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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1일 일요일 오후 11시 41분 47초
제 목(Title): 신동아/동티모르를 가다


 [17] 제목 : [제4세계를 가다] 동티모르에서 골든 트라이앵글까지

  TV와 활자매체가 구분되는 것은 TV의 경우 모든 것을 그림으로 말해
  야  한다는 점이다. 언뜻 보면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그 ‘그림’의 
  이면에는  시청자들이  모르는 뒷얘기들이 많이 숨어 있다. 때로 그 
  현장  취재의  갈피갈피에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취재진만의 남모를 
  고통이 배어 있다.
  
  90년대 이후 TV매체에서 봇물 터진 듯 만개한 프로그램이 시사 다큐
  멘터리다.  모든 프로그램이 그렇지만 특히 시사 다큐멘터리는 살아 
  있는  현장을 생명으로 한다. 때문에 분쟁지역, 인권탄압과 같은 민
  감한 사안은 목숨을 담보하는 위험 부담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우리 국내 방송의 제작 여건이 CNN, BBC, NHK와 같은 세계적인 방송
  사처럼 체계적인 취재 시스템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부분 관
  광비자를 받거나, 몰래 국경을 넘어야 하는 등 열악하기 그지 없다. 
  필자가  그동안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다녀온 국가는 20여개국이다. 
  이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수십년째 인간사냥이 계속되고 있
  는  동티모르, 세계 최대 마약지대 골든 트라이앵글. 그리고 최소한
  의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해 거대한 권력과 맞서 싸우는 멕시코 사
  파티스타 게릴라의 처절한 삶이다. 
  
  
  ◆ 죽음의 땅 동티모르
  
  동티모르는 지구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식민지로 인도네시아의 통치
  를 받고 있다. 40여만명이 사는 조그마한 이 섬에 비극이 시작된 것
  은 70년 말 인도네시아에 강제 통합되면서부터다. 그동안 독립을 외
  치다 희생된 주민은 20여만명.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한 것이다.
  
  필자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96년 12월. 국내 언론사로는 최초의 
  잠입 취재였다. 이후 지난해 8월, 다시 한 번 다녀왔다. 동티모르와 
  두 번의 인연을 맺은 것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잔학한 인권탄압 때문
  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과의 밀월 관계 
  때문에 그동안 이 문제를 철저하게 외면해왔다. 
  
  동티모르  잠입취재는 솔직히 두려움과 걱정스러움 그 자체였다. 외
  신으로 전해 들은 소식은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등 살벌한 얘기뿐
  이었다.  주위에서는 가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국내 언론사로는 처음
  이라는 욕심, 핍박받는 동티모르 주민들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
  각에 감행했다. 
  
  취재진은  먼저 호주 시드니에 있는 동티모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
  했다.  임시정부는 96년 동티모르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끈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호세 오르타를 수반으로 하고 있다. 
  
  임시정부측은 아무런 연락 없이 들어갈 경우 위험하다며 현지안내인
  과 차량까지 섭외해주었다. 임시정부는 안내자와 접선시 인도네시아 
  비밀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명을 정해주었고 차량은 번호까
  지 지정해주는 등 안전에 각별한 신경을 써주었다 
  
  동티모르는  세계적 휴양지 발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발리 덴파
  사  공항에서 동티모르로 가는 항공편은 하루에 한두 편. 미리 예약
  을 하지 않을 경우 좌석 구하기가 쉽지 않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떠난  취재진은  동티모르 공항에 도착하면서 순간 걱정으로 바뀌었
  다.  동티모르의 ‘코모로 공항’. 국내 공항이지만 외국인들은 6~7
  명의  경찰이 집중 조사를 하는데 방문목적과 기간, 숙소, 여권번호
  까지 세밀하게 체크한다. 
  
  동티모르  취재는 처음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취재는 방송용 카메
  라가 아닌 가정용 비디오를 이용해야만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외
  국  언론사의 취재를 철저히 막고 있기 때문이다. 공항을 나와서 만
  난 주민들은 겁먹은 표정에 말이 없었다. 
  
  동티모르에 있는 동안 임시정부에서 지정해준 트리스모 호텔에서 묵
  었다.  외신기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때문에 호텔 주변과 입
  구에는  사복경찰이 상주하며 24시간 감시했다. 한번은 호주 ABC 방
  송  기자가 밤에 주민들과 인터뷰를 하다 들켜 구타를 당한 후 테이
  프를 빼앗기고 간신히 풀려나온 일이 있었다.
  
  식민지 취재는 한마디로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안내인과의 접선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지정된 차량만 이용할 것, 안내인과는 그들
  이  말을 걸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물어봐서는 안 된다 등등. 안내인 
  접선은  도착한 지 하루가 지나서야 이뤄졌다. 상황이 안 좋다며 약
  속시간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
  
  다음날 안내인이 기다리라는 장소로 나갔다. 그러나 사람은 없고 택
  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사는 취재진을 태운 후 시가지를 세 바
  퀴 돌더니 한적한 골목길에서 걸어가는 사람을 태웠다. 그는 웃으면
  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을 안내인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처
  음으로 우리를 데려간 곳은 딜리시 외곽에 있는 마을이었다. 주민들
  은  취재진을 게릴라 장교가 숨어 있다는 집으로 안내했다. 그는 팔
  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일주일 전 인도네시아군과 전투를 벌이다 
  총상을  입고 마을에 숨어 있다고 했다. 그는 처절하게 투쟁하고 있
  는 게릴라의 실상을 알려주었다.
  
  “게릴라는  300명도 안 된다. 수만명의 인도네시아군과는 숫자상으
  로  보나 무기로 보나 얘기가 안 된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일주일 
  전에도 적군을 3명이나 죽였다. 며칠 뒤에 다시 산속으로 들어갈 것
  이다.” 
  
  장교와  얘기를  나누던 도중 마을 주민들이 몰려왔다. 30대 중반의 
  한 여성은 석달 전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자신을 집단 성폭행했
  다며  눈물을  흘렸다. 40대 남자는 군인들이 동생의 눈알을 도려내 
  죽였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마을을 촬영하려고 나서자 주민들
  은 나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군인과 정보원들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
  이다.
  
  한번은 인도네시아 경찰을 안내인으로 잘못 알고 접근했다가 혼쭐이 
  날  뻔한 일이 있었다. 도착 첫날, 3시간이 지나도록 안내인이 접선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가려고 하는데 모자를 쓴 두 명의 젊은이가 
  말을 걸어왔다. 독립운동단체 요원인 줄 알았는데 뒷머리가 짧고 건
  장한 모습이 이상해 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음날 안내인에게 물어보
  니  그 젊은이들은 우리나라로 치면 ‘백골단’이라는 것이었다. 당
  시  동티모르의 인구는 20만. 그러나 주둔하고 있는 인도네시아군과 
  경찰은 3만여명. 여기에 동조자를 합하면 군·경찰 한 명이 대략 인
  구 5명을 감시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 대학 옆에 특전사
  
  동티모르는 한마디로 죽음의 도시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살인·폭력
  ·강간을 일삼는 점령군의 폭정에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때문
  에 외국 언론사와의 만남은 비밀리에 이뤄진다. 안내인은 차로 시가
  지  외곽을 세 번이나 돌게 한 다음 주민에게 안내해주었다. 미행차
  량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점령군의 만행을 폭로하는 주민들은 “눈알을 도려내거나 죽창을 가
  슴에 꽂아 죽였다” “군인들이 갑자기 들어와 윤간을 했다” 등 상
  상할  수  없는 사실을 내뱉었다. 올해 대학교 2학년생인 수린 양은 
  자신의  아버지가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후 밤마다 군
  인들로부터  온갖 협박을 받고 있다고 했다. 군인들은 밤 늦게 집에 
  돌을 던지거나 욕설을 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했다. 
  수린 양의 어머니는 남편이 교도소에서 상상도 못할 일을 당하고 있
  다며 이렇게 얘기했다.
  
  “교도소에서  음식에 독극물을 넣어 정치범들이 음식을 먹은 후 병
  원에  실려 갔다. 교도소에는 독사를 가둬놓은 방이 있는데 말을 안 
  들을 경우 이 방에 집어넣는다.”
  
  이 말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교도소에서 자행되는 고문
  행위는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동티모르의  주도 딜리시에 있는 ‘티모르 대학’. 외국인이 카메라
  를  들고 들어가자 학생들이 승리의 V자를 그리며 몰려들었다. 학교
  측은  취재진에 학생들의 시위가 우려된다며 나가줄 것을 요구했다. 
  학교측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바로 학교 옆에 인도네시아 
  특전사  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측이 두려워하는 것은 학생들
  의  시위가 시작될 경우 군과 경찰의 무력진압으로 유혈사태가 예상
  되기 때문이다.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된 학생들은 대부분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통받고 있었다. 가슴에는 피멍이 들고 얼굴 다리 팔에는 담뱃불로 
  지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학생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자 열
  댓  명이 강의실로 몰려들어 현재 동티모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상
  을  알려주었다. 취재진이 방송 후 보복이 두렵지 않으냐고 묻자 학
  생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인터뷰를 시작
  했다.  외신이 나간 후 군인들이 취재에 응했던 학생들을 찾아내 보
  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채찍으로 등허리를 때리거나 심하게 
  구타한다고 학생들은 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취재기간은 얼마 남지 않았
  는데  안내인은 위험하다며 동행취재를 거부했다. 취재 도중 안내인
  이 도망가버린 일도 있었다. 90년 인도네시아군의 무차별 발포로 20
  0여명의  주민이 살해된 산타쿠르드 묘지를 촬영하려 하자 안내인은 
  “카메라 다운”을 외쳐댔다. 촬영을 감행하자 그는 달아났다. 다음
  날  왜 도망갔느냐고 물으니 그는 촬영장소 뒤쪽이 인도네시아 특전
  사부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 “우리 땅을 돌려달라”
  
  필자가  동티모르를 찾은 것은 96년, 98년 두 차례다. 두 번의 방문
  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동티모르의 정신적 지도자인 벨로 주교와 
  한 두 번에 걸친 인터뷰다. 벨로 주교는 외신과 접촉하지 않는 인물
  로 알려져 있다. 인터뷰기사가 나갈 경우 인도네시아 정부의 반발을 
  사  주민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이유였다. 필자 역시 한달 전 인터뷰
  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벨로 주교가 사는 사택을 찾아갔
  다. 두 시간 남짓 만나달라고 버티니 벨로 주교가 접견실로 나왔다. 
  반갑게 인사를 하자 벨로 주교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지난번  독일의  한 신문과 인터뷰를 했는데, 기사 내용이 사실과 
  달라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외신기자들은 만나지 않겠다.” 
  
  취재진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왔고,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 통치를 
  경험했기  때문에  동티모르의 고통을 잘 알고 있다며 한국인들에게 
  이곳의  실상을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벨로 주교는 인터뷰 시간을 5
  분만 주겠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티모르에는  지금도 상상 못할 만행이 벌어지고 있다. 딜리시는 
  외부의  눈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낫지만 시골에서는 지금도 수없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바다에서는 의문의 주검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
  렇게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지만 그 진실들이 감춰지고 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인도네시아 정부에 우리 땅을 돌려달라는 것
  이다. 왜 그들은 우리 정당한 요구를 무참히 짓밟는 것인가. 인도네
  시아는 이 땅에서 떠나야 한다.”
  
  주교는  인터뷰가 끝난 후 한국을 꼭 방문하고 싶다며, 김수환 추기
  경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성당으로 떠났다. 
  
  이후  우리는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촬영테이프를 숨기는 작업을 했
  다.  60분짜리 테이프 앞부분은 빈 채로 놔두고 중간 이후부터 20분 
  정도만  촬영한  다음 처음 위치로 되돌려놓는 방법을 택했다. 만일 
  압수될 경우 빈 테이프 부분을 보여주며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동티모르에서의 마지막 날, 필자는 아들이 이유없이 죽어 슬픔에 잠
  겨  있는 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아들은 버스를 타고 가다 영
  문도  모른 채 경찰에게 끌려내려 총을 맞고 사망했다. 그 어머니는 
  당시 아들이 입었던 피 묻은 옷을 간직하고 있다며 옷장 깊숙이에서 
  꺼내  보였다.  티셔츠에는 총구멍이 나 있었고 바지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어 당시의 비참한 현장을 읽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옷을 바라보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되뇌었다. 
  
  “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하는가. 게릴라들의 정보원도 아니었다. 인
  도네시아는  이 땅에서 떠나라. 죄 없는 아들을 죽이는 것이 우리를 
  잘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인가.” 
  
  필자는  동티모르 인권단체를 찾았다. 이곳은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인권탄압 실상을 취합하는 곳이다. 인권단체책임자는 UN에서 ‘동티
  모르 자치안 협상안’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가 계속되면서 인권상황
  이 더욱 나빠졌다고 한다. 동티모르의 경우 한마디로 치안 부재라고 
  할  만큼  살인, 약탈, 강간, 고문, 그리고 실종자가 파악조차 되지 
  않는 등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말했다.
  
  
  ◆ 티모르와 기아자동차
  
  취재를  끝냈지만  난감한 문제가 앞을 막았다. 촬영 테이프를 갖고 
  나오는 것이 간단치가 않았다. 공항 검색대에서 철저한 소지품 조사
  가 벌어졌다. 우리는 테이프를 신발 밑바닥에 숨기거나 가방 내피를 
  찢어 그 속에 감췄다. 그리고 독립운동단체에서 일러준 대로 미화 2
  00달러를  준비했다. 천운이었을까. 달러를 손가락에 끼워 악수하는 
  척하면서 건네자 검색요원은 한국에서 왔냐고 물으며 간단한 검사만 
  마친 후 통과시켰다. 
  
  이후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30분. 혹시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초조히 뜨는 순간만 기다렸다. 그 30분은 내 생애에서 가장 
  길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두 달 후 방송을 통해 동티모르 
  실상이 처음으로 국내에 전해지면서 많은 격려전화가 왔다. 사실 방
  송을 낸 뒤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가 동티모
  르 관련 방송을 할 경우 외교 채널을 통해 항의하는 등 반발이 있었
  기  때문이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에서 동티모르 관련 보도를 한 후 
  국교단절 얘기까지 흘러나왔다고 한다.
  
  동티모르와 관련해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얘기가 있다. 96년 
  취재  당시 인도네시아에서는 기아자동차에서 만든 승용차가 국민차
  로  선정됐다. 물론 여기에는 수하르토의 아들이 관련돼 특혜시비가 
  일기도 했다. 문제는 차의 이름이 ‘티모르’였다는 점이다. 동티모
  르 주민들은 취재진에 강력히 항의했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티모르라는 이름을 사용해 
  인도네시아 국민차를 만들 수 있는가. 결국 침략자 수하르토의 돈벌
  이를 위해 동티모르를 팔아 먹은 것이다.”
  
  최근 동티모르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다. 인도네시아 총선 이
  후 올 8월에 동티모르에서 자치안에 대해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우
  리 정부에서도 선거감시를 위한 경찰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
  는 걱정이 앞선다. 이미 동티모르 내에서는 인도네시아의 사주를 받
  은  세력이 자치안 반대운동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큰 폭동
  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된다. 인구의 절반이 죽어가면서도 독립하겠
  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 동티모르 주민들, 그들의 엄청난 희생이 
  어떠한  결과를  얻어낼 것인지 자치안 투표결과에 세계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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