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3일 화요일 오후 02시 55분 46초 제 목(Title): 중앙/광주항쟁사람들 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20. 광주항쟁 사람들 중앙일보 [ 사회 ] 1999. 7. 12. 月 "갑오년의 농민군이나 80년 광주의 시민군이나 민중은 언제나 진리에 가깝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시기만 다르지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습니다. " 올해 전남대에서 안식년을 맞은 왕년의 '맹장' 송기숙 교수는 해남의 자택에 은거, 창작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94년 대하소설 '녹두장군' 을 완간한 그는 여전히 한국민중사를 소설로 형상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광주항쟁을 겪은 지식인들은 전남대를 주축으로 학계에 널리 포진해 있다. 7년형을 선고받았던 명노근 (영문학) 교수와 선고유예를 받았던 이광우 (정치학) 교수는 84년 복직된 뒤 지난해 정년퇴임했다. 구속. 해직등 고초를 치렀던 송기숙 (국문학) . 안진오 (철학). 이상식 (사학).이방기 (법학). 김동원 (사학). 이홍길 (사학) 교수 등은 전남대에서 교직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전남대와 달리 학내 민주화문제에 얽혀 교수들이 대거 구속됐던 조선대에도 박동철 (영문학). 김수남 (국문학) 교수 등이 현직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항쟁 당시 광주지역 대학의 초임 교수이거나 대학원.학부 학생들도 이제는 중견 교수로 자리잡았다. 광주시민연대 공동대표인 나간채 (사회학) 전남대 교수는 당시 초임 교수였고, 5.18기념재단 이사인 오재일 (행정학) 전남대 교수와 빛고을미래사회연구원장인 정근식 (사회학) 전남대 교수는 대학원생이었다. 명노근 교수는 현재 YMCA전국연맹 이사장으로, 광주YMCA회장을 지낸 이광우 교수는 광주민중항쟁영상기록특별위원회 대표로 시민운동계에서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다. "피해자 측 증언을 포함해 계엄군 출신 제대군인들의 양심적인 증언까지 영상으로 남겨두기 위해 96년 변호사.대학교수.방송인 등 20여명이 모였어요. 지금까지 1시간짜리 테잎 3백여개를 제작했지요. " 이교수는 영상 증언이야말로 광주의 진실을 증거할 가장 확실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광주항쟁 정신의 계승작업에 광주 지식인들의 분발이 요구됩니다. 정리해야 할 자료들이 아직도 쌓여 있을 뿐 아니라 개념규정조차 적지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니까요. " 오수성 전남대 5.18연구소장 (심리학) 은 '광주항쟁 지식인들' 의 과제를 이렇게 제시한다. 그간 자료집을 내는 지식인들의 활동은 간단없이 계속돼왔다. 지난 82년 박석무 학술진흥재단 이사장 (전 국회의원) 은 금남로 부근 호남동에 한중고문연구소를 설립했는데 88년부터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로 간판을 바꾸고 초대 소장에 송기숙 교수가 취임했다. 그때부터 2년여에 걸쳐 정근식 (현 전남대 교수).안종철 (현 광주시 5.18전문위원) 연구위원등 30여명의 조사원이 5백여 항쟁 참가자들의 구술을 채록하여 1천6백여쪽의 '광주오월민중투쟁사료집' 을 출간했다. 연구소는 96년 재정난으로 전남대 5.18연구소로 업무를 이관했다. 항쟁관련 문화예술계 인사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도 '예향' 광주만의 특색. 문학계에서는 홍희윤 (필명 홍희담) 씨가 광주항쟁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의 삶을 그린 '깃발' 을 통해 광주항쟁을 정면으로 다루었고, 시인 김준태씨는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등 일련의 광주 시를 발표했다. 또 줄곧 광주문제에 천착하던 임철우씨는 지난해 2월 장편 '봄날' 을 완간했다. "장편 '봄날' 을 쓰게 된 것은 내성적인 성격의 저를 광주항쟁 한 가운데로 이끌어준 친구 '박효선' 에 대한 속죄의식의 하나로 운명적인 작업이었어요. " 임씨는 광주항쟁 과정에서 온몸을 내던져 싸웠던 고 (故) 박효선 (1954~98) 씨야말로 광주항쟁 정신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낸 대표적 인물이라고 강조한다. 시민군 홍보부장이었던 박씨는 83년 극단 토박이를 창단, '금희의 오월' '모란꽃' 등 항쟁을 소재로 극본을 직접 쓰고 연출해 국내와 미국.캐나다 등지에서 장기공연했다. 그는 또 항쟁 당시 시민군 지도부로 도청에서 산화한 윤상원의 일생을 그린 광주MBC 드라마 '시민군 윤상원' 에서 윤상원 역을 열연하는 등, 지난해 가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온몸으로 광주를 껴안은 '참광대' 의 모습으로 광주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지역문화예술 가꾸기로는 김상윤 광주비엔날레 사무차장의 활동이 돋보인다. 그는 80년 '녹두서점' 을 운영하며 지역문화운동을 광범위하게 뒷바라지했고 최근에는 극회 광대 출신의 김윤기씨와 광주비엔날레 정상화에 앞장서고 있다. 언론계에서도 광주항쟁을 치러낸 사람들이 적지 않게 활약하고 있다. 정용화 광주매일 서울취재부장과 극회 광대 출신의 김선출 광주매일 문화체육부장은 '정사 5.18' 이라는 기획물을 연재했고, 광주MBC의 오창규 PD는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와 '시민군 윤상원' '윤한봉 망명기' 등의 드라마를 제작했으며, 영상기록특위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해관계에 집착해 갈 길을 못찾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통령이 광주와 관련 있다는 이유로 정권의 들러리만 서서는 광주항쟁 정신을 제대로 계승할 수 없습니다. 뼈를 깎는 반성 없이 광주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 비판도 있다. 항쟁 직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96년 귀국한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민족미래연구소장은 항쟁정신 계승에 가장 앞장서야 할 광주 지식인들이 시대의 부름에 제대로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이처럼 통렬하게 지적한다. 광주민중항쟁의 의미를 전국화.세계화하기 위해 광주 지식인들은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각양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을 포함해 이 시대의 지식인들을 항상 깨어있도록 하면서 쉼없이 분발하고 논쟁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스러져간 넋들에 대한 '산 자의 빚' 의식일 것이다. 고규홍 기자 <gohkh@joongang.co.kr> 입력시간 1999년 07월 12일 19시 00분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