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5월 21일 금요일 오후 03시 04분 01초 제 목(Title): 퍼온글/진중권 코뮌에는 개인이 없는가? 엑스리브리스/코뮌에는 개인이 없는가 코뮌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공간적 형식은 무엇인가. 이진경 ‘자본주의를 넘어서고, 근대를 넘어서는 학생운동’, 이재원 편저 <오래된 습관과 복잡한 반성>에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먼저 “코뮌적인 삶”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대체 그가 말하는 “코뮌적 삶”이란 무엇일까? “지배적인 체제를 전복하고 화폐의 일방적 지배를 넘어서 서로가 형제적인 연대의 관계를 이루는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노동의 방식을 창출”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노동의 방식을 창출”한다는 그 “코뮌”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생산수단의 공유에 근거한 강한 코뮌? 이해의 공동성에 근거한 소자산가의 연합? 농민들의 생명공동체? 사상의 공동성에 근거한 인텔리의 연구단체? “리즘”이라는 공동의 형식취향으로 묶인 예술가 동인? 아니면 68년 학생들의 기숙사 공동체? 아니, 그 이전에 그의 “코뮌주의”는 사회 전체의 개조를 위한 매크로 기획인가? 아니면 몇몇 “탈주자”들을 위한 마이크로 기획인가? 대체 머리 속으로 무슨 상을 그리고 있기에, 벌써 거기에 걸맞은 “공간형식”까지 고민하는 걸까? “예수와 그의 동료들”, “프란체스코와 그의 추종자들”, “프리메이슨과 같은 비밀결사조직”. 이게 바로 그가 제시하는 “코뮌”의 역사적 선구다. 대체 왜 이런 것들이 현대사회의 정치적 이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왜 이런 것들로 “지배질서를 전복하고 화폐의 일방적 지배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 걸까? 퇴니에스가 얘기했듯이 현대사회는 공동사회가 아니라 계약으로 묶인 이익사회. 이 타인들 사이에 “공동체”를 수립하는 게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공동체는 ‘동질성’을 전제한다. 그것도 게임 규칙의 공정성(=‘정의’)이라는 형식적 동일성이 아니라 실질적인 ‘동질성’을. 그렇다면 그의 “코뮌”의 바탕을 이루는 동질성은 어떤 것일까? 또 “코뮌”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하나의 사회로 묶어주는 동질성은 어떤 것일까? 수없이 떠오르는 질문. 부재하는 답변. 그는 “지배”가 없는 세계를 꿈꾸는 모양이다. 하지만 ‘공동체’라는 말 속에 든 반민주적 함의는 어떡하고? 가령 공동체는 동질성을 전제하고, 동질성은 이질적인 것의 배제를 의미하고, 배제는 강제를 내포하고, 강제는 인격적 혹은 비인격적 지배와 폭력을 전제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역사적 예로 든 코뮌들은 그 내부에 고도로 집중된 권력, 지배, 폭력을 구현하고 있었다. 물론 그걸 미화하는 아름다운 수사학과 함께. “사생활의 욕망은 정말 모든 사람에 공통된 타고난 어떤 본능 같은 걸까요?” 본능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어느 쪽이든 거기서 당위명제가 결론으로 나오는 건 아니다(자연주의적 오류). 문제는 이런 거다. 즉 그의 “코뮌”이 “사생활”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대단히 억압적인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 대체 왜 그는 “사생활”을 공격하는 걸까? 사생활을 폐지하면 자본주의가 극복될까봐? 사생활은 개인이 국가나 타인의 감시와 지배에서 자유로운 최후의 공간. 사생활을 보장하면서도 공동체적 연대의식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또 그래야 하고. 그러잖아도 대한양계장 수탉들. 남의 사생활 무시하기를 밥 먹듯 한다. 가령 O양 비디오. 동료 인간의 인권이 침해되는 걸 보면 적극적으로 뜯어말려야지. 그 정도의 사회적 연대의식은 있어야지. 비열하게 실실 웃으며 침이나 잴잴 흘리고…. 이런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사생활”을 공격하는 게 과연 얼마나 진보적인 짓일까? 엑스 리브리스(ex libris)란 '∼라는 책에서'라는 뜻의 라틴어로, 책을 인용할 때 쓴는 말입니다. 진중권씨의 이메일 주소는 kyoko@zedat.fu-berlin.de입니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