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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5월 28일 금요일 오후 01시 10분 20초
제 목(Title): 책/코오진-맑스주의 그 가능성의 중심


자본론 해석은 끝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 그 가능성의 중심 

가타리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이산(02-334-2847) 펴냄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58)의 대표작 <마르크스주의 그 
가능성의 중심>이 번역돼 나왔다. 

본디 이 에세이는 1974년 일본 문예지 <군상>에 연재한 것이다. 그가 이 글을 쓰던 
일본과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많은 점에서 닮았으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적군파와 공산당 극좌파가 결성한 ‘연합적군’이 규율 위반을 이유로 
조직원 12명을 살해하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사건(1972)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적군파와 일본 공산당 극좌파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지식인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는 합창이 터져나왔다. 독일 통일과 소련의 붕괴 이후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순식간에 철지난 유행가로 돌변한 상황과 닮았다. 
오늘날이 70년대 일본과 다른 점은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오히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분리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책의 
때늦은 번역 소개는 오히려 시의적절해 보인다. 

마르크스 연구가 시대착오적인 일로 치부당하던 시절, 가라타니는 마르크스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겠다고 선언하며 이 에세이를 썼다.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 이외에 어떤 ‘철학’이나 ‘작자의 의도’를 
전제하고 읽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마르크스주의가 풍미하던 시절, 많은 이들은 
마르크스의 <자본> 따위의 글을 ‘작품’으로 읽는 대신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서’로 읽었다. 그들은 거기서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적 유물론, 착취이론 
따위를 발견하고 정리했다. 이런 독법은 사상가 마르크스를 도그마로 변한 
마르크스주의의 거푸집 안에 우겨넣는 폭력일 수 있다. 마르크스를 ‘가능성의 
중심’에서 읽겠다는 것은 그의 텍스트를 텍스트 자체로 읽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가라타니는 우선 매우 뛰어난 독자다. 

그는, “어떤 작품의 풍부함은 글쓴이가 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체계 자체에서, 
뭔가 그가 ‘지배하고 있지 않은’ 체계를 가진 데 있다”고 말한다. 그는 좀 
까다롭게 말하는 스타일리스트다. 이를 좀 쉬운 말로 바꾸자면 “모든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를 넘어선다”는 얘기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를 ‘텍스트의 권리’란 
말로 표현한다. 지은이의 유권해석조차도 텍스트의 권리를 침해하지는 못한다. 
예컨대 에코라 할지라도 자신이 쓴 <장미의 이름>이란 텍스트에 대해 유일무이한 
유권해석을 내릴 자격을 갖지는 못한다. 텍스트에 대해 이렇게 접근할 때 우리는 
텍스트에서 지은이가 ‘사유하지 않은 사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라타니는 <자본>을 이런 방식으로 읽는다. 그는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다음 
구절에 주목한다. 

“상품은 얼핏 보기에는 자명하고 평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분석해보면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섬세함과 신학적인 심술궂음으로 가득 찬 매우 기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상품’의 ‘형이상학적 섬세함’과 ‘신학적 
심술궂음’이란 뭘까. 가라타니는 그것을 화폐라는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찾지 
않고 그 원초적 형태인 ‘확대된 가치형태’(상품들 사이의 상대적인 가치의 
연쇄)에서 찾는다. 소쉬르가 언어를 ‘차이의 체계’로 읽듯, 그 또한 상품경제를 
‘상품들 사이의 차이의 체계’로 읽으려 한다. 언어와 상품의 유비에서 그는 
“교환을 규제하는 암묵적인 규칙체계”(차이체계)를 본다. 이런 독법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는 ‘주의’가 아니다. 사람이 임의로 선택한다든가 폐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곧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와의 
교환=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에 기초하고 있는 어떤 불가피한 ‘현실성’이다.” 

가라타니의 ‘가능성의 중심’ 또한 이같은 그의 명시적 결론보다는 그가 사유하지 
않은 사유에 있을 것이다. 그는 “서양사상사의 계보에서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읽는 한… 근본적인 이의제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구조주의 언어이론은 과연 서양사상사의 계보에서 벗어나 있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구조주의가 합리주의 전통의 적장자라는 점은 그의 한계가 
어디 있는지 보여준다. 

이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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