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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8일 일요일 오후 03시 35분 48초
제 목(Title): 퍼온글/임채윤 베트남일기 


해외통신

 


임채윤
박사과정 98학번
 베트남 일기  

 

이 글은 내가 지난 7월초 열흘정도 베트남에서 체류하면서 쓴 일지를 발췌한 
것이다. 나는 운좋게도 베트남에 진출해있는 한국기업들의 노사관계를 연구하는 
연구프로젝트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현지조사를 위해 베트남에 가게 
되었다. 이 일지는 원래는 인류학자들이 많이 쓰는 현지일기(field diary)를 
흉내내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들어와 
그날의 일들을 세세히 기록할 만큼 부지런하지 못한데다, 메모하는 습관마저 
부족하여 실제로는 매우 부실한 그날그날의 스켓치, 혹은 메모에 가까운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베트남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보통으로 알고있는 것 만큼 이상의 
어떠한 지식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내가 알고 있는 베트남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월남전 영화와 단 한편의 한국영화를 통해서 얻은 
것이 대부분이고, 그 이후 대학에 들어와서 학회세미나에 읽었던 {거꾸로 읽는 
세계사}나 리영희선생의 글을 통해서 약간의 '교정'을 거쳤을 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불변의 진리를 생각하면 내가 본 것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내 나름의 금언을 생각한다면 그 
마저도 상당한 왜곡이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부끄러운 글을 쓰게 된 것은 베트남에 대한 기억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열흘 남짓 동안 베트남에서 만난 
세세한 하나하나가 아직도 너무나 강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아직은 우리에게 먼 
나라일 수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그 기억의 조각들을 서툴게 나마 적어보려는 
것이다. 


7월 4일 


호치민시,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이름인 사이공에 도착. 밤 11시 55분이다. 
다섯시간정도 소요. 시차는 두시간. 한국 국적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이 베트남사람들. 베트남에 자주 다니신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보트 피플들의 고향방문이 얼마전부터 허용되어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동승한 베트남인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오는 사람들. 미국에서 직항이 없기 때문에 
김포공항에서 갈아타고 베트남에 들어감. 공항에 내려서 보니 모두 자기몸의 
몇배가 되는 엄청난 짐을 가지고 왔다.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가져다줄 
선물인 것으로 보인다. 

공항은 매우 허름한 편. 그나마 많이 좋아진 것이라는데, 5-6년 전만해도 곳곳에 
월남전때 추락한 헬기가 활주로 옆에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카키색의 제복을 입은 
경찰이 나의 여권과 비행기에서 작성한 4-5종의 입국서류를 한참을 응시한 뒤에, 
그리고 다시 짐을 가지고 줄을 서너번을 바꿔선 후에야 공항을 빠져나 올 수 
있었다. 공항을 나오는 현관(?) 앞에는 울타리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택시기사들... 국산 소형차 
택시를 타고 시내로 접어들었다. 3-4층의 낡은 건물들. 밤늦은 시각인데도 붐비는 
거리.... 


7일 5일 


제대로 닫지 않은 커튼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가워 눈을 떴다. 여섯시가 조금 
넘은 시각. 오늘은 휴일이어서 특별한 일정이 없다. 일행 모두가 사이공에서 멀지 
않은 붕따우라는 해변의 휴양도시에 가기로 했다. 차를 타기 위해 숙소 밖으로 
나왔을 때, 일요일 아침 8시에 조금 모자란 시간에, 거리는 수많은 오토바이와 
약간의 자전거로 뒤덮여있었다. 어딘가 몹시 바쁘게들 가고 있었다. 일요일인데 
말이다. 

베트남은 차를 타고 다니기에 몹시 부적절한 곳이다. 우선 도로사정이 좋지 않고, 
무엇보다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우선이다. 그 수많은 오토바이들을 헤치고 차를 
몰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베트남은 오토바이의 
천국이다. 오토바이라고 하지만, 이지라이더에서 피터폰다와 데니스 호퍼가 타는 
오토바이는 아니고, 중국집에서 배달할 때 쓰는 오토바이를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이것도 베트남에서는 매우 비싸서 가장 인기있는 혼다의 '드림' 시리즈의 경우 
3,000달러 가까이 줘야한다. 이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고려하면 천문학적인 
가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공에만 백수십만대의 혼다(베트남사람들은 
우리가 복사기를 제록스라고 부르는 것처럼 오토바이를 그냥 혼다라고 부른다)가 
있다고 하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제2경제가 발달했다는 추측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붕타우는 사이공에서 130-40Km정도 거리인데 차로 세시간 이상 걸린다. 그만큼 
도로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매우 길고, 아름다운 해변과 칸느나 니스를 
연상시키는 유럽풍의 집들(비록 많이 낡기는 했지만)과 붉은 기와지붕이 조화를 
이룬 붕타우는 월남전기간동안 미군들의 휴양지였고, 개방이후 다시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공사가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었다. 베트남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여서 그런지, 도시의 풍경이 유럽, 특히 파리와 비슷하다. 특히 건물들의 
외양이 그런데, 최근에 짓는 건물들도 유사한 양식으로 짓는다. 보통 3-4층의 
건물들인데 폭이 몹시 좁은 것이 특징이다. 법으로 폭이 정해져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길을 접하고 있는 부분이 장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곳을 
누군가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해변가에서 있었던 일화. 해변가에서 셔츠를 파는 16,7세가량의 소녀가 우리를 
따라 붙기 시작했다. 외국인인데다, 일행중 하나가 소녀와 눈길이 마주치는 바람에 
우리는 그 소녀의 목표가 되었다. 그 이후로 그 소녀는 셔츠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우리 일행을 무려 2시간 이상 쫓아왔다. 우리가 음료수를 마시러 까페에 들어가면 
밖에서 기다리고 다시 나오면 쫓아오고... 이 사람들은 한번 팔겠다고 마음 먹으면 
어지간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듯 하다. 타고난 장사꾼들이다. 


7일 6일 


첫 번째 조사를 시작했다. 오늘은 **라는 봉제업체와 **이라는 신발업체를 방문. 
**는 정확하게 말하면 봉제업체만은 아닌데, 봉제업체 외에도 컴퓨터자수, 
종이박스제조업체가 같은 이름하에, 같은 지붕아래 같은 이름으로 일하고 있었다. 
물론 봉제업체가 가장 큰 편. 노동자는 다 합하면 1,000명 정도. 주로 인형을 
만들어 유럽으로 수출한다. 베트남의 많은 업체들의 주요 수출지역은 유럽이라고. 
이것은 미국과 최혜국대우(MFN)를 받지 못하고 있어서, 몹시 높은 관세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낮은 임금수준에도 불구하고 관세 때문에 경쟁력이 없다고. 
현재 협상이 진행중인데, 내년 초쯤에 타결될 것으로 기대들을 하고 있다. **의 
사장은 92년부터 베트남에 있었다고. 일찍 온 편. 한국에서 사업하다가 잘 안되, 
정리하고 이쪽으로 건너옴. 많은 시행착오. 특히 **같은 정식투자절차를 밟지 않은 
소위 임의진출기업은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다. 임의진출기업이란, 베트남 정부의 
자국기업과 해외투자기업에 대한 관리가 이원화된 점을 이용하는 것. 베트남에서 
해외투자기업에 대한 정책은 특이한 점이 있다. 우선 최저임금을 비롯한 전기세, 
수도요금 등 모든 시설사용료가 두배. 최저임금의 경우 베트남기업은 26-7달러 
수준인데, 해외투자기업은 45달러. 그것도 달러기준으로 지급해야. 노동문제의 
경우도, 베트남기업에 비해 훨씬 감독이 심한 편이라고. 사소한 쟁의에도 정부가 
개입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이것은 내가 알기로는 매우 예외적. 특히 IMF이후 
해외투자유치를 위해 모든 노동쟁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고 
해외신용평가기관의 한마디에 노동조합의 운명이 좌우되는 우리의 현실과 대조되는 
현상. 사정이 이러해서, 낮은 임금수준을 노리고 들어오는 영세기업들의 경우 
적응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서, 정식투자절차를 밟지 않고, 베트남인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베트남기업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측면에서 베트남기업에 준하는 처우를 받기 때문에 임금수준 등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고. 그러나 위험부담이 높은 편인데,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베트남인 
사장이 돌변하여 자기가 실제 사장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식당이나 
술집과 같은 소규모 사업의 경우 특히 이런 경우가 많아서 재산을 날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런 임의진출이 제법 많이 있다고. 

오후에 방문한 **는 나이키 신발을 만드는 신발공장. 전체 노동자가 4,800명에 
이르는 대규모 공장. 깨끗한 시설. 이 공장은 사이공지역에서 유명한 공장인데, 
***사건이라는 노사분규 때문이다. 96년도에 이 공장의 한국 여자관리자인 ***가 
베트남인 여성 노동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신발가죽으로 구타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한동안 베트남의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는 
구금되었다가 재판은 받지 않고 한국으로 송환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고 
한국계기업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하면 언제나 그 사건이 언급된다고. 당시 언론의 
논조가 재미있는데, "우리에게 경제발전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우리 아들, 
딸들이 외국인에게 모욕을 받아야 한다면 그냥 가난하게 살자"는게 신문사설의 
주요논조였다고 한다. 그러나 경영자들은 그 사건이 그렇게 크게 비화된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물론 ***가 그때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만기업이나 한국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냥 '단체기합'정도에 '불과'한 
일이었다고...... 

이 공장의 경우 한국계기업인데다 나이키공장이기 때문에 노사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사건이후 사장이 바뀌었고, 그 
이후에 노사관계에 대한 사측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사실인 듯 했다. 시설이 
깨끗하다고 이야기 하자, 나이키 본사에서 시설과 관련해서 요구사항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국제적인 여론을 고려한 것이리라. 노조측과 일종의 노사위원회와 같은 
정기적인 만남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7일 8일 


조사 셋째날이다. 더운 나라에서 돌아다녀서 그런지 매우 피곤하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몹시 덥다. 그래도 요즘이 사이공지역은 가장 견딜만한 때라고 한다. 
우기이기 때문에 하루에 한차례, 보통 오후 2시나 3시쯤에 한시간정도 소나기가 
온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지만 습도가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닌 것 같다. 

오전에 방문한 업체는 한국의 유명한 재벌기업인 **의 전자회사였다. 전자제품 
조립공장에는 처음이라 비교할 수 없지만, 유난히 깨끗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생산라인을 돌아보았는데, 조립공장인지, 실험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깨끗했다. 
우리를 안내한 회사간부도 그점을 강조해서 설명했다. 한국의 자회사 공장보다도 
우수한 시설이라고. 또 이웃해있는 굴지의 일본전자회사들보다 우수한 시설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도 하노이에서 고위층이 사이공을 방문할 때 산업체 시찰을 하곤 
하는데, 꼭 이 공장을 방문한다고 한다. 사실 베트남에 진출한 많은 한국기업들은 
저임금을 노리고 들어오는 노동집약적 산업이 대부분이고, 따라서 
내수시장진출보다는 수출을 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시설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임금이 오르면 언제든지 또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 회사는 내수시장의 진출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깨끗하고 
우수한 시설은 내수시장진출에 필요한 기업이미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또한 공장을 방문하는 고위층들에게는 정말 이 기업이 제대로 투자를 하려고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이 회사는 한국에서도 무노조경영으로 유명한 회사중의 하나이다. 놀랍게도 
베트남에서도 그러한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베트남은 국법으로 모든 회사에 
노조가 의무적으로 설립되어야 한다. 우리가 방문한 다른 회사들은 모두 
회사설립이후 수개월 내에 모두 노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만은 회사설립 2년이 
지나도록 노조가 없었다. 이에 대해서 묻자, 그것은 **의 원칙이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법에 걸리는 것이 아니냐고 하자, "법도 바뀔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나라법도 중요하지만 회사법도 중요한 겁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쯤되면 일국적인 수준에서의 노사관계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이론적 
모델들은 다국적 기업의 출현앞에 크게 수정되어야 할 듯... 

임금수준이나 기업복지의 수준은 베트남에 있는 다른 기업들에 비하면 월등한 편. 
하지만 최근에 수십명의 직원을 해고했다고 한다. 생산을 시작한 지 2년쯤 지났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숙련도도 높아졌고, 따라서 노동강도를 더 높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유휴인력을 삭감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에 비하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수치를 제시해 주었다. 
다국적기업들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나 국제적인 비교에 첨예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이키신발업체의 경우에는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등지에 있는 다른 
나이키공장들과 언제나 임금경쟁을 하고 있다. 저쪽이 조금 더 싸다 싶으면 이쪽은 
안되는 것이다. 물건 주문이 들어오지 않으므로. 이 전자회사의 경우에는 한국에 
있는 본사가 비교기준이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유휴인력이 발생했다고 해고하는 
것은 불법일텐데... 

오후에는 **가방공장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메이커의 가방을 만드는 공장이다. 
한국에서 가끔 백화점에서 가격표를 보고 놀라곤 하던 여행용 가방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들고 세계를 돌아 다니는 여행가방을 만드는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세계를 돌아다닌다. 이 가방공장은 
구찌라는 곳에 있다. 이곳은 베트남에서 매우 유명한 지역이다. 우리로 치면 
군(郡)단위에 해당하는데, 이곳을 유명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구찌터널이다. 
영화 플래툰에서 미군들이 들어갔다가 공포에 질려 돌아나오는... 이 지역은 
월남전 당시 사이공의 최종방어선이었다. 당연히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 
중의 하나이다. 회사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지역사람들은 베트남에서도 가장 
당성과 사상성이 투철하다고 한다. 현재의 수상인지 누군지도 이 지역출신이라고. 
한마디로 '드센' 지역이라는 인상. 그런데 왜 이런 곳에 들어왔느냐고 했더니, 
'몰랐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이곳에서는 한국인 관리자들과 베트남 사람들이 서로 영어를 써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다른 기업에서도 베트남말을 할 줄아는 한국인 
관리자를 만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내수시장진출을 노리고 들어왔다는 
**전자의 경우도 한국인중 베트남어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회사는 베트남인 
통역을 썼는데, 나이가 40대 후반정도이고 김일성대학에서 유학을 하고온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말을 정말 잘하는 편이었다. 어제 방문한 방직회사의 
경우에도 베트남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없었다. 생산관리자들의 경우는 영어와 
한두마디의 베트남어, 그리고 한국어와 몸짓을 동원해서 의사소통을 했고, 
사무실의 여직원들에게는 한국말로 지시를 했다. 한 여직원이 한국에 연수를 
다녀와서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알고, 다른 직원들도 계속 들으니까 대충 
알아듣는다고 한다. 문제는 모기업이 부산에 있는 기업이고 사장부터 
생산관리자까지 모두 경상도사나이들이라는 것이다. 

**가방공장의 경우 공식적으로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무직들에게는 대우가 좋은 편이고 사측과의 접촉도 잦은 편. 반면에 사무직원 중 
영어가 서툰 직원이나 대부분 영어를 모르는 생산직 노동자들은 사측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연구팀이 만난 베트남인 직원은 전문대학을 졸업한 
사무직원이었는데, 그 점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토로했다. 사장이 영어할 줄 아는 
직원들의 말만 듣고 회사를 망친다는 것이다. 자신은 진심으로 회사를 위해서 
일하고 싶고 일도 잘 할 수 있는데,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기회도 없고, 자신이 
느끼는 회사의 문제에 대해서 사장에게 건의할 기회도 없다고 한다. 매우 흥분해서 
지금 당장이라고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7월 9일 


오전에는 방직공장, 오후에는 나이키 신발의 부품을 제조하는 공장을 방문. 오전의 
방직공장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대규모 방직회사. 베트남에 진출한지 가장 오래된 
기업중의 하나. 우리가 방문한 업체중 흑자를 보는 몇안되는 회사중 하나. 
대부분의 기업들은 적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 미국시장이 봉쇄되어 
있다는 것을 첫 번째로 들었다. 신발같은 경우도 유럽이나 기타 다른 시장들도 
미국시장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모두들 MFN이 체결되기만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베트남정부의 해외투자기업에 대한 정책을 든다. 
베트남기업보다 두배쯤 높은 최저임금. 역시 두배이상 높은 각종 세금과 
시설사용료 등. 또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등. 실제로 오후에 방문한 공장은 
수요일날 휴무룰 했는데, 수요일에 그 지역 전기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신발부품공장도 그 유명한 구찌에 있다. 마치 전쟁터같은 곳이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다른 기업들에 비해 영세한 기업. 

우연히 사장의 아들을 만났다. 한국에서 고등학교졸업하고, 군대갔다와서 
베트남으로 아버지 일도와드리러 왔단다. 집안식구가 다 와있다. 원래 부산에 
공장이 있었는데, 모두 뜯어가지고 베트남으로 건너왔다고. 베트남을 선택한 
이유는 사장이 월남전 참전용사였기 때문. 유명한 백마부대용사. 어머니는 
사이공시내에 혼자 사시고 아버지와 아들은 공장에서 먹고자고한다. 20대 초반인 
아들은 몹시 외로운 듯. 현지인 노동자들 설문조사를 하고 있는 동안 옆에 
서있는데, 아들이 다가와 한국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반갑다면서 
말을 걸어왔다. 첫마디는 '이 베트남놈들 순 다 도둑놈입니다. 위에서 아래까지 
한놈도 안빼놓고 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믿지 마십시오.' 놀라서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도난사건이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가 이야기해준 두 개의 
일화. 한번은 사장과 한국인 관리자 모두가 휴일을 이용해 공장을 비우고 
놀러갔단다. 그런데 저녁에 돌아와보니 공장에 아무것도 없더란다. 자재, 뜯어갈 
수 있는 기계, 물건 등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털렸단다. 그 이후 경비를 대폭 
강화. 아들도 직접 야간순찰을 돌았는데, 하루는 순찰도중 부품을 훔지는 노동자를 
잡았는데, 왜 물건을 훔치느냐고 했더니 그 현장에서 절도행위 자체를 
부인하더라고. 오히려 자신을 도둑으로 몬다고 화를 내더란다. 경찰서에까지 
갔는데, 별로 유리한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결국 퇴직금얼마를 주고 회사에서 
내보냈다. 이런 경우는 매우 많다고 한다. 기계를 훔친 노동자 세명을 해고한 적도 
있는데, 이들이 노동재판소에 부당해고소송을 내서 노동자들이 승소. 결국 이것도 
돈을 주고 해결. 

이야기를 하던 중 소란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설문조사를 한다고 50여명의 
노동자들이 야외에 있는 식당에 모여있자, 다른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않고 나와서 
구경들을 하는 것이다. 생산이 되지 않자, 한국인 관리자가 뛰어나와 욕설을 
퍼부으며 일을 하러 들어가라고 했다. 결국 설문조사가 중단되고, 퇴근 후에 
작성해서 다음날 수거하기로 했다. 현지인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도 
유사한 일이 생겼다. 인터뷰에 응하던 한 남자직원이 자신의 잘린 손가락을 
보여주고 불만을 토로하자 주변에 다른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결국 인터뷰장소를 
옮겨야 했다. 

아들은 베트남사람들에게는 잘 대해줄 가치가 없다고 한다. 그냥 아주 가끔 술이나 
한번 사주고 기분 풀어주면 된다고. 구찌 지역에 대해서 물어보자, 이 회사가 
구찌에 거의 처음으로 들어온 회사라고 한다. 이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내용들을 
얘기했다. 재미있는 것은 구찌지역 노조위원장이 이 공장에 일하고 있다고 한다. 
또 우리가 이야기하는 식당은 구찌지역 인민위원회 비슷한 곳의 높은 사람의 
집에서 운영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지역사람들의 극성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공장의 노동자들보다 그 가족들이나 그 이웃들이 공장에 매우 관심이 
높다는 것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아들, 딸들에게 늘 공장에서 있었던 일을 묻고, 
부당하다 싶은 일이 있을때면 이웃주민들이 함께 와서 항의를 한다는 것이다. 

*사장은 베트남에서 두 번째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듯 했다. 이번에는 백마부대의 
동지들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말이다. 


7월 10일 


오늘은 기업조사 마지막 날이다. 연일 이어지는 강행군에 모두들 몹시 지친 표정. 
그런 연구진을 배려해서인지 오전에 방문하기로 했던 또하나의 나이키공장(직원이 
무려 8,000명이 넘는 대형 신발공장이다)은 우리의 약속된 방문을 거절해주었다. 
우리는 호치민대학 측 연구파트너(H 교수. 이 사람은 그 유명한 베트콩출신이다. 
5년간 월남전에서 싸운 용사다)의 도움으로 사이공 시내에 있는 베트남의 
국영신발공장을 방문했다. 사장은 독일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엄청난 골초였다. 
우리과 같이 있는 동안 한시도 입에서 담배를 떼지 않았다. 호치민이 엄청난 
골초였다는 말이 생각났다. 호치민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는데, 담배가 
거의 유일한 취미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호치민의 유언은 No Smoking, 그리고 
Marry 두가지 였다고 한다.(베트남에서 만난 한 젊은 친구가 우스개소리로 해준 
얘기다) 너무 짧은 방문이었고, 사장과 그리 길지 않은 얘기를 영어통역을 통해서 
나누었기 때문에 회사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 수는 없었다. 

오후에 방문한 회사는 회장이 종교인으로서 종교적 신념을 기업경영과 결합한다고 
해서 유명했던 한국의 의류회사였다. 현지 사장 역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만난 한국인 경영자, 관리자 중에서 가장 베트남어를 잘했다. 회사의 
정신을 기독교정신이라고 설명하고 그 핵심은 기업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라고 했다. 
기업복지가 잘되어 있는 편이었다. 아침과 점심 두끼의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의사도 고용되어 있었다. 

사장이 생산관리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생산관리의 방식은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을 측정해서 하는데, 우선 중간정도의 생산능력을 지닌 노동자가 열번 같은 
작은 작업을 하도록 해서 평균치를 구한다음 거기에 0.8을 곱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에 기준해서 생산량을 항당하고 초과달성할 경우 개별 인센티브를 지급한다. 
사장은 필리핀, 태국 등지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는데, 비슷한 기후조건을 갖춘 
나라이지만 베트남인들은 그들과는 달리 인센티브시스템이 잘 작동된다고 한다. 
인센티브시스템의 도입 이후 잔업이나 연장근무에 대한 별로 없고, 일을 
열심히하고, 기술을 배우려는 동기도 강하다고 했다. 하지만 노동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큰 불만은 일을 너무 많이 시킨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잔업이나 휴일근무등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고, 
한국사람들이 너무 일을 열심히 한다고 얘기하곤 했다. 


7월 11일 


오전에는 사이공지역의 노동조합연맹의 간부들, 노동부의 간부들 등과 컨퍼런스를 
가졌다. 말이 컨퍼런스이지 베트남측의 참석자들이 각각 발표문을 준비해와 
우리에게 읽어주고 몇가지 질문을 받는 방식이었다. 그들의 발표문에서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한국기업들이 베트남의 노동법을 무시하고, 베트남의 
노동관행을 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들의 자세에서 외자도입을 
위해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라도 희생시켜야 한다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베트남의 외국기업에 대한 정책은 확실히 독특한 측면이 있고, 지금의 
우리 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해외직접투자가 거의 
증가하고 있지 않고, 들어와있는 많은 기업들이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국제적인 경쟁의 압력에 베트남정부의 그러한 정책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지... 

공식적인 현지조사일정이 끝났다. 오후에는 유명한 구찌터널을 방문했다. 군단위인 
구찌지역에만 총연장 260Km로 땅굴을 팠다. 월남전 당시에 다 판 것은 아니고, 
프랑스 식민지시절 독립운동을 하면서 파기 시작했다고 한다. 터널의 위는 
정글지역이다. 낮에도 해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한 정글. 그들은 이 땅굴을 
호미와 흙을 담아낼 자루만 가지고 팠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는 땅굴을 파기에 
최적인 토질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진흙의 일종같은데, 일단 파서 벽을 
다져놓으면 금새 콘크리트처럼 딱딱해진다고 한다. 터널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2 층이 각각 지하 3m, 3층은 지하 8m에 있다. 터널은 몹시 좁은데,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일부지역은 관광객들을 위해서 넓혀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좁기는 
마찬가지여서 몸이 거의 낄 정도다. 덩치 큰 미국인 관광객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터널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서 베트남인들은 터널을 넓혀놓았으리라. 



7월 12일 


메콩델타를 갔다. 메콩델타는 베트남 최고의 곡창지대이다. 메콩강이 실어다 준 
비옥한 땅과 적절한 강우, 그리고 따가운 햇볕은 삼모작을 넘어 사모작까지 
가능하게 한다. 곳곳에 타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열대의 풍경들이 지나갔다. 
메콩델타관광은 사이공 시내에 있는 Sinh Cafe에서 운영하는 관광사를 통한 
것인데, Sinh이란 까페와 관광사의 사장 이름이다. 이 사람은 사이공에서 최근에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바닥에서 시작에서 까페를 차리고 까페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업을 시작한 것이다. 유창한 영어가이드와 
저렴한 가격, 그리고 배낭족들을 위한 숙박시설들이 몰려있는 지역에 위치한 
지리상의 장점 등으로 사이공에서 가장 유명한 까페가 되었다.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저렴하다. 메콩델타 하루 관광코스는 아침 8시경에 출발한다. 
버스로 두시간 정도를 달려서, 메콩강에 도착하면 제법 큰 배로 갈아타고 강을 
따라 내려간다. 한참을 내려가면서 어시장 등 각종 볼거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강에 있는 어느 섬에 내려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다시 작은 모터보트로 옮겨타 
좁은 운하로 들어간다. 벌꿀농장에 들려 꿀차와 술을 제공하고, 민속음악을 
연주해준다. 그리고 다시 노를 젓는 작은 배로 옮겨타 코코넛으로 캔디를 만드는 
조그마한 공장에 데리고 가 캔디를 맛보게 해준다. 이렇게 이곳 저곳을 하루종일 
데리고 돌아다니고 저녁 8시쯤 사이공에 돌아오는데, 중요한 것은 그 가격이다. 
불과 7달러다. 이 가격을 대하고 왠지 미안해졌다. 우리는 흔히 관광지의 바가지 
상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늘 바가지요금에 대해서 아무 생각없이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7달러의 요금을 보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7달러로 우리의 관광을 가능하게 한 그 많은 사람들, 즉 까페에서 관광예약을 받던 
사람, 버스 기사, 두명의 가이드, 수십명의 뱃사공들, 악사 등등 모든 사람들이 
먹고사는 것일게다. 나이키공장이 다시 떠오른다. 과연 이사람들이 관광객인 
나에게 베트남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부당한 돈을 요구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언젠가 영국에 다녀온 
선배에게서 영국대학생들이 '제3세계 농산물을 제값주고 먹기'운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7달러는 너무했다. 


7월 13일 


오전에는 호치민 대학 사회과학대학과 지루한 세미나가 있었고, 오후는 
자유시간이었다. 혼자 돌아다니기로 마음먹고 길을 나섰다. 원래는 걸어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나 얼마 걷지 않아 외국인이 사이공에서 걸어서 돌아다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을 요구하는 수많은 아이들, 온갖 
물건을 팔러 다가오는 사람들, 씨클로 기사 등등. 통일전 대통령궁, 지금은 
통일기념관 앞의 공원에서 결국 도보여행을 포기.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타는 
오토바이를 탔다. 한국에서라면 둘이서 타고 달릴 경우 경찰에 잡혀 딱지를 떼어야 
할 작은 오토바이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네명도 탄다. 그래서 오토바이로 택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명 Motor Taxi라고 부른다. 공원에서 한 모터택시 기사가 
접근해와 내가 자기 한국인 친구를 닮았다며 명함을 보여주었다. 그렇냐고 하고 
그냥 내빼려는데 계속 쫓아와 커피를 한잔 사겠다는 것이다. 커피를 한잔 마시는 
것도 괜챦겠다 싶어 그러자고 했고 결국 그와 나는 하루의 관광가이드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와 사이공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그와의 
대화였다. 이름이 히유(Hieu)인데, 서른 한 살이고 아내와 어린 딸이 있었다. 
고향은 사이공에서 북쪽으로 200Km쯤 떨어진 농촌. 부모님이 그곳에 살고 계시다. 
여동생이 있었는데 월남전때 강가에서 놀다가 폭탄이 터져 '사라졌다'. 부모님을 
졸라 92년에 땅의 일부를 팔아 1,500달러를 가지고 부인과 함께 사이공에 왔다. 
그중 1,200달러로 중고 한국산 오토바이를 사서 모터택시를 시작했다. 왜 취직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불가능하다고 한다. 태어난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취직을 하려면 관할 경찰서에 가서 도장을 받아야 하는데, 300만동(한화로 30만원 
정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일종의 뇌물이다. 그 도장이 있어야 취업이 가능하다. 
따라서 그는 일종의 불법체류자인 셈이다. 손님은 별로 많지 않아서 한달에 
10일정도 일한다고 한다. 나머지 날은 그냥 손님을 기다린다고. 대부분의 
모터택시기사들이 그렇다고 한다. 특히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줄고 
경기도 좋지 않아서 손님이 더 없단다. 전에는 부인도 긴 나무에 통을 매달고 
다니면서 밥을 파는 장사를 했는데 작년말에 넘어져 크게 다치는 바람에 일을 
못하고, 그때 약값 때문에 300만동의 빚을 졌고 매달 90만동의 이자를 물어야 
한다고. 베트남에는 은행이 발달하지 않았고, 따라서 돈은 사채업자에게 주로 
빌린다고 한다. 실제로 베트남에는 아직 은행에 저축하는 것이 거의 
일반화되어있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과 달러로 재산을 모은다. 시내 
곳곳에 금은방이 있고, 그곳에서 환전업무까지 한다. 사이공시내에서 여성들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많은 금팔찌를 하고 다니는 여성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와 한참을 돌아다니던 중 그가 갑자기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중에 생각해보자고 했고 계속 
고민했다. 결국 가기로 결정했고, 7시쯤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Dist 4에 
있었는데, 사이공의 빈민가이다. 강가에 나무로 지은 집들이었는데, 그의 집은 
좁은 골목을 수도 없이 꺽어 들어간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7평 남짓한 집을 
셋으로 나누어 부엌, 침실, 거실로 쓰고 있었다. 그들의 손님대접은 눈물이 날 
정도였다. 음식이 초라하다며 몇번을 미안하다고 했고, 내가 밥을 한 술 뜰때마다 
그의 부인은 반찬을 올려주었다. 손님대접을 위해 특별히 사온 계란을 놓고 서로 
먹이기 위해 몇번의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역시 손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맥주와 수박을 먹는 동안 그의 부인은 나의 신발을 가지고 들어가더니 깨끗이 
닦아서 내놓았다. 숙소앞에서 헤어질 때 그는 한동안 나의 손을 놓지 않았고, 그 
손의 온기는 베트남을 떠날때까지 계속 남아있었다. 그의 선량한 눈빛과 외소한 
뒷보습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구찌에서 방문한 신발부품공장을 떠올렸다. 그가 내년 
설에는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하면서 
헤어졌다.(그는 고향을 떠난 이후 한번도 고향에 돌아가보지 못했단다. 불과 200Km 
떨어져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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