 수 있는 배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실 이처럼 왜인이 강남지역에 살았었다는 전승은 중국측 문헌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그 문헌 가운데 후한시대의 <論衡>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가 앞서 살핀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조에 언급된 강남 지방의 회계(會稽)에 살며 그 지방의 일에 밝은 王充이라는 학자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우리가 그처럼 찾아 헤매던 왜의 정체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데 결정적인 열쇠가 되는 구절이 보인다. 원래 양자강 유역에는 오 나라와 월 나라를 이어 초(楚)라 불리는 강력한 비한인 계열의 나라가 발흥했는데 그 지역의 중심은 지금의 호남성 장사 근처로 양자강 중류지역이다. 이후 초나라는 점차 커져 아래로는 양자강 하류지역까지 내려가고 위로는 화북지역까지 북상하여 중국의 晋나라와 패권을 다투게 된다. 그 결과 유명한 晋.楚의 전쟁이 발생한다. 그리고 조금지나 晋의 뒤를 이은 漢나라와 다시 패권을 다투던 楚나라는 마침내 패망하여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이 楚나라와 나란히 그 방면에 있던 강국으로 越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越나라는 나중에 크게 나뉘어 충월, 구월, 駱越 등으로 불려져 총칭해서 百越이라고도 불려졌다. 그리고 漢나라 초에는 南越이라는 독립국을 건설하기도 하고, 남하해서는 베트남(월남)민족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論衡>을 보면 이 월 나라 사람과 나란히 왜인이 나온다. 거기에는 중국이 周天下이던 당시 "越裳은 白雉를 가지고 오고 왜인은 場草를 가지고 온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장초'는 남방의 특산 식물이므로 이 기록은 월나라와 함께 주나라에 공물을 바쳤던 왜인이 일본 열도 내지 한반도 남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강남지역에서 왔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기사가 후한 시대에 쓰여진 것이므로 주나라 시대보다 훨씬 뒤에 기록된 것이기에 단순한 전승에 지나지 않는다고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 무렵엔 만일 어떤 나라가 천자가 책봉한 제후국에 가서 교역을 할지라도 명목상으로는 주나라가 중국 전체의 왕이 되므로 그것은 기록상 주나라에 공물을 바치러 온 것이 되어버린다. 예컨대 월나라 사람과 함께 왜인이 연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기록상으로는 주나라 왕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로밖에 기록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사를 아주 오래 전 강남지역에서 배를 타고 활발한 해상 활동을 했던 월이나 왜라 불린 사람들이 화북으로 갔었다는 전승의 반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왜인은 적어도 전국시대 무렵까지는 한반도 남부나 일본의 서부에는 정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천천히 해안선을 따라 오키나와와 산동반도, 그리고 요동반도 등에 배를 정박시키면서 발해만으로 들어가 <산해경>에서 본 것처럼 연나라와 무역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진.한 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세력이 점차 강남지방까지 확장되어 진시황제 무렵에는 광동지방까지 중국령으로 되고, 한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더 나아가 남쪽에 있던 베트남까지 한나라의 직할령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많은 漢族들이 정부의 이주정책으로 남하하기에 이르고, 그 漢族의 핍박을 피해 일부는 해상으로 진출하여 한반도 남부나 일본 서부로 이주하고, 육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남하해서 화남지역이나 베트남 민족이 되고, 또 일부는 서쪽이나 서남쪽으로 도망하여 중국의 사천성이나 운남성 지방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특히 양자강 하구의 강남지방, 혹은 그 근처의 섬들에 살던 사람들의 일부인 왜인이 한반도 남부나 북큐슈로 수도농경 문화를 가지고 온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이처럼 왜를 대륙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같은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吳라든가 越, 또는 라든가 苗족은 중국의 사서에 나타나지만 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지역의 섬에 살던 민족으로서 중국에 알려진 족속이 있는가? 물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우리가 찾고 있는 왜인은 아니다. 한 나라 시대에 그 지역에 있는 섬들 가운데 해남도라는 커다란 섬에는 黎族으로 불리는 민족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중국측에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함께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왜인은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왜인이 중국 주변의 섬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한나라 이전에 이미 왜인은 그곳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위지> 동이전 왜인조를 보면 왜인의 생활, 풍토는 모두 朱崖, 耳사람과 가장 가까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해남도에 살았던 黎族 역시 朱崖, 耳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들의 강남지역의 작은 섬들에 대한 그들의 정보가 한 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그들이 알게 될 무렵인 한나라 시대엔 왜인은 이미 그곳에서 나와버렸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왜인의 존재가 중국의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어도 전승으로는 왜인이 월과 함께 남방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민족이고 중국(中原)과의 관계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후한시대까지 전해져 온 것이다. 게다가 <위지> 동이전 왜인조의 "왜인은 吳나라 太白의 자손이었다고 왜의 노인이 전하고 있다"는 기사도 왜인이 강남의 원주민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전승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라는 족속은 이제 일본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중국대륙으로부터 사라져버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강남지역에 살던 여러 민족이 남하해서 세운 광동, 관서, 귀주, 운남 또는 베트남, 라오스, 타이, 미얀마 등에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는 족속 가운데 '와(Wa)'라는 민족이 있다. 그들은 몬계 민족으로 불리며 베트남인과는 친척관계에 있다고 알려진 몬족과 동족관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베트남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분명한 것은 'Wa'라는 족속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볼 때 왜(Wa)인은 강남지역에서 모두 동지나해를 건너 일본 열도나 한반도 남부 등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일부는 타민족과 함께 대륙을 남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왜인은 원래 강남지방의 양자강 중류지역인 회계(會稽)지방 근처의 섬에 살았던 민족으로 처음엔 강남지방에 살면서 중국과 교류를 하고 살았다. 하지만 비한인 세력인 그들이 한나라의 확장 정책으로 그들의 영토를 잃게 되어 한인 이주민의 핍박을 피해 각지로 흩어지면서 그 일부 세력들이 발달된 조선술과 항해술을 이용해 자신들의 수도작 농경문화를 가지고 한반도 남부와 일본의 북큐슈 일대로 이주해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광개토대왕비문에 나타난 왜는 그 시기로 보아 일본 열도의 왜인임이 분명해진다. 물론 이 왜인은 원래부터 일본 열도에 살던 원주민이 아니라 한나라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상실한 강남지역의 오나 월나라 계열의 왜인 이주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대로 이들 왜인은 4세기에서 5세기초에 걸쳐 정말 한반도 남부 즉 지금의 김해지역으로 추정되는 가야(임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우리를 다시금 '임나일본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인도한다. 그것을 2부에서 다루기로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