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8일 일요일 오전 02시 51분 05초 제 목(Title): 임성모/ 현대일본의 정체성을 묻는다 현대 일본의 정체성을 묻는다 임성모 'IMF 원년'인 작년은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ㆍ베트남 방문을 계기로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가운데 아시아 속의 한국에 대한 자기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턱없이 부족한 논의에 그치고 말았다. 그 논의의 두께는 고스란히 일본과 베트남 등 아시아에 대한 이땅의 지적(知的) 축적의 두께를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때마침 현대 일본이 직면한 문제를 성찰적으로 조망한 두 권의 책이 잇따라 번역된 것은 하나의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매코맥(G. McCormack)의 『일본, 허울뿐인 풍요』(The Emptiness of Japanese Affluence, 창작과비평사 1998)와 카또오 노리히로(加藤典洋)의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敗戰後論, 창작과비평사 1998)는 현대 일본의 문제를 사뭇 대조적이면서도 공통된 관심에서 다루고 있다. 대조적 측면은 분석의 시야ㆍ관점ㆍ문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전자는 거시적이며 생태학적ㆍ정치경제학적이고 보고서처럼 명료하다. 후자는 미시적이고 심리학적ㆍ정신분석학적이며 비유적ㆍ우회적이다. 역사학자와 문학비평가의 글쓰기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전자가 '일관공정'을 거쳐 산출된 데 반해 후자는 첫 논문 「패전후론」이 유발한 논쟁의 산물이라는 것도 차이라면 차이랄 수 있겠다. 그럼에도 두 책은 현대 일본이 어떻게 '사죄/망언' '일본/아시아' 등 종래의 불온한 '공생(共生)'을 끝내고 진정한 공생을 모색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 일본은 어떠한 정체성(正體性)을 모색해야 할 것인가를 추구하고 정체성 확립에서 기억의 중요성을 전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적 측면이 엿보인다. 요컨대 두 책의 공통된 키워드는 '정체성'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두 책이 과연 우리는 일본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를 시사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매코맥의 책은 오스트레일리아인인 저자의 시각으로 재구성된 것이긴 하지만 그 논거의 대부분이 일본인의 자기분석인만큼 현대 일본사회의 자기성찰을 압축적으로 제시해준다. 한편 카또오의 책은 문학비평이라는 형식 탓이겠으나, 첫 글인 「패전후론」을 제외하면 일본 현대문학ㆍ사상의 흐름에 어두운 독자들에게는 다소 읽기 힘든 느낌을 준다. 저자가 의거하는 오오오까 쇼오헤이(大岡昇平) 같은 작가들에 대한 사전정보가 얼마간 요구되기 때문이다. 평자 역시 그런 독자 중 하나임을 고백하면서, 카또오의 다른 글들을 다 참조하지 못한 관계로 의도하지 않은 누락이 있을지도 모름을 미리 밝혀둔다. 1. 고도성장의 그늘 매코맥은 전후 일본사회가 달성한 '고도성장'의 외관이 일종의 사상누각임을 주장한다. 그가 도입부에서 언급하는 한신(阪神)대지진은 이 주장을 개진하는 데 극히 효과적인 장치이다. 여기서 이 재앙은 고도성장이 놓여 있던 불안정한 기반을 일거에 폭로한 상징적 재앙, 즉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정책의 결과인 인재(人災)로서 자리매김된다. 이 사상누각이 곧 '토건(土建)국가'이자 '레저국가'로서의 일본이다. 매코맥은 1962년 이래 네 차례나 추진되어온 전국종합개발계획, 즉 젠소오(全總)로 대표되는 일본의 '국토개발'이 어떤 메커니즘 아래 진행되었는지를 천착한다. 그가 보기에 현대 일본에서 건설사업은 재계ㆍ관계ㆍ정계라는 '마법의 삼각형'을 핵심고리로 하는 권력의 재생산과 이윤의 불균등 분배가 낳은 부산물이다. 이처럼 불온한 유착관계에 의해 생겨난 흉물스런 기형아인 '토건국가' 체계는 토오꾜오 일극집중 현상을 낳고 독과점 체계에 의해 건설비와 지가를 상승시키면서 납세자로서의 시민의 권익을 철저히 무시한다. 이러한 토건국가적 성장프로젝트의 특징인 강박적이고 물신숭배적인 효율성ㆍ생산성 추구는 시민권의 위축과 함께 심각한 환경파괴를 야기했고 이는 일본의 '리조트 열도'화와 함께 심화되었던 것이다. 종신고용제, 연공서열제, 기업별 노조를 '세 가지 신기(神器)'로 삼아왔던 일본의 회사주의(會社主義)가 극도의 긴장을 강요하는 비인간적 씨스템임은 '과로사'라는 용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매코맥은 이 긴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가와 휴양마저도 자본의 논리에 의해 철저히 옥죄이고 있음을 간파한다. 골프장ㆍ스키장ㆍ테마파크의 범람, 즉 '레저국가'화는 수요자인 시민의 요구보다도 공급자인 기업의 압력이 핵심적이기 때문에 레저에서 휴식은 부차적이 되고 소비가 일차적이 되고 만다. 또 리조트 건설이 지가 상승을 수반함은 당연한 귀결이며 여기서도 여전히 토오꾜오 중심의 획일적 유형화가 관철된다. 그의 지적은 전체적으로 타당하지만, 일본의 토건국가화, 레저국가화가 마치 지역주민과 국가ㆍ기업 간의 대립구도에서 후자의 폭력적 강권에 의해서만 추진된 것으로 읽힐 우려도 없지 않다. 애당초 그런 일이 지역주민의 동의 없는 강제만으로 가능했겠는가? 요컨대 매코맥의 논의에서는 납세자로서의 주민에 대한 권익 침해가 강조된 나머지 유권자로서의 주민이 져야 할 자기책임이라는 문제가 경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본 파시즘이 '위로부터의' 강제뿐만 아니라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풀뿌리 차원의 '아래로부터의' 지지를 불가결한 요소로 했던 것처럼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이 유발한 공해 등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시민의 책임도 크다. 2. 지속가능한 성장, 그리고 아시아와의 공생 그런데 매코맥은 일본의 일부 인공적 리조트 개발이 관광객들을 흡수하여 역설적으로 자연파괴를 막는 환경보호적 측면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또 서부 일본을 중심지로 해서 부상하는 이 '잡종문화'가 수도권중심주의를 타파하고 1980년대 이래 지방의 발의로 전개되어온 '일촌일품(一村一品)운동' 등의 '지역방위운동'처럼 획일적 성장 패턴 대신 다원주의의 확산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시카고대학의 일본 연구가 노마 필드(Norma Field)가 매코맥의 책이 결코 '일본 두들기기'(Japan-bashing)류의 글이 아님을 강조하듯이 이러한 시각은 그가 객관적으로 일본의 가능성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제3장 '농업국가'이다. 그는 일본의 쌀시장 개방이 "종래의 보호주의에 기초한 정치문화를 변혁하는 계기"이자 "개방적이고 책임있는 시민권 행사"라는 일본 '진보파'의 주장에 동조하는 대신 세기말의 문맥에서 새로운 시민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본다. 쌀시장의 자유화가 일본의 '신화적 정수(精髓)'를 국제화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과연 식량이 일반 상품처럼 취급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문제는 오히려 개방을 강요한 GATT와 WTO체제의 패권주의적 지향에 있다. 즉 쟁점은 시장 '자유화'가 아니라 오히려 신보호주의의 아성 미국에 근거지를 둔 식량 메이저의 횡포여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합리주의'를 원칙으로 내세우는 GATT는 이들 메이저의 특권을 보장하면서 식량의 자유무역화에 따른 막대한 환경적ㆍ사회문화적 비용을 간과함으로써 여타 국제기구와는 달리 시민적 권익을 침해한다. 따라서 생태학적으로 쌀농사에 이상적 조건을 갖추어 생산의 환경적ㆍ사회문화적 비용을 내면화하는 일본 같은 나라들은 GATT 주도하의 획일적 경쟁체계에 편입시키지 않는 편이 도리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식량수입국 일본의 소비패턴이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농어촌 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환경적ㆍ사회적 문제점을 야기하는지를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판단기준은 일본을 비롯한 현대산업사회가 추구해온 개발ㆍ소비 일변도의 성장궤도가 더이상 지속될 수 없는 성장프로젝트라는 인식이다. 매코맥은 생태학적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의 모색이 곧 정체성 모색의 일환이라고 본다. 일본의 경우 그 핵심은 아시아와의 관계이다. 그는 두 차례의 '탈아(脫亞)' 경험이 있는 일본에서 제기되는 '아시아주의' 논의가 자기비판적ㆍ역사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아시아성'과 '일본성' 간의 긴장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에게 그가 권하는 처방은 '탈일(脫日)', 즉 일본성으로부터의 탈피이다. 여기서 '일본성'이란 "혈통에 따른 독특한 인종적 정수로서 일본열도 주민들에게 부여된 '고안된' 정체성"(235면), 천황가에 집약된 일종의 '선민의식'을 말한다. 그는 일본의 '탈아(脫亞)'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백호(白濠)'를 대비하면서 최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채택하고 있는 '탈백호' 정책, 즉 비차별 이민정책과 다문화주의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일본이 추구할 진정한 공생은 "일본 속의 아시아라는 문제와 아시아 속의 일본이라는 문제를 동시에 얼마나 잘 다루는가"(238면)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조정의 첫걸음은 침략전쟁의 결과를 철저히 인식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compensation)을 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3. 보수와 혁신의 한쌍 구조 바로 이 지점에서 매코맥의 논의는 카또오의 그것과 교차점을 형성한다. 매코맥의 평화ㆍ헌법 논의와 '기억/망각'에 대한 고찰은 그대로 카또오의 '애도(哀悼)' 논의와 오버랩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매코맥의 논거가 주로 일본 '전후혁신파' 지식인의 주장인 반면 카또오의 주장은 이 '혁신파'에 대한 '자기비판'으로서 제시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매코맥의 5ㆍ6장 '평화국가' '기억하기와 망각하기'와 카또오의 책은 상호참조적 글읽기를 요구한다. 매코맥도 지적했지만 세기말인 1990년대에는 세계 각국에서 제국주의ㆍ인종주의의 역사에 대한 사죄가 있었다(288~89면). 동시에 그에 대한 반동도 대두하였다. 예컨대 독일ㆍ프랑스에서는 '가스실 날조설' 등 유태인 대학살을 부정하려는 '역사수정주의'가 등장하고 외국인 노동자 문제의 사회화에 대응해 혈통주의적 국적법을 고수하려는 내셔널리즘이 불거졌다. 일본의 경우에는 보혁공조체제인 '1955년 체제'의 붕괴 이후 호소까와(細川), 무라야마(村山) 내각의 침략전쟁 사죄에 대한 반동으로 연례행사처럼 '망언'이 나오고 급기야는 '자유주의사관연구회(自由主義史觀硏究會)'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新しい歷史敎科書をつくる會)'까지 발족해, 종래의 '자학사관(自虐史觀)'을 버리고 '자존사관(自尊史觀)' '국민의 정사(正史)'를 회복하자는 내셔널리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카또오의 저서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진행된 일련의 논쟁(이른바 '역사주체논쟁')의 산물이다. 그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이 쳇바퀴 돌듯 하는 '사죄/망언' 구조의 원인과 극복방안을 탐색하는 데 있다. 그의 테제는 「패전후론」에 집약되어 있는데, 먼저 원인 분석의 내용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후 일본은 패전ㆍ점령의 '비틀림'으로 인해 '인격분열'에 빠져 있다. '비틀림'은 점령군의 압도적 군사력에 의한 평화헌법의 강요, 최고책임자 천황을 면책(免責)한 토오꾜오재판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이 왜곡에 대해 눈감은 채, 혁신파(=호헌파)는 외래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자기 것인 양 부르짖으며 자국의 사자(死者)를 외면한 채 아시아의 2천만 사자에게 사죄하는 '외적 자아'인 반면, 보수파(=개헌파)는 호헌파의 '기만성'을 간파하면서도 천황의 전쟁책임을 부인하고 자국의 3백만 사자를 영령화하는 '내적 자아'다. 양자가 한쌍을 이루는 이 분열구조는 사죄와 망언의 한쌍 구조로 되풀이됨으로써 일본인을 책임주체(=역사주체)로 자립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석학적 현대 일본 비판은 매코맥도 인용하는 기시다 슈우(岸田秀)의 논리를 패러디한 것이지만, 전후 일본에서 지속되어온 보수와 혁신의 불온한 '공생' 관계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1955년 체제'가 자민당과 사회당의 보혁공조체제였음은 이제 상식이 되었지만, 매코맥은 이른바 '1946년 체제'(미국이 후원한 상징천황제와 평화주의 국가라는 패키지)의 성립이 일본공산당의 입장 변화, 즉 공화주의의 포기와 천황중심국가의 수용을 전제로 해서 가능했으며, 또하나의 실질적 헌법인 1951년 미일안보조약 이후, 평화주의를 명시한 제9조의 추상적 헌법 원리는 정치적 편의주의에 굴복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카또오가 "평화헌법으로 지탱되는 평화주의라는 것은 언어도단"(81면)이라 말한 것은 진실의 일면을 드러낸다. 실제로 일본의 '평화국가'화는 '안보 무임승차'로 표현되듯이 미국과의 안보조약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카또오는 이와같은 전후 일본의 맹점이 전후의 구서독과 달리, 구지식인과 '혁신파' 신지식인 간의 단절, 즉 사상적 대립을 거치지 않은 채 유야무야식으로 이루어진 중심이동에도 기인한다고 본다. "과거를 부정한다는 것은 그것을 자신에게서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11면)인데 전후 일본은 여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패전 이후 일본사회에 '제국'과 전쟁 체험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타당한 지적이다.(단 '전후 계몽'의 시기에 전쟁책임론의 맹점으로 천황과 공산당의 책임 문제를 동시에 거론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같은 '혁신파' 지식인도 존재했음은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경우에도 식민지지배의 기억은 망각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지만.) 카또오는 이 '전후민주주의'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혁신파 지식인들이 위험하게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인 양 무시하기 일쑤였던 망언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근원을 추구하여 '튼실한 사죄 논리'를 구축하려 한 점에서 논의의 성실성을 보여준다. 4. 국민적 사죄 주체의 모색 그런데 카또오는 일본의 지킬과 하이드식 인격분열 상태를 극복할 '열쇠'가 바로 사자(死者)에 대한 '애도'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의 3백만 사자에 대한 애도를 통해 아시아의 2천만 사자에 대한 애도와 사죄로 이르는 길을 모색하면서, 애도에 입각한 국민적 사죄 주체의 구축과 국민투표에 의한 현행 헌법의 재선택을 통해 보수파(=야스꾸니靖國파)의 논리를 흡수ㆍ소화한(그것을 내부에서 해체한) 사죄의 논리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소설 『레이테 전기(レイテ戰記)』를 쓴 오오오까 쇼오헤이가 수많은 일본인 병사들의 죽음을 복원함으로써 '무명용사=영령'의 허구성을 드러낸 뒤 "결국 가장 지독한 고통을 겪은 것은 필리핀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느낀 것을 일종의 전범(典範)으로 들고 있다. 카또오가 '애도'에 집착하는 이유는 2차대전이라는 '세계전쟁'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사자와 사회성원 간의 관계가 달라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국가주권(=국익)을 지상가치로 삼아 승패와 관계없이 '의전(義戰)'이 될 수 있었던 근대의 '국민국가간 전쟁'과는 달리, 총력전으로서의 세계전쟁은 국익을 넘어선 가치인 세계이념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패전국의 전쟁지도이념은 전승국에 의해 죄를 추궁당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자기부정, 자발적 '집단전향'이 일어나 사자에 대한 '배신'을 필연화한다는 것이다(「戰後的思考(二): 戰後的思考とは何か(2)」, 『群像』 1998년 10월호). 세계전쟁의 특징에 대한 그의 파악은 대체로 정곡을 찌른 지적이다. 1차대전이 변화의 기점이었지만 특히 2차대전을 계기로 '평화에 대한 죄' '인도(人道)에 대한 죄'가 개념화되는 등 국제법상의 혁신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성전'론, '대동아공영권'론 이념은 전승국의 보편적 인권에 입각한 지도이념에 압도당했던 것이다. 만약 일본 등 추축국(樞軸國)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인종주의적(독일), 공동체주의적(일본) 이념이 보편성을 획득하고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카또오에 따르면 애도는 '배신'당한 사자와의 '공동성(共同性)'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성을 해체하고 '공공성(公共性)'을 수립하기 위한 시도, 전후 책임주체로서의 '우리'를 새롭게 구축함으로써 종래의 '우리'를 해체하는 것으로 자리매김된다. 애도는 이러한 "자기부정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를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16면)이다. 결국 그의 처방은 매코맥과는 정반대로 '우리', 즉 일본(인)성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국민적 주체'로서의 '우리'를 만들어냄으로써 또다른 내셔널리즘을 제창하는 논리, 결국 '자유주의사관'파와 동일한 논리라는 비판이 비등했다. 하지만 카또오는 '국가적 존재'로서의 그것이 아닌 '열린 존재'로서의 '국민'으로 '우리'라는 사죄 주체를 구축하고 그것이 불필요해질 때까지 유지함으로써만이 '국가적 국민'을 내부로부터 해체할 수 있다고 말한다(61~62면). 또 "내가 말하는 사죄 주체로서의 '우리'란 국적취득 요건의 출생지주의에 상응하는 사회적 파악으로서의 '전후 일본인'으로서, 혈통주의에 상응하는 문화적 파악으로서의 '일본인'과 대립한다"(「戰後'謝罪'の論理」, 『每日新聞』 1997년 11월 5일)고도 명시한다. 따라서 "오욕을 버리고 영광을 찾아 나아간다"는 나까소네(中曾根)식의 국가적 국민 개념과는 일선을 긋는 사죄 주체를 모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그를 '네오내셔널리스트'라 하여 '자유주의사관'파와 쉽게 동일시할 수는 없다. 국가로 흡수되는 국민이 아닌 '열린 국민', '공동성'이 아닌 '공공성'을 모색하고, 침략전쟁과 천황의 전쟁책임을 인정하며 궁극적으로 2천만 아시아의 사자를 대면하고 사죄하기 위한 발판으로 자국 사자에 대한 애도 방안을 모색하는 카또오와, 국가적 국민을 요구하고 '대동아전쟁 긍정론'의 입장에 서는 '자유주의사관'파는 기본적으로 그 입지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5. 애도의 정치경제학과 시민적 정체성 그러나 카또오의 입지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도 부정하기 힘들다. 이는 근본적으로 '열린 국민'이라는 구상의 현실성 여부에 기인하지만, 또다른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그는 "전후 일본이 자신을 배제함으로써 타자를 회피"하고 있으며 이 책이 "자신이 됨으로써 타자를 만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20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자신과 타자는 이항대립적으로 나뉘어 있다. '자신 속의 타자', 매코맥이 말하는 '일본 속의 아시아'가 간과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전후보상' 문제를 생각해보면 두드러진다. 매코맥도 지적했듯이, 일본정부는 '매카서(MacArthur) 초안'에서 "모든 자연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규정했던 부분을 '일본국 헌법'에서 "모든 국민은 법 아래 평등"하다고 변경했다(261~62면). 그리고 이 '국민' 규정은 중의원선거법 개정과 쌘프란씨스코조약 발효를 거치면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참정권 박탈, 외국인 등록법 시행, 일본 국적 박탈과 쎄트로 제도화되었다. 마이너리티(minority)는 의무의 주체일 뿐 권리로부터 배제당한 것이다. 그 귀결로 재일조선인은 일본정부의 전몰자 유족에 대한 '은급(恩給)' 등 보상금 지급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일본국민'으로 전장에 내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비(非)국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40조엔 넘게 연간 350만 명의 '일본인'에게 지급되어온 전몰자보상금 가운데 국적 구분 없이 지급된 것은 지급 총액의 7%에도 못 미치는 원폭피해자 보상금(귀국 피폭자 제외)뿐이었다. 매코맥은 전후보상에서 독일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가 보상금액의 차이보다도 '태도, 혹은 성의'라고 했지만, 문제는 오히려 보상원리인 듯싶다. 미국과 캐나다는 2차대전시 일본계 주민에게 자행한 강제수용에 대해 보상할 때 국적을 묻지 않았을 뿐더러 일본 귀국자에게까지도 관리를 파견해 보상청구 신청을 받았다. 또 유엔인권위원회는 독립후 국적을 변경한 쎄네갈인 전 프랑스군 병사에 대한 연금 지불액에서 프랑스인 병사와 격차를 둔 프랑스 정부의 행위를 인권규약 위반으로 판정한 바 있다. 여기서 전제가 되는 것은 '자기 속의 타자'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보편적 인권 개념에 입각한 보상원리이다. 이같은 문제가 간과되고 있기 때문에 카또오가 말하는 '애도'의 주체와 대상에서 예컨대 재일조선인의 위치는 어떻게 자리매김되는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요컨대 그의 논의에는 애도의 심리학이 있을 뿐 애도의 정치경제학과 그 기본원리가 빠져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쟁책임 문제는 사실의 인지→사죄→보상의 순서를 밟는다. 카또오는 일본사회가 보상의 전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음을 적확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자기 속의 타자'라는 사실 인지의 핵심적 사안을 거론하지 않은 채 과연 진정한 사죄 주체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인가? 전후 일본사회에서 사자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살아남은 자들이 전쟁체험을 근원적으로 재검토하고, 스스로 그 우위성을 받아들인 민주주의ㆍ인권 등의 보편이념을 제도화하고 일상화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일본은 혁신파를 포함해서 그 과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하여 국가권력으로부터 자립적인 시민사회를 형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카또오의 혁신파 비판은 사까모또 요시까쯔(坂本義和)에 대한 비판(68~70면)에서 알 수 있듯이 시민사회론에 입각한 일본 국가 비판이 강력한 시민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한 데 대한 초조감을 반영한다. 그렇지만 시민운동의 침체 현상이 곧 '시민'적 정체성 모색의 불가능성을 반증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가 주장하는 '열린 국민'이라는 주체는 보수파의 논리를 '흡수'하는 것인만큼 거기로의 틈입을 요구하는데 완고한 보수파가 그런 틈새를 보일 것 같진 않다. '열린 국민'의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의 '개방적 국민' 형성이라는 프로젝트가 그 자신 탈피하고자 하는 '국가적 국민'으로 일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후생성 비판의 선봉에 서서 반(反)관료의 상징이었던 만화가 코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가 최근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투신하여 젊은층에게 『센소오론(戰爭論)』 열풍을 몰고온 것이 좋은 사례다. 여기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 '진보파'의 경직된 몰아치기식 논쟁구도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른바 '역사주체논쟁'도 이와 닮은꼴이 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최근 '국민'과 '시민'은 일본사회에서 서로 대항축을 형성하는 정치언어가 되고 있다. 작년 봄에 성립된 '특정 비영리활동 촉진법'(통칭 NPO법)의 원래 명칭은 '시민활동 촉진법'이었다. 그것이 의회 심의 과정에서 탈바꿈한 것이다. 백여군데가 넘는 문구가 '시민'에서 '국민'으로 바뀌었다. 보수파의 '시민' 알레르기라고나 할까? 카또오는 '시민'이란 표현 대신 '개방적 국민'을 고집하지만 거기에 국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 같다. 매코맥이 "일본성의 독특한 본질을 국제적으로 천명하려는 운동을 가장 강력하고 명료하게 주창한 인물"(231면)이라고 본 나까소네는 이렇게 말한다. 전후 사회, 저널리즘에서 가장 결여되어 있는 것은 국가론입니다. 국가는 악의 장치라는 맑스주의의 영향 탓에 국가ㆍ국민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시민이라는 말이 부상하여 귓전에서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실태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그 기초에 있는 것은 역사와 전통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 국가와 국민은 동시에 성립합니다. 시민은 국민공동체의 기반 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中曾根康弘·宮澤喜一, 「特別對談: 憲法50年」, 『朝日新聞』 1998년 4월 22일) 6. '아버지'에게 던진 질문 카또오의 글을 접하면서 또하나 갖게 되는 의문은 전후 50년이 넘도록 지속된 인격분열을 통합할 계기가 이제까지 과연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가 '66학번'으로 이른바 '젠꾜오또오(全共鬪)운동 세대'이기 때문이다. 중국 문화혁명의 영향을 받은 이 운동은 안보투쟁의 주축이던 기존 젠까꾸렌(全學連) 조직과는 달리 개인의 사상과 행동을 중심으로 대학의 사회적 윤리성을 문제삼고 '자기부정' 혹은 '자기변혁'을 구호로 내걸었다. 그만큼 대학투쟁 과정에서 전쟁책임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구서독의 경우 전쟁책임 문제를 여론화한 결정적 계기는 '1968년(학생)혁명'이라 불리는 대학투쟁 때였다. 당시 서독의 대학생들이 내건 구호 중의 하나가 바로 "아버지, 당신은 전쟁 때 무엇을 했습니까?"였다. 그때까지 나찌시대에 관해 함구하고 있던 구세대에게 책임을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들은 확고한 사죄논리에 선 전후보상을 실현해나갔고 그들이 현 통독사회의 중추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정주(定住)외국인의 증가에 따른 신나찌 같은 인종주의의 대두, 역사수정주의의 등장 등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되지만, 적어도 전후 독일사회는 대학투쟁 때 튼실한 기반을 구축해놓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의 대학투쟁은 그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 '자유주의사관'파의 중심인물 후지오까 노부까쯔(藤岡信勝)도 같은 세대지만 냉전체제 붕괴 이후 좌파적 역사관에 의거했던 입장을 180도 선회하여 국민ㆍ국가의 역사를 부르짖고 있는 판이다. 이 점에서 다음과 같은 카또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60년대말 젠꾜오또오세대의 반항은,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얼굴을 하고 있던 전쟁세대에 대한 혐오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었을 터이다. 카또오씨가 말하는 '내부로부터 연다'는 것은 이때 아버지세대의 가해성을 철저하게 추급(追及)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젠꾜오또오세대는 아버지세대의 자기기만을 문제삼기는 했지만, 그 자기기만의 원천으로까지 소급해서 추급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 또한 피해자 의식의 틀에서 결코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大越愛子, 「もうひとつの'語り口の問題'」, 『創文』 1997년 4월호) 일본에서는 독일과 달리 "아버지,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라는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젊은세대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지키자!"라는 목소리에 직면하는 것이다. 카또오의 성실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자기 세대의 '비틀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의 '안에서 밖으로'라는 논리의 설득력을 반감시킨다. 7. 진정한 공생을 찾아서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매코맥과 카또오의 두 저작은 모두 현대 일본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단 매코맥은 '시민'적 정체성을, 카또오는 '국민'적 정체성을 모색한다는 (결코 작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평자에게는 카또오의 '개방적 국민'이라는 개념이 결국 (국가적) 국민과 시민 사이에 동요하는 모습처럼 비친다. 그의 성실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논리에 흡수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매코맥에게 카또오의 책에 대한 서평을 맡겼더라면 어땠을까? 추측하건대 비슷한 (그러나 훨씬 비판적인) 반응이 나왔을 듯싶다. 어찌됐든 두 책이 모색하는 진정한 공생의 길이 우리 현실에는 어떤 참조틀을 제공하는 것일까? 우선 일본에서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한 비판이 한국에는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카또오 저서의 마지막 논문 「말투의 문제」에서 거론한 한나 아렌트(H. Arendt)의 르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이 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1960년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에 의해 아르헨띠나에서 체포된 나찌 전범 아이히만(K. A. Eichmann)에 대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아렌트는 그 많은 유태인을 강제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나찌 지배하에 있던 주요 도시의 유태인평의회가 협력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냉철하게 지적했다. 이 지적 때문에 아렌트는 많은 유태인들로부터 '민족의 딸'이 비극적 상황에 놓인 동포에 대해 그토록 동정심 없는 발언을 할 수 있느냐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근 40년 전의 일이지만 아렌트가 '아버지'에게 던진 발언의 무게는 아직 그대로이다. 일제지배하의 조선에서는 어떠했을까? 박정권하의 베트남전 파병 때는 또 어떠했을까? 아렌트의 발언은 또다른 각도에서 한국민족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반추하게끔 한다. 일본에서의 '국민'이라는 말처럼 한국에서의 '민족'이라는 말도 끊임없이 국가에 의해 흡수당해왔다. 일본이 구미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아시아를 간과해왔듯이, 한국은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 아래 동남아시아 등지에 대한 아(亞)제국주의적 행태를 직시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피해자 의식만 있을 뿐 가해자 의식은 없다. 그 결과 '국민'과 '민족'은 내셔널리즘의 과잉과 충돌로 표출된다. 이러한 악순환, 불온한 공생을 어떻게 끝장낼 것인가? IMF위기에 일본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일본에서의 내셔널리즘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변국들에게도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 카또오와 마찬가지로 '평화국가' 일본의 정체성을 지지하는 매코맥은 "일본 밖(의 아시아 국가들─인용자)에서 일본의 평화주의 또는 호헌론을 지지하는 결집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다. 유럽의 프랑스와 독일 간에 나타나는 애도와 화해, 기억의 공유를 이루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쟁점들을 일본 외부에서 더 잘 인식하고, 일본이 보통의 강대국이 되기를 바라는 측이 받는 지지의 약간만이라도 일본의 평화운동에 보내야 할 시기"(281~83면)라는 것이다. 결국 한일 양국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진정한 공생관계를 모색하려면 각 시민사회 영역의 체질개선과 이에 기반한 시민운동의 협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이른바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둘러싸고 양국 시민단체간의 불협화음이 일고 있는 것은 양국의 시민사회가 아직 '민족'과 '국민'의 족쇄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국가의 불온한 개입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인권 개념에 기반한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노마 필드의 말대로 세계사의 현시점은 "우리로 하여금 국경을 초월하여 아시아ㆍ태평양전쟁(나아가 근대─인용자)의 의미를 재점검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