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8월 4일 수요일 오후 12시 10분 55초 제 목(Title): 깐수/ 동서교류사항해(옥중서신) 교수간첩 무함마드 깐수의 獄中서신 “동서교류사號 항해는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고성표 월간중앙 기자 ------------------------------------------------------------------------------- - 대전교도소에서 복역중인 수인번호 4××0번 정수일(鄭守一·65·전 단국대 교수). 그는 사람들에게는 정수일이라는 낯선 이름보다 남파간첩, 교수간첩 무함마드 깐수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기자가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 준비를 서두르던 95년 여름의 일이었다. 대학에서 동양사를 공부하던 기자는 교내서점에 들렀다가 눈에 띄는 책 한 권과 마주쳤다. 무함마드 깐수가 쓴 “세계 속의 동(東)과 서(西)”라는 책이었다. 그 책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한 외국인 교수의 독특한 해석과 탁월한 역사학적 식견들로 채워져 있었다. 특히 우리 역사에 대한 언급에서는 ‘어쩌면 이렇게 한국사람인 나보다 우리 역사를 더 잘 이해하고 있을까’하는 신기함도 느껴졌다. ‘무함마드 깐수’라는 저자명만 없었다면 한국 사학자가 쓴 책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의 글은 날카롭고도 친근했다. 즉석에서 책을 구입한 기자는 하루만에 그 책을 탐독해 버렸다. 그로부터 한동안 깐수라는 이름을 잊고 지내던 기자는 1년 후 또 한번 그의 이름을 접하게 됐다. 전공 수업 시간에 지도교수로부터 무함마드 깐수 교수가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구속됐다는 사실과, 동료 교수들이 그를 구명하기 위해 탄원서를 준비중이라는 다소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지도교수는 “학자적 자질이 뛰어난 그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며 안타까워 했다. 기자는 1년 전 읽었던 그의 저서 내용이 머리 속을 맴돌면서 상당한 혼란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지난 4월, 이미 대중들에게는 잊혀져버린 ‘남파간첩 깐수’의 옥중 인터뷰 취재 지시가 떨어졌다. 대학 졸업 후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선뜻 그 기사를 맡겠다고 자청한 기자는 깐수를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우선 대학 시절 기자의 지도교수였던 김호동(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부터 깐수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됐다. 또 깐수의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였던 김원모(단국대 사학과) 교수와 현재 이슬람학회 회장인 손주영(외국어대 아랍어학과) 교수도 만나 학자로서의 깐수를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기자는 깐수가 옥중에서 보내온 편지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가 아직도 학자로서의 열정을 잃지 않고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연구 활동은 기자가 감히 상상하기 힘든 방대한 것이었다. 다음날 바로 깐수의 부인을 찾아가 취재 의도를 설명하고 면회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만나주기조차 꺼려했을 뿐 아니라 면회는 더더욱 안된다는 것이었다. 옥중에서 보내온 편지도 극구 공개를 꺼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96년 남편이 구속된 이후 각종 언론의 표적이 되어 한동안 시달림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흥미 위주의 언론보도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기자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대학 때부터 마음먹고 있었던 깐수 취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수차례의 전화 통화와 방문을 통해 부인과 기자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정작 깐수 본인이 면회를 극구 거절하는 바람에 옥중 인터뷰는 물거품이 되었다. 비록 인터뷰는 무산됐지만 깐수의 부인과 동료 교수들 그리고 한 수제자의 얘기를 통해 그의 최근 옥중 근황을 취재할 수 있었다. 옥중에서 “이븐 바투타 여행기” 완역 96년 7월 구속된 이후 4년째를 맞은 그는 그동안 수많은 서적 탐독과 방대한 원전(原典) 번역작업으로 쉴새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는 현실적으로 학문연구가 어려운 감옥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학과 아랍학에 대한 학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이미 세워놓은 연구계획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구속 1년만인 지난 97년 8월까지 그는 70여권의 서적을 독파하고, 한권의 영어 원전 번역을 끝마쳤다. 96년 11월초에 번역작업에 착수, 이듬해 8월까지 10개월에 걸쳐 “중국과 거기에로의 길”을 “동서교류사집록”이라는 역서로 번역해 냈다. 영국의 사학자 율(H. Yule)이 쓴 이 책은 동서교류사학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지만 국내에는 아직 변변한 번역서가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희망봉 항로가 발견되기 이전까지의 고대와 중세에 중국을 비롯한 동방과 서방 각국간의 교류를 다룬 것으로, 특히 주석(원저주·보저주·일역주·역자주의 4가지 종주와 소주)이 본문의 2배 이상을 차지하고 일곱개의 언어가 혼용돼 있어 자료가 미비한 옥중에서 그 방대한 번역작업을 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깐수의 옥중연구는 구속된 직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구속되기 직전까지 “고대동서교류사”를 집필해 놓았던 깐수는 작업을 완전히 마치지 못했다가 96년 11월 그의 간절한 법정진술과 당시 담당 검사의 배려로 양 손목에 수갑을 찬 채 몇 시간에 걸쳐 원고를 모두 정리했던 것이다. 이어 14세기 아랍인 대여행가였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완역을 시도해 불과 1년여만에 2백자 원고지 약 4천7백장 분량의 번역작업을 마쳤다. 이븐 바투타는 미국의 “라이프”지가 선정한 ‘1천년을 만든 1백인’에 뽑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행가로 그가 남긴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아랍어)는 30년에 걸쳐 12만km에 달하는 여정을 기록한 문헌으로 14세기의 이슬람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사료이자 인류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꼽혀 왔다. 이 책은 동양권에서는 중국에서 몇년 전 약역본이 나왔고, 서구에서는 프랑스에서 완역본이 나온 것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번역되지 않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국내에서 번역본이 출간되면 세계 두번째 역작이 되는 셈이다. 민병화(외대 중동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교수는 “언젠가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꼭 한번 완역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깐수가 해냈다니 놀랍다. 이는 우리 학계의 쾌거”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필생의 작업인 ‘실크로드학’으로 대표되는 ‘동서교류사학’을 정립하기 위해 이미 연구체계 구상을 마쳤으며 총 7장의 메모 작업에 들어가 이미 3장까지 마무리한 상태다. 애초 94년부터 10개년 집필 계획을 갖고 있던 이 연구는 2005년경까지 ‘중세동서교류사’ ‘근세동서교류사’ ‘고려·서역교류사’ 등의 연구를 마무리하고자 했으나 참고자료를 구할 수 없는 여건 때문에 집필을 보류해둔 상태다. 그러나 중세 부분은 이미 사료를 수집해 놓았고 총 7장으로 ‘학’(學)으로서의 얼개를 잡아놓은 상태다. 그의 역작들은 아직 햇빛을 보지 못했지만 연구 계획이 달성되면 현재 일본 중심으로 쓰인 왜곡된 동북아시아 지역의 동서교류사(실크로드학)를 바로잡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주변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었다는 죄책감으로 인한 극심한 정신적 고통, 고령으로 인한 육체적 한계 그리고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이처럼 학자로서의 사명감을 잃지 않고 있는 그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답은 그가 자신의 지도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을 알고 있던 모든 이들에 대한 보답이자 속죄이며 학자로서 민족 앞에 지고 있는 사명감이라고 밝혔다. “제가 영어의 몸이 된 지도 어언 오늘로 꼭 1년 한달이 되었습니다. 기로(耆老)에 있는 한 인생에게 있어서 영어(囹圄)란 실로 무상(無常)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릇 만사란 ‘위가위어가위지시’(爲可爲於可爲之時)여서, 할 만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바, 이 시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빈천하나마 평생을 걸고 다듬어온 학문으로 이 나라, 이 겨레의 학계와 후학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97년 8월3일 김원모 교수에게 띄운 편지에서> ▲고대부터 동서문명은 자체로 정체돼 있지 않고 활발한 상호교류를 통해 상승효과를 내왔다. 사진은 인류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한 곳인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 선 깐수. 그는 어릴 때부터 학업성적에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공부에 집념이 강했다. 또 중국에서 조선족 교포로 25년, 북한과 중동·동남아시아 등 해외에서 10년, 마지막으로 남한에서 12년이라는 드라마 같은 인생여정을 살아오면서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큰 열정을 보였다. 어쩌면 그의 성장환경과 생활여건은 그가 훗날 사학자로서 필요한 조건(어학능력)을 갖추는 데 오히려 큰 이점이 된 듯하다. 여기에 선천적인 천재성이 가미되었다. 중국에서 태어난 그는 기본적으로 중국어에 능통했다. 또 해방 전에는 일본어로 소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대학 이후에는 아랍어가 거의 모국어화되어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는 모든 교수 참고서적이 러시아어로 되어 있어 계속 러시아어를 접할 수 있었고, 영어는 베이징(北京)대학교 시절 및 영국식민지였던 이집트 유학 생활을 통해 익히게 되었다. 한편 당시 아랍-이슬람학 고전에 관한 연구는 독일인들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어를 정식으로 공부해야 했고, 중국 외무부 연수원에서 불어를 배운 뒤 프랑스 및 스페인 식민지였던 모로코·알제리에서 계속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그곳 상류층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 불어와 스페인어를 익히게 되었다. 그후 공작원으로 해외에 파견되어 필리핀의 타갈로그어 및 말레이시아어를 접하는 등 모두 11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중에서 중국어·일본어·아랍어·영어는 거의 모국어화되어 있을 정도로 능숙했다. 한국어까지 하면 그가 할 수 있는 언어는 총 12개 국어. 다양한 언어 사용 능력은 그가 역사학자로 성장하는 데 큰 힘이 됐다. 北 반대 무릅쓰고 신라사 연구 고집 50년대 아랍 국가에 가서 이슬람학을 연구하고 북한에 돌아온 뒤에도 그는 10년간 교수 생활을 하며 아랍권에 대한 어학 및 사학분야의 연구에 매진했다. 그후 공작원으로서 해외에서 학생생활을 하면서 주로 ‘이슬람 전파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고 84년 남한에 들어와 단국대에 편입할 때에는 ‘극동에서의 이슬람 전파사 연구’를 연구 주제로 선정했다. 그러던 중 85년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 김정위 교수로부터 아랍에 신라 자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카이로대학 유학 시절(55년)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결국 그해 카이로를 방문, 신라에 대한 자료가 담긴 책 16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이미 연구 자료가 거의 다 준비되어 있던 ‘극동에서의 이슬람 전파사 연구’ 주제 대신 한민족 대외사의 새 지평을 열게 될 ‘신라·아랍제국 관계사 연구’를 새로운 주제로 선택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고구려사가 중시됐기 때문에 당시 그가 신라사를 연구한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고구려가 사라진 뒤인 통일신라시대에 관한 연구이고 민족사적으로 보아 몹시 중요하다는 점을 들어 결국 본격적인 신라사 연구에 착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신라사 연구는 그 폭이 더욱 확대되어 국내에서는 체계가 잡혀있지 않던 ‘동서교류사’를 학문분야로 정립·심화시켰으며 그는 이 분야의 국내 최고 권위자가 됐다. 거기에는 김원모 교수의 도움이 컸다. 김교수가 깐수를 처음 만난 것은 85년 어느 날이었다. ‘콧수염을 기른 이국적 용모’의 한 남자가 연구실로 찾아와 지도교수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김교수는 그의 전공이 동양사쪽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당신이 전공하려는 동양사와는 무관한 서양사 전공 교수이니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얘기하며 “동양사를 전공한 교수를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교수님이 볼프강 프랑케 교수가 쓴 ‘동서문화교류사’를 번역해 출판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프랑케 교수는 말레이 대학에 있을 당시 저의 은사였습니다. 저는 동서문화교류사를 전공하려 하니 꼭 지도교수를 맡아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원래 볼프강 프랑케 교수는 중국 태생으로 독일 함부르크 대학 교수로 있다가 정년퇴임 후 말레이대학에 초빙교수로 와 있었는데 바로 그 시기에 깐수가 프랑케 교수에게 수학했던 것이다. 마지못해 허락하기는 했지만 당시 김교수의 솔직한 심정은 깐수가 과연 박사학위 논문을 제대로 써낼 수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교수는 얼마 후 자신의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영어·독일어·불어·중국어·일본어·한국어·아랍어 등 7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능력에다 역사학자로서 갖출 수 있는 최상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어학의 천재였습니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김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깐수는 일본 학회에 가면 일본어로, 중국에 가면 중국어로, 미국에 가면 영어로 논문을 쓰고 발표했다. 깐수의 역사학자로서의 자질은 단지 언어 구사 능력 뿐만이 아니었다. 김교수에 따르면 그와 학문의 세계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그 수준이 얼마나 높던지 중간중간에 아주 적절한 고사성어 등을 섞어 자신의 의사표현을 했다고 한다. 98년 겨울 대구교도소에서 보낸 서신에서도 이런 깐수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이 것은 공작원으로서 받은 교육만으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전형적인 학자로서의 깐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적한 독방은 자신을 돌이켜 보고, 가려 보고, 가늠해 보는 자기도야의 도량이기도 합니다. 자칫 무위도식하고 허송세월하기 일쑤인 이곳에서 저는 ‘수류화개’(水流花開·물 흐르고 꽃 피다)를 나름대로의 생활철학과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뜻인 즉, 매일매일 무언가 한가지라도 성취하여 늘 생활을 팍팍하게 하지 않고, 물이 흐르고 꽃이 피듯 싱싱하게 해 보자는 것입니다. (중략) … 이럴 때면 형극 속에서도 ‘마부위침’(磨斧爲針·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한 선열들의 그 굳은 의지와 끈기가 새삼 저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98년 12월21일 손주영 교수에게 띄운 편지에서> 깐수는 일찍이 ‘동서 교류사’ 분야에서 주로 한민족의 대외 교류사를 규명하여 우리 민족이 세계 속의 선진 민족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하고 결국에는 동서교류사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그는 박사학위 논문 ‘신라-아랍제국 관계사 연구’(1990, 단국대학교)를 발표했다. 이는 중세 동북아와 서남아시아의 교류를 다룬 것으로 그의 박사학위 논문 심사위원들은 하나같이 논문 내용의 탁월함과 참고서적의 방대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다른 면은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그가 보인 학자적 소질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일본의 역사 왜곡에 연구성과로 맞대응 논문의 요지는 과거 ‘남해로’를 통한 신라와 아랍의 활발한 교류를 밝히는 것으로, 아랍 동방무역의 전지기지였던 ‘깐수’라는 지역이 일본 학계에서 주장하던 것처럼 일본의 ‘江都’가 아니라 신라의 강주(康州·지금의 경남 진주)임을 논증한 것이다. 김원모 교수는 이 논문으로 해서 그동안 서역·동방 교류사에서 제외됐던 신라의 문화사적 위치가 국제적으로 복권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의 가명 ‘깐수’는 자기 논문의 핵심 단어였다는 점에서도 학문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논문 전체의 주제가 일본에 의해 왜곡된 민족사 일부를 복원하는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비록 정치적으로는 간첩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애국자라는 일각의 지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는 이밖에도 저서 “신라 서역 교류사”(1992, 단국대 출판부), 논문 ‘이드리시 세계지도와 신라’(1994, 신라문화연구원), ‘혜초의 서역장행과 8세기 서역불교’(1995, 정신문화연구원) 등 20여편을 발표해 학계 최초로 고대 한반도의 대서방 교류관계를 규명했다. 깐수는 위 연구에서 통일신라와 서역간의 문물교류 상황, 일본 및 서구 학자들이 저지른 신라 관련 왜곡 기술에 대한 시정, 신라의 이름이 기재된 세계 최초의 지도(1154년) 발견, 혜초·고선지 등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와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 등 새로운 문제들을 제시하였다. 신라 고승 혜초는 동양사람으로는 최초로 오늘의 중동을 역방하여 진서로 평가받는 현지 견문록을 남긴 거룩한 문화사절이었다고 평가했다. 고구려의 후예인 고선지는 세계 전쟁 사상 나폴레옹보다 더 위대한 전적을 쌓은 희대의 맹장이었다는 점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그는 또 일본학계에서 아전인수격으로 신라에 대한 아랍 문헌 기록을 자신들에 관한 기록이라고 오도하였는데 이를 낱낱이 밝히려 하였다. ▲8수6년 7월31일 통역실습 지도차 덕수궁에서 만난 외국어대 아랍어과 학생들과 깐수(오른쪽에서 두번째). 특히 그는 실크로드와 한반도의 연결 문제에 매진했다. 실크로드가 어떻게 한반도까지 이어졌는지 증명되어야 교류의 루트와 그를 통한 교류의 가능성, 현실성 및 그 실태가 입증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이미 10년 전에 실크로드의 한 간선인 남해로를 일본까지 연장해 놓고 국제 학계의 공인까지 받아놓고 있는데, 사실은 바닷길이 한반도를 거쳐 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 손도 못대고 있는 실정이었다. 깐수는 바로 이 문제를 제기한 후 95년부터 약 3년간 집중 연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과학적 논증을 제시하여 국제 학계의 공인을 받기 위해 96년 2월 중국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학에서 열린 ‘담기량 선생 탄생 85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에서 ‘고대 한·중 육로 초탐’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실크로드의 한 간선인 오아시스 육로가 고조선 시대부터 한반도에까지 연장되었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이 발표는 연구자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이어 5월 황해 횡단 선상에서 개최된 ‘장보고 대사 해양경영사 연구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남해로의 동단고대 한·중 해로’라는 제하의 논문에서 실크로드의 한 간선인 남해로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고증하였다. 그리고 이를 좀더 다듬어 7월18일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열린 국제역사·지리학대회에서 ‘고대 한·중 해로 초탐’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남해로의 한반도 연장설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으려 했으나 당국에 체포되어 무산되고 말았다. ◇깐수, 그는 누구인가 남북 분단이 빚어낸 비극적 지식인의 초상 깐수의 일생은 그야말로 ‘한편의 소설’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가 태어난 것은 1934년, 옌볜(延邊)에서였다. 그의 부친은 원래 함경북도 명천에서 화전을 일구던 가난한 농민이었는데 1911년경 중국 옌지(延吉)현 자유촌으로 이주하였다. 해방 이후 극소수만이 입학할 수 있는 중국 옌지의 옌볜고급중학교 및 베이징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무학력자였지만 교육 열의가 대단한 부모 덕분에 대학까지 다니게 된 그는 55년 조선족으로서는 첫 국비유학생으로 이집트의 카이로대학에 유학을 가게 된다. 58년 9월 중국 외교부 서아시아 및 아프리카국에 소환되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중국 외교관으로서 전도유망했던 청년 깐수는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들에 대해 강력한 한화(漢化)정책을 취하기 시작하던 60년대초 거꾸로 중국 정부에 북한 국적 회복을 탄원한다. 당시 중국 외교부에서는 정씨 만큼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또 돈들여 양성한 인재를 그냥 놓아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북한으로 가겠다는 그를 계속 설득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편협한 민족주의자’라는 식으로 위협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고위 당국자들과 10여 차례의 면담, 그리고 당시 부총리 겸 외교부장이었던 진의와의 최후 담판을 통해 63년 6월 마침내 북한으로 갔다. 그는 10년간 평양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학과장 등 교수로 재직하면서 크게 두 분야 즉, 중동학 개척 및 국제관계사를 자신의 학문 연구 주제로 삼아 매진했다. 그러던 중 1974년 9월 노동당 연락부의 소환을 받고 해외 공작요원으로 차출된다. 4년간의 교육을 거쳐 79년 레바논에 파견되면서 그의 기구한 운명은 시작되었다. 베이루트 아랍대에서 역사학 석사 학위를 받은 정은 유학을 간다는 명목으로 튀니지로 출국한다. 그는 튀니지대학 사회경제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등록, 활동하면서 석사 과정을 이수, 81년 또 한번 석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을 떠돌다 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 필리핀 국적을 취득한다. 84년 말레이시아 한국어 연수과정에서 알게 된 한국인 교수와의 인연으로 국내에 입국, 단국대 박사과정을 거쳐 조교수로 임명돼 동서문화 교류의 전문가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88년에는 서울의 모 종합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현재의 부인을 만나 결혼한다. 그는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던 당시 뛰어난 어학 능력을 바탕으로 ‘동서문화교류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96년 7월3일 서울시내 모 특급호텔에서 베이징의 모처로 팩스를 이용, 수집한 정보를 보내려다 좁혀든 정보기관의 수사망에 걸려 대전교도소에 수감중이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전향서를 제출한 뒤 현재까지 학문에만 열중해 왔다. ▲96년 5월 황해 횡단선상에서 개최된 "장보고 대사 해양경영사 연구 국제선상 학술대회". 깐수는 이 자리에서 '남해로의 동단-고대 한·중 해로'라는 논문을 발표, 실크로드의 한 간선인 남해로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고증했다. 깐수는 또한 97년 실크로드의 다른 한 간선인 초원로(스텝로)의 한반도 연장문제를 정리하여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하려 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문제는 일단 초보적인 학문적 정립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동서교류학이 미개척 분야였던 우리나라에서 깐수는 일찍이 90년대초 단국대에서 학부에 ‘동서문화교류사’라는 과목을, 대학원에 ‘동서문화교류사 연구’라는 과목을 각각 개설하였다. 또 96년에는 새로이 학부에 ‘동서문화의 이해’라는 과목을 신설하였는데 천안캠퍼스에서는 한 강좌에 7백여 명이나 수강함으로써 개교 이래 최다 수강생 기록도 남겼다. 궁형 받은 사마천의 심정으로 ‘실크로드학’ 집대성中 그가 이렇게 실크로드학의 정립을 비롯해 우리 역사상의 동서교류 문제에 집착했던 이유는 다름아닌 한민족은 ‘열린 민족, 열린 나라’를 지향했으며 결코 ‘은둔’과 ‘소극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려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신문이나 학술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 …한국에 은둔국이란 이름 아닌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미국의 동양학자이며 목사인 그리피스이다. 과연 한국은 그네들이 빈정대듯이 큰 갓을 눈두덩이까지 눌러 쓴 채 세상을 알지도 또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호젓하고 닫힌 나라였던가? 1154년에 저명한 아랍 지리학자 이드리시는 그의 세계지도에 지구의 동단에 있는 ‘섬의 나라’ 신라를 뚜렷하게 명기하였다. 요컨대 한문화권(중국이나 일본 제외)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 만방에 소개한 사람은 다름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무슬림들로서 그 역사는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중략) … 천년 전부터, 어쩌면 그보다도 더 일찍부터 있어 온 한국과 아랍세계간의 교류상을 몇 줄의 글로 줄여봤다. 한국은 결코 은자의 나라가 아니라 열린 나라였으며, 한국 문화권 밖에서 한국을 제일 먼저 알고 세상에 알린 사람들, 한국을 누구보다도 먼저 세계지도 속에 자리잡게 한 사람들이 바로 아랍-무슬림들이었다는 필자의 논지가 이 선에서 대충이나마 설득력을 갖게 된다면 다행으로 생각하며 한국에 관한 두 위인의 다음 글로 맺음을 하려고 한다. … (후략)” 그가 글을 맺으면서 인용했던 것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와 “25시”의 작가 게오르규의 ‘한국찬가25시를 넘어 아침의 나라로’였다. 그가 진정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학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우리 민족사에 대해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분단국가의 현실에서 ‘정치적’으로는 간첩이었지만 남한에서 그가 전력을 기울였던 것은 간첩 깐수로서의 활동이었다기보다 잊혀지고 왜곡된 민족사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한 민족주의 사학자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그가 12년 동안 남한의 정보를 수집해 이를 분석, 보고하는 등의 간첩 행위를 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기밀누설 등에 대해서는 일부 무죄 판결이 나온 바 있다). 하지만 간첩 행위에만 초점을 맞춰 학자로서 그가 이루어 놓은 모든 학문적 성과마저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진정 옳은 일인지는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학문적 성과를 이대로 사장시켜 버리기에는 지난 12년간 역사학계에 그가 끼친 영향과 역량, 신선함이 너무나 아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혹자는 십수년간 간첩과 학자로서의 이중생활을 철저하게 꾸려나간 ‘프로페셔널 스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프로페셔널적 이중인물이었다 할지라도 학자적 양심과 사명감, 소명의식 없이는 쉽게 하기 힘든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변호를 맡았던 김한수(金漢洙) 변호사는 그를 가리켜 “남과 북의 양 체제를 모두 겪으면서 남과 북을 냉철하게 그리고 거시적으로 바라보았던 최초의 지식인이었다”고 표현했다. 또 “남북 분단이 빚어낸 비극적 지식인의 대표적 군상”이라고 말했다. 지난 세월 깐수 그 자신 역시 북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과, 남한에 있으면서 꼭 이루어내고 싶었던 학문적 욕구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심적 갈등을 겪었을 것인가는 대강 짐작이 가고 남는다. 옥중에 갇혀 있는 지금도 자신 때문에 단국대 사학과 대학원에서 동서교류사를 전공하겠다고 들어온 박사과정 2명과 석사과정 3명의 학생이 공부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데 대해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그들 중 일부는 전공을 바꿔 다른 지도교수 밑에서 수학하거나 중도에 학업을 그만두고 사회에 진출한 경우도 있다. 깐수의 수제자였던 배준원(단국대 사학과 86학번)씨의 경우 박사과정을 밟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현재는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다루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선생님께서 나올 때를 대비하려고 합니다. 저는 비록 공부를 다 마치지 못했지만 동서교류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후학들을 위해 그리고 나중에 선생님이 나오셨을 때 변변한 연구실이라도 하나 마련할 수 있도록 사회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제가 공부를 그만둔 것을 선생님은 무척 못마땅해 하셨어요. 학위를 취득하려면 2002년까지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해야 하는데 옥중에 계시면서도 제 걱정에 손수 논문 제목을 잡아주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다시 공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비록 선생님은 반대하시지만 제자로서 공부 외에 다른 쪽으로도 스승의 뜻을 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씨는 스승이 영어의 몸이 되자 홀로 살고 있는 부인 윤씨를 친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전화로 안부도 여쭙고 시간이 나면 틈틈이 찾아 뵙는다고 한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분에게서 참 스승의 모습을 느꼈습니다.” 배씨에게 깐수는 여전히 간첩으로서가 아닌 학자로 그리고 스승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부인 윤씨 역시 초기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 한달에 두번씩 거르지 않고 남편 옥 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깐수는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옥중에서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바로 부인 윤씨의 존재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정수일이라는 한 인간에 대해 부인 윤씨나 제자인 배씨처럼 끝없는 믿음을 갖고 지켜보는 이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 평소 그와 빈번하게 학문적 교류를 해왔던 이슬람학회(회장 손주영 교수) 회원들의 구명운동을 비롯한 주위의 관심도 그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옥중에서 학문연구를 계속하는 것은,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은 민족사의 복원이라는 학자로서의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 … 여러 가지 불비한 여건 속에서 역출한 것이라서 후려(後慮)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학계를 위해 무언가 기수(旣遂)했다는 후련함과 일말의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럴 때면 궁형(宮刑) 속에서 사서 중의 사서라고 하는 “사기”(史記)를 찬한 사마천을 그려보기도 하고, 가까이에는 우리의 선현 중에서 유배 2년만에 “동의보감”을 완성한 의성 허준(許俊), 역시 유배살이 18년간 5백여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茶山)을 우러러 보곤 하였습니다. 다산은 앉아서 너무 오래 쓰다 보니 엉덩이가 짓뭉개져 벽에 선반을 매고 일어서서 썼다고 합니다. 실감납니다. 선반이라도 맬 수 있다니 여건으로 보면 유배살이가 그나마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선현들이 어떤 역경 속에서도 절차탁마(切嵯琢磨)하고 마부위침(磨斧爲針)하는 그 불요불급의 정신과 의지, 실천은 귀감으로 저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97년 8월3일 김원모 교수에게 띄운 편지에서> 지난해 8월15일 그는 광복절 특사 때 형기의 절반을 감형 받았다. 일흔을 바라보는 고령에 워낙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해오고 있기도 하지만, 사장시킬 수 없는 학문적 성과가 정상참작되면 그가 사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듯하다. “따지고 보면 그도 결국 남북 분단의 불쌍한 희생양이 아닌가 한다. 이미 본인이 전향 의사를 밝혔고, 못다한 학문에 대한 애정을 간곡히 표현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성숙한 사회라면 그를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관용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우리 사회의 법질서상 그가 강단에 서는 것이 어렵다면 그 아까운 재능을 다른 방식으로라도 살리도록 배려하는 것은 어떨까. 관용과 인도주의의 정신이 그 옛날 서역과 활발한 교류를 펼쳤던 신라인의 미덕이 아니었던가. 머지않은 시기에 다시금 연구실에서 ‘학자 정수일’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참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음을 확인할 날을 기대해 본다.” 외국어대 한 교수가 깐수의 전향서 제출이 있은 직후인 96년 11월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의 한 대목이다. 아마도 깐수의 지인들이라면 모두 비슷한 심정에서 학자 정수일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염원이 반영된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정부가 그동안 줄곧 추구해 온 햇볕정책에도 부합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더군다나 지난 7월5일 미국 방문 기자회견에서 김대통령이 8·15 특사 때 공안사범 대폭 사면 방침을 밝힘에 따라 이미 형기의 반을 채운 깐수가 석방될 수 있을 것인지 주목받고 있다. 깐수 獄中서신 전문 ------------------------------------------------------------------------------- - 김원모 교수에게 보낸 서신 *97년 8월3일 서울구치소에서 존경하는 교수님과 사모님. … 두 분의 다함없는 은고는 저에게 큰 힘이 되고 있으며, 이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이 두번에 걸쳐 전하신 뜻깊은 4언시문(四言詩文)도 반가이 받아 감상·음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는 시문 자작이 허용되지 않아 갱수하지 못함을 널리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그간 “중국과 거기에로의 길”(Cathay and the way Thither, H. Yule 원저, H. Cordier 보저, London, 1866, 총 9장 1백18절)이란 영어 원전을 완역했습니다. 지난해 11월 초에 번역을 시작하여 금년 2월25일자로 초역을 끝냈습니다. 이 날은 제가 지난해 상해에서 있은 국제 학술대회에서 ‘고대 한·중 육로 초탐’(古代 韓·中陸路初探) 이란 논문을 발표해 실크로드의 육로가 한반도에까지 연장되었다는 일설을 내놓은 날입니다. 그후 사정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6, 7월 두달간에 교정과 원고지 필사를 끝내고 지금 출판 승인에 제출중입니다. 동서교류사의 제1호 고전격인 이 책은 희망봉 해로가 발견되기 이전까지의 고대와 중세에 있어서 중국을 비롯한 동방과 서방 제국간의 교섭·교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수님이 역출한 “동서문화교류사”와는 신통히도 전후편 관계를 이루면서 잘 매치가 되는 성 싶습니다. … 역서명은 동서교류사의 초창적 고전이란 뜻과 집록적 성격을 살려 “동서교류사집록”으로 하고 부제를 ‘중국과 중국에로의 길’로 하였습니다. 분량은 2백자 원고지로 본문이 2천1백14매인데, 여기에 색인까지 합치면 약 2천2백50매쯤 될 것 같습니다. 교수님, 이제 제 이름 석자를 떳떳이 밝히면서 주저나 구김 없이 재량껏 모든 것을 행하니 자못 가슴 뿌듯합니다. 계획으로는 마르코폴로·오도릭과 함께 중세 3대 여행가의 한 사람인 아랍의 대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아랍어)를 번역하고, 다음으로 동서교류사나 실크로드 문화사와 관련된 대표적인 중국어 서적과 일본어 서적을 각각 번역하려고 합니다.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독일어나 러시아어로 된 이 방면의 고전도 구하는 대로 번역해 볼 작정입니다. … 오늘은 이만 줄이고 내일 편지에 계속하겠습니다. 그럼 두 분 안녕히 계십시오. 정수일 드림. *97년 8월4일 서울구치소에서 … 지난해 11월 법정 신문에서 저는 “욕심 같아서는 고대 동서교류사 원고라도 살려 학계에 남기고 싶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후 선고를 앞둔 이틀 전에 갑자기 담당 검사가 부른다기에 갔더니 그 검사님은 몰수된 컴퓨터 본체를 찾아다 놓고 그 원고를 출력 정리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실로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담당 직원과 함께 작동하였더니, 다행히 그 원고만은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만감이 교차하여 그만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바로 며칠 전 나에게 ‘극형’을 구형한 바로 그 검사 앞에서 나의 양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로…. 교수님, 인간사란 이렇게 기상천외한 무상과 이변의 협연으로 ‘새옹지마’(塞翁之馬)를 연출해 내는가 봅니다. … 다음으로 배준원의 박사학위 논문 문제를 상의코저 합니다. 근자에 준원이 보낸 편지를 통해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모셨다는 것과 그의 근황을 대충 알았습니다. 준원이는 제가 출정할 때 마다 법정에 와서 지켜보곤 하였습니다. 본래 제가 그의 지도교수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그에게 미안하거니와 교수님께 부담을 넘긴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저는 그에게 연일 보낸 세 통의 편지에서 저 나름대로 그의 학위논문 제목까지 지목하면서 논제의 취지와 체계, 내용과 참고문헌 등을 개략적으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 준원이와 함께 박사과정에 있는 신현중 교수에 대해서는 미안함을 넘어 죄책감마저 듭니다. … 몇 년 전 제가 동아갤러리에서 실크로드에 관한 특강을 할 때 그와 처음 만나 알게 된 후 한학기 동안 ‘동서교류사연구’란 저의 대학원 강의를 방청하고서는 곧바로 박사과정에 응시, 입학하였습니다. … 신교수는 법정에도 여러 번 나와서 눈인사를 나눈 바 있습니다. 1년간 휴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무쪼록 훌륭한 학위 논문으로 동서교류사의 연구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겨 놓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비록 제 처지가 이러하지만 가능한 한 선학의 본분을 다하려고 합니다. … 정수일 드림. *97년 8월5일 서울구치소에서 …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대학원에서 5∼6명의 원생들이 동서교류사를 공부하겠다고 ‘동서교류사호(號)’(준원의 말)에 승선, 막 출범의 닻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들이 이제 실의 속에 중도 하선하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 저는 교수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동서교류사호’는 결코 회항하거나 침몰하지 않고 옹골찬 항진을 이어가리라고 믿습니다. … 저의 바람은 단국대에서 동서교류사라는 학과목이 선택이건 필수건 간에 명맥을 이어갔으면 하는 것입니다. 선학이 후학들이 웅비하는 받침대, 도약하는 발판,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어 그네들이 당당한 학문의 역군이 될 때, 선학에게는 그 이상 더한 보람은 없을 것입니다. … 저는 범행에 대하여 회개, 자복하면서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누를 끼친 데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하는 바입니다. 그러면서 분단 비극의 체험자이고 산증인이며, 또 그 희생자인 저는 오늘의 이 처지를 분단시대를 사는 한 민족적 지성인이 겪는 운명으로 가늠하고 있습니다. … 요컨대 충정이상조우역사평가가 동서고금 지성인 공유의 인생패턴인 것 같습니다. 멀리로는 나말의 고운 최치원으로 올라가면, 그는 오로지 신라인이란 ‘동인의식’(東人意識)을 간직하였기에 당(唐)에서의 양양한 전도도 마다하고 29세(저도 동세에 귀국)에 단연 귀국합니다. 나말(羅末)의 난세를 치유하려고 ‘시무십조’를 건의해 구국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모함으로 변방의 외직으로 쫓겨났습니다. 고운의 이상은 좌절되고, 그는 수많은 고뇌와 몸부림을 거듭하다 역사무대에서 사라졌지만, 후세에 의해 그는 ‘동국문종’(東國文宗)으로 우리나라 중세 사상의 지평을 연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 이렇듯 고운의 인생여정은 분단의 격동기를 사는 오늘의 우리 지성인들, 좁혀서는 저 자신의 인생여정에 그토록 대응되는 바가 커서 가히 ‘금여시 고여시’(今如是 古如是)라 하겠습니다. 저는 법정 진술과 여러 상소서에서 시종일관 제 심형의 근원적 바탕은 겨레사랑의 민족주의임을 밝혔습니다. 저는 겨레의 통일이란 시대적 소명과 이상이 가혹한 현실과 조우되었을 때, 갈등과 고뇌에 몸부림치다가 급기야는 오늘의 비운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현실은 나로 하여금 진정한 민족의 의미와 그 소중함을 더 깊이 터득케 함으로써 ‘민족위상 정립’이란 저의 학문적 의욕과 집념을 일층 고취시켰습니다. … 존경하는 교수님과 사모님, 연일 3회에 걸쳐 몇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두분의 건승과 가내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이만 각필합니다. 정수일 드림. *98년 7월22일 대구교도소에서 존경하는 교수님과 사모님께. … 먼저 그간 교수님께서 거듭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남기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전일 ‘동해연구회 학술발표대회’에서 발표하신 동해 명칭 관련 논문을 퍽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일제의 ‘영토강탈’을 위한 ‘일본해’ 명칭의 위작과 ‘동해’ 명칭의 원상회복에 관한 교수님의 합리적인 논리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 역시 이 문제에 관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민족사의 위상 정립과도 직결된 문제이고 또 동해는 실크로드 해로의 동단이기 때문에 저의 연구과제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어제 받은 교수님의 역작 ‘태극기의 연혁’도 단숨에 일독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권위와 존엄을 표상하는 상징물이며 우리 겨레의 얼과 혼을 선양하는 표지물인 태극기에 관해 그간 우리 후손들의 불초와 몽매로 인해 중구난방식 언삼어사(言三語四)가 오갔으나 이제 교수님의 준론탁설로 가히 낙착을 지을 때가 되었나 봅니다. … 지난 4월 제가 단국대 장충식 이사장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과와 더불어 우리 학문 발전을 위해 단국대에서만큼은 ‘동서교류사’ 과목을 재활시켰으면 하는 제의를 하였습니다. … 준혁이도 이제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니 교양과목 강의쯤은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염치나 결례를 무릅쓰고 오로지 새 학문을 살리려는 일념에서 장이사장님께 이러한 내용의 제의를 했습니다. 반응 여하는 알 길이 없습니다. 교수님, 일취월장하는 국제 학문 추세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이 새로운 학문의 개척을 위해 길을 닦고 주춧돌을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해 미국의 “라이프”지가 지난 1천년을 만든 세계적 위인 1백명을 순위별로 선정했는데, 우리 동양인들 중에서 가장 앞자리(14번째)를 차지한 사람은 15세기 남해를 7번이나 항해한 중국 명나라의 명장 정화(鄭和)입니다. 중세 동서 교류에 대한 그의 큰 기여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그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런가 하면 이 1백명 중에는 중세의 2대 여행가인 이븐 바투타(44번째)와 마르코 폴로(49번째)가 끼어 있습니다. 이븐 바투타는 14세기 아랍 대여행가로서 마르코 폴로보다 여정이 훨씬 길고 오래며, 따라서 그의 여행기는 분량에서 폴로의 “동방견문록”의 몇 배나 됩니다. 그의 세계적 대 여행기는 일본에서도 아직 번역되지 못하고, 중국에서는 몇 년 전에 간략 역본이 나왔습니다. 제가 지금 연구를 겸해서 원전 전문의 번역 메모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절반쯤은 해 놓았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려서 영어의 신세에 주제넘는 일 같기도 하지만, 제가 최선을 다해 보려는 것은 결코 제 자신의 필화조문(筆花藻文)이나 명수죽백(名垂竹帛)을 기대(물론 기대할 수도 없지만)해서가 아닙니다. 비록 그 결과가 용문태작이라 하더라도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무언가 남기고 싶은 심정에서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전적으로 집사람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언어로 된 필요서적의 책명을 적어 보내면 그에게는 한낱 ‘그림’이나 다름없는 외국어 글자를 하나하나 맞추어가면서 책을 찾아내서는 그것도 미타하여 면회실에 와서 투명창을 사이에 두고 확인하고서야 들여보내곤 하였습니다. 그의 플라토닉한 사랑과 헌신적인 옥바라지는 저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 끝으로 두분의 의가지락(宜家之樂)과 건승을 마음 속 깊이 기원합니다. 자광(慈光) 정수일 드림. *99년 4월19일 대전교도소에서 존경하는 김교수님과 사모님. … 보내주신 영치금과 저서 2권, 논문 1부를 반가이 받았습니다. 두 분의 변함없는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논문 ‘조선 후기 서구의 충격과 조선의 대응’을 감명깊게 정독했습니다. 글에서 밝히다시피, 근세 초 서세동점에 편승한 서구문물에 대응하여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 ‘화혼양재’(和魂洋才), 우리는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그야말로 동병상련의 처방을 내놓고 중국과 일본은 제대로 투약하여 효험을 봤지만 우리만은 그렇지 못하여 결국 근세의 후진성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 저는 세계문호 가운데서 노신(魯迅)을 가장 존경합니다.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도 자기 민족을 사랑하였기에, 중화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흠과 흉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가차없이 들어내어 밝히면서 고칠 방도까지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허물을 자정(自淨)하는 현인들이 많이 나올 때 우리 겨레는 보다 슬기로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사색과 더불어 지난 한해 동안은 ‘이븐 바투타 여행기’의 완역에 주력하였습니다. 계획대로 연말에 끝마쳤습니다. 여행로 전도와 세부도 25장, 그리고 마르코 폴로 여행로와의 비교도도 제작, 완성하였습니다. 이븐 바투타(14세기)야말로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여행가이며 탐험가라고 저는 감히 말합니다. 지금까지 그의 여행기는 15개 국어로 번역되었지만 완역본은 프랑스어 역본 하나 뿐이고 기타는 다 초역본(抄譯本)입니다. 영어의 경우 수십년 전에 역자가 완역을 시도하다가 도중 사망하는 바람에 아직 완역본이 나온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완역본으로는 한글 역본이 두번째인 셈입니다. 학계에 일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간 여행기 번역에 병행하여 ‘실크로드학’의 학문적 정립에 착수하였습니다. … 대전 후 실크로드 연구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해온 일본도 94년에야 ‘실크로드학 연구센터’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하였습니다. 제가 구사하는 ‘실크로드학’의 학문체계는 1장 실크로드학의 학문적 정립, 2장 실크로드의 전개, 3장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의 역사적 배경, 4장 실크로드를 통한 물질문명의 교류, 5장 실크로드를 통한 정신문명의 교류, 6장 실크로드를 통한 인적 교류, 7장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의 역사적 전거의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교수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은 제4장의 연구 메모 작업중이며, 계획으로는 이 작업을 연내에 끝맺음하려고 합니다. … 초야의 개척이라 그만큼 책임감에 어깨가 무겁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서산(西山) 대사의 다음과 같은 시구를 늘 되새기곤 합니다. 즉 ‘답설야중거 불순호란행 금일아행적 추작후인정’(踏雪野中去, 不順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새하얀 눈발을 걸어가니, 그 걸음 흐트러져서는 안되리, 내 오늘 찍어 놓은 발자국, 뒷사람들 따라 걸을 것이어니. ― 저 나름대로 한글 번역). 바라건대 주벽 너머의 자유인이 되었을 때 곧바로 학계와 후학들에게 5∼6권의 공부거리, 읽을거리를 선물하였으면 합니다. 준원의 일이 못내 걱정됩니다. 이제 박사과정을 마쳤으니 논문을 써야 할 텐데 말입니다. 교수님께서 많이 지도하시고 채근하시어 제길로 나가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과내 교수님들, 특히 박경식 교수님께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끝으로 두분께서 항상 건승하시어 보시는 일에서 많은 성과가 있기를 마음 속 깊이 기원하는 바입니다. 정수일 드림. 손주영 교수에게 보낸 서신 *존경하는 손교수 내외에게. 우선 그간 두 분이 돌려준 배려에 깊이 감사하며 두 분의 건승과 만사형통을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 법정 선고시 재판장은 저더러 ‘소설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저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한마디로 압축했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저는 격동의 시대에 아스라한 비탈길을 숨가쁘게 치달아 올랐다고나 할까, 세파를 타고 ‘운명의 여신’과 숨바꼭질을 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내놓고 이야기할 만한 것은 별로 없어도 범상찮은 인생의 길을 걸어온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곳저곳 옮겨다니면서 살다 보니 그간 국적만도 다섯번이나 바꾸어 왔습니다. 그저 덧없이 떠돈 구름 인생이라고나 할까. 이 시점에서 더듬어 보니 참으로 회한스러운 일도 많습니다. 저는 법정 진술에서도 소명했지만 제 자신을 분단시대의 소명에 따른 한 민족적 지성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삶의 화두로 된 제 자신에 대한 이러한 자리매김이 없었던들 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을 것입니다. … 이제 저는 영어생활로 세번째 겨울을 맞고 있습니다. 주벽 속의 이곳 생활은 제 인생의 밑거름에 또 한가지 채색을 하는 셈이 되겠지요. … 존경하는 동욱엄마, 그간 집사람의 헌신적인 옥바라지가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가 구해서 보낸 책이 무려 1백60여권이나 됩니다. 지금까지 면회온 것만도 2백22회에 달합니다. 성인들은 이르기를 ‘현부 영부귀’(賢婦 令夫貴;현명한 아내는 남편을 귀하게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좋은 아내는 남편이 탄 배의 돛이 되어’ 그 남편을 항해시켜 주기 때문이겠지요. 근간에 저는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라틴어의 어조(祖語)이자 불경의 원전어이기 때문에 이전부터 관심해 오다가, 이 기회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어·프랑스어·에스파니아어는 그간 쓰지 않았더니 자꾸 감감해지기에 이제 복습을 하려고 합니다. 존경하는 손교수, 이슬람학회와 중동학회 회원 여러분, 그리고 아랍어 학과내 여러 교수님들께 여러 가지로 해량(海諒)을 빌면서 인사드립니다. 이만 끊습니다. 정수일 드림.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