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8월 5일 목요일 오후 02시 09분 54초 제 목(Title): 박노해/흑과 백의 사이에서 [박노해의 희망찾기] 14. 흑과 백 사이에서 중앙일보 [ ] 1999. 8. 1. 日 "당신은 아직도 사회주의자인가?" '아직도'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정직하게 대답한다. "예!" "아니오!" 라고. 사람들은 쉽게 물을지 모르지만, 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극단을 온몸으로 뚫고 나오며 깨우친 나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스냐, 노냐' 둘 중 하나를 분명히 하기를 요구한다. 이 단순한 흑백논리의 이분법이 우리의 가치관과 무의식 깊숙이 뿌리내린 것은 언제부터일까?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내가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처음으로 배운 '운동권 노래' 인데, 원래는 찬송가였다. 이렇게 양자택일의 선택을 요구하던 시대가 있었다. 70년대 박정희 (朴正熙) 유신독재 치하에서 노동조합은 물론이고 현장의 작은 모임조차 불순세력의 책동으로 몰아붙일 때였다. 나는 함께 손잡을 '대학생친구' 를 찾아 경동교회로 향린교회로 헤매고 다녔다. 당시 힘없고 뜻있는 자들의 유일한 의지처는 깨어 있는 목자들이 이끄는 교회였다. 험한 그 시절,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며 '본회퍼의 자리' 에 서리라는 결단을 다지곤 했다. "미친 운전수가 버스를 몰고 달린다면 마땅히 그를 끌어내리는 게 사랑의 길이다" 라고 했던 본회퍼 목사. 그는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가 나치의 감옥에서 죽어갔다. 바리케이드의 맨 앞자리에서 불의에 대항해 싸웠던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독재와 민주 사이, 자본과 노동 사이, 우와 좌 사이엔 날카로운 전선이 선명했다. 그 중간에서 타협하고 얼쩡대는 자는 회색분자요,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야당 정치인조차 정권과 타협하는 자는 '사꾸라' 라고 지탄을 받았다. 모든 비판세력을 '빨갱이' 로 몰아붙이던 군사독재 아래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고 작은 권리 하나를 얻기 위해서도 말 그대로 '목숨 거는' 순교자의 각오를 해야만 했다. 20세기 냉전시대의 최전선인 한반도에 태어난 우리의 운명, 그리고 나의 팔자는 늘 고통스런 선택과 결단의 순간 앞에 세워지곤 했다. 나는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내 아버지는 일제에서 해방되자마자 닥쳐온 민족분단과 좌우대립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여순사건에 연루됐던 분이라고 한다. 어머님도 친척 어른들도 입을 굳게 다물어 당시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아버지는 시대의 상처를 어쩌지 못하고 소리꾼으로 떠돌다가 암으로 쓰러지셨다고 들었다. 임종하기 직전 아무 말 없이 어린 내 머리를 쓰다듬던 슬픔에 찬 몸짓으로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 남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터에서 만난 이웃마을 어른들은 내 손에 달걀이나 사탕을 쥐어주며 젖은 눈시울로 혼잣말을 하곤 했다. "정묵이 (필자의 부친 이름) 는 참말로 아까운 사람이제. 판소리도 잘하고, 마라톤도 잘하고, 말도 잘하는 멋쟁이였제. " 그러나 철이 들면서 나는 '빨갱이 자식' 으로 태어난 업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실감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조회 때건 수업시간이건 '무찌르자 공산당' 을 반복해서 가르쳤고 사회주의는 모든 악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연좌제의 서슬이 퍼렇던 그 시절, 나는 죽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아버지 무덤 근처에조차 얼씬하지 않았다. 대신 어린이 반공연사로 웅변대회를 누비며 마이크를 잡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외치고 다녔다. 그러다가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한 후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극우 반공주의에 가려진 현실의 모순을 조금씩 알게 됐다. 그리고 차츰 아버지의 시대와 좌익으로 기울었던 그분의 인간적 고뇌를 이해하게 됐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늦은 가을날, 나는 전라선 열차를 타고 불쑥 고향을 찾았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절을 올렸다. 뗏장이 군데군데 무너진 초라한 무덤 속에 외롭게 누워 계신 아버지. 나는 소주 한잔을 부어놓고 담배에 불을 붙여 무덤 앞에 놓아드렸다. 담배 한 대가 다 타면 또 한 대를 붙여드리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 외로우셨지요? 제가 당신의 아들로 이 자리에 다시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하시지요? 저는 아직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당신의 부끄럽지 않은 아들로서 저의 길을 가겠습니다. 서늘한 가을바람 속에 어두워진 산길을 내려와 그 날로 밤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나는 노동자로서 기나긴 저항과 투쟁의 세월을 살았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는 우리의 부르짖음은 자꾸만 체제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최소한의 민주적 권리마저 짓밟아버리는 군사독재하에서 노동해방을 꿈꾸던 우리는 민중항쟁의 길 말고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길을 가장 분명하게 과학으로 밝혀준 사상, 내가 그토록 부정하고 거부해온 아버지의 사상, 사회주의의 깃발을 들고 나서게 된 것이다. 결국 나는 체포됐다. 그리고 안기부 지하밀실의 고문장에서 나는 좌우의 이념보다 더 무서운 또 하나의 숨은 흑백논리 앞에 직면했다. " '노동의 새벽' 을 누가 써 준거냐? 대학도 못나온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시를 쓰고 어려운 이론 글들을 쓸 수 있느냐?" 하고 수사관들은 집요하게 나를 추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문수사를 지휘하는 총책임자인 듯한 사내가 불쑥 나타나 피투성이로 신음하고 있는 나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당신이 어떻게 조직의 지도자냐? 무식한 노동자가 대학 출신들을 하부에 거느린다는 게 말이 되는가? 솔직히 자존심 상한다. 사람은 출신성분을 못 속이는 법이다. 비록 적이라도 카이사르와는 상대할 수 있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살려둘 수 없다.박노해라는 이름을 영원히 매장시키겠다. " 나는 그 적의에 찬 표정과 음성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계급사상이 골수에 박힌 자들, 엘리트주의가 핏속에 밴 자들, 나는 그들의 무서운 이분법에 몸서리친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은 고상한 이념의 영역이고, 본질적인 것은 사람이 사람을 낡은 잣대로 차별하는 실제 현실이 아닌가. 학벌과 성별과 연줄을 갈라내는 숨은 구별짓기의 칼날 앞에 날개 꺾인 숱한 민초들의 설움이 내 안에 사무친다. 아 그러나 어찌 그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어려서부터 인간적인 욕구를 억제당한 채 오로지 일류대학과 출세가도로 내몰리고 있는 우리 삶의 서글픈 자화상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변화한다. 어느 대학을 나오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를 중시하는 '교육주의' 에서 스스로 얼마나 창조적으로 실력을 쌓았는지를 평가하는 '학습주의' 로 바뀌고 있지 않은가.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선택을 강요하던 양극의 사고에서 벗어나 다양한 패러다임이 모색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이미 단순계에서 복잡계로, 흑백논리의 이분주의에서 다차원의 거미줄망으로 전환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주의 체제는 무너졌고, 나도 무너졌다. 나는 그 참혹한 무너짐 속에서 내 사상과 운동과 사람을 다시 성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일어서야 했다. 절대 폭압의 시절에 주어진 '이데올로기의 갑옷' 을 빌려 입고, 눈보라치는 겨울날 품 안에 든 씨알뿌리를 살리고자 등을 꽝꽝 얼려야 했던 우리들. 이제 봄을 맞이하기 위해 언 몸을 녹여 연두빛 새싹을 틔워내는 해토 (解土) 처럼 사회주의 이념을 벗어 내리고 보니 모든 게 새로웠다. 비로소 우리가 사회주의라 부르는 것 속에는 세 차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첫째는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다. 이미 붕괴한 옛 소련.동독.루마니아, 그리고 북한과 같이 닫아걸고 겨우 생존하고 있는 현실 사회주의국가 모델이다. 나는 이러한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반대한다. 둘째는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다. 사회주의 이념은 자본주의 상품경제체제가 안고 있는 근본모순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노동하는 사람을 높이는 휴머니즘과 평등가치가 실현되는 대안체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프롤레타리아 독재.집단주의.민중항쟁 노선으로 귀결됨으로써 위험한 독소를 내장하고 있다. 따라서 생존단계의 닫힌 사회에서나, 우리와 같은 분단상황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이 힘을 갖는 순간 절대주의.유일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음에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무한질주에 제동을 거는 장치인 만큼 '사상의 자유' 로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다. 사회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는 인류의 소중한 가치로 계승해야 할 요소가 있다. 그것은 노동가치의 중시, 평등과 공동선에 대한 지향, 돈보다 사람을 우선하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가치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바탕에 접목시켜 온 것이 서유럽의 '열린 사회주의' 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전쟁과 남북분단, 그리고 군사독재 때문에 사회주의적 가치가 통째로 부정돼왔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 같은 이념적 획일성과 지적 단순성을 갖고는 세계를 향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나는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는 우리 현실에 더 많이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사회주의자인가? 사회주의적 가치를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아직 사회주의자다. 하지만 새롭고 다양한 사상을 향해 열려 있는 내 존재를 어떤 이념의 틀에 묶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예!" "아니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아직 우리는 흑백논리의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21세기는 서로 다른 이념과 문명과 인종이 더불어 사는 '공존의 시대' 다. 그러므로 미래의 지평에서는 생동하는 무지개빛으로 "차이 만세!" 를 노래하게 되기를 바란다. 눈이 녹으면 물이 된다지만 눈이 녹으면 봄이 온다네 흑과 백 사이는 회색이라지만 흑과 백 사이엔 오색 찬연한 생명빛 물과 불은 허공에서 서로를 죽이지만 물과 불은 땅 위에서 푸른 대지를 이루네 미래의 자리는 극과 극 사이 긴장된 떨림의 무게중심! 글= 박노해 시인 입력시간 1999년 08월 01일 19시 22분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