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Hyena ( 횡 수) 날 짜 (Date): 1999년 5월 20일 목요일 오후 01시 49분 15초 제 목(Title): 도스타인 베블렌 북아메리카 북서부 지역에 콰키우틀족이란 인디언들이 살았다. 이들은 겨울이 되면 축제를 벌이는 데, 여기서 광적일 정도로 유별나게 낭비하고 무절제한 소비를 해대는 잔치를 벌인다. 자신들만 먹고 즐길 뿐만 아니라 이 축제에 다른 부족까지 초청해서 이 초호화판 잔치를 과시함으로써 초청받은 이들의 기를 죽인다. 심지어는 집까지 태우는 파괴적인 행위를 보이기도 한다. 이 풍습은 콰키우틀 인디언뿐만아니라 여러 원시 사회에 남아 있는 것으로 루스 베네딕트가 '포트래취(potlatch)'라고 하여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포트래치란 콰키우틀 인디언의 말로 신이 내려준 '술잔'을 이르는 말이다. 이 포트래치에서 얻어먹는 부족도 결코 감사나 칭찬을 하지 않는다. 얻어먹고간 부족은 도리어 씩씩대고 돌아가서 더 엄청난 잔치를 벌이고 여기에 전에 자신들을 축제에 초청했던 부족을 답례로 초청한다. 여기서 더 낭비적이고 무절제한 잔치를 벌인 부족이 더 큰 정치적 힘을 얻게 됨은 물론이다. 이런 풍습은 서양 인류학자들의 눈에는 불가사의하고 미치광이들이 창조한 것으로 도무지 이해가 돼지 않았다. 하지만 도스타인 베블렌(1857-1929)이란 경제학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유한계급론'이란 책을 통해 이 포트래치 풍습은 미국의 백인 유한 계급내에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풍습이란 것을 가르켜 준 것이다. 그는 20세기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를 맞아 흥청 망청대는 백인 졸부들의 작태를 원시 야만족에 빗대어 통쾌하게 조소한다. 바로 이들의 호화로운 파티가 바로 포트래치 풍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은 스콜세지의 '순수의 시대'을 보면 그 시대 미국 졸부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의 파티는 경쟁자들을 초청해서를 그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였지 같이 즐기자는 것이 아니었다. 베블렌은 인간은 제작 본능과 지배 본능을 가진다고 보았다.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던 원시 시대에는 제작 본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식량 걱정이 사라진 풍요한 시대가 오면 지배 본능이 나타나 사회 구성원은 제작을 하는 데 종사하는 노동자 계급과 이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는 지배 계급으로 2원 분리된다. 그리고 지배 계급은 제작을 하는 노동을 경멸하게 돼고 한가함을 지배 계급의 상징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서양 신사들이 단장을 들고 다니는 것을 이렇게 비유한다. '산보용 단장은 그 것을 가진 자의 손이 유용한 일에 사용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광고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한가함의 증거로서 효용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무기이기도 하므로 야만부족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킨다. 이러한 구체적이고 원시적인 공격 수단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용맹심을 가진 자에게는 매우 유쾌한 일이다.' '유한 계급론'은 동시에 근대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보장한다. 물론, 힘있는 자들의 욕망만...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는 이 욕망이란 말은 '효용'이란 단어로 보기좋게 둔갑한다. 이 효용에 의해 상품의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학의 기둥이다. 즉, 효용이란 상품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정도를 나타낸다. 자유시장 하에서 사회 전체의 효용이 증가되는 방향으로 경제가 나간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소득의 분배가 공평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분배 문제에 따른 계급 투쟁이 있을 수없고, 따라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도 경제학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베블렌은 이 효용이란 것의 허구를 들춘다. 바로 '비싼 것일 수록 아름답다'는 것이다. 졸부들에겐 상품의 효용은 그 쓸모보다는 그 가격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비쌀수록 자신의 부를 과시할 수 있기때문이다. 이 것은 IMF로 고통받는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몇 천만원짜리 모피 코트와 수입 가구가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를 잘 설명하기도 한다. 이 것을 '베블렌 효과'라고 한다. 이는 효용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신고전주의의 경제학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신고전학파의 효용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인정함으로써 경제를 약육 강식의 피비린내나는 킬링 필드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들의 효용에는 인간도 없고 윤리도 스며들 여지가 없다. 마약을 파는 것이나 빵을 파는 것이나 그 효용이 같다면 차이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영국은 중국 정부가 자신들의 어엿한 수출품인 마약을 빼앗아 불태웠다는 시비를 걸어 아편 전쟁을 일으킨다. 이 효용 이론에 의해 고삐가 풀린 서구 자본가들의 끝없는 욕망은 자국의 가진 것 없는 국민들을 수탈했다. 그러고도 그 욕망은 만족하지 못하고 전세계로 뻗어나가 지난 1 세기동안 제국 주의의 수탈에 세계는 악랄한 식민 통치와 2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비롯한 인류 역사상 유래없는 희생을 치루었다. 신고전학파의 경제학은 근대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수탈을 이 효용이라는 교묘한 말로 감추려한 것이다. 이 효용 이론은 아직까지 살아 남아 여전히 그 위력을 떨치고 있다. 하지만 베블렌이 간과 한 것이 있다. 근대 유한 계급의 이러한 행태를 원시 야만족에 비유하는 것을 원시 야만족이 들으면 화를 낼 것 같기 때문이다. 원시 야만족은 기계 문명의 혜택을 안 받았을 뿐이지 그 철학까지 야만적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콰키우틀 인디언의 포트래취는 그 표면적인 모습 뒤에 다른 이유가 숨어있다. 그 것은 포트래치를 통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부의 재분배가 이뤄지는 기능이 더 크기때문이다. 부족간에 경쟁적으로 더 큰 잔치를 벌이는 것은 더 광범위하고 공평한 부의 분배를 촉진하기위해 의도적으로 계산된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그런 이면의 이유도 없이 단순히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벌이는 근대 미국 졸부들의 행각보다 더 야만적인 경우는 없는 것이다. 인류학의 기본 원리는 원시 야만족이라고 해서 그들이 현대 문명보다 더 열등 하다는 편견을 버리라는 것이다. 베블렌이 '유한 계급론'을 쓸 때는 아직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 했던 때이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는 포트래치란 용어조차도 몰랐을지 모른다. 근대 미국 졸부들이야말로 문명의 탈을 쓴 진정한 야만족들인 것이다. 베블렌은 이런 졸부들의 행동을 '현시적 소비', '현시적 레저'라는 용어로 정착시킨다. 이러한 베블렌의 조소를 견디지 못한 미국의 졸부들은 그 다음부터는 매우 검소해 보이는 모습으로 일변한다. 현대 미국의 졸부들이 결코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 않고 검소하고 겸손해 보이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베블렌의 조소로 시작된 전통 때문일 것이다. 도스타인 분데 베블렌(Thorstein Bunde Veblen)의 일생을 살펴보면 참 흥미롭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쓴 갤브레이드는 그의 스승인 베블런을 꼭 빼어 닮은 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1857년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미네소타의 노르웨이인 개척촌에서 자랐다.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그 들 사회에서 노르웨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베블렌은 미국에 살면서도 영어를 외국어로 습득해야 했다. 그만큼 베블렌을 키워낸 토양은 비미국적이었으며, 그래서 그 이후에도 베블렌은 미국 사회에 완전히 합치되지 못하고 줄곧 관찰자로 남아있게 된다. 이후 그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마치 외계에서 온 관찰자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관습과 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었던 시각-은 그의 출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베블렌은 가난한 농가에서 정말 쓸모없는 게을러터진 아이로 자라났다. 그는 일상적인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돕는 대신 다락에 틀어박혀 진종일 책만 읽어댔다. 그가 17세가 되자 그의 부모는 게으름뱅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공부를 시키기로 결심한다. 자기 아들이 장차 목사가 되어 주기를 바라며 베블렌을 대학에 보낸 것이다. 그러나 칼턴 칼리지 아카데미을 다니던 시절의 베블렌을 보면 그는 자신의 부모를 많이 실망시켰을 것이다. 예배시간에 '우리 모두 술에 취하자'는 주제의 연설을 하기도하고(더구나 신학교에서), 급우들에게 사람고기를 먹자고 선동하기도 하여서 교수들의 골머리를 썩였다. 그는 자유분방한 그대로 조금도 순화되지 않고 졸업한다. 더구나 성적이 워낙 우수한 학생이었던 탓에 교수회의의 특별 허가를 받아 3학년과 4학년 과정을 한 해에 마치고 그 학교에서 가정 빠르게 졸업하는 학생이 된다. 아마도 학교에서는 앓던 이 빠지는 시원한 마음으로 베블렌을 초고속 졸업 시켰을 것이다. 베블렌은 학문의 길을 결심하고, 존스 홉킨스 대학을 거쳐 예일대학에서 '응보 원리의 윤리적 근거'라는 학위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84년의 일이다. 그 역시도 앞서 간 많은 경제학자들처럼 처음부터 경제학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 재기 발랄한 수재가 경제학자가 돼는 데는 더욱 복잡한 사정들이 개입하게 된다. 요즘같이 고학력 실업자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블렌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비자발적 실업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의 자유 분방한 사고와 행동을 받아들일 준비가 대학으로서는 아직 되어있지 않았던 셈이다. 실의에 빠져 고향에 돌아온 베블렌은 그의 특기인 빈둥거리기로 7년의 세월을 보낸다. 이 기간에 그는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등 모든 종류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섭렵한다. 훗날 그의 저서에서 보이는 다방면에 걸친 놀라운 해박함은 이 시기의 잡식성 독서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마침내 길고 긴 칩거를 마치고 벌써 34세가 된 베블렌은 텁석부리 수염에 곰가죽 모자를 쓰고 골덴 바지를 걸친 사냥꾼 같은 차림새를 하고 코넬 대학 경제학부의 보수적인 학자 로렌스 래플린을 찾아간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 지 보수적 경제학의 중심 인물인 래플린은 총장의 특별 허가를 얻어 이 사나이를 조수로 채용한다. 1892년 록펠러라는 전설적인 재벌이 시카고 대학을 인수하면서 전국의 유능한 인재들을 초빙하는 데 여기에 베블렌의 지도 교수인 래플린도 합류한다. 그 지도 교수는 시카고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제자인 베블렌을 강사로 데리고 가는 데, 바로 이 대학 강사 자리가 35세의 베블렌이 얻어 낸 첫 번째 일자리였던 셈이다. 베블렌은 거대한 도서관을 가진 시카고 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내 '굉장한 학식을 지닌 베블렌 박사'라는 칭호를 얻었고 새로운 경제 잡지를 편집하는 영광도 누렸다. 배블렌은 재벌들의 과소비를 통쾌하게 파헤친 '유한계급론'을 집필한 것은 록팰러의 과소비로 세워진 시카고 대학에 재직하면서 였다. 이 책이 출판되기 직전 이때까지 강사였던 베블렌은 총장을 찾아가 임금 인상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한다. 거절 사유는 베블렌이 대학의 이름을 빛낼만한 일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블렌이 대답한다. '그렇습니까? 저는 대학의 이름을 빛낼 의향이 전혀 없는데요.' 그가 시카고대학을 박차고 나오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의 지도 교수의 만류 덕분 이었다. 그리고나서 얼마 후 '유한 계급론'이 출판되어 크게 명성을 얻게 되는 바람에 베블렌으로서는 정말 유감스럽게도 대학의 이름을 빛내개 되었다. '유한 계급론'이 나오자 급진파와 지식인들은 그를 예찬하고 숭배했다. 그러나 베블렌은 그들의 찬사를 멸시했다. '유한 계굽론'은 베블렌에게 높은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그의 이단적인 사상은 보수적인 미국학계와 보수적인 시카고 대학에서 호감을 얻지 못 하였다. 야만 사회의 이방인 도스타인 베블렌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했다. 교수로서도 별로 성공적이지 못해서 여학생들과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다. 또 자신의 천재성을 학생들이 따르지 못한 다고 판단, 절대로 C학점 이상은 주지 않는 단호함을 보여 학생들을 그의 강의실로 부터 멀어지게 했다. 강의는 최악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전혀 알아 들을 수 없게 중얼거렸으며 학생들을 조롱했다. '훌륭한 필자가 훌륭한 연사는 아니다'는 법칙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던 셈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 수염이 덮수룩한 얼굴은 네안데르탈인을 닮았다. 거기다 어느 곳에서도 촌스러운 외모와 괴팍스런 생각을 지닌 이 사나이는 이상하게 너무 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또 그때마다 그 것을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 했던 모양이다. 여자 문제에서 전혀 자제심을 발휘하지 못하여 끝도 없는 스캔들에 휘말렸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하버드 교수의 물망에 올랐을 때 로웰 총장은 섹스라든가 그밖의 부도덕한 일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어서 약간 어색한 듯이 이야기를 꺼내며 베블렌에게 앞으로 동료가 될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아내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수에 임명돼거든 행동을 신중히 하라는 간접적인 가벼운 암시였다. 베블렌은 이에 대해 정중히 대답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벌써 부인들을 배알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임신을 하자 '가정에서 남성의 역활이 중요하지 않다는 인류학적 논리를 내세워 이혼하는 무책임한 가정 생활과 괴팍한 행동드이 문제가 되어 1906년에 15년간 몸담았던 시키고대학에서 쫏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시 방랑이 시작되었다. 스탠포드 대학과 미주리 대학, 뉴욕의 '신사회 과학원'등을 떠도는 동안 그는 왕성한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영리 기업의 이론', '제작 본능론', ' 독일 제국과 산업 혁명', '미국의 고등 교육', '부재 소유 제도' 등은 모두 '유한 계급론'에서 제시한 이원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자본 주의의 경제.사회.정치.문화를 총체적으로 규명하려 한 역작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더 이상 '유한 계급론'에 대해서 보낸 것과 같은 박수 갈채를 보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 이방인이 미국의 풍요한 사회로부터 박수를 받아야 할 이유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는 첫번째 아내 엘렌과 이혼한 후 안네 브레들리라는 온순하고 기품있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그녀마저도 결혼 6년만에 심한 정신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제 1차 세계대전중에는 워싱턴에서 전시 식량 행정을 취급하는 일을 자원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뉴욕으로 돌아와 자유주의적인 잡지를 운영하였는 데 그 것도 실패했다. 베블렌은 몇몇 충실한 제자들에게 생계를 의지해야 할 만큼 곤궁 해졌다. 뒤늦게 미국 경제학회장 자리가 주어졌지만 베블렌은 '정말 필요한 때는 주지않고서...'라는 말로 거절했다. 늙고 지치고 실의에 찬 베블렌은 1920년대 중반에 캘리포니아의 작은 오두막 으로 돌아와 칩거했다. 집필도 그만두었고, 어린 시절의 교향을 연상시키는 잡초 우거진 작은 오두막에서 혼자 사색에 잠기는 일로 소일했다. 걱정이 되어서 찾아오는 친구와 제자들을 냉담하게 대햇고, 추종자들과 독자들이 보낸 온갖 편지에도 일체 답장을 하지 않았다. 베블렌은 대공황이 임박한 1929년 8월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인생과 사상이 그러하였듯 그의 최후 이방인다운 것이었다. 불행했던 이 이상한 이방인의 이단적인 사상은 자본주의의 전모를 일목요연 하게 해명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제대로 보는 데 기여했다. 그는 살도 피도 없는 이론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고 야만적인 문화를 신성화하려는 존경받는 경제학의 허점을 통박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 과학이라는 아름아래 전승돼어 온 낡아빠진 편견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상적인 사회 현상을 면밀하게 파헤쳐 인생과 사회의 진실한 한 단면을 드러내보인 '외계로 부터 온 방문객'이었던 것이다. 경제 사상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베낀 책 1.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유 시민, 푸른나무(1992) 2. 불확실성의 시대, J. K. Galbraith(박 현채, 전 철환 공역), 범우사(1978) 3. 10일만에 배우는 경제학 200년, 김 경훈, 새로운사람들(1995) 4. 문화의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박 종렬 역), 한길사(19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