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15일 화요일 오전 01시 21분 22초 제 목(Title): 퍼온글/홍세화의 고국나들이 70년대 후반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에서 방랑생활을 하던 자신의 인생을 그린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52)씨가 새 저서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신문사 펴냄)의 출판을 계기로 20년만에 6월14일 3주 일정으로 부인 박일선씨와 함께 서울에 왔다. 귀국 환영사| 귀국 일정| 귀국 추진위원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중·고를 졸업했다. 6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69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재입학했다. 72년 `민주수수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는 등 순탄치 않은 대학생활 끝에 77년 졸업했다. 77~79년 `민주투위` 남민전 조직에 가담해 활동했다. 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파리에 정착해 20여년 간 이방인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95년 자전적 고백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일면을 극명하게 드러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발간해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다. 이후 타고난 감수성과 문제의식으로 우리사회를 향한 비판적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저서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관련기사 남민전 동지 21년만의 재회 <99년 6월15일 한겨레> 홍세화씨, 20년만에 한국땅 밟아 <99년 6월14일 한겨레> 홍세화씨 20년만에 귀국 <99년 5월28일 한겨레> 인터뷰/ 홍세화씨 딸 수현씨 <한겨레98년 9월14일> '빠리의 택시운전사' 연극무대에 <97년 12월5일치 한겨레> 조국에 똘레랑스는 없는가 <95년 9월21일 한겨레21 제76호> 분단의 상흔 세느강에 씻고…<95년 신동아> ◀한겨레 칼럼/홍세화의 빨간 신호등 안재구 교수와 나(98.6.13) 불편하지만 지지합니다(98.5.23) ------------------------------------------------------------------------------- - 남민전 사건 ------------------------------------------------------------------------------- - '남민전'사건은 1979년 총책 이재문(사건 당시 45세·81년 11월 옥사)을 비롯해 교수 교사 작가 조교 회사원 재야운동가 등 74명이 검거되고 4명이 수배된 대규모 공안사건이었다. 정부는 '폭력으로 정부전복을 노린 최대규모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 적발'(1차 발표), '북괴와 관련된 무장간첩단'(2차 발표)이라고 서슬 시퍼렇게 발표했지만 재야에서는 이를 유신말기의 상황에서 공안당국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최대의 사상범 조작사건'이라고 불렀다. 국제사면위의 각별한 관심과 석방운동 등 국제적인 주목을 모은 사건이었다. 옥사한 총책 이씨 외에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병사한 경우(전수진·여·당시 62세)와 사형 당한 경우(신향식·당시 45세)가 있긴 하지만 이 사건 관련자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감옥생 활을 하다 지난 88년 말까지 차례로 풀려났다. 지난해 병사한 김남주 시인도 이 사건으로 79 년에 감옥에 가 88년 12월 말 마지막으로 풀려난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사건에 관련됐던 사람들 중 김승균(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 이재오(건강사회실천협 의회 대표) 임헌영(작가) 안재구(수학자) 박석률씨 등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는 홍세화 님의 귀국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홍세화! 그는 장장 30년의 군사독재가 남긴 마지막 정치적 망명객이다. 학창시절부터 문화운동을 통하여 이 땅에 정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몸을 바친 그가 이른바 '남민전'이라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 망명하게 된 과정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라는 그의 자전적 고백에 남김없이 술회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과 함께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 특히 조국으로부터 그런 박해와 버림을 받았음에도 민족과 정의와 예술과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치 않아 조국의 하늘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자신의 현실로 껴안으며 고뇌하는 모습은 차라리 지순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깊은 호소력 덕분이었는가. 홍세화는 연전에 정부로부터 마침내 귀국할 수 있는 여권을 발부받았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장 귀국할 수 없었다. 이역 땅에서 뿌리 내린 삶을 당장 걷어젖히고 돌아오기에 20년이란 세월은 너무도 긴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직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한 생활인으로 빠리에 머물고 있다. 그러면서 홍세화는 서서히 조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 빠리에 살면서 체득한 유럽 문화의 실상과 그것을 본받고 싶어하는 한국 문화의 허상을 그만의 예리하고도 따뜻한 눈으로 논해 왔다. 그것이 이번에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신문사)라는 본격적인 문화비평서로 출간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제 어제의 망명객에서 우리에게 유럽 문화를 가장 잘 알려줄 수 있는 당당한 문화비평가로서 조국의 대중 앞에 어엿이 서게 된 것이다. 이에 평소 그와 인간애와 동지애를 나누던 지인들은 출판기념회를 마련하여 그의 귀국을 환영하는 자리를 베풀게 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 갈 수 있다던 마지막 망명객 홍세화가 마침내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고, 우리는 그에게 가졌던 동정과 미안한 마음을 홀가분히 벗어버리고 오히려 넘치는 기쁨과 자랑으로 온 국민과 함께 최대의 환영사로 그의 귀국을 맞이하고 싶다. "우리는 홍세화 님의 귀국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1999년 5월 26일 홍세화 귀국추진 모임 대표 유홍준 귀국일자 : 1999년 6월 14일 오전 10시 귀국일정 ------------------------------------------------------------------------------- - 6월14일(월) 오전 10시15분 에어프랑스 268편 귀국 13시 대학로 `명륜 왕족발`(학림레스토랑뒤편)에서 점심 및 기자간담회 16시 한겨레신문사 방문 6월16일(수) 19-21시 한겨레 초청 강연,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6월17일(목) 18-20시 귀국환영 및 출판기념회,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6월19일(토) 15-17시 참여연대 초청강연, `철학마당 느티나무` 6월22일(화) 오전 9:45-10:35 <생방송 임성훈입니다>(MBC TV) 생방송 출연 17-19시 서울대 학생회 초청 강연, 서울대 문화관 소강당 6월26일(토) 15-17시 광주지역 초청 강연, 광주 가톨릭 센터 7월7일(수) 출국 예정 귀국 추진위원 명단(무순) 예술계 고은(시인) 백낙청(평론가) 김윤수(평론가) 신경림(시인) 구중서(평론가) 임헌영(평 론가) 김지하(시인) 황석영(소설가) 이시영(시인) 김성동(소설가) 황지우(시인) 고 종석(평론가) 김민기(가수) 김영동(작곡가) 이상우(연극인) 정한룡(연극인) 임진택 (연극인) 채희완(무용가) 이애주(무용가) 김수길(음악인) 김석만(연극인) 정지영(영 화감독) 이장호(영화감독) 장선우(영화인) 류인택(영화인) 임옥상(화가) 김정헌(화 가) 유홍준(미술평론가) 김용태(민예총 사무총장) 문호근(예술의 전당 예술감독) 학계 최종욱(국민대) 안병욱(가톨릭대) 서중석(성균관대) 심지연(경남대) 박호성(서강대) 김세균(서울대) 손호철(서강대) 손예철(한양대) 백영서(연세대) 최원식(인하대) 안 현수(경기대) 류초하(충북대) 이광호(한림대) 이장우(성공회대) 언론계 리영희(전 한겨레신문) 임재경(전 한겨레신문) 김종철(연합통신) 장명국(YTN) 이 근성(중앙일보) 장성효(중앙일보) 김재홍(동아일보) 이계경(여성신문) 최영희(내일 신문) 윤후상(한겨레신문) 김효순(한겨레신문) 류영표(매일경제신문) 차미례(세계일 보) 김택곤(MBC) 이중식(조선일보) 정치사회계 박형규(목사) 박종렬(목사) 이부영(국회의원) 김근태(국회의원) 김영환(국회의원) 손학규(정치인) 류인태(정치인) 이철(정치인) 박우섭(정치인) 이호웅(정치인) 박홍 석(정치인) 강지원(청소년보호위원장) 최열(환경운동가) 정윤광(녹색교통) 박원순 (참여연대) 조성우(민화협) 심재식(의사) 양길승(의사) 김명호(의사) 윤대인(사업 가) 신동수(사업가) 이영구(사업가) 김정석(사업가) 박석률(출판인) 고세현(출판인) 나병식(출판인) 안부근(여론조사전문가) 이혜경(여성문화기획대표) 정수복(사회운 동연구소장) 김창섭(금융인) 김영환(사업가) 윤한봉(민족미래연구소) 김명석(사업 가) 신금호(노사정위원회) 천영세(민노총) 오승용(사업가) *고 김남주 시인과 고 제정구 의원이 유명을 달리하여 여기에 이름을 함께 하지 못 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 홍세화 문화비평 에세이 지은이 | 귀국환영사 | 귀국추진위원회 | 구입문의 파리의 이방인 홍세화, 그가 조국사랑의 마음으로 '파리에서 본 서울'은… 한국 사회와 프랑스 사회는 어떻게 만나는가? 나에게 서로 다른 두 사회는 느낌으로 만난다. 자주 안타까움으로 만나고 이따금 분노로 만난다. 두 사회가 부딪히면서 생겨나는 느낌은, 생겨날 때부터 아니 생겨나기 이전부터 나아가는 방향이 항상 한쪽으로 정해져 있다. 받는 쪽에선 나의 느낌이 반갑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친화력이 없으면 느낌도, 안타까움도, 분노도 없는 법이다. - 본문 중에서 홍세화는 파리에 살면서 체득한 유럽 문화에 대한 실상과 조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그 만의 예리하고도 따뜻한 눈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이제 어제의 망명객에서 당당한 문화비평가로서 고국의 대중 앞에 다시 서게 것이다. -유홍준(영남대 교수/ 미술평론가) 지난 95년「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자전적 에세이로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파리의 이방인 홍세화 씨가 이번에는 타고난 감수성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본 문화비평 에세이「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출간했다. 책의 제목을 통해 우선 "한강은 서울을 강남과 강북으로 가르며 흐르고, 쎄느강은 파리를 좌안과 우안으로 가르며 흐르는데,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된 지 반세기를 넘겼고 프랑스는 현재 좌우 동거 중에 있음"을 의미있게 되새겨보게 한다. 홍씨는 그동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웃사이더로 머무르지 않고 조국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으로 우리사회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져 왔다. 아직 삭지 않은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이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우리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제기를 하면서 조국의 '젊은 벗'들과 진지하게 토론을 벌이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펴낸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프랑스라는 거울 속에 투영된 우리 사회의 숨기고 싶은 풍경들까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또한 프랑스 사회의 긍정적인 특성뿐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그 사회의 또다른 이면들이 구체적 사례를 통해 흥미있게 서술되고 있다. 홍세화 씨는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오는 6월 14일 오전 10시 망명한 지 꼭 20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조국땅을 밟는다. 이번 귀국은 그의 대학 시절 연극반 친구이기도 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씨를 비롯, 연극연출자 임진택씨 등 당시 민주화운동 동지이자 지금은 사회 지도층 인사로 있는 100여 명이 귀국준비 모임을 구성하는 등 벌써부터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홍씨는 귀국 후 3주간 국내에 체류하면서 귀국환영 및 출판기념회(6월 17일 오후 6시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를 가질 예정이다. 또한 강연회 등을 통해 조국의 '젊은 벗'들과 대화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지은이: 홍세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파리에 정착, 20여년 간 이방인의 생활을 했다. 95년 자전적 고백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일면을 극명하게 드러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발간, 독자들의 높은 관심을 모았다. 판형/페이지/가격: 신국판, 320 페이지, 7,500원 펴낸이: 한겨레신문사 출판부 (710-0568∼9) 조국에 똘레랑스는 없는가 나를 인정하듯, 타인을 인정한다는 똘레랑스, 나와 타인이 공존하는 문화가 조국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일까. 강요하는 의식이 지배하고, 닮은 꼴이 아니면 매장당하는 나라가 조국일지라도 한반도는 영원히 그의 나라이다. 홍세화. 중고차 한대로 파리에 남은 꼬레 출신 망명객. 파리의 택시운전 사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사람이다. 47년 서울생인 그는 경기고,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고 70년대 말 지하조직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79년 무역회사 해외 근무차 파리에 있던 중 남민전 조직사건이 터진뒤 귀국하지 못하게 됐다. 그 뒤 82년 프랑스에 망명해 관광가이드, 택시운전 등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망명생활 13년째를 맞고 있다. 현재 그는파리 근교의 라 데팡스 지구의 쿠르브부아에서 장모, 아내, 딸 수현, 아 들 용빈과 함께 살고 있다. 부질없는 8.15특별사면 기대 만나자는 부탁에 선뜻 응해준 그를 대한 곳은 퐁피두센터의 광장에 접해 있는 분위기 있는 보부르 카페. 만나기도 전에 그의 책을 너무도 감명 깊게 곱씹어 읽어서인지 첫만남인 데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그래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투사" 출신의 해외망명객이라는 무시무시한 딱지가 붙은 정치범 이라는 생각에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은은한 웃음을 띠며 손 을 내미는 그의 눈빛을 대하자 부질없는 걱정은 일순에 눈녹듯이 사라졌 다. 이렇게 순하게 생긴 사람이 어떻게 정치범이 될 수 있을까 싶도록 그의 인상은 순하기만 했다. 주위의 종용도 있었고 자신을 정리하고 싶기도 해서 썼다는 그의 책 <나 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한국사회를 그토록 떠들썩하게 했고 급기야는 황규덕 감독하의 영화화 준비작업이 한창인데도,그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그가 갈 수 있는 나라는 다른 모든 나라, 갈수 없는 나라는 꼬레(코리아)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번 8.15 특별사면 소식을 기대해 봤으나 역시 부질없는 생각임을 재확인했다고 말한다. 그가 택시운전사를 그만둔 것은 이미 몇년이 지났다고 한다. 지난해 봄부터 그는 한국 유수의 오트 쿠뤼르(고급양장) 진태옥패션 파리지사 일을 맡고 있다. 집세 내기도 빠듯해 한달 집세를 내면 휴하고 한숨을 내쉬곤 하던 택시운전사 시절보다는 벌이가 나아졌지만 아직도 마음고생은 여전 하다. 요즘 그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모시고 있는 구순의 장모다. 1904년생인 장모는 대소변도 혼자 못볼 정도다. 내색은 안 하지만 고향에 묻히기를 원하는 것같아 그는 더욱 마음이 아프다. 자식들 또한 요즘 들어 부쩍 한국을 보고 싶다는 뜻을 비치곤 한다. "프랑스 국적 택해야 한국에 간다" 아들 용빈은(그는 아들을 반골이라 표현했다) "한국사회와 한국사람은 다른 것 같다. 한국사회는 한국사람들로 이뤄진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등 가끔씩 뼈있는 말을 던져 조국의 황폐함을 돌아보게 하곤 하더니 요즘에는 그래도 결혼은 한국사람과 하겠다는 의지를 자주 내비쳐 마음을 뒤 숭숭하게 만든다고 한다. 속지주의를 고집하는 프랑스에서 자랐으니 이제멀지 않아 성인이 됨과 함께 국적을 선택하는 권리를 갖게 되는데 아마도프랑스 국적을 택할 것 같고 그것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마음고생 덜 시 키는 게 아니겠냐는 게 그의 솔직한 심경이다. 그리고 프랑스 국적을 택 해야만 한국을 방문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자식들이 막상 프랑스 국적을 택하면 착잡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반문 했다. "국적 그거 어차피 종이쪽지 아닙니까? 걔들이 프랑스 국적을 갖는다고 눈이 파래지거나 머리가 노래지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혹시 잘 풀려서(?) 귀국하게 되더라도 딱히 할 일도 없을 것 같다는 그는한국사회가 그 물질적 성장에 비해 시민운동의 토대가 너무 나약하다고 말했다. "한국사회가 이제껏 돈번 것 말고 한 게 뭐 있나요? 가령 프랑스에서는 지난 68년 봄의 사회운동을 거치면서 신문사, 잡지사, 사회운동단체 등의물적 토대를 다져놨기 때문에 운동권 출신이라도 충분히 먹고 살며 사회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데 우리사회는 사회비판자들을 매장하는 사회입니 다. 지난번 운동권 출신으로 모기업체에 특채돼 일하다가 해외출장 나와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해 만났던 후배들이 있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건 회 한 뿐이더군요. 80년대 학번은 너무 치열하고 완벽을 추구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 것도 남기지를 못한 것 같아요. 이젠 진정한 의미에 서 시민운동의 토대를 다져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아플 땐 온돌방이 그리워 몸은 지구의 반대편에 서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조국으로 향하고 있는 그는 갈 수 없는 조국이기에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한가지 한가지를 더 애정을 갖고 지켜보며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는 좀더 공부를 해봐야 될 것 같다며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못다한 공부를 하려는 게 그의 소박한 바람이다. 요즘은 몸이 아파 사무실에도 가끔 결근하곤 한다는데 이렇게 아플 때면 한국의 온돌방이 그리워진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자리를 훌훌 털었다. 파리=최연구 통신원 *95년 9월21일 <한겨레21> 제76호 분단의 상흔 세느강에 씻고…[1]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씨가 20년만에 귀국합니다. 그의 '20년만의 귀국'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신동아> 95년 4월호에 실린 '`남민전` 사건 홍세화, 파리 하늘 밑의 정치망명자-분단의 상흔 세느강에 씻고…'(김기만/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를 옮겨 싣습니다. 편집자 주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제목을 단 책 한 권이 3월 말경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 간된다. 저자는 홍세화씨(48).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다 얼핏 책 제목으로 볼 때 '어찌어찌해서 파리까지 가 택시운전을 하게 된 어느 한국인이 그간의 체험담을 쓴 책이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은 좀 독특하다. 단순한 택시운전사의 체험은 아닌 것이다. 유신 말기, '10·26' 직전이던 지난 79년 10월 9일 이른바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약칭 남민전)사건에 직접 관계한 홍씨가 오랜 정치망명생활 끝에 '갈 수 없는 조국'을 향해 쏘아 올린 피맺힌 외침이기 때문이다. 경기고 출신으로 66년 서울 공대에 들어갔다 그만두고 2년여 후 서울 문리대 외교학과에 들어갔던 그가 삼선개헌 반대, 교련 반대, 위수령, 징집과 극악했던 군생활, '남민전' 참여, 한 회사의 파리지사원 발령, 프랑스 정치망명, 파리에서의 관광안내원 생활과 택시운전 등 지난 30년간 경험한 얘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개발연대 독재시절 한국이 겪었던 부끄럽고 어 두운 부분의 한 축도일 듯하다. 돌이켜보면 범상한 사람들로서는 겪기 힘든, 또 참으로 수상했던 '광기의 시대'가 아니고 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이지 않은가. 더욱이 해방 두 해 후에 태어난 그의 가족사에 는 민족분단, 동족상잔으로 인한 희생의 상처가 깊게나 있음에랴….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상세히 밝혀지지만 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분단에 대한 첫 인식, 학생운동 투신, '남민전'참여, 그리고 프랑스 정치망명에 이르기까지 홍씨의 48년 인생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분단의 희생물'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 분단이 가져다주고 또 마음대로 몰고다닌 질곡 같은 운명의 무서운 끈이 느껴진다. 인생 자체가 '분단의 희생물'인 사람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영문도 모른 채 어릴 때부터 외조부모 밑에서 성장한 홍씨는 서울 공대 1학년 때인 66년 가을 고향(충남 아산)에 갔다가 6·25때 당시 면당인민위원장이던 오촌당숙 등 일가 친척 대부분을 포함한 1백여명의 동네 사람들이 반공청년들에 의해 몰살당했음을 알게 된다. 더욱이 당시 만 3살이던 자신도 현장에 있었으나 극적으로 살아났고 당시 돌바기였던 동생 민화가 어른들과 함께 죽었음을 알게 된다.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처음 알게 된 순간이 었다. 아나키스트였던 아버지가 '세계평화' '민족평화'의 준말로 각 지어준 이름 이 세화 민화인데 민화가 민족분단의 참화로 희생되다니…. 혈기왕성한 19세의 그는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고교 때 고 조영래 변호사 등과 대일 굴욕수교에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는 등 세상사에 관심은 컸지만 얌전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성장해왔고 특히 막 KS(경기고 서울대) 마크를 달고 희망에 부풀어 있던 그에게 가족사의 비밀이 일부 풀리면서 조국의 현실이, 분단의 질곡이 엄청난 절망과 분노를 안겨줬다. 이로 인해 전보다 더 격렬히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도 가슴속의 빈터는 커졌다. 과거의 '나'가 아닌 새로 발견한 나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고 자아의 분열을 느꼈다. KS 마크, 엘리트 의식, 꿈과 가치관 등이 모조리 무너졌다. 이로 인해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됐고 2년여를 방방곡곡의 섬을 찾아다니며 울부짖는 방황 의 세월이 이어졌다. 마음을 추스른 그는 69년 서울 문리대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분단현실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세계 속에서의 한반도의 위상을 알아보자, 가능하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일에 종사해보자…. 격렬한 고민과 방황의 세월을 보낸 22살 청년이 능히 생각해봄직한 정상적인 꿈을 가진 채 다시 대학생이 됐지만 그는 이때부터 시대의 격랑에 휘몰리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발표된 '남민전'사건에 그의 이름이 오르고 때마침 파리에 가있던 그는 정치 망명을 신청, 오늘에 이르게 된다. 지난 세월의 한 아픔을 정리해보고자 2월 말 파리의 홍씨에게 전화연락을 했다. "오랫동안 한국언론이 '기피인물'로 대해왔던 홍 선생과 책출간을 계기로 본격 인터뷰를 하고자 한다"는 얘기에 그는 처음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몇 차례의 통화가 오간 뒤 인터뷰가 약속돼 3월초 파리로 가 그를 만났다. 약간 섬약하고 예민해 보이지만 잘생기고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며 설득력있는 화술과 차 분한 목소리를 가진 준수한 40대였다. KS학력의 세계유일 택시운전사 -소리를 하는 임진택씨를 통해 곧 책이 나온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아무리 '창작과 비평사'라 해도 5, 6공 때는 생각하기 힘든 기획이구나라는 생각, 또 이제 우리는 이런 일 들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책제목이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인데 지금도 핸들을 잡나요. =아닙니다. 택시운전을 정확히 88년 4월부터 90년 8월까지 2년 4개월간 했지요. 망명한 뒤 주로 관광안내원을 했고 택시운전은 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고등학교 후배가 억지로 자기 회사의 파리지사 일을 맡겨 그만뒀습니다. 고마운 후배였습니다. 1년 전부터는 한국 디자이너 진태옥씨의 파리사무실 일을 거들어주고 있습니다. 제 파리 생활을 가장 잘 대변하는 모습이 택시운전이라 생각돼 제목을 그리 잡은 거죠. -아마도 KS학력을 가진 관광가이드나 택시운전사로는 세계에서도 유일하지 않았을까 생각 됩니다. 궁금한 게 많아 어디서부터 얘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현재 신 분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요. =한국국적을 가진 프랑스 망명자입니다. 오랜 수속을 거쳐 82년 가을, 망명이 받아들여졌고 86년에 10년기한의 체류증을 받았으니 내년에 다시 망명자에게 주는 10년짜리 체류증을 받 든지 망명신분을 포기하고 국내에 돌아가든지 해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60∼70년대에 프랑스에 정치적망명을 한 한국인이 2명 있지만 이미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경우라서 다르고 현재로는 홍 선생이 한국인으로는 유일한 프랑스 망명자, 망명 1호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저로서는 국적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남민전'사건 관련자 중 감옥에서, 혹은 병고로 숨진 몇 분을 빼고는 다 풀 려나 사회일선의 다양한 분야에서 뛰고 있고 세상도 옛날과는 좀 달라졌는데 귀국할 생각을 합니까. =조국의 땅과 사람은 미치도록 그립습니다만 솔직히 한국사회는 아직도 존 두렵습니다. 그 래서 좀더 여기 머물고자 합니다. 대학생, 고교생인 자녀의 교육문제가 결려 있기도 합니다 만… 그리고 서울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보기에는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특히 남북관계에 관한 정책, 양심수를 대하는 태도,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수행, 분단적 사고 방식과 정치행태 등은 달라진게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쓰레기 같은 인간들도 다수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의 지도자들로 남 아 있지 않습니까. 또 현실적으로 현재의 '여행문서'(망명자에게 내주는 일종의 여권-필자)로는 한국에 갈 수 없게 돼 있습니다. -그건 왜죠. =여행문서의 '여행목적지'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Pour tous pays sauf COREE). 즉 남북한을 가리지 않고 한국에만 갈 수 없고 세계 어느 나라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죠. 망명자를 보호하기 위한 당연한 조항이지만 이 문서를 받고 노트르담 성당옆의 세느 강변에 나가 '갈 수 없는 나라 한국'을 되뇌며 포도주 한 병을 나발 불었던 기억이 납니다. -계속- 분단의 상흔 세느강에 씻고…[2] -현 신분은 프랑스 망명자, 귀국 미정 망명자 신분만 포기하면 당장에라도 돌아가는데, 문제는 없는 것 아닙니까. 물론 79년에 남민전사건으로 지명수배됐으니 사법처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공소시효도 지났을 것이고 현 정권이 세삼 이 문제를 들출 것 같지도 않은데…. =물론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남민전 사건 주역들이 사회에서 다 당당히 활동하고 있는데 제가 귀국한다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아직은 제삼국에서 남북한을 등거리에 놓고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한 편에 경사되지 말고 말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상황,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권이 패망한 후 마치 패망자처럼 돌아가 는 모습은 우습습니다. 또 제가 돌아가서 특별히 한국을 위해 할 일도 없어 보입니다. 공부 라도 더 한 뒤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남민전'사건은 총책 이재문(사건 당시 45세·81년 11월 옥사)을 비롯해 교수 교사 작가 조교 회사원 재야운동가 등 74명이 검거되고 4명이 수배된 대규모 공안사건이었다. 정부는 '폭력으로 정부전복을 노린 최대규모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 적발'(1차 발표), '북괴와 관련된 무장간첩단'(2차 발표)이라고 서슬 시퍼렇게 발표했지만 재야에서는 이를 유신말기의 상황에서 공안당국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최대의 사상범 조작사건'이라고 불렀다. 국제사면위의 각별한 관심과 석방운동 등 국제적인 주목을 모은 사건이었다. 옥사한 총책 이씨 외에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병사한 경우(전수진·여·당시 62세)와 사형 당한 경우(신향식·당시 45세)가 있긴 하지만 이 사건 관련자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감옥생 활을 하다 지난 88년 말까지 차례로 풀려났다. 지난해 병사한 김남주 시인도 이 사건으로 79 년에 감옥에 가 88년 12월 말 마지막으로 풀려난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사건에 관련됐던 사람들 중 김승균(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 이재오(건강사회실천협 의회 대표) 임헌영(작가) 안재구(수학자) 박석률씨 등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경우도 적지 않다. 얄궂은 역사의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사건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사건전모를 발표했던 3공 때의 주역 구자춘씨는 아직도 국회의원으로 정치일선에 남아 요즘 김종필씨와 함께 민주자유연합을 구성하고 바쁘게 뛰고 있으니 남민전 관련자들의 심사는 어떠할 것인가. 남민전사건 성격규명 필요하다. -남민전사건으로 말머리를 돌려볼까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해서 이재문씨는 간첩이었나요. 북한과 무슨 관련이 있었습니까.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남민전이 무엇이었는지 그 성격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남민전은 기본 적으로 점조직입니다. 따라서 조직원들이 전체의 모습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한 이씨는 간첩이 아니었습니다. 대구매일 기자로 활동하던 64년 1차 인혁당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독재권력에 뚜렷이 반대했고 통일운동을 하는 등 진보적 성향 인 것은 분명했지만 북한과 연계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남민전이 북의 지령에 따라 용공활동을 한 일은 없었고 경찰도 이에 대한 어떤 증거도 제시한 바 없습니다. 경북대 정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영남일보에도 수석으로 입사했을 만큼 총명했던 이씨는 4·19 5·16을 거치며 자생적인 혁명가로 바뀌었다고 생각됩니다. 71년 민주수호 국민협 의회가 구성됐을 때 그가 대구지부 운영위원 겸 대변인을 맡았다는 사실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견실한 반정부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반증해 줍니다. 그러나 75년 4월8일 민청학련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이른바 여정남 도예종 '인혁당 그룹 8명'에게 대법원의 사형확정판결이 내려지고 놀랍게도 그 다음날 새벽 전격적으로 이들이 처형되면서 이씨는 새 조직을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구상을 하게 되고 76년 2월 남민전을 결성해 조직확대에 나서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2 인혁당 사건이라 불리죠. 그 8명에 대한 사형확정과 전광석화 같은 다음날의 처형집행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불러 일으켰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제2인혁당 사건은 정보부에서 인혁당을 재건해 만들어 발표 했던 것입니다. 월남 패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64년의 인혁당 1차 사건 때도 대부분 무죄로 풀려났거든요. 안보를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김지하 시인이 75년 봄 석방돼 동아일보에 3회 연재했다 그로 인해 다시 구속된 것도 바로 이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사람들의 억울함에 대해 썼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국제사면위에서 강력한 항의를 하는 등 국제여론이 비등했죠. =국제사면위에서는 지금도 한국에서 8명의 정치범이 사형확정판결 하루만에 처형된 75년 4 월9일을 「엠네스티 역사상 가장 슬픈 날」이라고 말합니다. '남조선'명칭 때문에 당하겠구나 생각도 -당시 발표자료에 따르면 남민전은 밑의 하부조직인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에 속하는 투사가 있었고 그 위에 남민전의 전사와 지도부 순으로 구성되던데 홍 선생은 어느 단계에 속했습니까. =물론 나이도 어리고 내세울 투쟁경험도 적으니 맨 밑의 투사에서부터 시작했죠. 몇 달 지 나고 그 사이 거리에서 애드벌룬에 삐라를 띄워 뿌리는 일을 몇 번 하고 나니까 전사로 진 급시키더군요(웃음). 솔직히 겁이 좀 나더라구요. -남민전은 자금확보를 위해 재벌집을 털기도 했는데 거기에는 가담하지 않았나요? =79년에 당시 '7공자'중 대표로 알려졌던 최원석 동아건설회장 집을 다른 조직원들이 털 려 했으나 경비원에게 부상만 입히고 실패했죠. 보도관제로 신문에 나지도 않았죠. 고 김남 주 시인도 그때 가담한 조직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악덕재벌 부정축제자를 혼내주자는 시도 는 몇 번 더 있었을 겁니다. =아까 겁이 났다고 했죠. 위에서 알면 사상성이 약하다고 했겠군요. =저는 처음 대학에 들어간 지 11년 반만인 77년 여름, 대학을 졸업했는데 이 무렵 고교동 창인 박석률의 권유로 민투에 가입해 6개월 후 전사로 진급하면서 조직 이름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민주주의 해방전선'까지는 좋다 싶은데 '남조선'이라 해놨으니 나중에 잘못되 면 꼼짝없이 가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석률이에게 '뜻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까지 이름을 붙일 것은 무어냐'라고 불평하기도 했지만 남민전의 깃발을 보고 사연을 들은 뒤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남민전 깃발 얘기는 79년 11월13일 당시 손달용 치안본부장이 남민전사건 추가발표를 통해 공개한 것으로 인구에 회자된 바 있다. 인혁당 2차사건으로 처형된 8명이 감옥에서 입었던 옷을 수집해 8조각으로 꿰매서 가로 1.5m 세로 1.1m의 깃발을 만들어 남민전 기로 정하고 전사의 입회 때 이를 의식교육용으로 썼다는 것. 홍씨는 "이 깃발을 보고 그 깃발에 얽힌 비장한 사연을 듣고 나니 당시의 분위 기에서 더 이상 남민전의 이름에 시비를 걸지 못하겠더라", "인혁당은 공안당국의 필요에 의해 고문실에서 재건되고 그들은 죽음을 당한 것인데 그들이 나일 수 있고 내가 그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때의 심경을 회고했다. -남민전의 목표는 무엇이었다고 봅니까. =저를 포함한 참여자 대부분이 유신체제 타파를 통해 민주화를 이루려는 운동조직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것이 실제로 목표였다고 봅니다. 물론 일부 수뇌부는 대부분의 관여자들과 달리 운동방법의 과격성이나 사상적 편향들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신폭압체제의 군부독재가 갈수록 견고해지는 상황에서 합법적인 대항수단만으로는 운동이 철저히 깨질 수밖에 없다는 좌절감이 심했고 이에 따라 폭력을 불사하는 급진적인 운동방식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 남민전은 최악의 독재상황이 만들어 낸 시대적 산물이었다고 생각되는군요. -공안당국이 볼 때는 이재문 신향식 등 과거 인혁당 통혁당과 관련됐던 사람들이 이 조직 의 수뇌부에 있으니 '대어를 낚았다'고 생각할 만하고 또 그렇게 몰아가기도 좋지않았겠어요. =그렇습니다. 조직원 일부가 과거 인혁당 통혁당재건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고, 그전부터 일관되게 박정희독재정권 반대투쟁을 해온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지식인 현직교사 등도 끼여 있는데다가 유신 말기 증세들이 자꾸 나타나는 판이었으니 공안당국으로서는 잘됐다 싶어 엄청난 사건으로 부풀려서 집대성한 거죠. -계속- 분단의 상흔 세느강에 씻고…[3]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이 남민전 수사해 -홍선생은 못 보셨겠지만 지난 88년 5월 남민전사건관련 수감자 가족들이 호소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호소문은 '남민전사건은 유신독재권력 연장의 볼모로 삼기 위해 왜곡, 조 작된 것'이라며 특히 관련자들이 악명 높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50여일간 악랄 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중에 다른 경로를 통해 듣거나 알게된 것이지만 고문은 지독했다고 합니다. 이재오씨가 그 고문에 관해 증언한 바도 있지 않습니까. 노인네였던 이호덕(당시 68세·관세사)·전수진 부부도 고문을 심하게 당했는데 전 여사는 결국 복역중 위암이 발병해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사망했다고 합니다. 최석진(당시 28세·한국경제개발협회 연구원)은 오죽했으면 고문을 견디 다 못해 화장실 가는 틈에 3층에서 투신해 척추가 골절됐겠습니까. 이 사건 뒤로도 재야서 오래 활동했던 이재오씨는 지난 88년 한 인터뷰를 통해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을 폭로하고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주역인 박처원 유정방 방에서 지독하 게 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고문과의 싸움'으로 유명한 김근태씨(현 민주당 부총재)도 "남영동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고문당할 때 '너 이방에서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 어나간 줄 알어'라는 말을 들었다."고 토로한 것을 보면 남민전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간다. 인권변호사들의 대거 변론참여에도 불구하고 80년 5월2일의 선고공판에서 4명에게는 사형, 또 다른 4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진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당시 金영삼 신민당 총재 등 각계인사 8백74명이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진정서를 재판부에 제출했지 만 소용이 없었다. 또 한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얘기가 있다. 독재정권하의 검찰이 특히 공안사건에 있어 어떻게 정권의 주구노릇을 했던가는 국민들 대부분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남민전사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 7명의 검사가 이 사건에 달라붙어 독재정권의 보위에 충성을 다했는데 그중의 한 명이 바로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씨라는 사실이다. 김영삼 총재의 진정, 박철언은 담당검사 -남민전 관련자 가운데 유일하게 검거되지 않고, 따라서 감옥도 안 가고 고문도 안 당한 셈 인데… 동지들에게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왜요, 사실 그로 인한 번민이 말도 못하게 심했습니다. 돌아버릴 것 같았어요. 택시운전을 하면서, 말하자면 가장 격심한 육체노동의 하나로 먹고 살게 되면서 그 정신적인 번민을 좀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어떻게 외국에 나오게 됐습니까. =학교를 졸업한 뒤 대봉산업에서 일한 지 열달만인 79년 1월1일 유럽지사 근무 발령이 났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얼떨떨했습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그래, 한번 떠나 보자. 다른 사회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했습니다. 학생운동하다 몇 차례 정보기관에 끌려간 바 있고 제명당한 적도 있어 여권이 나올 수 있을까 걱정했으나 다행이 잘 해결돼 3 월 말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유신말기의 숨 막히는 긴급조치시대, '떠나고 싶다'는 욕구는 바로 '숨쉬고 싶다'는 욕구였을 것입니다." 그의 대학생활을 자세히 들어보니 이해할 만하다. 69년 다시 서울대 외교학과에 들어갔을 때는 대학 전체가 삼선개헌 반대데모의 열풍에 휩쓸렸을 때였다. 당시 이철(현 민주당 의원)은 데모 뒤 제명당해 군대에 끌려갔다. 70년에는 교련반대 투쟁이 격렬했고 이해 11월 청계천 상가에서 근로자 전태일이 분신자살 해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71년 봄부터는 고교후배이자 외교학과 동기인 임진택의 손에 이끌려 문리대 연극반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연극 선배인 김지하 시인과 교유하게 됐다. 연극반의 차미례(언론인) 장선우(영화감독)나 유인태(민주당 의원) 김민기(가수) 유홍준(영남대 교수) 등과 어울렸다. 설명 안해도 알만한 면면들이다. 71년 10월 위수령이 내려져 군화발이 대학을 점령했다. 4학년이 된 이듬해 6월 홍씨는 대학에 삐라를 뿌렸고 대공분실에 붙들려가 치도곤을 당한 뒤 학교에서 제적됐다. 이어 73년 10 월 그는 군에 입대했고 입대 직전에는 결혼도 했다. 74년에는 군에 있던 관계로 그가 관계할 수 없었던 민청학련사건 관련여부를 조사받는다고 서빙고동 보안대에 끌려가 모진 곤욕을 치렀다. 심신의 상처가 심한 상태에서 76년 8월 만기제대한 그는 늙은 학생으로 한학기 남은 학교에 복학했다. 학과에서는 까만 후배인 유태연(현 동국대 교수)만이 인사를 청해왔다. 이미 두 아이를 둔 가장으로 먹고 살기 위해 입시학원에서 가르치다보니 괴발개발 쓴 졸업 논문이 통과되지 않아 졸업이 미루어 졌다. 77년 여름 겨우 졸업장을 손에 쥐게 된다. 앞에서 언급됐듯이 이 무렵 자주 어울리던 고교동창 박석률로부터 '민투'가입을 권유받고 그는 아주 당연한 일처럼 여기에 참여한다. 그런 제의가 없었다해도 아마 스스로가 그런 조직을 만들었거나 혼자서라도 행동을 했을게 분명한 상황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남민전 유럽파견 전사로 발표돼 -파리로 떠날 때도 물론 남민전 전사로 활동하던 때였죠. =그렇습니다. 조직원들은 '다른 사회와 만나보고 오겠다'는 제 희망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청량리 밖의 조촐한 술집에서 이재문 선생, 이해경 선배(당시 39세) 석률이 등과 이별의 술잔을 나눴습니다.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지만 출국이 주는 해방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 았다는 점에서 저는 철저한 활동가는 못 됐던 셈이죠. -당시 경찰은 홍 선생에 관해 '남민전은 조직원을 유럽에도 파견했다'고 발표해 신문에 크게 보고되기도 했는데 알고보니 웃기는 얘기군요. -대봉산업이 아닌 남민전이 저를 파견했다고 말한다면 정말 코미디입니다. 제가 유럽으로 나가는데도 남민전 수뇌부에서는 누구 하나 만나보라거나 접촉해보라는 얘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남민전은 유신독재정권을 무너뜨려야겠다는 일념이었지 다른 게 아니었다는 반증입니다. -사건발생은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10월20일경인데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남민전사건이 첫 발표된 지 열흘쯤 후인데 본사의 김병만 사장이 파리에 왔습니다. 제 경기고 선배인데 배짱좋고 사업수완이 좋은 분이었죠. -아, 그 율산그룹 신선호씨, 제세그룹 이창우씨와 함께 '재계의 무서운 삼총사'로 불리던 그 김병만씨인가요. =그렇습니다. 10월16일, 17일자 신문을 가져왔는데 저에 관한 경찰 발표 내용이 상세히 보도돼 있더군요. 남민전이 유럽에 파견한 것으로 말이죠. 김 사장은 같이 서울에 들어가자고 권유했습니다. 밤새워 고민하고 아내와 상의한 뒤 다음날 아침 가방 두 개만 챙겨 네식구가 기차를 타고 파리를 떠났습니다. 베를린에 있는 외교학과 동기생 친구 박학성(현 서강대 교수)을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여튼 그 상황에서 서울로 가 감옥에 갔다가는 그 압제정권 치하에서 인생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 오더군요. 대학 때와 군대에서 겪은 혹독한 경험 때문에 사실 감옥과 고문에 대한 두려움은 컸습니다. 중고차 한 대로 파리에 남은 사내 -파리에서는 난리가 났겠군요. =나중에 들으니 교민사회에 벌써 '홍세화가 북으로 갔다'는 소문이 나는 등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파리로 전화하니 김 사장이 받더군요. 한국에 가지 않아도 좋으니 파리로 돌아오라고 해요. 저는 김 사장을 믿고 따르는 편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터진 뒤 정보부에 끌려가 한 일주일간 고생했다고 하니 얼마나 곤욕을 치뤘겠습니까. 제가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얘기를 알고 있는 데 파리에 와서 이분이 단 한 번도 제게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아요. 그렇게 속이 깊은 분입니다. 나중에 망하긴 했지만 대봉은 당시 여느 회사와 분위기가 달랐고 동아투위 출신들이 와서 일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김 사장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홍씨는 김 사장의 중재로 당시 주불 한국대사관에 나와 있던 정보부 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여 대봉산업 파리지사원으로 그대로 파리에 머무르도록 한다는데 합의한다. 대신 홍씨는 프랑스에 망명치 않기로 약속했다.-계속- 분단의 상흔 세느강에 씻고…[4] 이런 조치가 이루어진 것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10·26 때문이었다. 이 거대한 역사변화의 와중에서 해외에 나와 있던 정보기관들도 홍씨를 단단히 제어할 생각을 포기했고 그런 점에 서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 뒤가 궁금하군요. =국내의 혼란 덕분에 제 일은 유야무야로 끝났고 대봉은 그해 말 망해 문을 닫았습니다. 회사가 외환은행 관리로 넘어갔는데 네 식구의 귀국 및 이사비용으로 3만여프랑(약 4백50만 원)을 주더군요. 귀국을 포기하고 눌러앉기로 하고 중고승용차를 한 대 샀습니다. '중고차 한 대로 남은 사내'가 됐다고나 할까요. 불어도 제대로 못할 때인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더 라구요.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 관광가이드였고 나중에 택시운전이었습니다. 홍씨는 지금도 김병만씨에 고맙게 생각한다. 그 서슬 시퍼렇던 시절에 그런 배포와 후배사 랑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홍씨는 기자에게 김병만씨의 근황을 꼭 알 아봐 달라고 당부했다. 여권 기한 끝나 정치망명 신청 -망명 얘기를 물어보겠습니다. 언제 신청한 거죠. =82년 3월입니다. 왜 정확히 기억하느냐면 제 여권 유효기간이 만료되는때였기 때문입니 다. 그때까지는 망명신청을 기피하고 있었으나 한국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정치적 망명권'을 얻는 것외에는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더군요. -망명권을 얻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당시 사건이 발표된 한국신문을 복사해가 담당관에게 저의 관련정도와 처지를 설명해줬는데 이해를 못하더라구요. 사실 생각해 보니 정치망명을 신청할 만큼 뚜렷이 눈에 띄게 반정부 활동을 한 것도 없었단 말입니다. '남조선'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는 엄청나지만 그에게야 영어로 '사우스 코리아'라고 설명되니 그 정서의 차이를 이해할리 없지요. 또 '당신 공산주의자냐'고 물어, '아니다'라고 했더니 그럼 한국에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하는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망명이 허용됐습니다. -프랑스가 망명자에 대해서는 그래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따뜻하지요. =망명 허용은 비교적 엄격하지만 일단 망명을 허용한 사람에게는 상당한 배려를 합니다. 물론 합법적인 체류증이 주어지고 노동을 할 수 있는 노동허가증이 교부됩니다. 제가 파리7대학 역사학부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했는데 등록할 때 보니 일부 증빙서류를 면제해주고 등 록수수료도 면제해주더군요.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자녀들이 학교에 다닐 경우에도 각종 수수료를 면제해 줍니다. 프랑스는 망명자를 군경 유자녀와 같이 수수료 면제자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역시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최대한 구현하려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적은 그대로 유지하겠죠. =당연합니다. 다만 대학 3학년과 고교 3년인 자녀들에게는 잠정적으로 프랑스 국적을 갖도 록 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죠. 지금의 망명 신분으로는 한국방문을 못하거든요. 다 성장한 아이들인데 조국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줘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엄연한 한국인이 한국 국적으로는 한국을 갈 수 없고, 프랑스 국적으로는 한국을 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지만 당분간은 다른 선택의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녀들이 우리말 합니까. =잘합니다. 파리에서 자녀를 한글학교에 7년 보내고 자녀들이 개근상을 타게 한 경우는 흔 하지 않습니다. 망명자의 아이들이 한글학교 개근상을 받았다면 누가 믿기나 하겠습니까. 기 피인물인 제가 한글학교에 나타나면 교민들이 수군거리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나타내는 경우 도 없지 않아 처신이 쉽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꾹 참고 한글학교에 데리고 다녔지요. 제가 파리에 장모님을 모셔와 같이 살고 있는데 아이들 우리말 교육에는 할머니도 큰 도움 이 됐습니다. -교민 학부형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군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시대상황이 그러했고 또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는 분들이니 그 들의 책임도 아니고요. 그러나 한글학교나 한국식당에서 제가 옆자리에 있는데 제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홍세화라는 사람은 빨갱이고 간첩이니 접촉하지 말라더라'는 식으로 얘기 하는 것을 듣게 되면 정말 음식이 여지없이 체하더군요. 육체노동의 충만함 느낀 택시운전자 -이제 무거운 얘기는 치우고 관광가이드나 택시운전 할 때의 재미있던 에피소드들 좀 들어봅시다. =자질구레한 얘기들은 많죠. 그러나 별로 돌아보고 싶지는 않군요. 다만 중고교 대학 동창 을 우연히 관광안내하게 됐을 때가 제일 곤욕스러웠으나 '직업이다. 연극을 하자'는 생각 으로 해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교민사회에서 기피하니 관광안내 일거리도 꾸준히 들어 오지 않고 더 이상 자존심을 굽히고 살 수도 없어 정직한 노동, 즉 몸으로 벌어 먹는 일을 생각했고 그 해답은 택시운전 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상황은 좀 다급했습니다. 이이들은 자 꾸 커가는데 면세점에 나가 일하는 아내의 변변찮은 수입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고 내 벌이는 시원치 않고… 김지하선배가 저를 도와주려는 따뜻한 마음으로 난초 그림 열점을 인편에 보 내줬는데 오죽하면 그것을 한점도 보관하지 못하고 다 내다 팔았겠습니까. -택시운전 2년4개월에 겪은 애환은 상당히 많겠군요. =그렇습니다. 역시 택시는 어느 나라에서나 그 사회 모습의 일부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파리도 예외가 아니예요. 에피소드를 책에 좀 소개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만 미리 공개해보죠. =한국 승객 한 분이 파리에서 택시를 탔는데 목적지에 와 미터기 요금대로 돈을 내자 운전 사가 자꾸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더랍니다. 말이 안 통해 귀찮은데다 두렵기도 해 3배를 달라는 줄로 알고 얼른 3배의 돈을 줘버렸답니다. 사실은 세 개의 가방에 대한 추가요금만 을 요구한 것으로 요금규정에도 나와 있죠. 파리의 택시가 앞자리에 손님을 안 태우는 것은 4명 이상일 때는 2대의 택시를 이용하도록 하자는 것, 즉 택시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운전자 들이 짜낸 지혜인데 이것을 모르고 돈을 조금 더 줄테니 4명이 타자고 죽자사자 우기는 한국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라이브 쇼를 찾아가 달라며 차에 오르자마자 온갖 음담폐설이나 욕을 늘어놓는 분, 초고급 비밀을 마구 얘기하는 한국 정보기관원이나 관리들도 있었죠. 택시정류장에 밤마다 전화를 걸어와 신세타령을 늘어놓는 프랑스 할머니도 있고 택시승객인 외국여자들이 은밀한 유혹을 보내오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팁이 제일 후하기는 북구인 영미인 프랑스인이고 남유럽 남미인들이 짭니다. 일본인들은 교육을 받았는지 거리에 상관 없이 거의 예외 없이 10프랑(1천5백원)의 팁을 줍니다. -택시운전사의 수입은 괜찮은 편입니까. =택시회사에서 한 주일 단위로 차를 빌려오면서 미리 한 주일분 임차료를 내고 임차료를 제외한 나머지 벌이를 개인의 수입으로 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데 제도 자체가 않은 돈을 벌 기 어렵게 돼 있습니다. 하루에 10시간까지만 일하도록 규정돼 있고 택시마다 근무가능한 시간을 알리는 등이 켜져 있어 본인이 연장근로를 해 돈을 더 벌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도록 돼 있습니다. 제 경우는 두 주일에 하루 정도만 쉬는 등 열심히 일했어도 한 달에 1만프랑 (약 1백50만원)안팎 버는 게 평균이었는데 프랑스의 국민소득수준과 물가수준을 고려하면 이는 하위에 속하는 수입입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택시운전생활은 어떠했습니까. =몸은 고되었지만 충만한 하루하루였습니다. 정직한 순수 육체노동의 첫 경험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조건 친절하자. 일 시간을 엄수하자. 2주일에 하루를 쉬자. <르 몽드>신문 을 매일 사서 읽자는 네 가지 원칙을 세우고 일했는데 대체로 충실했습니다. 택시운전생활 중 가장 기억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88년이었습니다. 임진택이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귀국하여 같이 살자는 간곡한 내용이더군 요.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저는 아직까지 그 편지에 답장을 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해 말 인 것 같은데 감옥에서 풀려난 박석률이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우리는 감옥에서 같이 있 으니 외롭지 않았는데 세화가 제일 외로웠을 것'이라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지 않겠어요. 옆에 있다면 정말 붙들고 실컷 울고 싶었습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그냥 덤덤한 듯이 물 었습니다. "그래, 너 몸은 괜찮냐", "그래, 괜찮아", 이러고 끊었습니다. -계속- 분단의 상흔 세느강에 씻고…[5] 옥살이 오래 한 친구의 위로전화 -고국이 그립지 않을 리 없을 텐데 견딜만 합니까. =두고 온 나의 벗들, 가족들, 고향산천의 땅이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안간힘을 쓰며 붙 들었습니다. 불현 듯, 또 자꾸만 부르는 유혹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벌써 16년이 됐지만 시 간이 지나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더 세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돌아갈 수 없다'하므로 더 줄기차게 부르는 듯한 환영을 갖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좀 성숙해진 듯합니다. -'갈 수 없는 나라'가 아닌데…. =저는 이미 모순을 살고 있습니다. 고향이 있으면서 없고 조국이 있으면서 없습니다, 매일 '돌아가야지'라고 말하며 동시에 '갈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따지고보면 저의 모순을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고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민족에 고통을 주고 있는 분단의 모순처럼 말이죠. 저는 이 모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좀더 신음해보고자 합니다. -혹시 북한에 가봤습니까. =가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남한에서 나왔다고 해서 북한을 동경한다는 식으로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조국의 남과 북 두 편이 다 잘되기를 바라지 어느 한 쪽만이 일방 적으로 잘 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스스로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합니까. =볼셰비키는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는 사회주의자라고 여깁니다. - 그러나 '사회주의자니까 친북이겠지'라고 말한다면 우습다는 거죠. =그렇지요. 왜 그렇게 이분법적으로만 사고해야 합니까. 분단에서 온 결과인지 모르지만 우 리는 알게 모르게 이분법적 사고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진보를 생각하 기 어렵게 되고 도대체 사람들의 사고가 한 없이 왜소해지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땅, 사람, 사회에 대해 지금 당장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면 질색입니다. 분단유산 이분법적 사고 못 견딘다 -왜소해진 지식인의 폐해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지식인들이 혼을 잃은데다 나태해지고 있다는 것만 봐도 폐해는 뚜렷합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길게 보지 못하고 권력에만 아부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솔직히 한국언론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너무 엉터리예요. 지역적으로 봐도 과거 시베리아 만주벌판까지 누볐던 우리 지식인들이 반도의 절반으로 시야가 좁아진데다 자꾸 분단적 사고에 함몰되다보니 왜소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적을 내부에서 만들고 죽어라 싸우고 말이죠. -우리 정부가 하는 일은 어떤가요. =북한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당연히 비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북한을 포용하 는 정책, 민족화해와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시책을 좀 과감하게 펼 수는 없을까요. 현재는 세계유일의 슬픈 분단국이지만 우리의 목표는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루 는 사회건설, 그리고 평화통일이 아니겠습니까.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이라는 생각도 해봅니까. 분단의 희생자라는…. =그보다는 이청준 소설 <소문의 벽>을 더 생각하게 됩니다. 엣날에는 분단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있었으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학 1학년 때 가족사의 비밀을 알고 충격받아 결국 학교를 그만둔 것이나 그 뒤 인생항 로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그게 어디 작은 희생입니까. =아산의 '황골'이라는 고향마을은 홍 윤 최 세 성씨가 잘 어울려 살던 동네였다고 합니 다. 제가 고향에 가본 것이 대학 1학년 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리 크지 않은 마을에서 1백여 명이 죽었다, 아니 서로 죽였다는 게 맞겠죠. 제 오촌 당숙 등 일곱 사람의 경우 그들의 가 족, 할머니 어린애까지 다 죽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충격은 심했습니다. 특히 '옥토끼'라 불렸다는 동생 민화가 죽었다는 얘기는…. 그 날이 제 인생을 어느 정도 바꾼 게 사실입니다. 악령같은 그 어둠의 기억을 떨쳐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세계평화(世和)가 방황을 거듭하다 끝내 이렇게 파리의 뒷골목을 다 니고 있는 것이겠죠. 그러나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보다 이런 곡절을 겪은 제 삶이 이제는 정말 저와 친해졌습니 다. 좀 성숙해졌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가장 그리운 게 무엇입니까. =군불을 뜨겁게 땐 안방의 뜨끈뜨끈한 구들목입니다. 거기에 들을 대고 누워 마음껏 잠 한 번 자보고 싶습니다. -내년에 망명자 체류신청을 연장하기 전에 마음이 정리돼 조국에 돌아오게 되기를 기대하 겠습니다. =강요로 해석하지 않겠습니다. 제 모순이 빨리 극복된다면 좋은 일이죠. 긴 인터뷰를 끝낸 뒤 퐁피두센터 부근의 프랑스식당으로 가 저녁을 들고 밤늦게 헤어졌다. 맑은 성정을 가진 홍씨가 파리의 뒷골목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목을 짓누르는 듯 한 분단의 아픔 때문에 가슴이 메었다. -끝-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