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일 목요일 오전 09시 34분 15초
제 목(Title): 신동/정의로운 현대판선비열전


    
 
'정의의 왕따' 내부 고발자 列傳

'조직의 소금'된 돈키호테들

철없고 눈치없는 사람들이 있다. 배알이 좀 꼴려도 적당히 모른 척하면 될 것을, 
기어이 "이건 아니다"며 분연히 나섰다가 핍박 속에 살아간다. 조직의 비리와 
잘못된 관행, 집단 이기주의와 낡은 전통을 뿌리 뽑으려 필마단기로 맞서 싸운 
용감한 '왕따'들
이수형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
-

    

현준희·전 감사원 주사
"감사 중단 외압 있었다" 양심 선언 


    '고 발은 짧고 고통은 길다.’

현준희씨(玄俊熙·46)가 보낸 지난 3년은 우리 사회의 내부 비리 고발자가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신산한 삶의 전형이었다.

96년 4월, 당시 감사원 4국의 주사였던 현씨는 ‘양심선언’을 자청, “효산그룹의 
콘도사업 부당특혜사건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상급자의 지시로 중단됐다”고 
폭로했다. 이 사건 감사에 참여했던 현씨는 효산이 수도권정비심의위를 거치지 
않고 경기도 행정심판위의 결정으로 사업허가를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그 결과 
효산은 지가 상승과 부대시설 사업수익으로 수백억원대의 부당이득을 얻게 됐다는 
것.

이에 따라 현씨는 관련 공무원들에 대한 징계 방침을 확정하고, 이들의 예금계좌와 
외압 여부 등을 추적하려던 단계에서 갑자기 사건을 5국으로 이송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감사가 진행중인 사안을 다른 국으로, 그것도 직무감찰을 주로 하는 
5국으로 넘기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결국 이 사건은 이 국 저 국을 떠돌다 
가치 없는 ‘참고정보’로 분류되면서 감사가 중단됐다. 

현씨는 “익명의 제보자를 비롯해 감사과정에 접촉한 이들 대부분이 ‘고위층’의 
외압 사실을 시인했다”며 여러 차례에 걸쳐 감사 중단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건의서를 올렸다. 더욱이 효산이 콘도사업 승인을 신청한 시점은 효산의 
장장손회장이 장학로 전 청와대 부속실장에게 뇌물을 준 것으로 밝혀진 시기와 
일치해 의혹을 더했다.

그러나 현씨의 요구는 번번이 묵살됐다. 몇 차례나 결재판을 들고 국장실을 
들락거렸지만, 6급 주사가 소신을 펼 수 있는 여지는 너무도 좁았다. 돌아온 것은 
뜨악한 시선들과 노골적인 따돌림뿐. ‘하극상’이니 뭐니 하는 말까지 나돌았다.

결국 양심선언이라는 마지막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보도자료를 만든 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도움을 청했다. 그는 양심선언 직후 
국가공무원법의 성실의무와 복종 의무 등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파면됐고, 급기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현씨는 “나를 양심선언으로 몰아간 것은 정의감도 영웅심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두려움’이었다.

“비자금사건이라면 경리장부를 찢어버리면 비리 흔적도 감쪽같이 사라지겠죠. 
하지만 이건 얘기가 달라요. 눈앞에서 건물이 올라가는 것 아닙니까. 언젠가는 
전말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이걸 못 막으면 내가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
-

철저히 잊혀진 '제2의 이문옥'

-------------------------------------------------------------------------------
-

파면당했기 때문에 퇴직금은 절반만 나왔다. 몇푼 안되는 퇴직금을 생활비로 
까먹으면서 재판에 매달렸다. 모아둔 돈도 없어 생계는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다단계판매, 휴대폰 영업사원, 학습지 방문판매 등을 전전했지만 전셋집을 
세 차례나 줄여 옮겨야 했다. 요즘도 가족들 얼굴 대하기가 민망해 친구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날이 많다. 영락없는 ‘홈리스’ 신세다.

97년 11월에야 무죄선고를 받았지만, 아직 2심이 진행중이다. 3심까지 가려면 
6년이 걸리니 이제 겨우 절반을 치러낸 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소송비용을 대신 부담해주고 있지만, 재판이 자꾸만 길어져 미안할 따름이다. 
민사소송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사건을 덮은 감사원 간부들은 재판이 6년을 끄는 동안 편하게 밥 먹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쯤이면 퇴직금 고스란히 챙겨서 감사원을 떠났겠죠. 나중에 
자기들 잘못이 드러나도 ‘미안하다’ 한 마디면 그만 아닙니까. 재판을 자기 
돈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루 벌이를 포기하고 막막한 심정으로 법원에 
가면 감사원 사람들은 번갈아 출장비 받아 들고 나와 하루 근무를 대신하고 
가더군요.”

그의 양심선언 후 효산사건은 재조사에 들어갔고 건설공사도 취소됐지만, 정치권의 
외압 등 현씨가 제기한 핵심적인 의혹부분에 대한 조사는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그 후 제일은행이 효산에 특혜대출을 해준 사실과 효산이 스키리조트 
회원권 사기분양사건을 무마해 달라며 경찰관에게 뇌물을 준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효산의 장회장은 그룹소유 호텔 재건축 과정에 시의원들에게 억대의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되는 등 효산의 비리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해도 ‘리틀 한보’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현씨가 주장한 내용에 무게가 실리는 대목이다.

현씨가 양심선언을 한 날이 15대 총선 사흘 전이었기 때문에 당시 야당이던 
국민회의는 며칠 동안 그를 원군(援軍) 삼아 ‘융단폭격’을 했다. ‘제2의 
이문옥’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야당이 여당이 된 오늘, 정치권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짝했던 언론의 관심도 선거 보도에 묻혀갔다. 현씨는 현직 공무원인 제보자를 
보호하기 위해 언론의 끈덕진 요구에도 끝내 그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때문에 
더 이상 폭로할 거리가 없다고 판단한 언론은 이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며칠도 
지나지 않아 그는 이렇듯 철저하게 잊혀져 갔다.

“15대 총선을 앞두고 한 시민단체가 후보자들에게 내부 고발자 보호법 입법에 
대한 찬반의사를 물었더니 다들 찬성한다고 답했더군요. 그랬던 사람들이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정치인들은 자기 발목 잡힐까봐서도 절대 자발적으로는 그런 법 
만들지 않습니다. 이런 분위기다보니 내부 고발자를 배신자로 여기는 ‘깡패의 
의리’가 공직사회에 팽배해 있어요. 이젠 시민들이 나서야 합니다. 이 법이 
만들어지면 세금을 가장 적게 들이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공직자 비리를 막을 수 
있어요….”


    

박대기·전 국방부 조달본부 구매담당관
무기부품 '바가지' 구매실태 폭로 


    국 방부 조달본부에서 군무원으로 13년간 내자구매 업무를 맡아오던 
박대기씨(朴大基·51)는 지난 93년, 외국에서 무기부품을 구매하는 외자구매 
파트로 발령받았다. 외자구매 형태는 단순했다. 공개입찰에서 최저가를 써낸 부품 
중개상과 구매계약을 체결하면 그만이었다. 처음에는 관행대로 일을 처리했지만, 
차츰 의문이 생겼다. 중개상을 통하지 않고 내자구매의 경우처럼 생산자로부터 
직접 부품을 구입한다면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형편을 알아보니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자구매 파트에서는 국내 
업체들의 가격정보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알뜰한 직구매가 가능하지만, 
외자구매는 그렇지가 못했다. 비교해볼 만한 가격정보가 거의 없었다. 조달본부의 
몇 안되는 전문인력이 4300여개의 외국 업체가 생산하는 수십만 종의 부품 
가격정보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 시험 삼아 박씨는 95년에 
자신이 구매를 맡았던 300여 개 부품의 제작회사와 일일이 접촉해 실제 판매가를 
조사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심한 경우는 수십 배에서 수백 배까지 가격차이가 납디다. 개당 75센트짜리 
부품의 최저 입찰가가 315달러인가 하면, 176달러짜리는 3250달러, 525달러짜리는 
7800달러짜리로 둔갑했더군요. 중개상들이 가격정보에 어두운 국방부를 갖고 논 
거예요.”

그는 이미 낙찰통보를 받은 중개상들에게 낙찰가를 생산자 가격에 적정 이윤을 
보탠 수준으로 낮춰달라고 요구했다. 중개상들이 이를 거절해 그는 낙찰무효를 
선언하고 생산자와 직접 계약을 맺었다. 그 결과 전체 부품가의 28%인 300만달러를 
절약할 수 있었다.

“수백만달러씩 하는 덩치 큰 무기나 어거지로 몇백달러 깎으려 들었지, 그깟 
‘몇푼’ 안 되는 부속품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을 안 썼어요. 부품구매 분야는 
지난 20년동안 감사다운 감사를 받아본 적도 없었습니다. 생산자인 대형 
군수업체들도 박한 이윤 보자고 번거로운 입찰경쟁에 끼여들기를 마뜩찮아 했으니 
중개상들이 활개를 쳤던 거죠.”

대개 2개 중개상이 국내외에서 팀을 이루는데, 국내 중개상은 조달본부와 
거래하고, 해외 중개상은 생산자나 잉여 군수물자 창고에서 부품을 조달했다. 
조달본부는 이들에게 2중의 마진을 떼준 셈이었다. 박씨는 부품구매에 관한 한 
생산자를 배제한 최저가 입찰제는 의미가 없다고 보고 95년 11월, 직구매 방식을 
가미한 ‘최저가 입찰제 개선안’을 상관에게 제출했다. 동료 구매관들에게 회람도 
돌렸다.



-------------------------------------------------------------------------------
-

부품구매 '감시의 눈' 밝힌 계기

-------------------------------------------------------------------------------
-

반응은 기대와는 딴 판이었다.

“한 마디로 ‘멋모르고 날뛰지 마라’는 겁니다. ‘최저가 입찰제에 손대는 것은 
경쟁질서 위반이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까놓고 ‘동료들 줄줄이 목 날아가는 
꼴 보고 싶으냐’며 반발하기도 했어요. ‘옛날 잘못을 캐자는 게 아니라, 앞으로 
잘해보자는 것 아니냐’고 매달려도 봤지만 우군은 없었어요.”

뒤이어 그는 부품구매와 관련된 43만달러의 초과 지출 사례를 적발, 해당 
중개상으로부터 돈을 환수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환수할 겨를도 없이 그는 
비(非)구매 부서로 인사조치되고 만다. 

96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제안서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방으로 자신의 
뜻을 들어줄 수 있는 곳을 물색하던 그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96년 12월 청와대 민정비서실에 민원을 낸 것이다. 하지만 민정수석실은 그의 
건의를 국방부로 내려 보냈고, 국방부는 다시 조달본부로 이첩했다. 청와대로 낸 
민원에 대한 회신을 자신이 소속된 부서로부터 받게 된 것. 그의 행위는 ‘조직과 
동료를 팔아 보상이나 받아보겠다는 짓’쯤으로 매도됐다.

97년에는 보직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마지막에는 행정과 도서실 사서업무를 
맡겼다. ‘딱지’가 붙은 이상 어느 부서에 가더라도 더는 버텨내기 힘들겠다 
싶었다. 지난해 9월, 그의 명예퇴직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20년 몸 담았던 조달본부를 떠난 그는 옛 경험을 바탕으로 정부와 기업의 구매제도 
개선안을 제안한 책(가제·‘IMF 위기 극복을 위한 구매전략’)을 쓰고 있다.

혼자 힘으로 방대한 조사작업을 벌였기 때문에 박씨가 주장한 내용에는 약간의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입찰가가 실제 판매가의 수십∼수백 배에 
이른다고 주장한 몇몇 항공기 부품의 경우 국방부 자체감사 결과 가격차이가 
3∼11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중개상이 제시한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 제작사와 직접 구매계약을 했다는 게 조달본부의 반박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외로운 싸움’이 빛을 잃는 것은 아니다. 그의 외침이 
있었기에 연 3억달러에 이르는 무기부품 구매과정에 비로소 감시의 눈길이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3월 감사원은 국방부 조달본부가 65센트짜리 헬기 수리용 나사를 2300배가 
넘는 1500달러에 수입한 사실을 밝혀냈다. 지난 3월 국방부는 K1전차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하면서 최고 6배까지 비싸게 구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자체감사에 들어갔다.

또한 올해 초 국방부 조달본부는 가격정보에 어두워 바가지를 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가격정보 수집을 전담하는 조달정보과를 신설했다. 아울러 국제법률 
국제무역 외환관리 분야의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김용익·서울대 의대 교수
'의료개혁' 大義위해 의료계 치부 고백 


    "병 원에서 약을 구입하는 과정에는 임상연구비, 기부금, 장학금, 학회 참가 
보조금 등 다양한 형태의 비밀스러운 거래들이 오고 갑니다. 어떤 약이 병원에 
새로 들어가려면 ‘랜딩비’라는 채택료가 주어지고, 그 후에도 ‘리베이트’라 
불리는 상납이 계속됩니다. 의사들은 약을 선택할 때 의학적으로 가장 적합한 약을 
고르는 게 아니라 이윤이 제일 많은 약을 고릅니다. 대학병원들이 1차 항생제 대신 
3차 항생제부터 쓰는 일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의사들은 20대 때부터 이 
‘병균’에 노출되어, 30대 중반이 되면 이를 병원 경영의 필수불가결한 요령으로 
보는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병원의 횡포에 분통이 터진 제약회사 영업사원의 고발이 아니다. 의사, 그것도 
국립 대학병원의 현직교수가 실명을 내걸고 쓴 글이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김용익 (金容益·47)교수가 그 주인공. 지난해 11월 김교수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의 소식지 ‘개혁통신’에 이 
글을 싣고 의료보험 약가(藥價) 비리의 사례를 조목조목 나열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애써 가르친 제자들이 도둑질하는 의사가 되는 것을 더 보고 있을 수 
없다”며 “의약품 비리가 일어나는 ‘샘물’을 말려달라”고 당부했다.

이 글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띄워지고, 한 신문이 이를 인용 보도하면서 
‘의도(醫盜)’라고 표현하자 의료계에 한 바탕 파란이 일었다. ‘너만 깨끗하냐’ 
‘고자질이 교수가 할 처신이냐’ ‘양심선언이 아닌 야심선언’ ‘돈 못버는 
기초의학 교수의 콤플렉스’…. 의사협회 통신망 등을 통해 원색적인 비난들이 
쏟아졌다. 의사협회는 학교측에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같은 대학 
동료교수들의 시선도 고울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의도했던 바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의보 약가 개혁의 필요성과 
의약분업의 방향 등을 설명하는 50여쪽 분량의 책자 500부를 만들어 의대 
교수들에게 보내고 통신망에도 올렸다. 워낙 꼼꼼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명확하게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비난의 목소리는 차츰 잦아들었다. 은사와 선후배들로부터 
격려주도 꽤나 얻어 마셨다.

“의약분업이 제대로 되려면 의료보험이 바로 서야 합니다. 의료보험이 
모순덩어리기 때문에 도무지 진전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의료보험이 자리를 
잡지 못하는 걸까… 여러 모로 원인을 분석하다 보니 결국 약가 문제로 돌아오게 
되더군요. 의료인들에 대한 불신의 매듭을 푸는 길도 여기에 있다고 봤습니다.”

자료를 모으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등에 몸 담고 있는 의식있는 의·약사들에게 협조를 부탁했지만, 기꺼이 
자신의 치부를 공개하겠다는 이는 드물었다. 간곡한 호소를 거듭한 끝에 
20여명으로부터 귀중한 ‘양심선언’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의사와 약사가 모두 
의약분업을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까닭은 제약회사가 병·의원과 
약국에 떼주는 엄청난 약가 마진에 있음이 드러났다. 이는 개인의 도덕성 
차원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제도에 책임을 물어야 될 사안이었다.

“그러고도 제약회사가 망하지 않는 것은 의료보험 약가가 실거래 가격보다 두세 
배쯤, 심지어 아홉 배나 높기 때문이었어요. 의보 약가는 제약회사들이 제출한 
원가계산 자료를 바탕으로 의료보험 약가심의위원회가 결정하는데, 그 
원가자료라는 게 실제보다 몇배씩 부풀려져 있었어요. 더 놀라운 것은 
약가심의위가 보건복지부나 의료보험공단이 아니라 대한제약협회 산하에 설치돼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복지부의 의보 약가 담당직원은 아예 제약협회에서 
근무하고 있더군요.”



-------------------------------------------------------------------------------
-

의료개혁 향후 1년이 고비

-------------------------------------------------------------------------------
-

문제 제기 방법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공연히 시끄럽게 했다가 결국 의사들만 
피해를 보고 끝나는 게 아닌가, 개인적인 야심이나 공명심에서 일을 저지른 것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보 약가처럼 이해관계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론의 힘을 업고 정면승부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제약업계는 정계 재계 언론계에 많은 연줄을 갖고 있습니다. 병·의원과 약국도 
변화하려면 비용을 치러야 하므로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려다간 되레 역공당하기 십상이에요. 장관도 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마당에 
담당 공무원을 만나 얘기해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나오겠습니까. 유일한 방법은 
강력한 여론을 형성하는 것, 요즘 많이 쓰는 말로 ‘담론’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담론 형성’의 효과는 기대 이상으로 빨리 나타났다. 복지부는 그의 제안을 
수용, 12월부터 의보 약가 실사에 들어간 끝에 지난 2월, 전체 의보 약가를 평균 
30.7% 인하했다. 현재 낮춘 약가를 의보수가에 반영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제약협회에 위임됐던 의료보험 약가심의위도 복지부 산하로 들어왔다. 6월말까지 
수가 정상화가 이뤄지면 의약분업 문제도 새로운 전기를 맞을 전망이다.

의약분업의 정착과 그에 따른 의료전달체계의 확립은 김교수가 구상하고 있는 
‘의료개혁 시나리오’의 대미. 그는 지난 5월 의약분업 합의안이 타결될 때까지 
‘의약분업 실현을 위한 시민대책위’ 자문위원으로 협상을 주도했다. 대학병원 
의사라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의약분업 대상에 대학병원까지 포함시켜 또 
한번 ‘왕따’가 됐지만, “전문인들의 이해관계가 국민의 이해관계와 배치되면 안 
된다”는 그의 고집을 누구도 꺾지 못했다.

“일이라는 게 ‘때’가 있어요. 이런 일은 ‘모멘텀‘(momentum)이 있을 때 
해치우지 않으면 영원히 못해요. 앞으로 6개월에서 1년 남짓한 기간이 우리나라 
의료개혁을 위해 가장 중요한 모멘텀입니다. 이럴 때 누군가가 욕 먹을 각오하고 
뛰어다녀야 해요.”


    

황하일·전 서울 지방철도청 검수원
'달리는 흉기'에 제동건 양심 레일맨 


    황 하일씨(黃夏日·35)는 요즘도 매일 아침 9시 서울역 광장으로 정시 
‘출근’한다.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 햇볕 아래서 정오까지 농성을 벌이다 
철도노조 사무실로 발길을 옮긴다.

서울지방철도청 소속 서울동차사무소 검수원으로 열차 정비업무를 담당했던 황씨는 
지난 4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파면됐다. 언론이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철도청의 
위험천만한 열차 운행실태를 잇따라 보도한 뒤였다. 언론 보도는 그가 한 
시민단체에 제보한 내용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파면조치는 그의 
‘해사(害社)행위’에 대한 ‘조직의 쓴맛’이었다.

95년부터 ‘열차 아래의 삶’을 시작한 황씨는 철도 현장의 고질화한 안전불감증에 
기가 막혔다. 그때 그때 땜질하고 이어붙이고 두드려 맞춘 ‘바퀴 달린 흉기’들이 
쉴 새 없이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보수품 유용 문제가 심각했다.

보수품 유용이란 당장 출발할 열차의 부품에 결함이 있을 때 급한 대로 대기중인 
다른 열차의 부품을 떼다 붙이는 것. 소모품과 예비 부품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이처럼 임시방편으로 열차를 운행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 경우 부품의 수명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정비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부품이 이 열차 저 열차의 
기계적 환경에 길들어 있지 않아 사고 위험이 높아진다. 특히 새마을호 열차의 
보수품 유용은 수십년 동안 계속돼온 관행이었다. 심지어 바꿔 끼울 부품을 열차 
출발시각까지 구하지 못해 고장난 부품을 그대로 단 채 운행하기도 했다.

“검수원들끼리 ‘열차가 굴러가는 게 용하다’며 한숨을 내쉰 적이 많아요. 
섬뜩한 일이지요. 노조 활동을 하면서 노사협의회 때마다 이 문제를 꺼냈습니다. 
책임소재를 확실히 하기 위해 노조 대의원들과 수시로 보수품 점검을 하고, 
보수품과 관련된 예산을 공개하라고 요구했지요. 사측도 얼굴을 맞댄 자리에서는 
그러마고 했지만, 말뿐이었어요.”

지난해 국정감사 때 철도청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1월부터 8월까지 8개월 동안 
서울동차 사무소의 보수품 유용건수는 12건뿐. 그러나 황씨가 조사해보니 12월 한 
달 동안 현장 관리자들이 스스로 장부에 기재한 건수만도 35건에 달했다. 실제 
유용건수는 장부상의 수치보다도 두 배 이상 많다는 것. 더욱이 철도청이 96∼98년 
사이에 1000억원을 들여 도입한 도시 통근형 동차는, 새 차인데도 사무소 기술과 
문서에 기록된 불량건수만 한 해 500여건이 넘는 ‘고물 열차’로 드러나 그 도입 
경위에 대한 의혹도 제기했다.

황씨는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열차 바퀴가 과열돼 불이 붙는 ‘축상 발열’ 
사고가 새마을호 열차에서만 18건이나 발생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는 기차 
바퀴를 구성하는 차축 베어링에 유막이 형성되지 않거나 구조적인 결함 때문에 
차축이 과열되는 현상으로, 심하면 차축이 비틀리거나 부러져 탈선 등 대형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비상 상황.

노조에서 조사한 결과 원인은 불량 윤활유에 있었다. 윤활유 품질이 떨어져 바퀴와 
차축의 마찰열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렸던 것. 사측의 조사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문제의 윤활유는 전국의 지방철도청으로 납품되는 제품이었다. 비슷한 사고가 전국 
어느 철로 위의 열차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황씨는 전국 철도검수원 
모임에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고 실태보고서를 작성했다. 지난해 12월, 이 
보고서가 시민단체인 도시연대에 전달됐다.



-------------------------------------------------------------------------------
-

"기차표 팔았으니 운행 중단 못한다"

-------------------------------------------------------------------------------
-

“검수원들이 축상 발열의 위험성을 미리 감지해 열차 운행을 중단해야 한다고 
건의하면 간부들은 ‘이미 승차권을 팔았으니 그럴 수 없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승객이 줄어든다’고 영업논리만 앞세우며 운행을 강행했습니다. 이게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 공공기관 간부의 입에서 나올 소리입니까? 노보를 통해 여러 
차례 안전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지만 소용 없었어요. 더 이상 내부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언론 보도가 나간 직후 철도청 본청에서 직접 서울동차사무소에 대한 
특별복무감사에 착수했다. 감사팀은 황씨를 비롯한 노조 임원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그를 포함한 3명이 파면되고, 2명에게는 감봉 3개월과 지방전출 조치가 
내려졌다. 징계사유는 ‘근무기강 문란’. 상사에게 집단적으로 면박을 주는 등 
위계질서를 무너뜨렸고, 상사에게 인격모독성 발언을 했으며, 허위로 병가(病暇)를 
냈다는 등의 이유였다.

“소가 웃을 얘깁니다. 감사 과정이 언론 보도 경위에 대한 추궁으로 일관했어요. 
‘누가 기자를 불렀나’ ‘누가 자료를 전달했나’ ‘아무개 기자와는 어떤 
이야기를 했나’ ‘언론 기관과 인터뷰를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건 누가 봐도 언론 보도에 대한 보복성 징계입니다. 설사 
감사팀이 지적한 근무기강 문란행위가 사실이라 해도 그게 어디 파면 처분까지 
받을 잘못인가요?”

황씨는 노동부에 부당징계 구제신청을 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지루한 소송에 
매달리게 되겠지만, 그는 ‘승리’를 낙관한다.

“임금 몇푼 올려달라고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승객의 안전과 국민의 알 권리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입니다.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이니까 승리를 확신하는 겁니다.”


    

이용호·전 전북도 교육공무원
몸으로 겪은 교육계 비리 책으로 펴내 


    "학 교에서 물품을 구입하거나 공사를 하면 10%의 커미션을 받는다. 이렇게 
마련된 돈은 장학사나 교육청 간부들에게 ‘봉투’로 건네진다. 그 입출내역은 
교장과 서무과장밖에 모른다. 교장이나 서무과장이 학교를 떠날 때는 잔액을 두 
사람이 나누고 비자금 장부를 소각한다.”

“교육청 서무계는 인사청탁금으로, 관리계는 예산배정 과정에, 경리계는 물품 및 
공사계약 때, 감사계는 하급기관 감사 때 돈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한다.”

지난해 2월 출간된 교육계 비리 고발서 ‘너는 그렇게, 나는 이렇게 부정부패의 
장본인이었다’에 실린 내용의 일부다. 책을 쓴 이는 87년부터 전북도 교육청과 이 
지역 7개 학교에서 교육공무원으로 근무한 이용호씨(李庸浩·40). “현장에서 내 
힘으로 바로잡기에는 부패의 고리가 너무 견고했다”는 게 책을 펴낸 까닭이다. 
쓰기 시작한 지 다섯 달 만에 나온 책이지만, 10년 세월에 삭인 분노와 회한, 
좌절감과 허탈감이 곳곳에 녹아들었다.

그는 신참 때부터 ‘고집불통’으로 통했다. 학원설립 허가업무를 담당하는 교육청 
사회교육계에서 공무원 노릇을 시작했는데, 허구한 날 민원인이 보는 앞에서 
머리가 허연 상급자와 삿대질을 해댔다.

“민원인이 들고 온 신청서를 읽어보면 분명히 문제가 없는데도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서 허가를 안 내주는 겁니다. 공무원이 규정을 객관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멋대로 유권해석하기 시작하면 세상에 되는 일이 있겠어요? 하긴, 쉽게 허가를 
내주면 ‘봉투’가 얇아질 테니….”

반대로 규정에 어긋난다고 확신하면 누구 뭐래도 기안서를 쓰지 않고 버텼다. 
상급자는 “당신과 같이 일 못하겠으니 인사과에 가서 얘기하라”고 쏘아붙였다. 
간부들이 내놓고 따돌리니 교육청 안에 그를 받아주겠다는 부서가 있을 리 없었다. 
그 후로는 일선 학교로만 떠돌았다.

학교 서무과장 일을 보면서 학교도 비자금을 운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엔 
그저 불가피한 관행이려니 생각했다. 교장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마음은 편했다. 
더러는 ‘떡고물’도 떨어졌다. 그러나 돌아가는 사정을 좀 알게 되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교사가 몇만원짜리 수업교재 사달라고 하면 예산이 없다고 잡아떼면서, 뒤로 
챙긴 비자금으로 장학사에게 술 사주고 봉투 찔러주다니요…. 교장이 개인적으로 
가져다 쓰는 돈도 적지 않아요.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집에 있던 낡은 소파를 가져와 교장실 소파와 바꿔놓고는 소파 바꿀 돈을 
내놓으라는 교장도 있었다. “비자금은 만들더라도 교장이 개인적으로 쓰는 것은 
안 된다”고 맞섰다. 갈수록 교장과 부딪치는 일이 잦아졌다. 교육청에 찾아가 
교장의 비리를 털어놓기도 했지만, “웬만하면 둥글둥글하게 살라”는 면박만 
당하고 왔다.

바깥 세상에 낱낱이 알리기로 했다. 자신의 비리라고 덮어둘 수는 없었다. 
학원설립을 허가해준 사례로 봉투를 받고, 학교 비자금으로 중국 여행을 다녀왔던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도 숨김없이 털어놨다. 나는 잘했고 너만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책 제목 그대로 모두 다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이젠 이런 짓 그만두자는 
호소를 담으려 했다.



-------------------------------------------------------------------------------
-

'요주의 인물' 낙인, 취업도 안돼

-------------------------------------------------------------------------------
-

원고를 들고 전북지역 출판사를 찾아 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이런 책 찍었다가 
교육청에 밉보이면 도내 관청들이 맡기는 일감이 죄다 끊긴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렵사리 마련한 출판비 400만원을 들고 광주까지 나가서야 책을 낼 수 있었다.

교육청이 발칵 뒤집혔다. 지역 언론이 떠들썩해지자 부랴부랴 감사팀을 조직해 
그가 근무했던 학교들로 내려보냈다. 그도 교육위원회의 호출을 받았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교육위원이란 사람이 대뜸 “당신 동생은 교사고, 형은 공무원이지?” 
했다. 그들이 내가 책을 낸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입 잘못 놀리면 네 
가족이 다친다’는 협박으로 들렸다.

6월17일, 전북도 교육청 징계위원회는 그의 해임을 결정했다. 사유는 학교 예산 
횡령과 부당 집행. 비자금을 확보하느라 학습기자재 구입비를 중복 계상했던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교장이 보는 앞에서 비자금 장부를 
태워 없앴기 때문에 그 속사정을 입증해줄 ‘물증’도 없었다. 그의 책을 통해 
비리가 드러난 교장은 정직 3개월의 경징계를 받는 데 그쳤다.

“곧바로 교육청에 소청심사를 요구했죠. 소청심사위원회에 들어갔더니 소청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취조를 하더군요. ‘그랬어, 안그랬어?’ 하면서 반말은 
예사고…. ‘이런 분위기에 서는 공정한 심사가 이뤄질 수 없다’며 도중에 
뛰쳐나왔죠.”

소청이 기각된 후 법원에 파면처분무효소송을 냈다.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이 못돼 
직접 소장을 쓰고 법원을 들락거리지만 판사로부터 ‘서류가 미비하다’고 핀잔을 
듣기 일쑤다. 퇴직금은 보증 잘못 섰다가 남의 빚 갚느라 다 날렸다. 재판에 지면 
당장 파산신청을 할 판이다. 생계는 동생이 매달 조금씩 보내주는 생활비에 
기댄다. 직장을 구해볼 요량으로 인력은행도 기웃거렸고 주변에 부탁도 해봤지만, 
이미 그는 이 지역에서 ‘요주의 인물’이 돼 있었다.

이씨가 ‘모든 것을 잃었다’며 허탈해 하는 것은 비단 이런 현실 때문만이 아니다.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로부터 단 한 통의 위로전화도 받지 못했습니다. 직장에 
있을 때는 자기들 어려운 일 발벗고 나서 도와준다고 해서 ‘해결사’라는 
별명까지 붙여주더니…. 하기야 내 피붙이들까지 저러고들 있는데, 새삼 세상 인심 
탓할 수야 없겠죠.”

교사인 동생은 그가 책을 낼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애원하다시피 만류했다. 
그러던 동생은 책이 나온 후 그와 연락을 끊었다. 기업체에 다니는 다른 동생도 이 
책의 필자가 자신의 형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직장에서 행여 형 같은 내부 
고발자로 비칠까봐서다.

“내가 아무 가치 없는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맨앞에 나서지 않겠습니다. 왜 그토록 세상을 어렵게만 살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이젠 다 잊고 싶습니다. 이러는 내가 비굴해 보입니까?”


    

김민수·전 서울대 미대 교수
비판 용납않은 오만한 대학에 선전포고 


    "서 울대 미대는 가부장적 권위에 길든 가신적 모범생들의 공동체입니다. 
진보나 변화라는 이름의, 소수자들의 철학은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예술보다는 
‘인간성’이 중요하고, 이론보다는 실기가, 살부(殺父)의 신화보다는 사부님의 
기침소리를 헤아려 듣는 도제의 밝은 귀가 조신하게 모럴로 살아 있는 
학교이지요….”

지난 6월4일 서울대에서 열린 ‘김민수교수 복직과 학문의 자유를 위한 공청회’에 
참석한 서울대 미대 출신의 한 대학교수는 혹독한 서울대 미대 비판으로 화두를 
열었다.

김민수(金珉秀·38) ‘전(前)’ 서울대 미대 교수는 지난해 여름 대학당국의 
재임용심사에서 탈락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객관적인 미술비평에 힘을 
쏟느라 ‘인간적인 의리’를 챙기는 데 소홀했고, 이론분야에서 드물게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사부님들이 연신 ‘헛기침’을 해대도 들은 척하지 않았다.

김교수는 재임용심사에서 요구하는 연구실적물 수보다 4배나 많은 8편의 논문과 
저서를 냈지만 ‘연구실적 평가미달’이라는 이유로 탈락했다. 그는 함께 심사받은 
42명의 교수 가운데 유일한 탈락자였고, 연구실적물 요구량을 다 채우고도 탈락한 
것은 서울대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교수가 우선 심사대상으로 제출한 실적물은 저서 ‘21세기 디자인 문화탐사’와 
연구논문 ‘시각예술의 측면에서 본 이상(李箱) 시의 혁명성’. 전자는 97년 
‘올해의 디자인상’ 수상작으로 일부 대학의 디자인 관련학과에서 교재로 채택될 
만큼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후자 역시 김교수가 서울대 총장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자 20여명의 교수들이 이 논문의 우수성에 대한 학술소견서를 
법원에 제출했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서울대 미학과의 한 교수는 소견서에서 “이 논문은 김교수가 디자인 분야뿐 
아니라 폭넓은 철학적·미학적 이론을 소화했음을 보여준다”며 “이 논문이 
디자인 분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락했다면 심사위원들이 논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 선입관으로 심사했거나 무식의 소치로밖에 판단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김교수가 탈락한 것은 학문외적인 요인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가 ‘터부’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96년 10월 김교수는 한 학술심포지엄에 발표한 논문에서, 장발 노수현 등 서울대 
미대 초기의 일부 교수들이 친일행각을 벌였다는 다른 대학 교수의 연구결과를 
각주에 인용했다. 이 연구결과는 이미 책으로 출간돼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이들의 친일활동은 당시의 신문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또한 이 논문에는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K교수의 디자인 경향에 대한 비평도 
들어 있었다. ‘그의 스타일은 이미지가 지녀야 할 내적 정감과 심리적 미묘함을 
말살하고 피상적인 형식의 단순화된 선적 구성력을 강화시켰다’는 평가였다. 당시 
미대에서는 장발교수의 흉상 설치가 논의되던 중이었고, K교수는 그때껏 
명예교수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이다.



-------------------------------------------------------------------------------
-

임용 탈락 후 '무허가 강의' 계속

-------------------------------------------------------------------------------
-

“뒤늦게 교수 간담회에 나와 해명을 하래서 갔더니 ‘왜 다른 대학의 교수가 쓴 
검증 안 된 논문을 인용했느냐’며 문제된 부분을 삭제하라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서울대 교훈은,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게 학문하는 길이라는 뜻 아니냐’고 
맞받았습니다. 디자인사 담당교수라면 엄정한 사관(史官)의 역할을 다해야 하고, 
제대로 평론활동을 하겠다면서 공치사나 남발하는 ‘대감댁 식객’ 노릇을 할 수는 
없죠.”

김교수가 문제된 부분의 삭제를 거부하자 미대 학술지는 그의 논문을 게재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가 심포지엄에 참석했다는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는 
“선배 교수들에 대한 학문적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권위적인 위계 질서, 비(非) 
서울대 교수들의 견해를 무조건 폄하는 오만한 엘리트주의가 학문의 자유와 예술적 
창의성을 질식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교수는 재임용심사에서 탈락한 후에도 ‘무허가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그가 
96년부터 가르쳐온 ‘디자인과 생활’은 매 학기 4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몰려들던 
인기강좌였다. 재임용 탈락과 함께 강의는 폐강됐지만, 총학생회가 수업을 
계속해달라고 요청하며 수강생들을 끌어모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출석체크도 없고 
학점도 안 주는 강의지만, ‘단골 학생’들이 꾸역꾸역 몰려든다. 

지난 5월17일에는 서울대 교수들로 구성된 ‘김민수교수 복직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돼 눈길을 끌었다. 각 단과대학을 망라한 30여명의 교수들이 
공동대표와 추진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두각을 나타내는 인재를 키워주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제거하고 멀리하려는 우리 학계의 부끄러운 타성을 이번 기회에 
근절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미대 교수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이제 내 문제는 개인적인, 혹은 미대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쳤다고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어요. 내가 포기하면 내 후배들도 똑같은 꼴을 당할 
테니까…. 끝까지 싸울 겁니다.”

 
 
    
 

-------------------------------------------------------------------------------
-

Copyright(c) 1999  All rights Reserved.
E-mail: newsroom@donga.com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