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1일 화요일 오전 02시 07분 01초 제 목(Title): 장회익/21세기 과학기술의 전망과 새 문명� 21세기 과학기술의 전망과 새 문명 건설의 과제 장회익 [1] 시간의 연속성을 신뢰하는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세기 또는 새로운 천년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어떤 우연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로 이 시점이 인류 문명사에서 하나의 큰 역사적 전환점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인간의 '개척적 자기실현'을 지향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반성적 자기조정'에로 그 지향점을 바꿔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내는 것을 삶의 지향점으로 삼아왔다. 지금까지는 '원하는 바' 즉 소원이 무엇인지는 심각하게 물을 필요가 없었다. 소원은 항상 있어왔으며 오직 그것을 이룰 방법과 수단이 문제였다. 그러나 과학기술이라는 엄청난 행위수단을 손에 넣게 된 지금은 그 행위의 결과가 '사실상의 필요'를 넘어서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모두 성취할 경우 이는 '적정의 성취'를 크게 넘어서 오히려 치명적 피해를 입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제 인류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는 "어떻게 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 '원하는 바'를 어떻게 '적정의 성취'에 맞추어 조정해낼 것인가" 하는 점이 된 것이다. 이것은 결코 배부른 자의 사치스런 고민이 아니다. 배고픔을 참고 살아가기도 어렵지만 음식을 앞에 두고 이른바 다이어트를 한다는 것 또한 이에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훨씬 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설혹 개별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생존에 실패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전체 인류와 생태계의 장기적 보존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원하는 바'에만 따르는 이러한 과잉의 성취는 인류의 생존 터전 자체를 치명적으로 훼손함으로써 인류의 장기적 존멸의 위기를 자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지향점을 바꾼다는 말은 물론 '원하는 바'를 성취시켜나가야 할 이전의 활동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거나, 혹은 이전 시기에는 '원하는 바'에 대한 조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시대사적 중요성에서 이제 '원하는 바'의 성취보다는 '원하는 바'의 조정이 상대적으로 더 큰 비중을 지니게 될 시점에 이르렀음을 말하는 것이다. [2] 우리가 이제 이러한 역사적 전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 세기의 과학기술이 어떻게 전개되리라는 전망을 내리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그것은 인류가 20세기적 역사의식의 바탕 위에 활동을 진행할 것인가, 혹은 21세기적 역사의식의 바탕 위에 활동을 진행할 것인가 하는 점이 몹시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당위적으로 보자면 새로운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활동이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현실로 보면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짙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리없이 현재의 지배적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예상을 해보고, 이것이 초래할 위험성과 함께 가능한 대안을 살펴나가는 길을 택하기로 한다. 한 시대의 과학기술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수요에 의해 크게 좌우될 것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먼저 오늘 이 시점에서 표출되는 '사회적 수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두드러진 흐름이 형성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크게 고양되어가는 소시민적 소비욕구인데, 이는 물론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특히 자본주의 경제가 세계를 장악하면서 이것을 구조적으로 부추겨나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국가의 권위나 안보를 위한 대규모 무기체제라든가 우주개발 또는 초대형 가속기를 만들겠다는 염원이 소시민적 소비욕구에 앞서 사회적 우선순위를 점유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소비재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경제가 최우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소비'라는 것은 유형적 상품뿐만 아니라 의료를 비롯한 각종 써비스와 무형적 문화상품의 소비까지를 함께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수요를 형성하는 다른 하나의 두드러진 흐름은 점차 확산되는 환경보존적 관심에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닥치는 일차적 피해만을 우려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최소한 당위적 측면에서 환경을 희생해가며 개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사회적 수요'를 인정한다면, 21세기 산업의 중심축은 거대 에너지와 다량의 물자를 소모하는 '에너지-물자 중심'의 형태에서 새로운 사고와 정련된 지식을 요구하는 '정보-지식 중심'의 형태로 옮겨가리라는 예상을 해볼 수 있다. 환경적 여건에 의해 에너지와 물자는 날이 갈수록 희귀해질 것이고 반대로 정보와 지식은 날로 증가할 것이므로, 최소한의 에너지와 물자를 사용하고도 시민적 기호에 가장 적절한 제품을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정보와 지식을 투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크게 각광받는 정보공학과 생명공학은 적어도 당분간 비약적 발전세를 지속할 것이 예상된다. 특히 '정보-지식'의 한 축을 담당하는 정보공학은 컴퓨터의 '굳은모'(하드웨어)와 '무른모'(쏘프트웨어)의 지속적 혁신 및 통신기술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한동안 놀라운 변모를 지속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지수함수적 발전이 무제약적으로 계속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지닌 한계상황은 정보기술 자체에서도 올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이와 맞물려 돌아가는 또하나의 축인 '지식'의 발전 상황에서 오게 될 공산이 크다. 즉 지식과 정보의 관계는 뼈와 살의 관계에 해당하는데, 정보라는 살에 비해 지식이라는 뼈가 충실하지 못하면 정보 또한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지식'산업과 이를 뒷받침할 체계적인 '지식'이론이 여기에 걸맞게 발흥하지 못한다면, 고급 컴퓨터를 들여다놓고 게임이나 하고 앉아 있는 상황이 되고 말 것이다. 반대로 아직은 그 싹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다음 세기에는 지식 자체에 대한 복합적 이해를 추구하는 '지식과학' 심지어 '지식공학'의 등장 가능성 또한 조심스럽게 점쳐볼 수 있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과 함께 갑작스런 정보기술의 보급은 예기치 않은 사회ㆍ문화적 문제들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의 육체노동뿐 아니라 정신노동의 자리까지 무서운 속도로 잠식해들어옴으로써 엄청난 고용불안의 사태를 야기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 남겨지는 작업은 농업을 비롯한 일부 기초생산 분야와 컴퓨터가 해낼 수 없는 극도의 고급지능 분야로 양극화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복제인간의 가능성을 두고 한창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생명공학 또한 짙은 우려 가운데에서도 발전을 지속할 공산이 크다. 이는 물론 과학자들 자신의 공명심을 동반한 성취욕구에 기인하는 면도 있겠으나 좀더 기본적으로는 이 과제가 첨예한 소시민적 관심사인 건강과 식량 문제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의 무분별한 개발을 통해 장기적 건강 유지와 안정적 식량 공급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인류가 그나마 실낱 같은 기대를 걸어볼 만한 것이 바로 생명공학이기도 한 것이다. 20세기 후반기 이래 급속한 진전을 보이는 분자생물학은 바로 이러한 기술을 가능하게 할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으며, 앞으로 몇년 안에는 인간 유전자 배열의 완벽한 해독을 포함한 몇몇 획기적인 학문적 성취가 기대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을 기반으로 생각해본다면 곧이어 유전자 조작기술의 발전에 따른 각종 인공장기가 등장하고 유전자 치료가 가능해질 것이며, 또 유전자 이식기술로 배양된 새로운 인공식품들이 다량으로 활용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생명공학의 성과는 물론 적지 않은 우려를 야기하고 있다. 이는 특히 인간복제에 대한 윤리적 문제와 관련하여 첨예한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복제인간이 출현할 경우 종래의 인간 개념 자체에 커다란 혼란이 올 것은 물론, 이들에 대한 사회적ㆍ윤리적 대처방안이 엄청난 문제들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의 현실화를 억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마냥 미루기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현가능성만으로도 이것은 이미 문제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에 관한 사회ㆍ윤리적 대처방안이 심도있게 모색되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기왕의 편협한 인간중심적 가치관을 반성하고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인류의 정신문화에 보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우려해야 할 점은 이러한 생명조작 기술이 지구생태계에 부과하는 직접적 위협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산업문명을 통해 지구생태계는 이미 두 가지 측면에서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다. 그 하나는 인간 및 인간에 의해 심각하게 변형된 사육종들이 지구상 대부분의 주요 생존 터전을 점유함으로써 야생종들의 생존 터전이 급속히 줄어들고 이로 인해 진화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의 멸종사태가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대규모 물리적 환경이 지구 자체의 자연정화 능력을 크게 넘어서는 정도로 오염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더하여 다시 유전자 조작을 통한 각종 변종들을 무제약적으로 산출해낸다면, 제아무리 철저한 보안을 기한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언젠가는 생태계의 일부에 노출될 것인데, 이는 결국 우리 생태계에 궤멸적 파국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문제에 당면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른바 환경과학 그리고 환경공학에 기대를 걸고 있다. 우리는 물론 이러한 학문적ㆍ실천적 노력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해야 한다. 이러한 학문적 과제 속에는 기왕에 발생한 각종 환경오염을 정화하는 문제들을 비롯하여 공해방지기술, 그리고 좀더 넓게는 대체에너지, 대체물자, 손실 방지 등의 기술이 포함될 것이다. 특히 몹시 성가신 각종 폐기물 문제가 여기서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게 될 것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힘겨운 투쟁이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노력만으로 현재 진행되는 전지구적 규모의 생태계 교란과 환경훼손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발생한 손상만 하더라도 이미 영구히 되돌릴 수 없게 된 것이 너무도 많으며, 이러한 생태계의 손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범위와 규모에서 점점 더 커져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에 반해 현단계의 환경공학적 기술이 손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주로 사후처리적인 성격의 것이며 그 영역도 극히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환경기술의 이러한 제약은 단순히 이것이 초보단계에 있기 때문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이 지닌 이념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어서 그 어떤 획기적인 학문적ㆍ이념적 진전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 문제에 대한 의미있는 해결이 어려우리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3] 그렇다면 그 대안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인류문명은 어려운 환경여건을 어떻게 극복하고 안정된 생존기반을 마련할 것인가에 그 일차적 관심이 모아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사에 입각하여 발전한 현대의 과학과 기술은 자연 안에서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그 지식의 형태가 짜였다기보다는 자연을 조작하여 '원하는 바'의 결과를 성취하기에 적절한 형태로 짜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서도 이들 사이의 '전체적 연관성'을 파악하려는 것보다는 조작과 제어를 도모하기에 유용한 형태의 '부분적 확실성'을 확보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20세기 문명이 보여준 대표적 특성인 전문화ㆍ분업화가 바로 지식의 이러한 성격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원하는 바'의 내용 자체를 검토하는 것이 주된 과제가 되는 새로운 상황 아래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결과들을 예상할 수 있어야 하므로 사물간에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전체적 연관성'의 파악이 중요한 위치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경우 전체적 맥락을 알지 못하는 부분적 지식은 오히려 폐해를 조장하는 결과를 줄 수 있으며, 이러한 폐해는 그 행위의 규모가 클수록 증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기술적 능력이 크게 신장될 것으로 예상되는 다음 세기에는 부분적 확실성에 입각한 이러한 지식의 형태가 더욱 위험시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추구되는 환경과학과 환경공학조차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성격의 지식에서 유래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21세기 새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와는 다른 형태의 지식이 요청될 것인데, 이렇게 형성된 새 학문은 분화보다는 통합지향적 성향을 가지며, '부분적 확실성' 못지않게 '전체적 연관성'을 조망할 수 있는 강한 투시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특히 미래사회에서 부딪치게 될 대부분의 중요한 문제들은 그 구성물들 사이에 비선형적 연관관계를 지니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주로 선형적 연관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기존의 학문체계만으로는 다루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한편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연관을 함축하는 통합적 학문체계에 도움을 구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깊은 직관에 의해 유형적 지식의 영역을 뛰어넘을 수 있는 그 어떤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윤리적 직관과 심미적 감성까지 아우르는 그 어떤 지혜의 영역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전통문화에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한국인의 문화적 뿌리를 형성하는 동아시아의 전통문명 속에서도 때묻은 외피만 잘 걷어낸다면 깊은 직관에 의해 다듬어진 귀중한 지혜의 맥을 짚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하여 서구적 합리성의 틀을 벗어던지고 그 대안을 동아시아의 전통문화 속에서 찾아보아야 한다는 성급한 목소리에 대해서는 일정한 경계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선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것이 옷을 갈아입듯이 손쉬운 일이 아니다. 패러다임 자체는 어떠한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기 관념의 틀, 그리고 삶의 방향까지 내맡겨야 하는 총체적 성격을 가진 것이므로, 이것의 전환은 최소한 내면 깊은 곳에서 "과연, 그렇군!" 하는 심적 공감을 얻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과학의 지식과 과학적 합리성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현대의 지식인들이 적어도 그 지성의 긍정적 측면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으면서 곧바로 동아시아의 전통사상 속에서 이러한 공감을 얻어내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만일 어느 누가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했다고 할 때, 과연 그가 현대과학이 말해주는 유의미한 내용들까지 함께 포용하는 의미에서의 새 패러다임에 도달한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알다시피 동아시아의 전통문명은 근대과학을 독자적으로 배양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바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이것을 성공적으로 수용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적 세계관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부르짖는 외침 속에는 다분히 과학을 미처 수용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명의 바퀴만을 되돌려놓으려는 퇴행적 자세가 섞여 있다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이 그 안에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깊은 직관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삶의 양태를 좀더 크고 깊은 틀에서 사고해온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접근방식은 현대과학적 사물이해와 동아시아적 전통사상을 상호보완적으로 수용하는 일일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우리가 진지한 반성의 자세만 취할 수 있다면 현대 서구과학의 틀 안에서라도 오늘 우리가 당면한 생태학적 문제와 그 해결의 실마리를 얻어내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만으로는 그 이해의 폭과 실천의 능력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 동아시아적 직관을 다시 곁들여 얹게 된다면, 불완전한 이해의 결함을 직관적 지혜를 통해 보완하고 불충분한 실천력을 치지역행(致知力行)의 도를 통해 보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단순한 통합 이상의 상승효과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토론 1 21세기에 서 있는 과학자의 모습은? 황우석(黃禹錫)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21세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현재보다 더욱 사회발전의 중심부로 이동할 전망이며 그 가운데서도 생명공학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원동력이 될 것이다. 생명공학에 관여하는 과학자들조차 21세기에 도래할 생명공학의 구체적인 상을 잡기 힘들다. 대체로 난치성 질병을 퇴치하여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등의 업적을 갖고 올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동시에 경도된 생명공학기술에 의해 초래될 생물학적 위험성은 생물재해(bio-hazard)의 개념에서 생물테러리즘(bio-terrorism)으로 바뀔 정도로 심각한 단계를 맞을 것으로 전망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복제와 유전자 조작 등의 생명공학기법과 그 결과물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심지어는 연관 과학자들조차 이것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실정이다. 바로 이와같은 측면에서 "원하는 바"의 조정이 상대적으로 더 큰 비중을 지니는 시점으로 21세기의 문명사적 의의를 정의한 장회익 교수의 의견에 동감하면서, "적정의 성취"를 크게 넘어서지 않는 '과학적 안전지대'를 설정하는 지혜의 집적이 필요한 시기로 보고 싶다. 생명공학은 과거 불가능하게 보였던 많은 것들을 실현하며, 최근의 1년은 과거 십수년의 과학주기에 해당될 정도의 빠른 속도로 기술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인간의 잘못된 유전자를 읽어 이를 진단하고 정상유전자로 교체하여 고질적 유전병을 고치는 한편 인간의 장기를 지닌 유전자를 다른 동물에 발현시켜 장기를 공급받고자 하는 실험까지 행해지고 있다. 이들 기술은 적어도 10년 이내에 실용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생명공학에 대한 이같은 전망은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더라도 순기능적인 측면만 내세운 과장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생명공학기술의 무분별한 적용으로 인해 초래될 역기능의 내용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불치병을 치료한다는 유전자 요법은 아직 불확실한 기술이며 유전자 조작을 가한 동ㆍ식물들이 자연계에 대규모로 노출되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생태계 교란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느 기술이 실현가능성 탐색단계를 지나 실제 적용하여 당장이라도 현실화할 수준에 이르렀다면 이미 그 기술은 달성된 것과 진배없을 것이다. 성체의 체세포를 이용하여 복제동물을 생산하는 기술이 국내외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현시점에서는, 세포학적으로 동물과 유사한 인간복제의 가능성은 두말할 나위 없는 문제일 것이다. 즉 이는 이미 가능성의 문제라기보다 적용 여부에 대한 사회적 동의와 그 실현시기의 선택문제가 된 것이다. 오히려 인간복제 단계를 넘어 열성유전자를 제거해 대량생산한 '맞춤인간'들이 실제 인간들을 대체할지도 모른다. 특히 주목할 점은 생명공학이 과학자들의 순수 연구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1973년 생명공학의 핵심적 기술이라 평가되는 유전자재조합기술이 개발된 이래 8,90년대를 거쳐 생명공학산업은 '21세기를 이끌어갈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선진국들은 이미 막대한 연구비를 들여 이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자본의 논리에 따른다면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우리의 식탁에 질 높은 농산물을 제공하는 이 황금알 같은 산업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생명공학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쥔 사람은 바로 생명공학 자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일 것이다. 생명공학이 많은 부분에서 실제 결과물이 배출될 정도의 성숙단계까지 진행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아직 연구실 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실제로 연구의 진행정도와 그 결과에 대한 예측에 누구보다 접근해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과학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연구가 가져올 폐해에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전자 조작기술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제한된 구역에서만 사용하는 특수 배지(培地)에서 이들을 다루어 결과물들이 외부에 유출되었을 경우에는 스스로 사멸토록 하는 조처 등이 좋은 사례이다. 실제로 구미 선진국의 과학자들 중에는 이러한 연구들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을 폭로하고 사회적인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는 데 앞장서는 사람들도 있다. 과학자들이 올바른 도덕성으로 무장하고 실험에 임한다면 과학의 결과가 오용되는 일은 어느정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자율적 윤리규정에만 맡길 경우 과학의 본질인 호기심이나 외력에 의해 이러한 통제수위는 위험영역을 넘나들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젝트와 연구비로 과학자들이 통제되는 현재의 씨스템에서 과학자 개개인의 도덕적 완성도에 따라 연구를 포기해줄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 생명공학과 인간복제 등은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사항이라 과학자 스스로도 어디까지가 도덕적으로 가능한가를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사회체제의 권력이나 자본의 계획적 의도가 연구과정에 결합된다면 과학자들의 자력통제는 불가능해진다. 2차대전 당시 원자탄을 제조한 '맨해튼 계획'을 돌이켜보면 자신들의 연구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연구 과정에만 몰두한 과학자들을 볼 수 있다. 장회익 교수의 발제문은 생명공학의 결과에 의해 초래되는 지구생태계에 대한 직접적 위협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지구 자체의 자연정화 능력을 넘어서는 물리적 환경의 오염 문제의 대안으로 환경과학 또는 환경공학에 대한 기대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공학은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것이 필연적이며 환경공학과는 상치되는 개념이므로 이들을 지혜롭게 조화시키는 환경생명공학의 설정을 추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과학자뿐 아니라 윤리학자ㆍ사회학자ㆍ철학자 등이 모여 이에 대한 통합학문의 기술적 체계를 설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이를 알리고 생명공학의 연구 범위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얻어야 할 것이다. 이 사회적 동의는 연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의 방향을 정하고 한계를 긋는 수단이 될 것이며 과학자들은 안정된 바탕에서 인류복지 구현을 위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발제자가 제시한 "전체적 연관성"을 조망할 수 있는 강한 투시력이 필요하다는 중간 결론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리라. 아울러 서구의 합리성을 배제한 채 섣불리 동양적 세계관에 의한 패러다임 전환을 기해보고자 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과학을 미처 수용하지 못한 상태에서 문명의 바퀴만을 되돌려놓으려 하는 퇴행적 자세"라고 평가한 부분에 공감하는 바이다. 어쨌든 이미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는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분자생물학자이며 생식유전학의 대가 리 씰버(Lee Silver) 박사는 "생명공학이 가져올 미래는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인간복제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오히려 잿빛 미래를 낳을 확률이 높다"고 말한 바 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어떠한 '희망'을 찾아내고 그것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특히 그 가운데 상당부분은 과학기술자들의 몫이어야 할 것이다. 토론 2 환경정의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하여 권혁범(權赫範)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연초부터 21세기에 대한 요란한 담론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다분히 선정적인 종말론 아니면 테크노유토피아에 대한 호사가적인 관심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지금까지 인류를 이끌어온 지배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해나가지 않는다면 지구사회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진지하고 절박한 의지가 부분적으로나마 담겨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은 1999년이라는, 다소 수리적으로 불안해 보이는 해의 벽두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만은 아니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그동안 한국사회에서는 근대 정치경제학적 인간론에 기초한 패러다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여러가지 노력이 이미 생명ㆍ생태지향적 운동과 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의 한가운데 서 있는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장회익 교수는 발제문을 통해서 한마디로 '사실상의 필요'를 넘어선 '원하는 바'의 과잉 성취가 인류에게 부과하는 치명적 위협을 경고하며 '원하는 바'를 '적정의 성취'에 맞게 재조정해낼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일종의 문명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부분적 확실성'이라는 이념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과학, 특히 요즘 신바람난 정보공학과 생명공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이 인간과 지구생태계를 파국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다. '전체적 연관성'을 무시하고 '부분적 확실성'에 몰입할 수밖에 없으며 '원하는 바'의 성취가 궁극적으로 전체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 무관심한 현대 과학기술은 '원하는 바'를 재조정해야 할 새로운 문명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윤리적 직관과 심미적 감성을 포괄하는 동아시아의 생태친화적 전통사상을 현대과학적 사물이해와 결합함으로써 이러한 재조정을 위한 대안적 패러다임에 근접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류에게 자기반성적 조정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 발제자의 주장에는 대체로 공감하고 동의한다. 하지만 여러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짧은 글이란 한계는 있었겠지만, 추상적인 전망과 과제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구체적 측면들이야말로 더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선 '사실상의 필요'를 넘어선 인류의 과잉성취에 관한 것이다. 지구의 전체 인구가 필요로 하는 식량이나 생필품의 생산이 수량적 차원에서 보면 부족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현재 8억명이 기아상태에 있고 매년 1800만명이 넘는 인구가 기아 및 관련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어떤 학자들은 이 원인을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이라고 꼬집었다. 그것은 국내적 차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전세계적 차원에서의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비판하는 말이다. 따라서 제3세계의 다수 인구에게 '적정의 성취'는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이들의 성취로부터의 소외와 박탈이 '과잉성취'의 필연적 결과임은 그동안 저발전연구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인류'라는 말도 어폐가 있다. 그것은 과잉성취의 책임자ㆍ수혜자를 피박탈자ㆍ피해자와 얼버무려 동일시하는 정치ㆍ사회적 암시를 낳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북의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책임, 남의 일부 및 북의 다수 과잉소비계층의 책임을 완화하는 보수적 기능을 할 위험이 있다. 물론 반생태적 생산과 소비로 인한 피해는 장기적으로 볼 때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한다. 그것이 인류 공동의 과제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단기적이고 지리ㆍ공간적인 차원에서 그 책임과 부담이 지구의 사회적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방향으로 주어진다는 점이 좀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 자연파괴의 재앙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과잉성취의 열매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듯이, 재앙과 위험은 지구적 약자에게 '지금 여기에서' 직격탄을 날리면서도 부자와 강자에게 그 피해를 지연시킬 여유와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국내적ㆍ국제적 차원의 구조로 인해 인류의 과잉성취에 대한 기본적 수혜로부터 대다수가 소외되고 지구적 약자에게 환경파괴의 부담이 일방적으로 전가되는 현실에서 '원하는 바'의 재조정은 불평등한 재분배체계의 변혁의 요구로부터 멀어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요구는 여전히 유효하고 치명적이며 우리의 치열한 관심을 요하는 문제이다. 물론 전통적인 남북간ㆍ민족간ㆍ계급간의 차별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산업문명의 반성적 재조정에 대한 인류적ㆍ보편적 요구가 희석될 위험이 없지는 않다. 가령 서구 중산층의 생활수준 및 양식을 기준으로 한 평등ㆍ불평등싸움 그리고 좌우파의 근대화지상주의는 반성적 재조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라는 점은 뚜렷하다. 그러한 차별성에만 입각한 전통적 정치투쟁은 재분배의 불평등구조에만 시야를 한정함으로써 산업생산체계의 반생태적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제3세계의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이 불평등한 국제구조에 대한 불만을 활용해 근대산업문명에 입각한 발전을 계속 밀고가려는 목소리를 경계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런 양면성을 고려할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류적' 시야와 '차별적' 시각의 균형이다. 다음으로 정보공학과 생명공학을 중심으로 한 현대의 반생태적 과학기술을 어떻게 제어하느냐의 문제이다. 그것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할 것이지만 그 결과 동시에 치명적 고용불안을 야기하고 생태계의 교란과 궤멸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발제자는 그것이 자연 안에서의 조화로운 삶보다는 자연을 조작하여 '원하는 바'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고 본다. 전체적 연관과 맥락을 무시ㆍ부정하는 과학기술의 이러한 성격은 '원하는 바'가 성취되었을 때의 모든 가능한 결과에 대한 예방적 논의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합지향적이며 전체적 연관을 중시하는 새로운 학문체계와 패러다임에 대한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학문내적, 과학 내부에서의 논의와 패러다임 변화에 의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기본적으로 반유기체적이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을 일정한 기계적 추상체계에 의해 해체ㆍ분리하고 해체된 부분에 대한 미시적 분석과 공학적 변형을 통해서 '원하는 바'를 성취하려는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그 '원하는 바'는 과학기술 자체가 갖는 영원한 혁신 요구의 속성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이윤극대화라는 법칙에 의해 끊임없이 규정되고 변화된다. 생명에 대한 기계주의적 환원주의는 생명-유기체의 전체성을 해체, 자유시장경제에서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 여러 부분들을 주조해냈다. 따라서 과학기술은 단순히 학문적 발전이나 전환, 통합에 의해 달라지기 어렵다. 과학기술에 대한 외부적 통제, 특히 문화적ㆍ정치적 힘에 의한 통제가 필요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부분적 확실성'이 초래할 위험을 경고하고 그것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사후에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은 과학 내부의 패러다임 전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과학 밖에서의 과학에 대한 통제에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문화적 힘이다. 이 힘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기술의 민주주의적 통제만이 부분성ㆍ전문성ㆍ분업성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논의는 과학 자체의 이념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되고, 그것은 반드시 과학을 그 자신의 부분으로 통합하고 있는 문화적 차원에서 그리고 현실의 정치경제적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과 연관되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이러한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한 민주적 통제가 과학기술에 대한 성공적 통제를 이뤄낸다 하더라도 현대산업문명의 반생명적 본질을 자동적으로 변경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주의가 달성하려는 목표의 내용은 당대에서 이미 과학기술과 시장경제에 의해 필요와 욕망이 규정된 대다수 지구주민의 생활양식과 의식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많은 민주주의나 민주적 통제만으로는 부족하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을 친생태적으로 전환하려는 문화적 운동은 매우 중요하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과학기술을 시장경제의 요구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려는 필연적 경향을 갖는 생산자에 대한 정치적ㆍ사회적 통제(민주주의)와 소비자의식의 자발적 변화(문화)의 병행이 요구된다. 그 문화적 움직임의 방향이 발제문의 지적대로 서구적 합리성을 완전히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친생태적 동양사상에 대한 재해석에 기초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추상적 새 패러다임을 고정된 미래의 환경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청사진으로 못박아놓고 그것에 의거하여 현실을 바꿔나가려 할 때, 과거의 전통적 좌파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 생명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단순한 관념체계에 그것을 무리하게 종속시킴으로써 매우 본질주의적이고 교조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거대한 추상적 패러다임을 지나치게 믿지 않아야 한다. ■ 발제자의 답변 황우석 교수는 그의 토론에서 생명공학이 이미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에 대해 우려를 표방하고, 특히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쥔 과학자들의 책임을 환기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자뿐 아니라 윤리학자ㆍ사회학자ㆍ철학자 등에 의한 통합적 연구체제의 수립을 제안하면서, 환경과 생명을 함께 고려하는 '환경생명공학'의 필요성과 함께 '적정의 성취'를 크게 넘어서지 않는 "과학적 안전지대"의 설정을 촉구한다. 발제자는 이 모든 의견에 대해 기본적으로 공감하며, 발제자가 미처 지적하지 못한 중요한 몇몇 사항들을 짚어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다만 황교수가 제안하는 '과학적 안전지대'라는 것이 과연 '안전한' 것일 수 있는지, 혹은 이른바 '환경영향평가' 같은 안전에 대한 또하나의 허상으로 끝나지나 않을지 일말의 우려가 남는다. 다음으로 권혁범 교수는 "추상적인 전망과 과제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구체적 측면들이야 말로 더 중요한 것"이라는 전제 아래 대략 다음의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로 불평등한 분배구조 속에서 '적정의 성취'를 논의한다는 것은 수혜자와 피해자를 얼버무려 과잉소비계층의 책임을 완화시키는 보수적 기능을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며, 둘째로 현대의 반생태적 과학기술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학문내적 논의와 패러다임 변화로는 불충분하고 외부적 통제, 특히 문화적ㆍ정치적 힘에 의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셋째로 고정된 미래의 환경유토피아라는 추상적 새 패러다임은 자연과 생명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단순한 관념체계에 그것을 무리하게 종속시킬 위험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발제자는 둘째 항목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으며, 이는 또한 발제의 내용과도 부합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첫째 항목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을 달리한다. 흔히 생태적 논의가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희석한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으나, 이는 오히려 문제를 거꾸로 접근하는 일이다. 이 두 문제는 함께 제기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며 함께 제기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단지 발제문에서는 주제의 성격상 '사회내적 문제'를 명시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점에서 권교수가 말하는 '인류적' 시각과 '차별적' 시각의 균형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고정된 환경유토피아' 패러다임에 대한 우려에 대해서는 다소의 오해가 있지 않은가 한다. 발제에서 말하는 것은 결코 '고정된 환경유토피아'를 지향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에 대해 좀더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존의 잘못된 관념을 고쳐나가자는 것인데, 종종 느껴지는 이에 대한 반지성적 혐오야말로 진실로 우려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