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yena ( 횡 수) 날 짜 (Date): 1999년 5월 22일 토요일 오후 11시 36분 19초 제 목(Title): 왕안석의 신법 1. 우리 나라 국민들은 무척 부지런하다.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외국인의 커리커처에 그려진 한국 남자의 모습은 매우 바쁘게 돌아다니는 마른 남자들이다. 우리 나라 국민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개개인들이 부지런한데 왜 우리가 IMF를 맞아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그 것은 IMF 이후 항상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먼가 잘 못 돼도 한 참 잘 못된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대체로 김영삼 정부의 잘못된 경제 정책 탓으로만 돌린다. 세상에 이렇게 복잡한 결과에 그토록 단순한 원인은 별로 없다. 그 외에 중요한 요인이 분명히 더 있는 것이다. 그 때 이미 정부는 우리 나라 재벌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고 본다. 정부의 특혜 지원으로 성장한 재벌들은 정부 경제 정책에 공공연히 도전한다. 최근까지 구조 조정에 저항하는 김우중 대우 회장의 발언에서 그 예를 본다. 얼마없던 중소기업들은 그나마 이번 IMF로 도산해버리고 재벌들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이런 경제 위기는 재벌들에겐 더 성장하기 좋은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대공황 후의 미국은 재벌의 독점이 더 심해졌다. IMF 중에 빈익빈 부익후 현상이 더 심화되었다. 내가 보기엔 IMF를 부른 내부 요인들로는 정부의 잘못된 개입 경제 정책, 재벌들의 무분별한 투자, 공무원들의 부정 부패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IMF를 초래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 결과 책임은 정부에도 재벌에도 지워지지않고 부지런하지만 힘없는 국민 개개인과 중소기업에게 돌아가고 있다. 물론 국민들이 지도자를 잘 못 뽑은 책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것도 힘없는 국민들만 그 고통을 벌써 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너무나도 억울한 얘기이다. 아직도 자유시장이냐 정부 개입 경제이냐를 따지는 논란이 많다. IMF의 책임 소재를 묻는 청문회에서 당시 재무 장관은 자유 시장의 논리를 폈다. 자유 시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제는 시장의 자율적인 조절 기능에 맡기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200년도 더 된 해묵은 아담 스미스의 신화를 아직도 앵무새처럼 떠든다. 이 것은 주로 선진국들이 내세우는 논리로서 자본 주의 경제학의 신앙에 가까운 것이다. 현재도 여전히 이 논리에 의해 미국을 비롯한 부국들은 그외 국가들의 시장 개방을 요구한다. 반면에 정부 개입 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국가 경제같은 거시 경제의 문제에는 정부의 개입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이 것은 공산주의 국가의 계획 경제 정책이 대표적인 것으로 케인즈 이후 자본 주의 국가에서도 광범위하게 시행 돼어 오고 있는 경제 정책이다. 1930년대 케인즈가 대공황을 해결하는 정책으로 제시한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 정책은 그 때까지 자유 시장을 맹신하던 자본 주의 경제학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었다. 자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최선이라는 신화는 깨지고 만 것이다. 동시에 케인즈 정책의 대공황 해결은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허구임를 알려준다. 역사적으로 빈민들의 가난을 구제위해 노력한 정권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보면 이 말이 지닌 가증스러운 허위마저 느껴진다. 케인즈 이후 한 때 정부 개입 경제 정책이 만능이라는 인식까지 퍼지기도 했으나 그 원조격인 공산권의 붕괴로 보아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유 시장이냐 정부 개입 경제이냐?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도 이 문제는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재벌들은 정부의 통제를 조금이라도 덜 받으려 작은 정부를 요구하고, 정부는 방만한 재벌들을 통제하려하면서 더 거대한 정부를 지향한다. 어느 쪽에도 정답은 있지 않다고 본다. 일찌기 이 문제에 대해 갤브레이드는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아직 공산권이 몰락하기 전인 70년대 중반에 쓴 이 책에서 그는 자본 주의와 공산주의의 경제나 체제는 서로 수렴해 간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 시장 정책과 정부 개입 경제 졍책이 적절히 섞인 혼합 경제 정책이 바른 길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권이 몰락한 것은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자본주의 경제의 일방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도리어 공산권의 폐쇄적인 체제 탓이었다고 본다. 정부는 시장에 대한 지나친 개입으로 기업의 활동을 위축시켜도 안돼고 또한 재벌들의 횡포를 방관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 했다. 2. 서구에서도 1930년대 대공황에야 이르러 나타난 이러한 자유 시장이냐 정부 개입 경제냐 하는논란이 동양에서는 놀랍게도 이미 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11세기 중반, 중국 송나라 시대, 왕안석의 신법을 둘러싼 싸움이 바로 그 것이다. '왕안석(1020-1086)의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으로 강서성 무주 출신이다. 그는 일찌기 지방 관리로 일하면서 농촌 백성의 딱한 사정과 지방 토호세력의 횡포를 직접 보게 된다. 그러한 체험을 통해 그는 개혁법을 구상한다. 신종이 20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하면서 왕안석의 개혁법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부재상으로 등용한다. 그는 11세기 중반을 전후로 하여 10여년 동안 정권을 잡으면서 청묘(靑苗), 모역(募役), 농전 수리, 균수(均輸), 시역(市易), 보갑(保甲), 방전균세(方田均稅) 등 잇달아 신법(新法)을 발포했다. 볍씨나 농기구를 구입하기 위해 부유한 지주나 호족으로부터 돈을 빌린 농민들은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마침내 자신의 토지까지 넘겨버리고 만다.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년 10할에 이르는 고리에 시달려 왔다. 한편 자금에 여유가 있는 지주는 더 많은 토지를 싼값에 사들이면서 더욱 부유해진다. 또 자기 밭이 없는 소작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빌린 돈의 부피만 점점 커질뿐 자립할 기회는 없기 때문에 일할 의욕을 잃어버린다. 농촌을 떠난 사람들은 도시로 흘러들어가 품팔이로 연명했다. 청묘법은 춘공기에 국가에서 낮은 이자로 농민에게 곡식을 대출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모역법으로 농사일을 보호하고, 시역법으로 경제를 원할하게 하고, 농전 수리법으로 수확의 증대를 꾀하고, 방전 균세법으로 세금을 골고루 받았다. 이로부터 100년 동안 송나라의 정치사는 신법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의 결렬한 싸움으로 얼룩지게 된다. 신법은 빈부의 차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막고 사람들에게 일할 의욕을 주기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삼고있다. 이미 송나라 시대에는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 소금, 차, 술 등을 정부가 전매해서 얻는 수입, 그리고 상업에 대한 과세 수입이 국가 수입의 큰 몫을 차지하고있었다. 국민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면 국가는 부유해지지만, 쇠퇴하면 적자 재정을 면할 수 없다. 신법은 정부가 원조하고 개입하여 경제 활동을 왕성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경우는 국가의 자금을 융자해 도와주며, 그렇게 하여 자립한 농민이 부를 축척하면 국가 전체의 경제도 건실하게 발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상인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정책이 실시되었다. 대상인들이 지배하는 동업 조합을 거치지 않고 영세 상인들과 직접 거래를 하면서 낮는 이자율로 융자를 해주었으며 팔고 남은 물건을 사들였다. 이와 같은 내용의 신법은 현재 많은 국가들이 실시하고 있는 사회 경제 정책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 부터 천년 전에 이런 높은 수준의 정책이 면밀하게 계획돼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왕안석의 신법은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신법으로 인해 특권을 잃어버린 지주, 호족, 고급 관료, 조정의 중신, 그리고 황족이 많았던 것이다. 황후가 울면서 법의 시행을 중지해 달라고 황제에게 호소했다는 얘기도 있다. 시종일관 신법을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 사마광이다. 중국 역대의 치적을 서술한 그의 자치통감은 후세까지 널리 사랑을 받았다. 모택동이 항상 이 책을 옆에 두고 통치에 참고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사마광이 유명 가문의 귀공자였기 때문에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몰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신법에 반대했다고 볼 수 없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사상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혜택을 주는 일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직업에까지 정부가 개입하여 원조를 하는 정책에는 근본적으로 반대했던 것이다. "빈부의 차가 있는 것은 인간들간의 차이가 있기때문이다. 능력과 의욕이 부족한 사람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으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되돌려 받지않는다고 하는 데, 국가가 그런 일에 깊이 관여하면 국고가 빈곤해진다." 훗날 시를 통해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을 받은 소동파 역시 신법을 반대하는 구법파(舊法派)의 중요한 정치가였다. 그는 왕안석을 시인이자 서예가로 높이 존경했다. 하지만 신법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가 민간의 경제 활동에 개입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국가가 돈을 빌려주면 관리와 백성 사이에 좋지 못 한 관계가 발생하고 사회의 기강이 흐트러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왕안석의 재능과 지혜를 높이 샀던 원로 정치가인 구양수 역시 그 중의 한 사람 이었다. 당시 그는 중앙을 떠나 지방의 책임자로 있었는데 농민에게 돈을 빌려 주기를 거부했던 까닭에 면직을 당했다. ' 소동파는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한 이유로 호주 태수로 좌천당한다. 그는 이 지방 관리들의 행패를 직접 보고 이를 풍자하는 시를 짓는다. 그러나 이 것은 필화 사건으로 번져 그는 정부를 비난했다는 죄명이 씌워져 사형을 언도 받는다. 하지만 소동파의 재능을 아낀 많은 지식인들이 그의 구명 운동에 나선다. 왕안석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자고로 명군은 재사를 죽이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로 신종에게 탄원함으로써 신종 황제는 소동파를 석방하게 된다. 관직을 잃은 소동파는 황주 장강가에서 궁색한 생활을 하게된다. 여기서 그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보게 된다. 그리고 이 기간에 그는 적벽부와 후 적벽부같은 불후의 명작을 쓴다. 왕안석이 실각하고 그의 절대적인 후원자이던 신종마저 갑자기 중풍으로 붕어하자 사마광이 재상에 오른다. 사마광은 소동파를 복권하고 다시 중앙 정계로 불러들인다.. 소동파는 자신이 직접 본 국민들의 참상을 생각하고 신법의 일부를 실시하자고 사마광에게 건의한다. 믿었던 소동파에게서 뜻밖에 반론에 부딪치자 사마광은 종래의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에 소동파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번이라도 수많은 백성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시오?' 사마광과의 관계가 어색해진 소동파는 자원해서 항주로 좌천된다. 그는 그 지역의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여러가지 사업을 벌인다. 빈민 구호 사업, 개간 사업, 실업자 구제를 위한 교량 공사들을 벌인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소동파였기에 그의 시는 아직도 많은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리라. 3. 사마광, 소동파,구양수 등의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한 구법파의 생각을 오늘날에 표현한다면 '커다란 정부'에 반대하고, 자유 시장을 믿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왕안석의 신법은 바로 정부 개입 경제 정책을 가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안석의 신법이 완벽하지 않는 이상, 사마광이 신법에 반대하는 것에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의 이의에서도 역시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다는 식의 자기 편의적 이고도 위선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빈부의 차이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서는 가난해서 능력과 의욕이 부족한 것인 지, 능력과 의욕이 부족해서 가난한 것인지 구분을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람의 능력이란 대부분 비슷하다. 극히 일부만 훨씬 뛰어나거나, 뒤쳐진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들의 예에서 보듯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부지런하다. 이 것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라, 어느 시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지런하다. 그 것은 생존 본능의 문제이다. 먹고 살아 남으려면 부지런해야 하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 전에 인류는 자연 도태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다수가 가난하다. 그러하면 사마광의 말대로라면 대다수의 사람이 다 능력과 의욕이 부족하다는 얘기 아닌가? 사마광은 자기 기만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는 가진자들은 부지런해서,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서라는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마광은 자기 눈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보다는 어차피 한 번 죽을 것인데 살아서 뭐하나 라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장황하게 훈계하는 자와 닮아 보인다. 왕안석의 시대로 부터 무려 천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는 당시의 송나라보다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훨씬 풍요한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제 정책이 왕안석의 신법보다 더 나은가를 물어본다면 결코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다. 근본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경제 정책 책임자들이 왕안석이나 소동파처럼 고통받는 백성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위해 정책을 실시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는가? 그저 자기가 속한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지키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 그 것을 위한 해묵은 자유 시장의 곰팡내나는 논리를 외치는 자들. IMF와 같은 총체적인 파국을 맞아 책임을 지는 자는 없고, 모두 책임 전가와 자기 핑계에 급급한 자들뿐... '왕안석을 등용하던 황제가 죽자 사마광을 비롯한 구법파는 정권을 잡은 다음 신법을 서서히 폐지시켰다. 은퇴해있던 왕안석은 그 소식을 듣고도 자신의 정책에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나라를 구제하려면 신법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신법은 국가의 재정을 개선하는 효과를 거두었었다. 그 후 권력을 되찾은 신법파는 다시 신법을 시행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왕안석의이름은 19세기 말엽까지 희대의 악인 재상으로그려져 민간의 연극이나 역사책을 통해 전해내려왔다. 이 위대한 선구자에게 쏟아진 차가운 시선을 통해 우리는 중국 역사에 관철되고 있는 보수주의 풍토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보수적인 면은 중국의 전통만이 아니라 내가 위에 소개한 도스타인 베블렌의 '유한 계급론'에 의하면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빈민들도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 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유한 계급은 보수적인 계급이다. ....... 문화 양식의 변화에 대한 이 계급의 반대는 본능적인 것이며 주로 물질적인 이해 타산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 것은 기존의 행동 방식이나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부터의 괴리에 대한 본능적인 반발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나 힘겨운 일상 생활에 모든 힘을 빼앗기는 사람은 내일 이후의 일을 생각할 만큼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이다. 이 것은 아주 부유한 사람이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픔을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베낀 책 1. 70 일간의 세계사 여행, 하니 스스무(곽윤이 역), 새터(1995) 2. 십팔사략(10권), 고우영(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