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14일 월요일 오전 07시 52분 30초 제 목(Title): 퍼온글/박명호 20세기를 이끈 10인의 경제� [74] 제목 : [되돌아본 1백년 ④] 20세기를 이끈 10인의 경제학자 20세기를 이끌어 온 10인의 경제학자를 선정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가장 손쉽게는 학계에서 권위를 지닌 경제전문가들에게 각자 10인의 경제학자 를 지명하도록 한 다음 그 중에서 표를 많이 얻은 순서대로 10인을 선택하면 될 것 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방식에 의해 노벨상 후보가 추천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 및 재원 등이 제한된 상황에서 필자는 비교적 널리 읽히는 경제학사 서적과 일반 대중을 위해 쓰여진 경제이론 관련 서적 중에서 이론의 창의성, 심화 /응용 기여도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을 기준으로 하여 10인의 경제학자를 선정하였 다. 그 결과, 이론의 독창성 기준에서는 케인스·파레토·코스를 선정하였고, 기존 이론의 심화 및 응용에 대한 기여도 측면에서는 새뮤얼슨·프리드먼·힉스·레온 티에프·베커를,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 측면에서는 슘페터와 하이에크를 선정하였 다. 소위 20세기를 대표하는 10인의 경제학자를 뽑아 놓고 보니 20세기 경제학계의 몇 가지 특징을 접하게 된다. 첫째는 20세기 경제학자들은 경제이론의 새로운 패러다 임을 만드는 작업보다 19세기에 이미 만들어진 경제이론을 심화, 발전시키는 연구 를 중점적으로 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0대 경제학자 중에서 케인스를 제외하 고는 모두 기존의 경제이론틀 안에서 연구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경제학의 영역이 과거보다 대폭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최근에 와서는 전통경제학에서는 다루지 않던 주제인 제도·역사 뿐만 아니라 차별·결혼·범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신고전파 경제학의 연구영역은 넓어졌다. 셋째, 경제학이 1870년대 한계혁명 이후 1세기에 걸쳐 이론적으로 정련화 작업을 거친 결과 20세기에는 모든 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엄밀한 이론체계를 갖춘 과학으 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 후반부터는 경제학 분야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우리가 선정한 10대 경제학자 중에도 케인스·파레토·슘페터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벨경제 학상 수상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넷째, 경제학자의 경제정책 형성 과정에 대한 참여 폭이 매우 넓어졌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경제 정책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케인스를 위시하여, 나머지 경제학자들 역시 정책의 이 론적 기초 제공 뿐만 아니라 구체적 정책대안 제시에도 매우 적극적인 공통점을 지 니고 있다. 20세기를 주도한 10대 경제학자를 살펴보도록 하자. ■존 케인스(1883∼1946) 겨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로 평가받는 케인스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기존의 고전파 경제이론체계와는 전혀 상이한 새로운 이론 분야를 개척하였다. 특히 케인스는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정부의 시장개입을 적극 옹호하 였고, 전후 30여년 동안 세계 각국은 케인스의 처방을 수용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케인스가 기존 경제학과 결별하게 된 계기는 1931년의 금융공황이었다.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불황은 2년이 지나 격렬한 금융공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당시 실 업의 원인을 고임금으로 판단하였던 피구를 위시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긴축재정 과 개인저축 활성화를 공황 타개책으로 제시하였다. 그 결과 흔히 재무성의 견해라 고 불리는 정책이 집행되어 임금인하, 주택 및 도로 건설비 절감, 구제금 지출액 삭감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케인스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저축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퇴장이며, 이는 투자를 증진시키지 않고 오히려 고용을 감소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케인스는 유동성 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적인 노력을 반대하였고, 유용한 물건을 사기 위한 지출을 막는 행위를 반사회적 행위로 규정하였다. 즉, 유동성 선호가 반사회적 결과를 초 래할 수 있다는 케인스의 통찰은 이자에 대한 유동성 선호이론으로 발전되었다. 한편, 케인스는 고용량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총수요에 대한 기업가의 예 상이라고 지적하고, 이를 유효수요라고 불렀다. 그리고 유효수요는 사람들의 소비 성향, 투자의 한계효율 그리고 유동성 선호와 같은 제반 심리적 요인에 의해 결정 된다고 하였다. 특히 당시의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효수요의 진작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케인스는 결국 정부가 투자를 사회화해서 각종 공공정책 을 집행해야만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고전파 경제학에서는 오직 기업가와 노동자만을 경제주체로 삼았다. 정부는 시장의 여건 조성 역할만 수행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사회적 통념이 바로 케 인스에 의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케인스의 지적대로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 는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 구시대의 사고에 젖어 있다는 점이다. 케인스는 당시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통념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정부의 시장활동에 의 적극 개입이라는 파격적인 발상을 통해 인류의 경제부흥을 이루는 데 지대한 기 여를 하였다고 평가된다. ■빌프레도 파레토 (1846∼1923) 최적화 개념 도입, 후생경제학의 원조 파레토는 경제학 교과서에서 자주 접하는 이름이면서도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경제학자중 한명이다. 사업가·정치인 등 다양한 경력을 보유하였던 파레토 는 1892년 왈라스가 건강상의 이유로 경제학 교수직을 포기함에 따라 로잔대학에 왈라스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였다. 파레토에 의하면 사람들은 외형적 특징 외에도 지적 능력, 도덕성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동질적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파레토는 사회를 엘리트·귀족·속인의 3계층으로 나누고, 이들 3계층은 상호 끊임없이 교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속인 계층에서 태어난 높은 자질의 소유자가 엘리트 계층으로 올라가는 ‘엘 리트의 순환’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 엘리트 계층에는 자질이 모자 라는 사람들이 누적되고 속인 계층에는 높은 자질의 사람들이 쌓이게 되어 사회적 혼란이 출현할 수 있음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파레토가 경제학 이론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일반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공헌은 사 회적 효용의 극대화에 대한 이론적 정의다. 파레토는 “초기의 어떤 위치에 있더라 도 약간의 움직임으로 인해 일부 사람의 후생이 증가하고 일부 사람의 후생이 감소 하면 이런 움직임이 사회를 위해 유익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움직임일지라도 개인들이 누리는 효용을 동시에 증진시켜 줄 수 없는 상황”을 효용의 극대점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이를 현대 경제학에서는 ‘ 파레토 최적’이라고 부른다. 특히 그는 ‘일반균형’이 파레토 최적이라는 후생경 제학의 제1정리와 함께, 파레토 최적이 초기 자원 배분의 적절한 이전을 통하여 일 반균형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는 후생경제학의 제2정리를 보여줌으로써 현대 미시 경제이론의 중요한 초석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파레토는 왈라스에 이어 미시경제학의 이론적 기초를 누구보다 충실하게 제공하였으며, 통계분석에서부터 소득분배 및 인구 그리고 사회철학문제에 이르기 까지 방대한 경제·사회현상에 대해 절제되고 통찰력있는 시각을 보여주었다고 평 가된다. ■로널드 코스 (1910∼) 거래비용 개념의 도입 코스는 1937년 한 논문에서 ‘왜 기업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바로 이 질문으로 인해 50년이 지난 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신제도학파라고 불 리는 새로운 경제이론의 사조를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코스는 기업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거래비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 거래비용이란 계약을 체결하기 이전 단계에 요구되는 정보의 수집비용, 계약 작성 에 필요한 비용, 계약이 제대로 준수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데 드는 비용 그리고 계 약이 위반되는 경우 이에 대한 벌칙을 집행하는 데 드는 비용 등 모든 거래행위에 수반되는 비용을 의미한다. 실제로 시장이 발전할수록 경제활동에서 거래비용이 차지하는 비용은 증가한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거래비용은 총국민 소득의 45%를 차지한다고 한다. 코스에 따르면 시장에서 발생하는 거래비용이 비싼 경우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업’이라 불리는 위계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중앙화된 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 한편, 코스는 1960년에 ‘사회적 비용의 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시장실패 발생시 정부 개입을 정당화하는 전통적 후생경제학의 명제를 뒤바꿔 놓는다. 코스에 따르 면 재산권의 정의가 명확하고 경제주체간에 협상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어 거래비 용을 무시할 수 있는 경우, 시장실패가 발생할지라도 당사자들간의 자발적 협상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정부의 개입이 불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코스는 이 경우 개인들간의 협상 결과가 어찌되었든 국민소득의 가치나 구성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현재에 와서는 ‘코스 정리’라고 부른다 . 이와 같이 코스는 기업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 거래비용이라는 새로 운 개념을 경제학에 도입하였고, 재산권에 대한 분석 등을 통해 정부 역할에 새로 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특히 거래비용 개념을 제도의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하 는 신제도학파가 코스의 추종자를 중심으로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노스·포겔 등 신제도학파의 일부 경제학자는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1990년대에 이미 노벨경제 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폴 새뮤얼슨 (1915∼) '경제원론'을 세계적으로 보급 국제경제, 생산, 자본, 금융, 성장, 거시경제학 그리고 경제사상사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보여준 새뮤얼슨은 그 어느 다 른 저서보다 자신의 경제원론 교과서인 “경제학”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일 반인들에게 새뮤얼슨은 유명한 경제원론의 저자로 통용되고 있다. 실제로 새뮤얼슨의 “경제학”은 초판이 출간된 1948년부터 지금까지 세계 각국에 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경제학 교과서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새뮤얼슨은 그의 지도교수 슘페터와 같이 경제학의 전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슘페터의 영향하에 작성된 새뮤얼슨의 박사학위 논문 ‘경제 분석의 기초’는 슘페터 자신이 20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경제동학 방법을 다 루고 있다. 새뮤얼슨은 학위논문에서 미·적분학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동학과 정학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바로 이런 수학적 방식을 경제분석에 체계적으로 도입한 실적이 인정 되어 새뮤얼슨은 제2회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새뮤얼슨은 힉스에 이어 신고전학파의 미시적 시장균형이론과 케인스의 거시경제이 론을 접목시켜 신고전파 종합이라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완성시켰으며, 신고전파 종 합은 2차대전 이후 30여년간 경제학계에서 가장 중심적인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 다. 신고전파 종합의 경제정책의 처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제의 완전고용을 위 해서는 적절한 정부 개입이 필요하지만 일단 완전고용이 달성되면 오직 수요, 공급 이라는 시장메커니즘에 맡겨 경제를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서는 과연 그동안 정부의 시장개입 수준이 적정하였는지, 그리고 수요 조절을 통한 경제안정화 노력은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의 구심이 제기되면서 신고전파 종합을 근간으로 하던 경제정책은 본격적으로 도전받 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런 도전은 80년대 미국의 지속적 경제침체와 맞물려 전후 30년간 강단을 지배해왔던 “경제학”의 가르침은 다소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뮤얼슨은 친절한 경제학도들의 스승이자, 탁월한 경제이론가이면서 동시에 적절 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한 훌륭한 경제학자로 남을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 (1912∼) 화폐수량설을 복원, 현대적 통화주의 주창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시장경제이론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갖고 세상사 에 대해 평론을 즐기는 집단으로 평가받는다. 대체로 경제전문가들은 논리가 정연 하고 입장이 분명하기 때문에 논쟁시 상대방에게 상처도 많이 주는 만큼 욕도 많이 듣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프리드먼은 가장 대표적으로 논쟁을 즐기고 남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하 는 경제학자로 통한다. 프리드먼의 일생을 보더라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고집이 없 었으면 학자로서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프리드먼의 성공은 50년대 초반부터 일관되게 당시의 주류이론을 형성하던 케인스 경제학에 대한 비판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프리드먼의 경제학에 대한 기여는 실증주의적 분석을 경제이론의 핵심으로 보는 그 자신의 방법론 연구에서 시작된다. 실제로 그는 박사학위 논문 뿐만 아니라 자신 의 주요 저작이라 할 수 있는 “소비 및 화폐이론”에 이르기까지 실증주의적 방법 에 충실한 연구활동을 하였다고 평가받는다. 프리드먼은 화폐수량설에 관한 연구를 통해 화폐이론에 관한 자신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였다. 특히 화폐수요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 화폐수요는 건강, 교육, 일생 동안 기대되는 소득 등의 장기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므로 안정적이라고 주장하였다 . 그리고 화폐수요가 안정적이면 화폐의 유통속도 역시 안정적이라고 지적한다. 프 리드먼의 이런 주장은 장기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는 케인스 경제학과는 대조를 이 룬다. 프리드먼은 ‘미국의 금융사, 1867∼1960’ 연구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통화주의자 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는 1930년대 공황이 연방준비은행의 서투른 통화정책 때 문에 발생하였다고 진단함으로써 전통적인 케인시안 분석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견해를 다시 한번 제시하였다. 프리드먼은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화폐수량설 의 논쟁을 역사에서 꺼내어 부활시켰다. 신화폐수량설 말고도 룰에 따른 금융정책, 자유변동 환율제, 투기이론과 후기의 안 전성, 계량경제학과 계량경제사 등 그와 결부된 경제학 분야에서의 이론적 공헌과 제안은 무궁무진하다. 50년대와 60년대 케인시안 정책이 경제학계를 지배하던 시기에는 광인 취급을 당하 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실증적 분석을 토대로 자신의 소신을 하나하나 증 명한 결과 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통화량을 신중하게 감시하기 시작하였고, 재정정책 만능 시대는 종식되었다. 물론 같은 시기 프리드먼은 화폐에 대한 이론적 기여를 인정받 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다. ■존 힉스 (1904∼1989) 경제학 최고의 절충주의자 힉스는 20대 약관의 나이에 대체탄력성 개념을 도입해 분배이론의 토대를 구축하였 고, 무차별 곡선을 활용한 새로운 수요이론을 발전시켰다. 또한 1937년에 발표한 ‘케인스와 고전학파’라는 논문을 통해 케인스가 “일반이 론”에서 제시하고자 한 정책적 함의들을 고전경제학의 테두리 내에서 흡수하여 재 해석하였다. 특히 고전파와 케인스의 이론을 절충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도입한 IS -LM 모형은 오늘날까지 거시경제학의 기본 모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힉스의 절충주의적 모습이 가장 부각된 저작은 1939년에 발표된 “가치와 자 본”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왈라스·파레토의 일반균형이론과 뵘바베르크·빅셀의 자본이론은 언어장벽 등의 이유로 영·미권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찌감치 독어·불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힉스는 왈라스·파레토·빅셀·뵘 바베르크의 원저작을 읽으며 이들의 이론들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새로운 경제학 체계를 구축코자 하였으며, 그 연구 결과가 바로 “가치와 자본”(1939)이다. 로잔의 전통과 오스트리안·스웨덴 전통이 묘하게 힉스에 의해 영국에서 계승되었 다. 그리고 바로 이런 업적으로 30여년 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한편 힉스가 50년대 이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경제동학 방법론이다. 힉스가 경제동학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 기존의 경제이론이 균형성장 궤적에 있는 경제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기술진 보와 같은 외부 충격으로 인해 경제가 균형성장 궤적에서 이탈하는 경우에는 이론 적 해석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출발하였다. 특히 힉스는 실물경제가 균형성장 경로에 놓여 있는 경우보다 불균형 상태에 놓인 경우가 보다 일반적이라는 기본 인식 하에 동학방법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트리안 자본 모형을 토대로 하는 신 오스트리안 모형을 개 발하였다. 힉스는 일생을 통해 균형있는 시각과 절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경제학의 제반 분 야에 걸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케인스의 처방을 고전경제학과 융합시키고자 IS -LM 모형을 만들었고, 왈라스와 뵘바베르크를 한자리에 모아 미시경제이론의 근간 을 제시하는 등 현대경제이론의 기초를 다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바실리 레온티에프 (1906∼1999.2) 산업연관표 최초 작성 레온티에프는 일생 동안 오직 한 길만을 걸어온 대표적인 경제학자다. 레온티에프 의 ‘input-output’ 분석은 그가 러시아에 있을 때부터 시작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방법론적으로 개발해 온 분석틀이다. 그 결과 오늘날 레온티에프의 분석 은 세계적으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경제분석 도구의 하나가 되었고, 바로 이 업적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레온티에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시절부 터 경제계획 수립에 조교로 참여하면서 input-output 분석의 아이디어를 갖게 되었 다. 그러다 1925년부터 베를린대학에서 좀바르트 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면 서 산업연관표를 본격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산업연관표는 경제를 다양한 산업 또는 부문으로 분류하고, 산업간 재화와 서비스 의 흐름을 행렬에 의해 체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민경제의 순환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초자료라고 할 수 있다. 레온티에프의 초기 input-output 분석은 실용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 지만, 실제로는 데이터의 부족으로 한 산업의 산업연관표를 만드는 일조차 어려웠 다. 그는 1930년대 미국으로 건너와 5년 이상에 걸친 연구를 통해 미국 경제의 산 업연관표를 만들었다. 특히 당시에는 전자계산기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계산을 수작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이 작업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전자계산기가 도입되면서 각국 정부는 산업연관표를 본격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레온티에프는 산업연관 분석의 취약점으로 지적되었던 가격변화에 따른 투입물간의 대체문제, 기술 조건의 변화가 산업연관표에 동태적으로 미치는 효과 분석, 산업 연관 분석의 동학화 문제 등을 꾸준히 보완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산업연관표가 세계 각국의 경제분석에서 가장 보편적인 경제분 석 수단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게리 베커 (1930∼) 사회현상의 경제적 분석 통한 경제학의 지평 확대 베커는 인종 및 성차별, 범죄와 처벌, 결혼 및 가족제도, 인적 자본론 등 일반 경 제학자들이 다루지 않았던 사회문제들을 개인 효용 극대화라는 경제학 분석틀을 활 용해 연구하였고, 바로 이런 업적이 인정되어 199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베커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흑백 차별문제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을 시도하였 다. 회사에서 사람을 채용할 때 고용주는 단순히 노동자의 능력만을 보지 않고, 노 동자 역시 회사에 일자리를 구할 때 임금만 보고 취직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고 베커는 결국 거래 당사자의 ‘취향’이 거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을 간파하였다. 이를 토대로 개인의 효용함수에 차별에 대한 취향을 도입함으로써 노동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차별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베커는 범죄와 처벌과 관련하여 다른 사회과학자와는 다른 독창적 시각을 제 시하였다. 만일 범죄로부터 얻는 이익이 비용보다 크다면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저지른다고 한다. 즉, 범죄는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개인의 특수한 범죄성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비용과 편익을 계산해 결과적으로 나타난 의도적 행위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범죄 를 줄이기 위해서는 범죄행위의 비용을 증가시키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주장 한다. 이외에도 베커는 결혼, 가족 및 자녀양육 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개인이 자신 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기본 가정하에 경제학적으로 분석하였다. 물론 복잡한 사회문제를 개인의 효용극대화라는 가정 하나에 의존해 분석한다는 점 에서 여타 다른 사회과학자들로부터 ‘지적제국주의’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베커의 사회문제에 대한 명쾌한 분석과 대안 제시는 경제학의 분석틀이 인 류의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슘페터는 케인스와 함께 마르크스가 사망한 1883년에 태어났다. 슘페터는 오스트리 아 모라비아 지방에서 태어나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29세의 나이에 자신의 가 장 중요한 저작이라 할 수 있는 “경제발전론”을 저술하였다. 이후 슘페터는 본대 학의 경제학 교수, 오스트리아 재무성 장관, 민간은행 은행장 등 주요 요직을 경험 하고 32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50년 사망할 때까지 활발한 연구 활동을 전개하였다. 슘페터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경제이론가는 왈라스다. 특히 왈라스의 일반균형이론 에 나타나는 시장간의 상호 종속성 분석이야말로 경제이론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 그러나 왈라스의 일반균형 분석은 정태적 이론이라는 점에서 경기순환 과정 속에 서 불연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하는 경제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슘페터는 지적한다. 특히 경제발전 과정에서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 행위를 강조하는 슘페터는 기업가가 혁신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은행의 신용창출 역할을 강조한다. 여기서 혁신 이란 기업가가 생산요소들을 새롭게 조합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아무튼 20세기의 기업가는 더이상 자본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금융기관의 신용창출을 통한 자금조달 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슘페터에 의하면 이윤이란 바로 창조적 파괴행위를 성공적으로 이끈 기업가의 정당 한 노력의 대가라고 한다. 그런데 한 기업가가 혁신을 이루어 이윤을 얻게 되면 혁 신적인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행위는 곧바로 모방되어 사회 전체적으로는 점차 이윤 이 소멸하게 된다. 슘페터에 따르면 경기순환은 자본주의 경제의 고유한 현상으로 경제는 이론적으로 는 끊임없이 주기적 변동을 거치면서 발전이 가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자본주의 경제의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서 볼 수 있었던 기업가의 의지, 능력 및 열정 등 이 경제가 발전할수록 일상적인 가치로 퇴색하면서 기업가의 입지가 점차 줄어들었 을 뿐만 아니라 혁신 과정이 창의적 기업가보다 기계적인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슘페터의 이론체계는 왈라스의 균형체계에 비하면 논리적 엄밀성에서 미흡하기는 하지만 일반균형이론이 간과하고 있던 경제발전을 기업가의 새로운 생산요소의 결 합에 의한 혁신과 모방 과정으로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경제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된다. 올해로 탄생 1백주년을 맞는 하이에크는 자타가 공인하는 20세기 최고의 자유주의 자라고 할 수 있다. 하이에크는 30대까지는 전통적 오스트리안의 자본이론에다 빅 셀의 누적 과정 그리고 미제스의 화폐적 순환이론을 접합한 화폐적 경기순환이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화폐적 경기순환이론이란 화폐이자율과 자연이자율의 괴리가 생길 때 자본재와 소 비재의 상대가격이 변하고, 그 결과 경기순환 과정이 유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론이다. 그런데 화폐이자율과 자연이자율의 괴리는 은행의 신용창출에 의해 발생한 다는 점에서 경기순환 과정에서 은행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함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은행의 신용창출 역할에 대한 강조는 빅셀·미제스·슘 페터 등 오스트리안 경제학자의 공통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는 2차대전 이후부터는 경제이론가라기보다 자유주의 이념의 전도사로 일 생을 마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체제와의 투쟁이 바로 하이에크의 중년 이후의 세계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복지국가의 폐해와 과도한 정부개입으로 인한 비효율성 그리고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 시장으로의 복귀 정책은 세 기말에 이르기까지 굳건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하이에크에게 시장이란 완전한 이성을 갖춘 합리적 인간들이 완벽한 계획을 갖고 만나는 장소가 아니고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들이 제한된 정보를 갖고 만나는 장소 다. 분권화된 시장에 대한 정보는 시장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다 는 점에서 중앙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어떤 행위도 결과적으로 시장에서 왜곡현상 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하이에크는 강조한다. 하이에크 개인적으로는 1930년대 영국에 건너와 당시의 경기침체 원인 및 극복 방 안을 놓고 케인스와 열띤 논쟁도 펼치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하이에크로서는 완전한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세계는 케인스의 처방대로 경제활동에서 적절한 정부 개입을 인정하는 방 향에서 운영되었다. 케인스와 스타파·칼도어 등 영국의 케인스학파는 하이에크를 집요하게 비판하고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하이에크는 이론적 경제학과 결별하고,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전후 30년이 지나고 나서는 과도한 정부개입이 경기침체의 주된 원인으로 지적되면서 그제서야 하이에크가 50년 전부터 주장했던 신자유주의 처방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역사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장수가 필요조건 임을 하이에크는 보여주고 있다. 박명호 (한국외국어대 교수·경제학과)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