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5월 21일 금요일 오후 03시 09분 41초 제 목(Title): 퍼온글/정재숙 시인 김정란 "저를 때려주고 싶습니까?"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 필화 아닌 필화… 그의 글에 ‘적당한 타협’이란 없다 시인 김정란 그를 ‘싸움꾼’으로 알고 있던 이들은 그렇게 당차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 정말 이 여자인가 놀란다. 인파에 묻히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키, 여릿여릿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몸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위태위태해 보이는 걸음걸이가 그를 다시 보게 한다. ‘이건 모순이다.’ 그러나 일단 말을 시작하면 그는 제 이름을 찾고 제 심지를 찾는다. “…습니다” 어금니 맞추는 소리가 딱 딱 울리는 그이 달변을 10분쯤 듣고 나면 결국 ‘이 사람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겠구나’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전화폭력에 부들부들 떨다 “요새 전화받느라 바빴어요. 그리고 많이 아팠습니다.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소나기처럼 터지는 ‘따르릉’ 소리에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거의 성폭행 수준 욕을 들으면서 참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공개된 자리에서 문제제기를 해야지 얼굴을 감춘 수화기 속에서 폭언을 퍼붓는 덴 질렸어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정란(46·상지대 불문과 교수)씨는 지난 한달여 전화폭력에 시달렸다. <조선일보를 아십니까?>(개마고원 펴냄)에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 부드럽고 멍청할 것, 그리고 나 자신만을 위할 것’을 썼다가 필화 아닌 필화를 겪었다. “<조선일보>의 잽싼 몸바꾸기”가 “너무나 위험해 보”이고 “우리 사회에 아주 나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그가 잘 아는 문학판 예를 들어 그걸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욕설뿐이었다. 문학을, 문인을, 언론이 질질 끌고 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외친 그에게 그가 연대정신을 품고 동료라고 여겼던 문인들이 오히려 돌을 던졌다. “90년대 들어서 한국 문학은 부드럽고 멍청한 애첩의 지위로 몰려났다”고 동료들 어깨에 거침없이 죽비를 내리친 그가 때려주고 싶게 미웠을지도 모른다. “저도 이 사회를 몰이하는 <조선일보>라는 거대담론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어요.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가 쓴 글을 읽으면서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몰랐으면 고백해야지요. 적어도 <조선일보>에 들러리 서지는 않겠다는 맘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는 단호하고 딱 부러졌다. 남들이 뭐라건 그 눈에 옳게 보이는 것을 옳다고 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아줌마 시인들을 열심히 비평했고, 지난 91년 김문기 이사장 시절 상지대 재단이 교수협의회를 붕괴시키려 했을 때 악바리처럼 농성과 단식으로 그 비합리에 맞섰다. 고등학교도 못 나온 아줌마들이 뭘 썼을까, 의심하다가 시가 너무 좋아 읽고 확신을 가지는 과정에서 계급의식을 깼다. 91년 대학에서 해직되고 난 뒤 재단과 싸우면서 오히려 단단해졌다. 정치적으로 사회를 읽는 방식과 동시에 문학을 밀고 나가는 방식을 익혀가기 시작했다. 그가 옳다고 믿는 걸 사회에 대고 발언하자 가슴속에 오래 묻혀 있던 ‘여성의 힘’이 저절로 풀려나왔다. “아버지는 보기 드문 인텔리였어요. 상대적으로 교육을 덜 받은 엄마는 이를테면 전근대적이었지요. 아버지를 닮고픈 마음과 어머니를 싫어하는 마음, 그 두 방향은 내 문학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이었습니다. 80년대를 고통스럽게 보낼 때도 이 두 극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 속에 숨어 있던 ‘어머니’를 발견한 거예요. 겉돌지 않고 내 소리를 낼 수 있는 힘, 내 새끼를 위해 싸우는 어미늑대처럼 이건 내가 할 수 있겠다는 기운이 솟구치는 믿음, 계파나 노선이 아니라 자기 본질이 가르쳐주는 대로 나아가는 길을 찾은 겁니다. 좋은 여성이면 정말 남성보다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가 쓴 칼럼에 ‘적당한 타협’이란 없다. 시를 쓰든, 산문을 쓰든, ‘김정란’이란 이름 석자가 붙는 한 그건 “세상에 대고 반드시 나를 이야기하겠다”는 확신에 찬 시요 글이다. “핏줄들. 알리바이?/ 어림없어. 일어나// 이럭저럭 세월은 갔다. 사실이다. 나는/ 살아 남은 내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허깨비…라고. 내 안의 핏줄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나는 다시 울어. 오월, 살아 있는 일이/ 아아 아직도 추문이야. 현장의 추문./ 나는 여전히 현행범이야. 오월 다시 오월은 오고.”(‘다시 오월’ 중에서) 그는 이제서야 80년 5월을 제대로 노래할 수 있다. 월간 <현대시>에서 펴낸 시낭송 음반에서도 그는 ‘비겁한 정원사들’이란 시 속에 광주 민중항쟁을 노래했다. “여긴 내 물이 아니야”라고 도리질쳤던 고통스런 80년대를 거쳐 그는 이제 자신있게 역사와 사회에 대해 내면 깊숙한 곳에서 뽑아낸 육성을 뿜어낼 수 있다. “아버지는 늘 ‘피양’이라 부르셨던 평양에서 내려오셨던 분이셨고 어머니는 4·3사태가 일어났던 제주 분이셨어요. 이 두 극이 만나 빚어낸 나, 영민했던 부친과 격렬하고 직관이 강했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나를 분석해보면 지금 내가 보여요. 아버지를 사랑했던 딸인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 남자가 와서 날 꺼내주길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몸을 일으킨 건 내 속의 여성이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니었던 날들, 담대하라던 아버님 말씀을 오늘도 되새깁니다.” “나는 시를 산다(生)” 그는 시인들의 직관이 “가장 기능이 좋은 사회적 안테나”라고 말한다. 시는 “자기가 먼저 간다.” 그래서 그는 시를 “쓴다”고 하지 않고 시를 “산다[生]”고 한다. “감기. 아무렴. 난 감 잡고 있지./ 뭔가 삐걱거리는 것을.// 감기, 내 삶에 대한 내 삶 전체의/ 징후. 내 기질이 내 삶에 대해 가지는 관계./ 안에서 어긋나는.”(‘지옥에서- 감기기운’ 중에서) “독살스럽다는 말까지 들을 때, 때로 이렇게까지 글을 써야 할까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칼럼을 읽고 멀리 미국에서까지 전화주신 분들, 이러다 우리 엄마 테러당하는 거 아니냐면서도 절대적 지지자로 힘을 주는 두 아이들, 말은 안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동지들, 이들 격려로 다시 일어섭니다. 허위의식과 감상과 속임수와 싸구려 상술로 똘똘 뭉친 문학과 언론 행태를 공격하는 데 제 단호한 여성은 늘 용감합니다.” 사진 박승화 기자 parksh@mail.hani.co.kr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