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chess (채승병) 날 짜 (Date): 1995년08월01일(화) 23시10분16초 KDT 제 목(Title): [Re] 스탈린그라드...... 다름이 아니라 Hobbes님의 글 내용 중에 다소 정정할 사항이 있어 그런데...... 이거 말꼬리 잡는 거 같아서 참 죄송하네요. 이해해 주시고. 제가 Hobbes님의 글 중에서 지적하고 싶은 사항은 2가지 입니다. 한가지는 블라우 작전. Hobbes님이 열심히 글을 쓰시다 잠시 착각하신 것 같은데 블라우(Blau. 청색)작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뒤에 행한 작전이 아니라 바로 이 스탈린그라드 진격 작전명이 블라우 작전이었습니다. 남부전선 좌익에서 호트의 제 4 기갑군이 선봉, 제 6군이 그 뒤를 따르면서 스탈린그라드 일대에서 돈강의 수운을 장악하고 북측으로부터의 소련군 압력을 경계하도록 되어있었고, 우익에서는 클라이스트의 제 1 기갑군이 주력이 되어 그로즈니(현 체첸 공화국 수도지요) 방면으로 진격하여 카스피해 연안 바쿠 유전 지대를 장악하도록 되어있었죠. 결국 제 4 기갑군이 스탈린그라드 초입에서 갑자기 제 1 기갑군 방면으로 잠시 전환된 사이에 소련군 제 62군이 진주하여 제 6군의 전멸이라는 참화가 일어났지만. 또 한가지는 독일군 부대편성에 관한 것입니다. Hobbes님이 글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에 독일군 편제가 감축되었다고 하셨는데 실제 스탈린그라드 이후에 부대편성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타임-라이프의 제 2 차 세계대전 시리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최초로 독일군 부대 편성이 변경된 것은 1941년 겨울 및 1942년 봄에 전년의 바바롯사 작전 실패의 큰 피해 후입니다. 1941년 작전에서 독일군 350만명 중 전투원 사상자는 75만명에 이르게 되고 이 전투손실을 보충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자 부대편제를 바꾸는 편법을 쓰게 되지요. 원래 독일군 1개 보병사단의 편제는 3개 보병연대가 주축이 되어있으며, 다시 이 각 1개 보병연대 예하에는 총 12개 보병중대로 구성된 3개 보병대대가 주축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밖에 각 보병연대는 제 13중대로 보병포 중대, 제 14중대로 대전차포 중대를 보유하고 있었고요.(또 기갑사단과 기갑척탄병 사단의 예하 부대는 또 편제가 틀렸습니다.) 이때 각 보병중대 정원은 본디 177명으로 1개 대대 총원은 708명으로 구성되었죠. 그런데 이 새로운 편제에서는 1개 중대원 수를 177명에서 약 120명 규모로 감축한 후에 1942년 하계공세를 맞습니다. 그리고 타임-라이프에 잘못 나온 것은 이때도 4개 보병중대가 1개 보병대대를 편성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탈린그라드의 참화 이후에 부대 편제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일군은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직전에 거의 대부분의 기갑사단은 완전편제 에 도달합니다. 기갑 및 기갑척탄병 사단은 아무런 편제 변경없이 최고조의 전력을 자랑하게 되었죠. 그러나 이때 중요한 사항은 1943년의 공업상황이 이당시 구식 화기들의 라인을 모두 최신형 무기들의 생산라인으로 전환 중이었기 때문에 극히 양산 상황이 불리했었다는 겁니다. 그 결과 쿠르스크의 대전투 이후 독일군 주력 기갑사단의 상태는 끊임없는 손실과 보충의 반복 하에서 완전편제에 도달한 적이 거의 없게 되죠. 다시 전 사단의 편제가 바뀐 것은 1944년인데, 이때는 결정적 원인이 또 작용하게 됩니다. 그것은 소위 이른바 동부전선의 `소련군 7대승리'인데 가장 타격이 컸던 것은 1944년 6월 22일(독일 바바롯사 작전개시 3주년)을 기해 이뤄진 소련군 중부전선 하계총공세로 이때 독일 중부집단군 30개 사단이 전멸당하여(스탈린그라드 전투의 2배 이상의 손실) 편제의 완전변경이 불가피해집니다. 결국 이때 보병사단은 1개 보병연대당 3개 보병대대 구성에서 1개 보병연대당 2개 보병대대 편제로 바뀝니다. (즉, 1개 보병사단당 보병대대수가 9개대대에 6개 대대로 감축됩니다) 그 바람에 원래 독일군 1개 보병사단의 총원은 17200명 이었는데, 9859명으로 대폭(!) 감소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히려 기갑사단의 편제는 조금 늘었습니다. 기갑연대의 경우 하위 편제는 종래대로 2개 기갑대대로 구성되었으나 하위 중대에 배치한 전차 수를 조금 늘렸지요. 결국 1개 기갑연대당 전차 161량 배치가 기준이 되었으나 실제 이 완전편성을 채운 예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이것도 사실은 부대마다 조금 틀려서 그로스 도이칠란트 기갑사단은 3개 기갑대대 편제였고 Waffen-SS 기갑사단은 12개 중대편성이 아니라 13개 중대편성 등 복잡했습니다) 독일의 진정한 심대한 손실은 1943년 7월부터 끊이지않고 계속된 소련군의 줄기찬 물량공세에 근거했습니다. 독일의 장병들은 제대로 재편성 받을 겨를도 없이 곳곳의 터져나오는 소련군의 분류를 막는데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고 결국 패전의 그날까지 시달려야만 했지요.(하기사 종전 후에도 시달렸지만) 스탈린그라드는 장비 및 인원손실에서 대단히 큰 패배였지만, 다시금 강조할 사항은 독일은 쿠르스크 전투 직전까지는 상당수 사단들의 피해복구에 성공했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