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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5일 월요일 오전 11시 34분 37초
제 목(Title): 월간중앙/ 맹사성


세종시대를 빛낸 문화전략가 孟思誠 
“즐겨 소를 타고 피리를 불었으며
비 새는 초가살이를 기쁨으로 여겼다” 



송혜진 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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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은 창작자나 연주가, 혹은 음악을 연구한 전문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높은 경륜과, 문화와 전통을 바라보는 유연하고 참신한 사고를 겸비한 
세종 시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는 동양음악 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것으로 평가받는 세종 시대에 음악 정책의 방향을 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문화를 보는 혜안과 유연한 사고로 시대의 문화를 디자인한 ‘문화 
기획자’이자 ‘전략가’였던 것이다. 그것이 ‘문화의 세기’라는 21세기를 
코앞에 둔 우리가 그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시인 곽재구는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을 노래했다. 
“장관이 통근버스를 타고/출근을 한 아침/기다렸던 TV 기자들은/버스를 탄 소감을 
묻고/나는 맹사성을 가르친다/조선 세종조의 좌의정/즐겨 소를 타고 피리를 잘 
불었으며/비 새는 초가살이를 기쁨으로 여겼다/좌의정이면 어느 정도 
벼슬일까/날아가는 새도 떨어지는 서슬이라는데…(중략)…맹사성을 
가르치다가/나는 옛 역사가 들려주는/향내 깊은 피리소리 듣는다.” 
<곽재구의 시 ‘맹사성’중에서> 

우리가 맹사성에 대해 가진 정보는 대개 이 정도다. 조선조 청백리(淸白吏), 소를 
타고 출근하며 피리를 잘 불었다는 소박한 맹사성. 그가 문화체육부가 선정하는 
99년 7월의 문화인물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왔다. 그것도 음악 분야의 인물이라니 
얼마나 생소한 일인가. 

조선 초기, 왕조의 문물(文物) 기반이 다져지던 때 맹사성이라는 인물이 무슨 일을 
했던가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왕조실록” CD-ROM에서 맹사성을 클릭해 보면 된다. 
그러면 모두 4백90건의 기사가 나오고, 그 기사들을 드문드문 발췌해 읽어보면 
태조부터 세종에 이르는 여러 임금들이 무슨 일이든 맹사성과 의논하고 그에게 
자문했으며, 신진 관리들이 무슨 일을 도모하려 상소를 올리면 임금은 “맹사성과 
의논하라”는 말을 자주 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임금들이 제도와 문화 전반에 
관해 “맹사성에게 물으라”고 한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그가 당대 최고 지성의 
한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음악도 그 중 한 분야였다. 그리고 미리 말하거니와 맹사성은 세종이 
‘국가음악’의 정비사업을 이루려 할 때 매우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음악 분야의 문화인물로 맹사성을 만나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맹사성에 관한 역사기록으로는 그의 음악 수업과정이나 음악 
기량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맹사성은 태종 때 이미 관습도감(慣習都監)의 
우두머리인 제조가 되어 있었다. 관습도감이란 조선 초기에 국가음악을 관장하기 
위해 설립한 음악기구의 하나로, 주로 국가의 연향(宴享)에서 연주하는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의 연습을 담당한 전문 음악원이었다. 

특히 관습도감에서는 태조 이후 정도전(鄭導傳) 등의 개국공신들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태조의 위업을 칭송하기 위해 지은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 ) 등의 신악 가사를 선율에 맞춰 공연하는 
일을 도맡고 있었다. 음악에 대한 전문성이 인정되지 않고서야 이런 막중한 일을 
책임맡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맹사성을 초청하고 “경(卿)이 관습도감 
제조로 있으면서 새로 지은 사곡(詞曲)을 음악인들에게 가르쳐 악조에 맞게 잘 
연습시켰으므로 부왕께서 기뻐하셨다”는 치하와 함께 궁궐에서 키우던 
내구마(內廐馬)를 상으로 내린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태종 11년 12월에는 맹사성이 인사이동으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자 예조에서 
“지방 행정 잘할 사람은 많지만 음악을 관장(管掌)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으니 
발령을 철회하여 맹사성이 나라에 필요한 정악(正樂)을 바로잡는 데 힘쓰게 
하자”는 건의를 올린 일도 있었다. 모두 맹사성의 음악 경륜을 짐작하게 해 주는 
일화들이다. 

동양 최고의 음악 시대 연 세종 

 
▲중리 맹사성의 고택 뒤편에 있는 정자. 세종 때의 세 정승(맹사성, 황희, 
허조)이 기념으로 아홉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하여 '세 정승'이라는 뜻의 
三相堂 으로 불리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일은 세종 때 이뤄졌다. 세종은 국가 대계(大計)를 구축하기 
위한 음악 정비사업을 벌임으로써 동양음악사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의 시대를 연 
왕이었다. 세종은 박연(朴堧) 등을 기용하여 고대부터 당시까지 축적된 
악론(樂論)을 연구하고 악기 연구와 제작, 실험을 독려하는 한편, 음악을 새로 
작곡하고 과학적인 악보인 정간보(井間譜)체계를 창안하는 등의 개가를 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교정치 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예악(禮樂)사상에 
기반을 둔 국가음악의 정비를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음악사의 악성(樂聖)으로 거론되는 박연의 업적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들은 적이 있겠지만, 맹사성이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박연이 아직 신진이었을 때 맹사성은 영악학(領樂學:국가 음악기구 중 악론 
및 음악 연주 제도에 대해 연구하는 부서인 악학의 책임자)의 자리에 있었다. 

세종 9년, 국가 제례에 쓸 아악기 제작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신상(申商)이 
“이번 아악기 제작은 박연 혼자 한 것이 아니고 영악학 맹사성의 도움이 컸다”고 
말하자 임금은 “악기 제작은 박연에게 맡기면 잘 할 것”이라며 맹사성의 역할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제례악 및 기타 궁중음악 재정비가 지나치게 이론 중심으로 진행되고 음악 
내용도 전통을 뒤로 한 채 중국 아악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이자 세종은 “박연 
등은 모두 신진(新進)이니 그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맹사성에게 “각별히 
유의하라”는 명을 내린다. 행간의 의미를 살피면 맹사성에게 기대한 것은 악기 
제작 등의 실무적인 것이 아니라 세종이 이루고자 하는 음악 정비사업의 향방을 
가늠하는 등의 주요 업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종이 그들에게 다 맡길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이었으며 맹사성에게 
무엇을 유의하라는 뜻이었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맹사성의 생각은 시시콜콜 언급돼 
있지 않다. “세종실록”에 나와 있는 세종과 맹사성의 문답을 보면 세종의 얘기가 
길고 맹사성의 대답은 아주 짧다. 이는 세종과 박연의 관계에서 볼 때 박연의 
상소가 대개 길고 세종의 답이 짧은 것과 상반되는 현상이다. 

이런 점 때문에 맹사성의 음악에 대한 생각이 그리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맹사성은 국가의 모든 음악 제도가 중국식 아악 이론에 따라 획일적으로 
구조 조정되는 대세(大勢)를 바로잡으려는 세종의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조용히 수행하였다는 사실은 실록 여기저기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세종 7년에 임금이 이조판서 허조에게 “우리나라는 
본디 향악(鄕樂)에 익숙한데, 종묘의 제사에 당악(唐樂)을 먼저 연주하고 
삼헌(三獻)할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향악을 연주하니 조상 어른들의 평시에 
들으시던 음악을 쓰는 것이 어떨지 맹사성과 더불어 상의하라”고 지시한다. 

또 세종이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나라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마땅한 일일까?” 

 
▲맹씨 고택 뒤에 있는 위패를 모시는 사당 
“악공(樂工) 황식(黃植)이 중국에 가서 아악 연주를 들으니 
장적(長笛)·비파(琵琶)·장고(長鼓) 등을 사이로 넣어 가며 당상(堂上)에서 
연주했다고 하니 중국에서도 또한 속악(俗樂)을 섞어 쓴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을 
연거푸 냈다. 
이때 맹사성은 “옛 글에 보면 아악과 속악(俗樂)을 섞어 연주하는 것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모양입니다”라며 짧지만 의미 깊은 답으로 
세종의 견해를 지지했다. 

이같은 사례는 맹사성이 기록에만 의존하는 것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여 왕의 
견해를 지지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당시에 새로 제작, 정비한 음악 연습을 
제례악을 담당하는 관서인 봉상시(奉常寺)에서 담당하자 세종은 제례악을 담당하는 
봉상시 소속 음악인들이 연향악을 담당하는 관습도감(慣習都監) 음악인들보다 
음악성이 낫다고 할 수 없으니 관습도감 음악인에게 신악을 연습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라며 음악 실체에 밝은 맹사성이 박연(朴堧)·정양(鄭穰) 등의 신진이 하려는 
일을 관심 있게 이끌어 줄 것을 당부한 것이다. 

낮은 목소리로 세종의 높은 뜻 뒷받침 

그렇다고 맹사성이 언제나 세종의 의견에 동조한 것만은 아니었다. 세종 14년에 
임금이 “처음에 아악(雅樂)을 만들 때 나는 다만 조정 의식에만 쓰고자 하였을 뿐 
뜻이 회례(會禮)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는데 …(중략)… 사세가 장차 그만둘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문무무(文武舞)의 의과 춤의 절차(節次)가 혹시 옛 제도에 
어긋나게 되면 반드시 후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기보다 
차라리 폐지하고 …(下略)…”라고 한 일이 있었다. 

이때 맹사성은 동료 학자들과 함께 시대에 따라 전통이 달라지는 것이므로 반드시 
옛 제도를 그대로 습용(襲用)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 대의만 서로 통한다면 
부족한 것을 보완하여 지속해야 하고 제도를 자세히 모른다고 하여 폐지하고 쓰지 
않는다면 악이 결여(缺如)될 염려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회례 아악이 제정되어 실용화 단계에 이르자 세종은 다시 “어찌 
회례에 중국음악을 쓰는가. 향악을 다 버리는 것은 불가하다”는 강경 입장을 
보이자 맹사성은 “먼저 아악을 연주하고 향악을 겸하여 쓰는 것이 좋겠다”는 
아악·향악 겸용론으로 당시의 문화상황과 세종의 견해를 조정하여 제도화시키기에 
이른다. 

‘겸하여 쓰는 것이 좋겠다’는 맹사성의 생각은 오늘날 우리가 맹사성이라는 
인물을 ‘외래 문화의 한국적 수용’이라는 배경으로 재조명하게 하는 핵심 
문구다. 어찌 보면 이도 저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입장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쓸 것’과 ‘버릴 것’이 뚜렷하게 대립하는 문화상황에서 ‘새로 재정비한 
아악과 전래의 전통음악을 겸하여 쓰자’는 생각은 세종 시대의 음악 비전에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참신한 제안이었다. 

맹사성의 발언은 예연(禮宴)에서 연주할 곡목을 반반씩 정하자는 것으로 
부각되었지만 그 바탕에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고, 외래의 것과 전래의 것을 
아울러 제 삼의 ‘무엇’을 창조해야 한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맹사성이 
‘전통과 제도는 변화하는 것이므로 이론과 명분에 얽매이지 말고 필요에 따라 
수정 보완하여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한 것 역시 그의 유연한 사고를 뒷바침해 
준다. 

맹사성의 ‘겸용론’(兼用論)이 제안된 후 회례에서의 아악은 오래지 않아 
폐용되었다. 세종은 전래의 음악전통과 아악, 세종대에 이루어진 음악이론의 성과, 
새로 만든 아·당·향악기, 악·가·무를 갖추어 연주하는 공연 양식 등을 한데 
응용하여 조선 전기 신악(新樂)의 결정판이 된 ‘정대업’(定大業)과 
‘보태평’(保太平)을 창작하여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세조 대에 조선왕조 
선왕들을 위한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6백여년이 넘는 유구한 전통을 
이으면서 조선의 시대적 이상을 소리로 전해주고 있다. 

물론 세종의 창작에 맹사성의 아악·향악 겸용론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였다고 
단언하기에는 주저되는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맹사성이 
오랜 음악 경륜과 문화와 전통을 바라보는 유연하고 참신한 사고를 겸비한 
인물이었고, 자신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핵심적인 생각 몇가지로 세종 시대의 
음악정책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음악문화의 조류(潮流)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를 보는 혜안과 유연한 사고로 시대의 문화를 디자인하는 데 
기여한 그의 업적을 조명하다 보니 그에게 ‘문화 기획자’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곧 창작자나 연주가, 혹은 음악을 연구한 전문 
학자는 아니었지만 우리가 음악 인물로 맹사성을 만나는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문화의 시대’라고 하는 21세기를 앞둔 이즈음, 소박한 
성품의 청백리 맹사성으로서 뿐만 아니라 세종 시대를 빛낸 문화 전략가로 
부각되어도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세종조의 名재상, 그리고 淸白吏 
“충성과 믿음을 禮로 삼고
청렴과 결백을 절도있게 지켰다” 



맹온재 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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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고불의 생활철학은 淸貧樂道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고향을 오고갈 때 결코 
관복을 입거나 공무용 교통편인 역마를 이용하지 않았다. 또 촌로의 행색으로 소를 
타고 오고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의 집은 
비가 샐 정도였다. 고불이 세상을 떠나던 날 세종은 문무백관에게 휴무를 명하고 
크게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은 그에게 ‘충성과 믿음을 예로 삼았으니 
文이요, 청렴과 결백함을 절도있게 지켰으니 貞’이란 뜻의 시호를 내렸다. 

 
▲맹씨 고택 안에 있는 맹사성 기념관 내부. 
고불(古佛) 맹사성은 1360년(고려 공민왕 9) 7월17일에 송도(지금의 개성) 근교 
한적한 농촌마을에서 당시 수문전(修文殿) 제학(提學)으로 있던 맹희도(孟希道)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사성(思誠), 자는 성지(誠之), 호는 고불(古佛)이다. 
원래가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고불의 할아버지는 당시 지금의 
내무부장관 격인 이부상서(吏部尙書)였다. 

고불이 5세 때의 얘기다. 고불이 이웃 아이들과 함께 최영 장군의 배밭으로 
놀러갔는데 때마침 배가 탐스럽게 익을 무렵이었다. 그때 최영 장군은 사랑방에서 
낮잠을 즐기다 배밭에서 용이 등천하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아이들이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 먹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최영 장군은 큰소리로 “왜 남의 배를 함부로 따고 있는고”하고 소리높여 
야단치니 다른 아이는 모두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데 유독 어느 아이가 먹다 남은 
배를 손에 들고 장군 앞에 정중히 절을 하면서 사죄하는 것이 아닌가. 장군이 
자세히 얼굴을 쳐다보니 똑똑하게 생겨 장차 큰 그릇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뉘집 
아들인고”하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정중히 대답하기를 “아랫마을에 사는 아버지는 맹(孟) 희(希)자 
도(道)자요, 할아버지는 유(裕)자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장군은 친구 
사이인 아이의 할아버지를 잘 아는지라, 아이를 보낸 다음 의관을 갈아입고 
상서공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꿈 얘기와 그 아이의 예절바른 행동을 칭찬하며 
담소하였다. 
일이 이렇게 발전하자 사돈 맺을 약속까지 나와 결국 장군의 손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라는 기록이 신창 맹씨 세적(世蹟)에 있다. 

조선 건국과 맹씨 가문의 수난 

고불은 어릴 적부터 학업성적이 뛰어난 수재였다. 그의 스승인 권근(權近)은 
자청해서 고불의 교육을 맡았다. 학문의 진도가 빨라 일문지십(一聞知十), 즉 
한가지를 들으면 열가지를 알아내는 추리력이 대단했다. 그는 17세에 진사 초시와 
복시에서 장원했고, 이어 국자감(國子監)의 구재(九齋)에 들어가 출세의 관문인 
문과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국자감이 성균관으로 바뀌고 다시 성균관이 국자감으로 바뀌는 등 학제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문과 초시·복시도 부정과 부패가 심하고 제도 자체가 흔들려 
결국 고불이 27세 되던 해인 1386년(우왕12)에 문과 친시(親試)에서 장원급제했다. 
즉 지금의 고등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한 셈이다. 문과 친시에서 장원한 고불은 
춘추관(春秋館) 검열(檢閱)로 발탁되었다. 이는 지금의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와 
같은 직종이다. 아마도 문과의 시험과목인 사서(四書)와 오경(五景)의 성적이 
좋았던 모양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나 할까. 

맹씨 가문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정에서 수난을 당했다. 고불의 처조부인 
최영 장군은 1388년(우왕14) 3월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조민수(趙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고, 이성계는 우군도통사로 삼아 좌·우도통사로 하여금 요동을 
정벌토록 하여 위화도로 먼저 출발하도록 하였으나 그해 5월 이성계는 네가지 
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면서 조민수와 함께 회군하였다. 

이성계의 회군에는 속셈이 있었다. 즉 이성계가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석왕사(釋王寺)에서 잠을 자다 절이 무너져 서까래 3개를 등에 지고 피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의 해몽을 무학선사(無學禪師)에게 물어보니 서까래 3개를 등에 
졌으면 왕(王)자가 틀림없으니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되는 꿈이라고 하여 그때부터 
이성계는 왕이 되려는 야욕을 품게 되었다. 그 해가 바로 1386년(우왕12)의 
일이다. 

1388년 5월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바로 우왕을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최영 장군은 고봉으로 유배해 쇠도리깨로 살해했다. 그리고 최영 
장군의 아들인 최담마저 살해했다. 

이렇게 이성계의 건국 음모가 착착 진행되는 과정에서 위화도에서 같이 회군한 
조민수마저 이성계의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반대하다 창녕(昌寧)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392년 1월 고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조선 건국이 확실시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피신했다.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요, 열녀(烈女)는 불경이부(不更二夫)”라 
하여 고려왕조를 끝내 배반할 수 없다는 굳은 절개로 두문동에 숨어 살던 72현 중 
세신정(洗身亭) 회맹대(會盟臺)에서 순절당한 24현 가운데는 고불의 할아버지 
맹유(孟裕·국사대사전에 맹호성으로 나와 있으나 잘못된 것임)가 끼어 있다. 

아버지 맹희도는 동두문동에 있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맹씨의 선세(先世)가 
살았다는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했다. 1392년 4월에는 맹희도와 형제처럼 지내던 
정몽주(鄭夢周)마저 송도 선죽교(善竹橋)에서 개국공신 조준(趙浚)에게 격살당하여 
수많은 고려왕조의 명현들이 이성계의 건국 과정에서 희생당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맹씨 가문은 이성계의 눈엣가시가 되어 고불도 춘추관 검열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해 7월 이성계는 송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처음에는 
고려의 각종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다 이듬해인 1393년 2월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개칭하여 조선왕조가 탄생했다. 

조선왕조가 출범하고 나라가 평온해지자 고불은 다시 수원판관이 되었다. 고불은 
피난지 한산에 있던 아버지 맹희도에게 간곡히 권유해 1399년(건문 원년) 10월 
온양에 있는 최영 장군집으로 모시었다. 지금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있는 사적 
109호 ‘맹씨행단’은 최영 장군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이 지은 집으로 최영 
장군 부자가 이성계에게 살해당하자 손자사위인 고불이 인수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집이다. 

우여곡절 많았던 古佛의 벼슬살이 

1396년 수원판관으로 복직했던 고불은 곧 예조의랑(禮曹議郞)으로 승진하여 
중앙관서에서 일하게 됐다(태조실록 5년 8월28일조). 이어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정종 2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등의 벼슬을 역임하다 1406년(태종5) 
이조참의(吏曹參議·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당상관이 되면 그 자손을 문과에 
급제하지 않아도 음사(蔭仕)로 하급관리로 기용하게 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군 광주면 직리에 있는 맹사성의 묘 
48세 때인 1407년(태종7)에는 예문관 제학으로 문과 친시(親試)에 
대독관(對讀官)을 역임하고 이듬해인 48세 때는 세자인 양녕대군이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갈 때 시종관으로 따라갔다. 이때 고불은 양녕대군의 
스승이었다. 그해 9월 명나라를 다녀온 고불은 한성윤(漢城尹·지금의 서울시장)이 
되고 세자의 우부빈객(右副賓客·세자의 사부)을 겸했다. 

1408년(태종8) 11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된다. 고불은 대사헌으로 
임명되자마자 영의정 조준의 아들 조대림(趙大臨)사건과 맞딱뜨린다. 이 사건으로 
태종은 왕실을 가볍게 보고 무시한다는 이유로 고불을 사형에 처하려고까지 했다. 

조대림은 태종의 부마였는데 영리하지 못한 편이어서 남의 말을 잘 듣는 
위인인데다 나이가 어려 사리판단에 어두었다. 조대림의 집에서 
목인해(睦仁海)라는 사람의 아내를 여비(女婢)로 삼았는데 그 남편 목인해는 
영리하고 애꾸눈으로 활을 잘 쏘았다. 목인해는 원래 김해(金海)의 관노 출신인데 
어찌어찌하여 궁궐의 숙위(宿衛) 관직을 받았다. 

조대림은 목인해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고 따랐다. 
목인해는 조대림의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됨을 기화로 출세를 목적으로 조대림을 
꾀어 발병범궐(發兵犯闕)하도록 한 사건이다. 원래 군인은 궁궐 밖에서 지키도록 
돼 있는 관례를 깨고 공을 세우기 위해 궁궐로 들어가게 한 것이다. 이렇게 
조대림을 사주하여 공을 세우게 하면 목인해도 그 덕으로 팔자를 고쳐보려는 
속셈에서였다(태종8년 12월5일자 실록의 기사). 

사태가 이렇게 되자 궁궐은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사헌부 대사헌 맹사성은 이 
문제를 법대로 다루게 되어 조대림과 목인해를 순금사(巡禁司)에 가두고 사실 
규명에 나섰다. 사헌부에서는 취조과정에서 규정대로 조대림을 고문했고 이 사건이 
태종에게 알려지자 태종은 모약왕실(謀弱王室)이란 죄목으로 대사헌 맹사성과 이에 
연루된 관원들을 모조리 옥에 가두고 곤장 1백대라는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이를 
못이긴 고불이 태종의 의도대로 승복하자 태종은 맹사성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모약왕실죄(謀弱王室罪)를 뒤집어쓴 맹사성을 구하기 위해 원로대신들이 상소를 
올리고 세자 양녕대군도 간곡하게 간언(諫言)하자 태종도 노여움을 풀고 사형 대신 
충청도 한산에 있는 향교(鄕校)의 재복(齋僕)으로 유배시킨다. 

이 사건으로 맹사성은 당시 사헌부 소속 감찰(監察)이었던 유일한 아들 
맹귀미(孟歸美)를 잃었다. 태종은 그의 아들을 사형에 처했던 것이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대명률(大明律)이 무색할 만큼 태종의 왕실모약죄는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피할 도리가 없었다. 

태종실록을 보면 1411년(태종11) 8월9일 태종은 맹사성에게 두미(豆米) 20석을 
주며 위로했고 또 같은해 12월9일자 실록에는 맹사성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고 나와 있다. 
이 사건으로 1409년 1월 유배지에서 풀려난 고불은 같은 해 8월 직첩(職牒)을 
되받아 지방관을 역임하다가 1412년(태종12) 5월3일 풍해도, 즉 황해도관찰사(현 
도지사)에 임명되었다. 

1416년(태종16) 9월 예조판서가 됨, 지금의 문교부 장관. 
1417년(태종17) 6월 호조판서가 됨, 지금의 재무부 장관. 
1418년(태종18) 8월 공조판서가 됨, 지금의 상공부 장관. 
1419년(세종1) 4월 이조판서가 됨, 지금의 내무부 장관. 그리고 동년 12월에 
예문관 대제학을 겸했다. 
1421년(세종3) 12월 의정부 찬성사가 됨. 
1427년(세종9) 1월 우의정이 됨. 
1431년(세종13) 태종실록을 편찬함, 그리고 동년 9월 좌의정이 됨. 
1432년(세종14) 1월에 팔도지리지를 완성시킴. 
1435년(세종17) 2월 늙어서 일을 못하겠다고 좌의정을 끝으로 모든 부직을 자진 
사퇴했다. 나이 76세 때. 
1438년(세종20) 10월4일 79세로 하세(下世)하다. 

세종실록 10월4일자에서는 고불의 하세 기사에 그의 경력을 자세히 소개했고 그의 
성격이나 예절 그리고 청렴결백한 거관생활(居官生活)의 모습을 자세히 소개했으나 
지면관계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고불이 우의정 때의 일이다. 고불은 매월 한차례씩 온양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에 
성묘하러 하인 한 사람만 거느리고 검은 소를 타고 서울에서 온양까지 다녔다. 
때는 1431년 5월 늦은 봄, “태종실록”을 완성시키고 서울을 출발하여 온양으로 
향했다. 

印沈淵의 유래에 얽힌 사연 

맹정승이 온양으로 성묘차 내려간다는 것을 알아차린 안성 근처에 있는 
양성(楊珹)현감은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는 길목 한 연못가에 평상을 만들어 놓고 
고불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의 목적은 융숭한 대접을 하여 
승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참 기다리고 있으려니 이웃 진위(振威)현감이 
나타났다. 그도 물론 같은 목적에서 이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 두 현감은 
서먹서먹하게 서 있었으나 곧 같은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친해졌다. 

해가 서산에 걸치도록 지루하게 기다리던 두 현감은 맹정승의 행차가 그날에는 
없다고 판단하고 기생을 불러 미리 차려놓은 술상을 놓고 서로 술잔을 권하다 그만 
춘흥(春興)에 젖어 만취하게 됐다. 

그때 저 멀리 검은소를 탄 초췌한 노인이 어슬렁어슬렁 온양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양성현감과 진위현감은 “저런 고얀 늙은이 같으니, 감히 뉘 앞이라고 
거만하게 소를 타고 본체만체 가는 거냐? 냉큼 가서 저놈을 불러 오너라”하고 
하인배를 보냈다. 그러나 하인만 돌아오고 그 노인은 여전히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아닌가, 두 현감은 하인에게 호령했다. 하인은 그 늙은이가 “온양 사는 맹꼬불이 
제 소 타고 제 길 가는데 누가 오라가라 하느냐”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처음 두 현감은 “맹꼬불? 맹꼬불? 그 이름 한번 괴상하다”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다 눈을 깜박이던 진위현감이 “여보! 양성현감, 온양 가는 맹꼬불이라고 
하인이 분명 말하지 않았오? 맹정승의 호(號)가 고불이 아니오?”하고 말했다. 
그제서야 양성현감도 감이 잡혔다. 혼비백산하여 비틀거리며 급히 일어나던 
양성현감은 그만 허리에 찬 도장(관인)을 연못에 빠뜨리고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그 연못의 이름을 인침연(印沈淵)이라 했다는 것이다. 

맹정승은 사사로운 행차에는 결코 역마(공직자가 출장갈 때 이용하는 말)를 
이용하지 않았고 그 차림도 허름한 촌노(村老)의 행색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오고가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公堂문답 나눈 좌의정 

고불이 좌의정 때의 일이다. 온양에 있는 아버지 묘에 성묘를 마치고 상경하는 
길이었다. 언제나 촌 늙은이 차림이었던 고불은 도중에 소낙비를 만나 제법 고색이 
찬란한 누각(樓閣)에서 쉬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와서 비를 피하던 
한 선비가 있었다. 그 선비는 영남 사람으로 제법 글깨나 읽은 건장한 청년이고 
서울에서 실시하는 녹사시험(錄事試驗·하위직 공무원 채용시험)에 응시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부자집 아들인 듯 차림새도 좋은 옷에 잘 아는 체하며 누각에 써 있는 
시(詩)를 읊으면서 거만을 떠는 것이었다. 그는 옷이 함빡 젖은 노인을 보고 
“노인양반 저 시의 내용을 아십니까, 누가 지었는지 훌륭한 글입니다”하며 그 
글을 번역해 가며 고불에게 알려 주는 것이었다. 이윽고 비는 계속 쏟아져 누각 
건너편에 있는 주막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심심하여 장기를 두었는데 두는 족족 지는 쪽은 젊은이였다. 장기도 
시시했던지 생각해낸 것이 묻고 대답하는 말 끝에 공(公)자와 당(堂)자를 달아서 
주고받기로 하였다. 그래서 고불이 먼저 묻기를 “무엇하러 한성에 가는公”하고 
묻자 “녹사시험 보려고 간堂-”하였다. 
그래서 고불이 “내가 채용해 줄公-”하고 웃으며 말하니 젊은이는 “놀리는 것은 
옳지 않堂”하고 대답했다. 

이렇게 공당문답(公堂問答)을 주고받는 사이 날은 개고 둘은 서울로 와서 길을 
나누었다. 며칠 후 고불이 관아에 앉아 녹사시험 채점 결과에 결재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그때 만났던 젊은이였다. 고불은 그 사람이 
합격한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되었는公?”하고 넌지시 물었다. 그제서야 그 
사람은 고개를 들고 바라보더니 고불인 것을 알고 “죽어 마땅합니堂”하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비 새는 초가살이 즐긴 청백리 

고불이 이 사연을 의정부 회의에서 사담으로 꺼내자 모두 감동하여 웃었고 그 
선비는 녹사가 되었다가 여러 고을 수령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1432년(세종14) 6월20일 고불은 윤회 등과 함께 명저(名著)인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를 끝내고 동북부 국경지대에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육진을 설치하던 때 마침 병조판서 황상(黃象)이 고불의 자택을 찾아왔다. 그 
이유는 좌의정인 고불의 소관인 국방과 외교·행정 중 북진을 설치하는 일에 대한 
일 때문이었다. 육진은 1432년(세종14)중에 끝내기로 계획이 서 있으나 현지 
사정으로 지연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오랜 시간 육진과 기타 병무행정에 관한 일을 상의하던 중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고불의 사택은 정승의 집으로는 보잘것없는 고가(古家)였다. 
사랑채는 빗물이 새어 병조판서가 가지고 온 서류뭉치와 관복은 이미 비에 젖어 
있고 방안 구석구석에는 물이 새 세숫대야 등 온갓 그릇을 놓아야 했다.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삿갓을 쓴 채 앉아 소낙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지금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맹씨 고택은 고려 때의 건축물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지이다. 원래 이 집은 
고려조의 충신인 최영 장군의 집으로 최영 장군의 아버지 최원직이 1330년에 
지었다.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다. 
고불의 생활철학은 청빈낙도(淸貧樂道)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청빈함은 세종 20년 
10월4일자의 실록에 그의 생활태도와 성격이 청렴결백했다는 기록만 봐도 능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병조판서가 고불의 집에 갔다와서는 “정승집이 저렇게 보잘것없고 허술한데 
고루거각 같은 이 집에 내가 어이 부끄러워 살 수 있겠는가”하고 바로 행낭채를 
부숴버렸다는 기록이 “야사총서”(野史叢書)에 나와 있다. 

고불이 보여준 청백리상은 이밖에도 많은 자료로 있으나 지면관계로 세가지의 예에 
그쳤다. 고불이 세상을 떠나던 날 세종대왕은 문무백관에게 휴무를 명하고 
거애(擧哀)하셨다는 기록이 있고 그 시호(諡號)를 내리시되 ‘충신접례왈문, 
청백수절왈정’(忠信接禮曰文, 淸白守節曰貞)이라 했다. 이 시호를 번역하면 
‘충성과 믿음을 예로 삼았으니 문(文)이요, 청렴과 결백함을 절도있게 지켰으니 
정(貞)’이라는 뜻이다. 

고불이 남긴 저서와 작품 

고불의 저서는 주로 관찬(官撰)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공저(共著)로, 나라의 법률 
혹은 종실의 보첩(譜牒), “태종실록” “팔도지리지” “고려사” 등이 있다. 

1)“신찬경제육전”(新撰經濟六典)=1422년(세종4) 8월11일 세종은 법률을 편찬한 
지 오래 돼 시대와 문화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아 “신찬경제육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찬성사(贊成事)이던 맹사성과 참찬(參贊) 허조(許稠)를 제조(提調)로 
하여 책을 편찬하게 했다. 당시 말하는 경제(經濟)란 경세(經世)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찬경제육전”은 지금의 ‘6법전서’를 뜻한다. 완성된 해는 
1425년(세종 7)이다. 

2)“고려사”(高麗史)=1425년(세종7) 12월7일 세종은 맹사성에게 “고려사” 
편찬의 일부를 맡겼다. 고려사는 그 책만 해도 1백39권 1백책으로 60여년이 
걸렸으며 1451년(문종1)에 완성하고 1454년(단종2)에 간행하였는데 고불이 어느 
분야를 맡아 집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3)“태종실록”=원래 이름은 “태종공정대왕실록”(太宗恭定大王實錄)이며 모두 
36권 16책으로 1431년(세종13)에 완성, 36권 끝에 이 실록을 편찬한 관원이 
나오는데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렴 집현전경연사겸판병조사, 
세자전신맹사성, 왕지선진’(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領集賢殿經筵事 兼 
判兵曺事, 世子傅臣孟思誠, 王旨撰進)이라 되어 있고 편찬에 참여한 관원들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4)“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1432년(세종 14) 1월에 완성한 관찬(官纂)으로 되어 
있다. 맹사성·윤회·신색 등이 편찬한 것으로 8권 8책이다. 1400년대에 이 
지리지의 가치는 세계 지리학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다. 

5)“종실보첩”(宗室譜牒)=1432년(세종 14) 11월23일 고불이 좌의정 때 세종은 
좌의정 맹사성, 지신사 안숭선(安崇善)에게 종실의 보첩(족보)을 만들도록 
위임했다는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 보첩이 우리나라 족보 편찬의 효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조 초기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있어 근천정가사(覲天庭歌詞)나 
향가(鄕歌)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대부분 구전전승(口傳傳承)돼 오는 동안 
인멸(湮滅)돼 그 작품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작가의 
인격률(人格律)과 국민에게 충격이 컸고 일반인들에게 널리 애송(愛誦)되어 오는 
것만이 지금까지 전해졌다. 
그런 작품 중 하나가 고불이 76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온양으로 낙향하여 지은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와 한시 ‘연자루(燕子樓)’가 있다. 

江湖四時歌 

강호(江戶)에 봄이 드니 미친 흥(興)이 절로 난다 
탁요계변(濁酉蓼溪邊)에 금린어(錦鱗魚) 
안주(安酒)로다 
이몸이 한가(閒暇) 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草堂)에 일이 없다 
유신(有信)한 강파(江波)는 보내느니 바 이로다 
이 몸이 서늘 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쩌있다 
소정(小艇)에 그물치고 흘리 워 더뎌두고 
이몸이 소일(消日) 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겨월이 드니 눈기피가 자가남다 
삿갓 빗기쓰고 누역(縷繹)으로 옷을 삼고 
이몸이 춥지안함도 역군은이샷다 


燕子樓 

駕洛遺墟幾見春 
首露文物亦隨塵 

可憐燕子如懷古 
來傍高樓喚主人 

가락나라 옛 터전에 몇번이나 봄이 오갔을까 
수로왕이 세운 문물 티끌 따라 없어졌네 

가련한 제비만이 옛정을 못잊는 듯 
누각에 찾아와 주인을 부르는구나 
<“한국역대명시전서”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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