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7일 월요일 오전 05시 36분 08초 제 목(Title): 퍼온글/격동의 현장에 지식인 ■한국 지성사 100년:'지사'에서 '지식게릴라'까지 '격동의 현장'엔 지식인이 있었다 '역사발전 원동력' 평가 속에 새 천년 지식인상 주목…"시대따라 역할도 변해" 새로운 천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위기와 변혁의 시대에 앞장서, 혹은 무지몽매와 억압, 지체와 퇴행의 사슬을 끊고 인간과 사회를 이끌며 진보시켰던 지식인들의 의식과 행동은 역사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전개된 지식인에 대한 논의의 천박성에서도 일부 증명되듯, 우리나라에서 지식인 혹은 지성사에 대한 의미 규정이나 탐구는 매우 취약한 실정이다. 학계의 경우에도 전공자들이 이 부문에 대한 결정적인 연구성과를 냈거나 작업이 진행중이기는커녕, 아직 정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19세기말 이후 현대사로 범위를 잡게 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미묘해질 수밖에 없다. 일제 식민지배와 해방, 좌우대립과 전 쟁, 분단을 거쳤고, 남한의 경우 군사독재와 민주항쟁을 지나 현재의 김대중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길을 걸으면서 지식인의 정체와 역할, 공과의 가치판단이 쉽지 않아진 배경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근현대 지성사를 되돌아보는 학술행사가 개최돼 눈길을 끈다. 6월4일 이화여대 박물관 세미나실에서 개최되는 교수신문 창간7주년 기념 학술세미나가 그것이다. 이 세미나의 주제는 '한국지성사의 회고와 성찰-지난 100년을 중심으로'이며, 주최측은 지 나온 20세기, 한국의 지식인들이 과연 그 역사적 좌표를 올바로 설정하고 그에 따르는 역 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를 짚어 미래의 지표로 삼겠다는 의도를 밝히고 있다. 수많은 지식인 배출 배경은 '선비정신' 세미나는 크게 기조발제와 4개 분과 발제 및 토론, 종합토론의 순서로 짜였다. 기조발제는 이상희서울대명예교수(현 교수신문 고문 겸 상지대 이사장)가 '한국 근현대사 100년 속에 서 지식인의 사명과 역할'이란 주제로 발표한다. 이후 4개 분과는 '일제 식민지 시대(대한 제국부터 해방까지)' '좌우의 이념대립과 정부 수립'(1945~60) '경제개발과 민주주의의 대립'(1960~87) '근대 민주주의의 형성과 시민사회의 성숙'(1987년 이후)으로 갈래를 지어 이 만열(숙명여대 한국사) 조동일(서울대 국문학) 정영태(인하대 정치학) 임현진(서울대 사회학) 교수들이 발제를 맡았다. 이상희교수는 기조발제에서 지식인이란 '일반인보다 더 민감하게 역사적 상황의 규제를 느끼며, 그 시대 그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부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인물'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지식인이 갖는 '역사적 방향감각'은 항상 진보와 혁신, 변화와 실험쪽을 가리키고, 현존 상태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보았다. 특히 '격동과 가혹함의 연속'이었던 우리의 역사과정 속에서 우리의 지식인들은 투옥과 처형, 망명과 표류를 일삼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교수는 지식인의 유형을 서구의 '인텔리겐차'와 '인털렉추얼'로 분류하고, 지난 100년의 우리 역사에도 두 유형이 존재했다고 부연한다. 그리고 이 시기 뛰어난 수많은 지식인들 이 배출된 배경을 우리의 지적 전통, 즉 '선비정신'에서 찾고 있다. 그는 발제문의 말미에서 전형적인 지식인으로 일제하 광복투쟁과 자유당정권 당시 반독재투쟁을 펼쳤던 장준하, 냉전 이데올로기가 기승을 부리던 엄혹한 시절에 중립과 통일을 노래한 신동엽시인을 꼽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인텔리겐차'와 '인털렉추얼' 외에 '테크노크라트'를, '자신들이 가진 전 문지식을 권력이나 자본에 제공함으로써 안주와 영달, 출세를 보장받'고 '권력과 자본의 정 당성이나 정통성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반역의 지식인'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또한 오늘날 우리 지식인 사회의 경향은 테크노크라트, 즉 직업적 기능적 지식인의 확대로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이만열교수가 고찰한 한말, 일제 강점기는 우리나라가 전세계적인 서세동점의 회오리에 휩싸였던 시기다. 따라서 기존의 전통적 지식인들도 구미의 새로운 사조에 어쩔 수 없이 대응해야 하는 세대로 바뀐다. 이만열교수는 이에 따라 먼저 당시 지식인의 형성 유형을 살폈다. 우선 종래의 화이관(華夷觀)과 서양문화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는지에 따라 척사위정 계와 개화계로 나누고 그 대표를 전자의 경우는 이항로 기정진 김중묵 최익현으로 이어오는 일련의 유학자들, 후자의 경우는 김옥균 박은식 등을 들었다. '박학다식'서 '전문적인 지식인'으로 전통적 지식인들과 달리 국내 신식학교 교육이 배출한 지식인들은 남궁억과 주상호(주시경) 등을 찾아볼 수 있고, 해외유학파도 하나의 부류를 형성했다. 일본과의 수교(1876년)후 파송한 신사유람단을 시작으로 1880년대 정부가 특히 일본에 유학생을 본격적으로 보내 일본유학파들은 1910년대초 약 500여명이던 것이 1940년대초 약 3만명에 달할 만큼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조선총독부 관리로 출세하는 길을 택한 이들도 있지만, 민족주의 혹은 사회주의운동에 종사하며 조선공산당운동과 청년 노동 농민운동에 관여한 사례 도 적지 않았다. 이만열교수는 한말 일제강점기가 기존의 세계관의 붕괴와 새로운 질서의 형성에 대응하는 학문과 사상을 구축하는 시기였고, 그 책임을 최일선에서 감당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종래에 통용되던 박학다식의 지식인이 차츰 전문적인 지식인으로 바뀌어갔다고 관찰한다. 여기서 그는 당대의 지식인이 소개 수용 구축했던 사상을 사회진화론과 애국계몽운 동(최윤식 안창호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근대민족주의, 자유주의적 가치관과 민주공화정 이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및 무정부주의 등으로 분류했다. 이만열교수에게서 눈에 띄는 것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항거하는 민족주의운동의 성격을 가졌던 1930년대의 국학연구에 글의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국학 연구의 터전을 마련한 최남선, 일제강점기에 가장 활발하게 국학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국어학 분야의 주시경 김두봉 최현배 김윤경 등의 업적, 한국 근대민족주의 사학을 성립시킨 주역인 박은식과 신채호, 다산학과 실학연구에 앞장선 정인보 안재홍, 백낙준을 중심으로 한 연희전문의 학자들이 열거됐다. 좌우 이념대립과 정부수립기를 다룬 조동일교수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가 지성-문화사 부문에서 커다란 업적을 이뤘다는 평가를 전제로 내세웠다. 그리고 분단상황에서 남북의 체제에 대한 시각에 따라 네가지 유형을 나눴다. 그 가운데 남쪽의 우익체제와 북쪽의 좌익체제가 각기 지닌 편향성을 극복하고 그 대립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선을 찾기 위해 민족문화의 저력을 계승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확대하는 데 힘쓰자는 이들을 '민족지성'이라고 일컬으며 글의 주제로 삼고 있다. 조동일교수가 고찰한 대상은 언어 사상 학문 문학 네 측면이며, 사상에서는 전통철학의 계 승 문제, 학문에서는 대학교육의 측면 등을 다루는데 한정돼 있다. 따라서 언어부문에서 는 조선어학회의 두 주역으로 각각 북과 남을 선택한 이극로와 최현배를 언급했고, 사상부 문에서는 전통철학을 계승해 재창조한 조소앙과, 그와 마찬가지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장하며 이념대립을 넘어설 것을 역설했고 '신민족주의' 역사관을 주창한 안재홍, 안재홍 의 뒤를 이어 좌우익의 대립을 넘어서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통합논리를 제시하려 했던 손진태를 비중있게 다뤘다. 문학에서는 좌익의 이론가인 임화, 우익의 대변자 노릇을 한 김동리 외에 양쪽에 다 가담하지 않고 별개의 단체를 결성하지도 않은 백철 홍효민 염상섭 채만식 이무영 등이 거론됐다. 민주개혁 사회운동 존재해야 비판기능 힘 얻어 뒤이어 1960년에서 1987년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 정영태교수는 '개발연대'로 지칭되는 박정희정권부터 전두환정권까지의 기간에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개발독재에 대해 침묵을 지키거나 묵종했고, 일부는 아예 지지와 찬양에 발벗고 나서 지식인 사회에 대한 여론을 부정적으로 만듦으로써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고 보았다. 지식인들의 침묵과 묵종의 이유로는 독재권력의 탄압과 통제 외에도 당시 학계를 지배했던 근대화 패러다임이 가져온 폐단을 지적했다. 즉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성취돼야만 정치사회적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경제발전이 저절로 정치사회적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처럼 가정함으로써 개발독재를 정당화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전통과 가치를 극복대상으로 상정해 대외종속을 심화시키고 민족주체성과 자긍심을 상실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지식인이 비판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사회가 이념적 이론적 개방성과 다원주의를 유지해야 하고, 시민사회의 활성화나 시민사회 내에 강력한 민주개혁적 사회운동이 존재해야만 지식인의 비판기능이 학계 내에서는 물론 바깥 현실에서 도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1987년 이후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시민사회의 성장을 다룬 임현진교수는 세 부분으로 나눠 논의를 전개했다. 그 첫째는 현대사를 통해 본 지성상인데, 임교수는 해방이후 우리의 대표적인 지식인 형태를 기능적 지식인과 비판적 지식인 두 부류로 나눴다. 그는 체제에 대한 저항과 비판과 도전에 주저하지 않은 집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의 지식인들이 해방공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왔고, 그들의 투쟁과 고통이 없었더라면 1987년 민주항쟁을 전기로 한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정치지형의 변화, 사회운동의 확장,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 관계의 재편이라는 한국 민주화의 궤적과 그에 따른 지식인의 변모를 논하면서 1987년 이후 지식인이 국가나 사회운동과 맺는 관계는 민주화 전문화 정보화 지구화라는 조건들에 의해 그 이전 시기와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즉 지식인의 대다수는 체제타협적 참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도 않지 만, 그렇다고 체제비판적 도전을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수긍하지도 않는 양가적인 이중성을 보여주며, 이것이 청년층으로 갈수록 보다 확연해진다고 관찰했다. 지난 100년의 한국지성사를 회고하고 성찰한다는 것은 분명 중요하고 관심이 쏠리는 기획이다. 그럼에도 각 시기별로 때로는 지식인의 역할이, 때로는 그 범주 설정이, 그렇지 않으면 당시 목소리를 냈던 지식인들의 정체가 명확치 않다는 인상을 남긴다. 자연과학 분야가 배제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편중돼 있다거나(이것은 참석자들의 전공을 보아도 그렇다), 여성 지식인에 대한 탐색이 전무하다시피 한 점은 행사당일 토론에서 보완될 수 있다 하더라도 아쉽고 부족한 점이다. 이런 문제점들은 한국 근현대지성사 연구의 어려움과 연결된 '원초적 한계'로 여겨지기도 한다. 90년대 후반 지성계의 지형은 다변화, 파편화한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기존의 지식인이라는 타이틀 외에 '지식 게릴라'라는 용어까지 등장할 정도로 그 미치는 범주와 역할과 외형이 변화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김대중대통령의 '신지식인'론이 전개되면서 언론과 지식인 사회에 분분한 논란과 비판, 반발이 일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종래의 '지사적 지식인'은 존재하지도, 유용하지도 않은 것 같다. 그렇다 면 현재의 지식인의 역할과 모습은 과연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이는 우리 앞에 던져진, 아마도 한두번의 세미나로는 풀릴 수 없는 지난한 화두가 아닐까 싶다. 김영신 기자 ------------------------------------------------------------------------------- - Copyright(c) 1999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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