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8월 5일 목요일 오전 12시 27분 01초 제 목(Title): 정재숙/ 재미 미술사학자,이정희 아이구. 제가 존경하는 교수님 소식이 한21에 올라왔네요. 이교수님 수업을 세개(한국미술사,중국미술사,일본미술사)를 모조리 들었었는데, 이유는 너무 재밌고 강의가 다이너믹하지요. 우연히 길지나가다 붙잡혀서 짐나르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요. :) 1인10역 한국미술의 뚝심 미국에서 딱 한 사람 한국 출신 한국미술사 교수, 그가 불상을 찾아헤매는 이유 재미 미술사학자 이정희 그는 그 또래가 타고났을 적당한 키와 몸피, 스타일을 지녀 첫눈엔 참 평범해 보인다. 일 때문에 찾아가는 절에서도 “뭘 빌러 왔나” 퉁명스런 스님 질문에 남편 자리보전이나 아이들 합격기원을 하러온 아줌마로 몰리기 일쑤다. 그나마 그게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카메라를 메고 삼각대 가방을 들고 산 속에 들어가면 영락없이 신고를 당해 한번쯤 “주민등록증 좀 봅시다”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서너 시간 땀을 찔찔 흘리며 오른 산사에서 불상을 보여줄 수 없다며 108배를 하라고 고집을 피우는 스님은 차라리 낫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산을 헤매는 그를 간첩으로 모는 이 땅 사람들 신고의식에 질릴 때가 더 많다. “깎아먹을 건 내 잠밖에 없었다” “한국국제교류재단 초청장학금을 받아 3개월 예정으로 들어왔어요. 물론 불상 연구 때문이지요. 몇년째 방학이면 달려오지만 이게 언제 끝날 지는 나도 몰라요. 어제는 해남을 다녀왔고 내일은 원주로 떠납니다. 불상이 있다는 소리만 들으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요. 하루라도 불상을 못 보면 우울해지니 참 괴상한 직업병도 다 있지. 불상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막 생에 의욕이 솟아요. 새로운 불상을 만나면 그걸 사진찍고 관찰하고 크기며 특징을 기록하고 내 머리 속에 입력합니다. 가끔 조사를 끝내고 돌아온 다음 불상을 도둑맞았다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을 쓸어내리게 돼요. 비가 죽죽 내리니까 저 살던 포트랜드 생각이 나네요. 거긴 거의 1년 내, 9월부터 4월까지 비가 와요. 빗소리를 친구삼아 밤잠을 잊고 일하던 때가 그립네요.” (사진/97년 5월7일, 그 혼자 힘으로 만들다시피한 오리건 포트랜드 미술관 한국실 개관 기념식장에 선 이정희씨. 중국, 일본과 나란히 한글로 선명하게 쓴 한국이란 휘장 글씨가 유난히 자랑스러워 보인다.) 재미 미술사학자 이정희(51·오리건 포트랜드주립대 미술학과 부교수)씨는 지금 미국에서 딱 한 사람 한국 출신 한국미술사 교수다. 노란 얼굴을 한 동양여자가 교수가 되는 것도 어려운 판에 한국미술을 강의하겠다고 나선 뚝심도 대단했다.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71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석박사 학위를 따고 시간강사 생활을 한 지 이십몇 년 만에 교수가 됐을 때, 그는 자기를 따르던 재미동포 2세, 3세들 얼굴을 떠올렸다. “강의를 나가보면 아이들이 울분에 차서 저한테 막 따져요. 선생님, 왜 중국미술사나 일본미술사는 개설하면서 한국미술사는 안 가르칩니까. 우리도 우리 조국 미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여기서 교수하기는 글렀다고 거의 포기하고 있던 터였지만 걔네들 꿈을 풀어주겠다는 일념으로 한번 더 교수직에 매달렸지요. 공부하고 일할 때 깎아먹을 거라곤 내 잠밖에 없어서 나중엔 몽롱할 지경으로 한계상황에 다다랐는데 그래도 나밖에 이걸 할 사람이 없다고 마음먹으니까 몸이 버텨주데요.” 94년 포트랜드대학에 부임했을 때 강의말고 또 하나 그에게 떨어진 일은 포트랜드 미술관에 한국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간만 확보된 상태여서 소장품을 모으고 전시실을 디자인하고 도록을 만들고 홍보를 하고 개막식 준비까지 그 어깨 위에 떨어진 일이 1인10역쯤 됐다. 보스턴에 두고 온 남편과 두 아이들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때 한국실과 함께 중국실, 일본실이 같이 개관하게 돼서 은근히 경쟁심이 솟았어요. 일본실은 일본기업들 스무개쯤이 기부를 해서 돈이 많았고 중국실은 기증품이 많이 들어와 소장품이 많았어요. 우린 아무것도 없었죠. 억척을 부려서 전시장소로 중앙에 가장 좋은 자리를 얻고 나서 기증품을 구하러 발벗고 나섰습니다. 중고등학교 동창, 고향 동무, 사돈에 팔촌까지 정말 뭐로든 끈만 닿으면 쫓아다녔습니다.” 그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걸 보다못한 동창들이 그야말로 쌈짓돈 5달러, 10달러부터 큼직한 목돈까지 모아주고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캘리포니아 미술관 한국실이 구석에 없는 듯 처박혀 있는 것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단독실도 없이 중국·일본실 옆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우리 미술품을 떠올리면서 미국 내 최고의 한국실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뛰다보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좋은 일도 생겼다. 84살 먹은 미국 할머니가 소중하게 보관해오던 한국미술품 한점을 선뜻 기증한 것이다. “풍토가 달라선가. 미국 사람들은 기증을 잘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아무리 설득해요 소용이 없어요. 그 좋은 인류 문화 유산을 지하실에 처박아 두고 혼자 가끔 보느니 환하고 밝은 미술관에 내놓고 여럿이 두루 보면 좋지 않으냐, 해도 끄덕 안 해요.” 한국실을 만들고 나니 그곳 사람들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전시실 안에 사랑방을 만들고 전통 창을 짜넣고 일일이 해설문을 써붙였다. 김치도 모르던 사람들이 한국 선비문화를 이해하게 됐을 때, 한국미술사를 강의하는 자신을 학생들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줬을 때, 그는 홀로 포트랜드에 떨어져 외로웠던 몇년 전을 떠올렸다. 중국미술사면 됐지 한국미술사를 뭣 하러 따로 가르치냐던 동료 교수들도 그에게 한국미술사를 커리큘럼에 넣으라고 인정해줬다. 내년부터 대학원 과정에 한국미술사 석사과정을 개설하게 된 건 물불 안 가리고 뛴 이 교수 덕이다. 한국에서 필요로 할 땐 언제든… “제가 포트랜드주립대에 가서 배운 게 있습니다. 이 대학은 미국 내에서도 일찌감치 대학이 상아탑이 아님을 실천한 대학입니다. 교수들 평가에서 그가 얼마나 그 지역사회를 위해 협력하고 봉사했는가를 크게 칩니다. 저는 한국실 개관을 위해 뛰면서 포트랜드 사람들에게 멀리 동양에서 온 오래 됐지만 새로운 문화를 깊이 심었습니다. 그걸 인정받아 벌써 종신교수직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언제든 저를 필요로 하면 돌아올 겁니다. 그래서 미국 시민권도 얻지 않았어요.” 그는 한국미술사 강의를 위해서 자문을 구하는 교수들이나 한국미술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터넷 사이트(http://odin.cc.pdx.edu/~dilj/)를 활짝 열어뒀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아마도 한국과 한국미술을 잊을 수 없고, 그래서 자연스레 한국인과 한국상품과 한국을 사랑하게 되리라고 그는 생각한다. “연구자는 외로워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물을 남과 나눌 줄 알 때 비로소 연구를 완성하는 것 아닐까요.” 사진 박승화 기자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