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yena ( 횡 수) 날 짜 (Date): 1999년 10월 14일 목요일 오후 02시 16분 24초 제 목(Title): [캡처] 위화도회군과 조준의 토지개혁 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다음][이전]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guest (guest) 날 짜 (Date): 1999년 10월 14일 목요일 오후 12시 29분 07초 제 목(Title): 위화도회군과 조준의 토지개혁 8.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조준의 토지개혁 ㅇ 함흥 차사에 얽힌 에피소드 어린 시절 나의 뇌리에 '이성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위화도 회 군'이고, 다른 하나는 '함흥 차사'다. 그런데 지금에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위화도 회군이야 조선 창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이라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함흥 차사는 조금 뜻밖 이다. 아마도 격동하던 동아시아를 무대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다간 영웅의 인생의 비애가 농 축된 사건이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나 보다. 그런데 이성계는 우리가 모두 아는 대로 전주 이씨다. 그렇다면 그의 출신지, 즉 고향은 전 라북도 전주가 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성계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 전주로 내려가지 않고 거처를 함흥으로 옮겨 그곳에서 반란을 도모했다. 역사에서 '조사의의 난'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결과 전주 차사가 함흥 차사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에서 이성계 는 전주가 아닌 함흥으로 자신의 고향을 바꾸게 된 것일까? 원래 이성계의 집안은 전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 이안사는 전주에서 잔뼈가 굵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맞아 항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각지에 산성 별감을 파견하여 주민들을 산성에 입주시켜 전쟁에 대비 하였다. 그런데 당시 농사를 지어야만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대다수의 농민들은 이러한 조정의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산성에 수용될 경우에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서 지방 각지에서는 조정의 이러한 정책에 반발해 주민들이 도주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 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전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도주를 차단하기 위해 명령에 따 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한을 산성 별감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전주에도 서울에서 파견된 산성 별감이 내려오면서 이안사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전주에 파견된 산성 별감은 조정의 정책에 따라 주민들을 산성에 입주시키기 시작했 다. 당시 고을 유지로서 마을 주민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안사는 이러한 산성 별감의 태도 를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사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기는 산성 별감도 마찬가지였 다. 고을 사람들이 이안사를 중심으로 집단 거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개 이처럼 힘이 균형이 팽팽한 경우에는 사소한 사건 하나가 그 균형을 일시에 무 너뜨리는 법이다. 이안사가 산성 별감의 관아 소속 기생을 건드린 사건이 미친 파장도 그러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비걸 기회만 엿보던 지방관은 이 사건을 빌미로 군사를 동원하여 이안사 일가 를 아예 몰살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주민들을 산성으로 강제 입주시키고자 했다. 산성 별감의 노 림수가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산성 별감의 보복을 두려워한 이안사는 일가 식솔과 당시 자기를 따르던 주민 170여 가구를 거느리고 황급히 전주를 떠나 강원도 삼척으로 탈주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조정의 힘이 미치기 시작하자 이안사는 아예 당시 고려의 통치가 미치지 않던 머나먼 함경도 덕원 지역으로 집단 이주를 하였다. 덕원 지방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가 몽골에 빼앗겨 그 무렵 원나라 쌍성 총 관부의 관할 지역으로 있던 곳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에 발생한 이안사의 엑소더스는 훗날 이성계라는 인물이 14세 기 말 격동하는 동아시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탈 주는 산성 별감과의 불화에서 기인한 개인적인 엑소더스였지만, 그 탈주를 계기로 이성계는 쇠락 해가는 고려를 벗어나 새로운 기운이 꿈틀거리는 원과 고려의 변방에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 던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새롭게 다가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후 이성계 집안은 그의 아버지인 이자춘의 대까지 쌍성 총관부에서 대대로 말직을 얻어 살게 된다. 당시 덕원 지방의 주민은 대부분 여진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아버 지 이자춘은 이들 여진족 사이에서 점차 세력을 얻어 서서히 그 지방의 유력 호족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자춘은 쌍성 총관부 산하에서 다루가치라는 벼슬을 지내며 점차 동북 지방에서 그 세력을 넓혀 나갔다. 훗날 중원의 패자가 될 주원장이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한참 목동 일에 빠져 있을 1335년, 이성계는 원나라 쌍성 총관부에서 다루가치로 있던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이성 계가 어느새 약관의 청년으로 성장해 있을 무렵, 동북 지방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동 북 지방은 원래 고려의 땅이었다가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게 빼앗겨 오랫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 아오고 있었다. 그러던중 고려의 31대 왕으로 등극한 공민왕이 동북 지방의 빼앗긴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절치 부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원나라가 안으로는 내분에 빠지고, 밖으로는 주원장과 장사성이 남경과 소주에서 일으킨 반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 자 공민왕은 이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의 옛 영토인 동북 방면을 공략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원나라의 관청인 쌍성총관부는 동북 지방의 영흥에 위치하고 있었다. 공민왕으로부 터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라는 명을 받은 유인우는, 군사를 정비하여 일단 영흥과 가까운 등주로 나아가 그곳에서 쌍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등주에 진을 친 유인우 장군은 여러차례 쌍 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쌍성은 의외로 강력해 유인우는 번번히 패하여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몇 차례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인우는 일단 군사를 거두고, 여러 부장과 함께 쌍성 공략에 대한 참모회의에 들어갔다. 그때 한 부장이 쌍성 공략을 위한 비책을 하나 내놓았다. 쌍성의 천호 로 있는 이자춘에게 도움을 청해보자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부장들도 대체로 그 제안에 동조했 다. 그러자 유인우는 이자춘에게 도움을 구하는 서신을 부장 이일임 편으로 보냈다. 유인우의 서신을 받아든 이자춘은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자신의 증조부 이안 사의 엑소더스 이후 집안 전체의 운명을 가름할 중대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증조부 이안사 가 '고려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로 고민했다면, 이제 그는 '몽골에 남을 것인가 아니 면 떠날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자춘의 판단은 침착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인생보단 앞날이 구만리 같이 창창한 자식들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유장 군에게 협력해 다시금 고려에 돌아가 가문의 중흥의 기틀을 다지고 싶었다. 물론 이러한 판단에 는 원나라에서는 고려인 출신이라는 딱지 때문에 더이상 출세할 수 없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작 용했다.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같은 고려인의 한사람으로서 쇠락해가는 원나라를 바라보며 공민 왕의 반원 정책에 내심 호응하고 있던 이자춘이었다. 이자춘의 응락을 받은 유인우는 즉각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 자춘은 그의 아들 이성계와 따르는 부하들을 이끌고 성 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자춘 부자의 도움을 받은 고려군은 매번 패하던 원나라와의 전투에서 크게 이겨 마침내 쌍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하고 만다. 쌍성총관부의 함락으로 고려는 한 세기만에 함흥 이북의 영토를 되찾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주인공은 유인우 장군이 아니었다. 고려 군이 이처럼 쌍성총관부를 함락 시키는데 있어서 이자춘.이성계 부자의 공이 결정적이었음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 문이다. 쌍성 함락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매우 고무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공 을 세운 이자춘과 이성계 부자를 서울로 불러올려 후하게 상을 내리고자 하였다. 증조부 이안사가 고향 전주를 버리고 도망쳐 나와 머나먼 이국 타향에서 한많은 설움을 달 래며 살아온지 만 3대.... 마침내 조국 임금의 부름을 받고 아들 성계를 데리고 고려의 서울로 당 당하게 귀환하는 증손자 이자춘의 심경은 말할 수 없는 환희와 회한의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가슴벅찬 부자의 귀환길은 참으로 가벼웠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평생 고려와 원의 접경 지역인 변방에서만 머물다가 처음으로 아버 지를 따라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구경하게 된 변발을 한 시골 청년 이성계, 그의 나이 약관 스물 둘이었다. 몽골 사람처럼 앞머리는 깍고 뒷머리는 땋아내린 체두 변발에 오랑캐 복장을 한 청년 이성계가 고려의 조정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공민왕과 그 신하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게다가 그의 당당한 체구와 위엄서린 얼굴은 이미 주위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었 다. 이 자리에서 이자춘은 공민왕으로부터 쌍성 함락의 공로로 대중대부 사복경이라는 벼슬을 부 여받는다. 하지만 무대의 주인공은 이미 이자춘이 아닌 그의 아들 청년 이성계였다. ㅇ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아마도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에 이성계처럼 어울리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나 라 안팎으로 뒤숭숭한 시기에 정계에 진출하는데 성공한 청년 이성계는 계속되는 굵직한 전투에 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며 국민적 영웅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이성계는 부친 이자춘이 죽자 공 민왕이 그의 부친에게 하사한 동북면 병마사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동북면의 병마사가 된 이성계 는 훗날 자신의 의동생이 되어 평생을 함께 지낸 여진족 추장 퉁두란을 비롯해, 말을 다루는데 능 숙하고 전투력이 뛰어난 동북면 근처의 여진족 병사들을 사병으로 육성하여 강력한 전투력을 키 워나갔다. 이성계는 조정으로부터 통의대부 상만호라는 벼슬을 받은 1361년 9월, 독로강(평북 강계 군) 만호였던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군신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 작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성계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든 것은 같은 해 10월에 쳐들어온 10 만여 홍건적을 물리친 사건이었다. 당시 고려군은 홍건적을 맞아 싸웠지만 수적인 열세에 눌려 점차 후퇴하다가 마침내 12월, 수도인 개경을 홍건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로 인해 공민왕은 안동으로 파천을 떠나야만 했고, 개경을 점령한 홍건적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고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등 그 잔학함 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자 공민왕은 전열을 가다듬고 군사를 모집해 정세운 장군에게 개경 탈환을 지시함과 아울러, 동북면의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 개경 탈환에 동참할 것을 지시하였다. 마침내 이듬해 인 1362년 1월 17일, 정세운의 지휘 아래 20만 고려 대군이 개경을 포위했을 때, 이성계는 스스 로 훈련시킨 정예 병력을 이끌고 급히 개경의 관문인 동문을 들이쳐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한 다. 결국 이성계의 돌파로 동문을 되찾은 20만 고려 대군은 한꺼번에 개경을 공략해 10만여 홍 건적을 대패시키고 개경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처럼 홍건적 토벌에서의 결정적인 수훈으로 국민적 영웅이 된 이성계는 바로 그 해 7월, 다시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병력을 물리쳐 다시 한 번 군신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한다. 당시 공민왕은 이성계의 이러한 무공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밀직부사라는 벼슬과 공신의 호를 내렸다. 하지만 그후에도 고려 정세는 여전히 불안하기만 했다. 먼저 공민왕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피난함으로써 백성들의 국왕에 대한 신뢰가 실추되었다. 게다가 홍건적을 물리침으로써 새로이 등장한 무장 세력은 권력 구도의 새로운 판도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 러자 이러한 권력의 판도 변화를 꺼리는 기득권 층은 김용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모의하여 정세운 을 필두로 홍건적 토벌에 참가했던 당대의 명장 4인을 한꺼번에 제거하고, 마침내 공민왕마저 시 해하려다 최영에 의해 토벌되고 만다. 이처럼 김용의 시해 기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원나라의 기황후는 남편인 순제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내세우는 한편, 최유에게 군사 1만 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달천에서 이들을 섬멸시켰다. 그런 데 최유의 군대를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성계는 자신의 고향 함주(함흥시)가 삼선, 삼개 형 제가 이끄는 여진족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력을 다시 함주로 향했다. 그러자 함주를 짓밟으며 행패를 부리던 여진족들은 이성계의 명성을 두려워해 대부분 투항해옴으로써 그의 동 북면 병력은 최강의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이성계는 여러 차례의 왜구 토벌 등을 통해 전공을 쌓으면서 착실히 승진한다. 그리 고 마침내 1388년 음력 1월에는 최영을 도와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며 수상 다음 가는 벼슬인 수 (守)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인임 일파가 제거된지 불과 한 달도 못되어 명나라는 철 령 이북을 자국의 영토로 선포하고,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고려 조정에 통보해왔 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최영을 위시한 반 명 세력은 명나라에 대한 무력 투쟁을 주장했고, 이성계와 정몽주 등 신진 사대부들은 외교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 하지만 고려에서 파견된 사신의 요동 입국이 거부당하자 상황은 최영 장군 쪽으로 기울었다. 4월 1일, 우왕이 황해도 봉산에 도착하여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처음으로 요동 정벌 계획을 알리자 당시 이성계는 네가지 이유를 대며 반대하였다. 1.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 농사철에 군사를 징발하는 것은 좋지 않다. 3. 요동 정벌을 위해 남쪽 방비를 소홀히 하면 그 틈에 왜구가 노략질을 할 것이다. 4. 장마철이라 활과 무기가 녹슬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며 전염병이 돌기 쉽다. 그러자 최영은 이성계의 주장을 반박하며 다음의 세가지를 열거했다. 1. 명나라가 대국이기는 하지만, 현재 북원과의 대립으로 요동에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요 동 방비가 매우 허술하다. 2. 요동은 매우 기름진 땅이므로 여름에 공격하면 가을에 충분한 군량을 얻을 수 있다. 3. 명나라의 군사들은 장마철에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성계의 4불가론 가운데 하나인 왜구 침범은 후대에 날조된 것 이다. 만일 당시 이성계가 왜구에 대한 언급을 했다면, 당연히 최영이 이에 대한 반박을 했을텐 데, 최영은 이성계의 다른 세 가지에 대해서는 반박을 하면서도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박을 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해민들이 정벌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상황에서 이처럼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그것도 최영과 국왕 앞에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고려사는 왜 이성계의 3대 불가론에 왜구 문제를 끼워넣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이성계의 조선 창업에서 최대의 아킬레스 건이 바로 위화도회군 당시 정벌군의 주력 부대인 해민 들의 반발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성계 일가로서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처리해야만 했 고, 결국 그의 손자 세종대에 이르러 <고려사>를 통해 해민들의 망명 행렬인 왜구를 당시 쓰시마 에서 건너와 난동을 부리던 일본 왜구와 동일시해버린 것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럼 여기서 위화도 회군을 다루기에 앞서 잠시 두사람의 주장을 들어보도록 하자. 먼저 이 성계는 소국이 대국을 공략하기가 쉽지 않음을 들었다. 하지만 최영은 명나라가 외형상 대국이기 는 하지만 아직 중원을 회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고, 게다가 호시탐탐 고토 회복을 노리는 북원을 견제하느라 요동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둘째, 이성계는 농사철에 군사를 모집하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징발 자체도 힘들다고 주장 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요동 정벌군의 주력 부대는 고려 장병이 아닌 해민들이었다. 최영은 전투력이 뛰어난 해민들을 고려 장교들의 통솔 하에 전투에 투입하려 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 는 것은 군량미. 최영은 이성계와는 달리 여름에 요동을 공략해 가을에 그곳에서 추수한 곡식을 확보하고자 했다. 만일 이성계의 말대로 가을에 출병할 경우, 요동에서도 충분한 식량을 비축해 전쟁이 장기전에 돌입함으로써 결국 고려군은 성 밖에서 추운 겨울을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그 래서 군량미가 조금 부담되더라도, 여름에 속전 속결로 요동을 정벌함으로써 가을에 그들이 추수 한 곡식을 군량미로 쓰겠다는 전략이었다. 셋째, 이성계는 장마철이라 활을 쏘기가 힘들고, 무기가 녹슬기 쉬우며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리기 쉽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마철에 전투하기를 꺼리는 것은 명나라도 마찬가지. 물론 그 렇다고 최영이 장마철에 전투하는 것을 낙관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최영은 이성계의 두번에 걸 친 요동 정벌이 모두 겨울과 가을로 장마철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우왕 에게 "만일 군대가 열흘에서 한 달 쯤 지체하면 요동 정벌은 성공할 수 없다"며 자신이 직접 요동 정벌 공략을 지휘하겠다고 간청했던 것이다. 결국 이같은 상황에서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 는 출정에서 제외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최영은 달랐다. 최영은 요동을 두번이나 정벌한 이성계 의 전투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우왕으로부터 요동 정벌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최영은 좌군 통제사에 조민수 장군을 임명함과 더불어 우군 통제사에 이성계를 임명하였다. 하지 만 그것은 무장 최영에게 있어서, 아니 고려에게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성계는 정치적 술수에 능한 정치가라기보다는 솔직 담백한 무장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가 조선을 창업하고 정치를 정도전에게 완전히 일임한 것이나, 궐 안팎에서 방원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행동한 것을 보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심지어 여진족 출신으 로 한평생 이성계를 보필한 퉁두란조차 사람 앞에서 무예를 자랑하는 이성계를 보고 "신변에 위 험을 자초할 수 있다"고 충고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요동 정벌 출정 기록을 면밀 히 분석해보면, 평상시 그의 행동 패턴과 달리, 이성계는 이상하리만치 소극적, 아니 소극적이라 기보다는 어떻게든지 요동 정벌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월 1일, 우왕이 이성계와 최영의 주장을 듣고 최종적으로 요동 정벌을 결정하자 이성계는 만일 불가피하게 출정해야 한다면 가을에 출병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우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틀 지난 4월 3일, 우왕이 평양에 도착해 병사들을 독려하며 압록강의 부교를 건설할 때 다시 한번 요동 정벌을 가을로 미룰 것을 건의하며 만류했다. 하지만 우왕의 완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이성계는 4월 18일, 5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을 출발하여 위화도로 진군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요동 정벌군의 총사령관이던 최영은 앞서 언급 한 것처럼 "만일 군대가 열흘에서 한 달 쯤 지체하게 된다면 요동 정벌은 성공할 수 없다"는 이유 로 우왕에게 직접 정벌군을 통솔할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최영이 탐라 정벌에 나선 틈 에 부친이던 공민왕이 정적들에 의해 시해당한 것을 지켜본 우왕은 최영을 만류하며 평양에서 함 께 머물며 정벌군을 총지휘할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 결과 5만의 요동 정벌군에 대한 실질적 인 통수권은 이성계와 조민수가 움켜쥐게 되었다. 비록 이성계가 마음에 걸린 최영이 조민수에 게 자신의 보검을 주며 자신의 지시에 따를 것을 기대했지만, 역시 정벌군의 실권은 이성계에게 있었다. 최영의 시야에서 벗어난 이성계는 정벌군의 진군 속도를 가능한 늦추었다. 자신의 주장대 로 장마철을 기다려 요동 정벌을 무산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는 평양을 출발한지 무려 19일 만인 5월 7일에야 겨우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주둔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11일, 니 성과 강계의 원수가 먼저 요동에 침투하여 살륙.약탈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이틀이 지난 13일, 이성계와 조민수는 "강물이 불어 압록강을 건너기 도 어려운데 요동까지 가려면 큰 강을 몇 차례 건너야 하는데다 군량도 다 떨어져 진군하기 어렵 다"고 우왕에게 아뢰며 서서히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후 이들은 이처럼 장마를 문제삼아 무려 14일을 위화도에서 지체하였다. 그리고 21일, 마지막으로 최영에게 회군을 요청했 다가 거절당하자 바로 그 이튿날인 5월 22일 새벽,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만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당시 회군할 무렵에 "큰 비가 며칠 내렸지만 물은 불지 않았다. 회군 하여 물가에 닿았을 때 큰 물이 올라와 온 섬이 물에 잠겼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평양을 출발한지 무려 20여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장마가 시작되 었고, 큰 비는 회군하기 직전 불과 며칠 동안만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이성계는 일부러 행군 속도를 늦추고 또한 위화도에서 14일을 머무르는 등 평 양을 출발한지 무려 한 달 넘게 지체하며 최영이 우려했던 장대 같은 장마 폭우를 기다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군 속도는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불과 9일만에 개경에 도착한 것과 비 교해볼 때 무려 3-4배나 차이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기록에 "이때 민간에서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번엔 군중에서도 불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정벌군들조 차 이성계가 왕이 되려 한다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오종록,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까 닭은',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2>, 청년사, 1997.) 그렇다면 이성계에게 이처럼 '역성 혁명'의 비젼을 불어넣은 것은 누구였을까? 당시의 정 황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신돈의 개혁을 통해 서서히 정계에 진출해 어느 정도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가 이인임 일파의 처형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 공한 신진 사대부 세력이었다. 특히나 이성계의 쿠데타가 성공한 후 개혁의 일선에 섰던 정도전 과 조준은 그 핵심 인물이었다. ㅇ 정도전과 이성계의 랑데뷰 여덟 살 먹은 성계가 함경도 덕원에서 동네 친구들을 이끌고 골목대장을 하며 놀던 1342 년, 정도전은 경상도 영주 지방에서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도전이 세 상에 태어날 당시, 고려는 몽골의 사나운 간섭 정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처럼 어지러운 난국에 도 불구하고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은 선비로서의 지조를 꿋꿋하게 지키면서 청렴 결백한 관직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청렴한 선비였는가는 <고려사>에서 선정한 고려 왕조의 청백 리 다섯 사람 가운데 올라 있는 그의 이름 석자가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하지만 청렴하다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돌려 생각하면 지나치게 가난하다는 말의 미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정운경의 집안도 가난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다만 정도전이 다른 가난한 집안과 차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장성한 뒤 부친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 던 이색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일 게다. 비록 가난했지만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 등 당시 쟁쟁한 문인들과 동문 수학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훗날 이들 동문들과는 전혀 다 른 길을 걸으며 끝내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갈라서게 되지만. 정도전이 진사시에 급제했을 때 그의 나이는 약관 스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가 맡은 관직 은 통례문이라는 벼슬로 단지 조회 때 예식이나 맡아보는 말단 한직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는 얼 마 지나지 않아 부친상을 당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만 했다. 이때 정 도전은 이색 문하에서 동문 수학하던 정몽주가 선물한 <맹자>를 정독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정도전은 이 책에 담긴 '역성 혁명'을 근거로 스러져가는 고려 왕권을 지탱하려는 정몽주를 제거하고 새로운 조선의 창업을 꿈꾸게 된다. 부친에 대한 3년 동안의 탈상을 마치고 정도전은 정4품의 지제교로 임명된다. 그래서 공민 왕과 우왕에게 <대학>을 강의하며 당시의 정치 현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그는 철저 한 불교 배척론자였으며, 더구나 당시 조정의 공식적인 입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반원 친명 정 책을 주장하였다. 그러던중 1375년, 날로 국운이 기울어가던 북원은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를 협공하는 문제 를 협의하기 위해 고려를 방문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정몽주와 정도전 그리고 이숭인과 권근 등 신진 유학자들은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공민왕의 시해 사건 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 인임 등 친원파는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끝내 원나라 사신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정도전 등 신 진 유학자들은 스트라이크를 일으키며 반발했다. 이에 이인임은 주동자인 정몽주와 정도전을 유 배시켜버렸다. 당시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자신의 결연한 심정을 시에 담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 다. 죽음은 한 번뿐인 것을 목숨을 붙여 안락하게 살고 싶지 않네. 천년 뒤 적막하게 영웅 열사가 가을 하늘에 빗겨 있구나. 정도전이 유배된 곳은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에 있는 천민 부락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 셋이었다. 그는 3년에 걸쳐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이때 천민들과 어울리면서 탐관 오리 들이 자행하는 온갖 횡포와 힘없고 가난한 백성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설움을 몸소 겪을 수 있었 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그의 역성 혁명 사상을 더욱 확고하게 다져주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정도전이 3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그래서 정도전은 하는 수 없이 고향 영주로 내려가 서당 선생으로 세월을 소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불타는 정열과 원대한 포부는 그를 마냥 고향에 머물게 할 수는 없었나보다. 당시 정도전은 한양 출입이 금지된 이른바 불순분자였다. 그래서 한양에서 제일 가까운 삼 각산 아래에 삼봉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독서로 세월을 보내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정도전은 그 땅의 소유권을 가진 권문 세가에 의해 쫓겨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날부로 정처없이 방랑 생활을 하게 된 정도전은 귀양살이 이후 근 10년 동안 자신의 뜻을 한 번도 펴지 못한 채 아무런 기약없이 불안한 생활을 견뎌내야만 했 다. 이처럼 불우한 생활을 보내던 정도전이 마지막으로 시도한 승부수는 다름 아닌 이성계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자신의 사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가진 이성계를 필요 로 했던 것이다.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고 한다. 넓은 들 하늘 아래 초목이 자라고 긴 강은 띠처럼 성을 돌아 흐르네. 장군이 이 땅에서 억센 오랑캐 꺾어 장수 소임 거듭되는데도 머리카락 아직 검구나.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정도전은 스스로 멀리 북쪽 변경의 함주(함흥)까지 이성계를 찾아갔 다. 1383년, 북풍 한설이 휘몰아치는 차가운 겨울이었다. 그가 이성계를 만나 처음 나눈 이야기 는 "이만한 군대를 가지고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였다고 한다. 당시 정도전의 나이 마흔하나 였고, 이성계의 나이 어느새 마흔여덟이었다. 그리고 5년 뒤 위화도 회군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 서 두 사람의 만남은 곧 혁명 이론과 무력의 만남이었다.(소준섭, '조선 제1의 개국공신 정도전' <새로쓰는 조선 인물 실록1>, 자작나무, 1992.) ㅇ 조준의 토지 개혁과 왜구의 소멸 평양에서 이성계의 회군 소식을 접한 최영은 "이제야 고려의 사직이 다하는구나"라고 탄식 하며 급히 말을 돌려 개경으로 입성하였다. 당시 그에게 남아 있는 군사는 불과 50여 명 남짓한 호위병이 고작이었다. 최영은 개경에서 천여 명의 군사를 모아 이성계의 군사에 대항하여 끝까 지 용전 분투했지만, 결국 이성계에게 붙잡혀 남해 끝 합포로 유배되었다가 두 달 뒤에 죽음을 맞 이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죽음을 맞이한 최영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말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 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후 최영의 무덤에 정말 풀이나지 않았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어쨌든 이처럼 요동 정벌군의 두 사령관 이성계와 조민수는 개경에 입성하자마자 최대 라이벌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 도 강화도로 유배시켜버렸다. 그리고 당시 아홉 살이던 우왕의 아들을 창왕으로 옹립하여 국정 의 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6월 19일의 일이다. 그렇다면 해민들은 당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을까? 그것은 물불을 안가리는 저항 운동이었다. 최영의 요동 정벌을 계기로 소강 상태를 보이던 왜구는 이성 계의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갑자기 정신없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위화도에서 회군한지 한달도 못 돼 왜구는 불길처럼 번져 6월에 전주.김제.만경.정읍에, 그리고 7월에 광주, 8월에 거제.논산.청 주.유성.대덕.승주.고흥.풍안.진주.옥천.황간.영동 등 해안과 내륙에 걸쳐서 무려 9회 17개소로 확산되어갔다. 당시 이러한 정황은 <고려사> 정지전에서도 확인된다. 정지전에 의하면, "정지가 태조를 따라 회군하자, 왜구가 삼도(양광, 전라, 경상도)로 들어와 회군한 직후인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 와 군을 노략질하고 불태워도 이들에 맞서 대적할 장수와 수령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지 가 경남 함양에서 운봉을 넘어 남원으로 진출한 왜구를 격파하자 당시 백성들은 "이번 싸움이 아 니었다면 삼도 백성들은 거의 다 죽을 뻔했다"고 할 정도였다. 위화도회군이 왜구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다. 요동 정벌이 중단되면서 왜구들은 주원장 에 대한 보복도 못하고 게다가 군에서 해고됨으로써 다시금 생계가 막막해지자 해적으로 돌변해 가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며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해민들의 난동을 방어할 장수와 수령이 없었다고 한 것은 당시 명분없이 회군한 이성계에 협력할 장수가 거의 없 어 고려 전체가 치안 부재의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이 모든 사태의 책임자인 이성계로서는 뭔가 대책을 세워야만 했 다. 당시 이성계가 두려워한 것은 권력 내부의 산발적인 반란이 아니었다. 당시 고려의 정세는 전 시 상황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정의 대신들은 아무런 힘을 갖고 있질 못하였다. 이성계가 가장 두 려워한 것은 사병을 소유한 무장들과 자신의 정치적 야심으로 하루 아침에 주원장에 대한 복수 와 생계를 동시에 잃고 자포자기 심정에 빠진 해민들의 폭발적인 난동이었다. 명분없이 쿠데타 를 일으킨 이성계로서는 이번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지 못할 경우, 사병을 소유한 무장들과 지방 토호들의 퇴진 운동으로 치명타를 맞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동 정벌을 포기함으로써 자포자기 심정에 빠진 해민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대 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해민들이 안심하고 먹고 살 수 있는 생계의 보장이었다. 그런데 그것 은 다름 아닌 토지에서 나왔다. 그런 까닭에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자마자 '전제 개혁'에 착 수했다. 1388년 6월 19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창왕을 옹립한 이성계는 당시 강직하기로 소문 난 조준을 대사헌으로 발탁하였다. 대사헌으로 발탁된 조준은 창왕에게 토지 개혁에 관한 상소를 잇달아 올렸다. 그러자 창왕 은 자신이 즉위하던 6월의 교지에서 "귀족들의 토지 겸병으로 전법이 크게 무너졌으니 그 폐단 을 구하는 방법을 도평의사사와 사헌부 및 판도사로 하여금 의론하여 고하도록 하라"고 시달하였 다. 마침내 토지 개혁에 대한 논의가 조정에서 공식적 안건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 한 창왕의 교지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수순을 밟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제 개혁! 이것이야말로 이성계의 혁명 공약 제1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드라마 <용의 눈물>을 보면 조준의 토지 개혁이 당시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가 고려의 권문 세가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만 그려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비단 <용의 눈물>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사> 조준전에 수록 되어 있는 시무론에는 당시 잦은 전란과 왜구의 침입으로 버려져 황폐화된 고려의 토지에 대해 다음과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비옥하고 기름진 불역전(연작 농지)은 모두 해변에 있음에도 옥야 수천리의 농토가 왜놈들에게 함몰되어 갈대가 하늘에 닿았으니 국가는 이미 어염과 목축의 이익을 잃었으며, 또한 옥야 양전 의 이익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은 전법판서 조인옥의 상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전라, 경상, 양광 3도는 국가의 중심부임에도 왜놈들이 깊이 들어와 우리 백성들을 포로로 약탈 하여 우리의 부고를 분탕하여 천리가 소연합니다." 이처럼 당시 고려는 쓸만한 농경지가 집중된 서남해안 전역이 40여 년에 걸친 왜구의 침입 으로 거의 황폐화되어 있었다. 명태조조차 고려로 보낸 한 고명문에서 "지금 고려는 바다로부터 50리 혹은 3-40리씩 떨어진 곳이라야 비로소 백성들이 안심하고 산다"(1370)고 할 정도였으니 말 이다. 또한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 보면 정도전이 나주로 유배되었다가 부친에게 보낸 서 신(1375)이 하나 전하는데, 당시 전남 해안 지방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해변의 주군들은 변두리이고 멀어서 왜구들의 환난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연해 주군의 주민 들은 포로가 되거나 혹은 이주하여... 여우와 토끼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 당시 실시된 토지 조사(1388~89)를 보더라도 전국의 농토는 실전 491,342결(1결=2천-5천 평)에 대한 황원전(경작자가 이탈해 황폐화된 농경지) 비율이 무려 34%로 166,643결에 달했다. 그런 까닭에 고려로서는 버려진 농지에 백성들을 정착시켜 토지 생산력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 다도 시급한 과제였다. 명태조가 수많은 전란을 통해 중원을 제패하고서 농경지 재개발에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처럼, 잦은 전란으로 버려진 농경지의 재개발이야말로 허물어져가는 고려의 정 권을 장악한 이성계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이처럼 버려진 서남해안의 농지를 개발하는 데 있어서 조정으로서는 해민이냐 원주민이냐 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이미 버려져 누가 경작했는지 알 수 없는 농경지의 주인을 찾기도 어려 울 뿐더러, 설사 그들을 찾더라도 그들은 그 농경지의 소유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의 대 부분의 농토는 권문 세족들의 사전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정으로서는 원래의 경작민들을 귀향시 켜보았자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농지의 소유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농경지 개발에 있 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종래의 소유권 일체를 백지화시키는 사전 혁파를 단행하여 버려져 황폐화 된 권문 세족의 토지를 해민과 원주민을 가리지 않고 현재의 경작자나 또는 경작하려는 사람에 게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을 통해 농경지를 개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충실한 것이 조준의 토지 개혁이었다. 조준의 토지 개혁은 크게 3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그는 권문 세가와 귀족들에게만 이로운 사전을 혁파하고 이것을 '공전'으로 편입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전이란 국가 소유의 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농지세를 징수하는 수조지를 말하는 것으로, 조세를 부담하는 농민 소유의 자작 농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버려진 농지를 개간하는 자에 대한 혜택이다. 조준은 황폐화된 농지를 개 간하는 자에게는 20년 동안 그 농토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게 하고, 다른 부역을 시키지 않으 며, 오직 수군 만호부에 전속시켜 성곽을 수축하도록 하였다. 조준은 이처럼 버려진 농지를 개간 하려는 사람들에게 종래의 소유와 상관없이 경작권을 우선적으로 부여함으로써 해안 지역의 왜 구, 즉 해민들을 흡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오늘날의 호적부에 해당하는 호구 조사 실시를 주장했다. 당시 고 려는 잦은 전란으로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지방 행정조차 엉망이어서 이러한 유동 인구에 대한 호구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세금을 제대로 징수할 수가 없었다. 그래 서 조준은 전토의 많고 적음에 따라 호구를 편적해 세금을 징수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조준의 전제 개혁으로 정착한 왜구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 다. 토지 개혁이 실시된지 30년이 지난 세종 원년인 1419년 6월, 거제.남해현에서 망명한 왜가 생 계가 어려워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세종은 이들에 대해 "이전에 우리 나라로 망명한 왜인들은 곧 우리 나라의 백성이다. 그러니 이들을 모두 포구의 병선에 분배하여 그 호적을 물어 복구해주라"고 하명하였다. 여기에서 세종이 포구의 병선에 분배하고 그 호적을 물어 복구해주라고 한 까닭은 이들이 이성계의 전제 개혁 당시 수군 만호부에 소속되어 토지를 분배받아 호적에 편입되었던 왜구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1389년 12월, 토지 조사가 완료되자 이듬해 9월, 이성계는 한양으로 일시 천도하고 공사전적인 토지 장부를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린다. 당시 불길이 며칠 밤낮을 송도 하늘로 치솟 자 이를 바라본 공양왕은 "조정의 사전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혁파되니 애석하도다"라 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말 그대로 고려 왕업의 화형식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성계는 기득권 층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한양으로 일시 천도한 상태에서 토지 장부를 모두 불태워버린 것 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391년 2월, 이성계는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여 5월에 '과전법(科田 法)'을 공포하였다. 과전법은 오늘날 공직자의 봉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경기도내 농토 수조권 을 18품계의 직급 서열에 따라 배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수조권이란 소유권이 아 니라 국가가 징수하는 수확량의 1/10을 관료들에게 양도한 권리를 말한다. 그런데 당시 이성계 는 이러한 수조권 분배에서 고려 왕조를 지탱하던 왕족과 공경 대신들을 배제함으로써 사전을 잃 고 봉급줄마저 끊긴 이들은 자연 쇠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전제 개혁에 관한 연구가 주로 과전법에 초점을 맞추어왔지 만, 과전법은 지배층의 봉급 체계이지 전제 개혁 그 자체는 아니었다. 오히려 전제 개혁의 핵심 은 사전 혁파에 있었다. 사전이 혁파됨으로써 비로소 전국의 농토는 해민과 원주민을 가리지 않 고 현재의 경작자가 소유자로 전환될 수 있게 된 것이다.(김성호, <중국진줄 백제인2>, 맑은소 리, 1996, p253-260.) 이성계의 전제 개혁은 기존의 사유권을 혁파하고 경작자의 점유권을 그대로 소유권으로 인 정한 까닭에, 대부분의 전제 개혁에서 문제가 되는 토지 분배에 대한 복잡한 행정적 절차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해민 출신의 왕건에 의해 시작된 고려의 국운은 아이러니하게도 망명 한 이들 해민들의 보트 피플 행렬인 왜구로 인해 쇠락하여 소멸하고 만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한 명태조의 해민 탄압을 계기로 50년 동안 발 생한 왜구 문제에 대해 공민왕과 최영, 그리고 이성계는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했다. 먼저 공민 왕은 해민들의 보트 피플 행렬의 원인이 명태조의 해민 탄압에 있다고 본 까닭에, 명태조의 정책 이 전환되기를 기다리며 장기 전략을 펴나갔다. 당시 이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기에는 기득권 층 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게다가 버려진 토지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최영은 공민왕의 서거 후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한 고려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려 는 명태조의 무리한 세공 요구에 반발해, 오히려 해민을 동원해 요동 정벌 감행함으로써 명태조 를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최영은 먼저 명태조에 대한 불타는 복수욕과 수없는 전투를 통해 단련된 해민들을 동원해 요동을 정벌하고, 그 후 다시 아직 고려 군에 편입되지 않고 명나라 해 안 지역에 잔류하고 있는 해민들을 통해 명나라 해안 지역을 습격하고, 북쪽에서는 북원과의 협 공을 통해 주원장을 공략함으로써 명나라를 초토화시키려는 웅대한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성계는 명분없는 회군으로 하루 아침에 명태조에 대한 보복과 생계 대책을 동시에 잃게 된 해민들을 사전 혁파를 내용으로 하는 전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농민으 로 귀화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이처럼 사전 혁파를 통해 해민들이 정착하게 됨으로써 근 50여 년 이나 지속적으로 고려를 괴롭혀왔던 왜구 문제는 일단락을 맺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392년 7 월, 이성계는 조선을 창업하고 그후 새로운 서울인 한양으로 도읍해 태조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개성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는 단순한 국가 권력의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1,500년 간 지속돼왔던 지방분권주의의 소멸과 새로이 시작될 600년에 걸친 중앙집권 체제의 탄생을 알 리는 상징적 랜드마크이자, 해상 교역 문화에서 농경 정체 문화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상징적 사 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는 한양이란 텍스트를 다루기 전에 먼저 한양 천도의 계기가 된 개 성의 탄생과 그 소멸 과정, 즉 지방분권 체제의 붕괴 과정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이처럼 개성과 한양, 고려와 조선의 단절과 연속적인 측면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북한이 왜 아직도 김씨 왕 조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으며, 남한이 50년 독과점 체제로 운영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바다의 도시 개성의 탄생의 계기가 된 격동하던 8∼9세기 동아시아 무대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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