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5월 5일 수요일 오전 05시 32분 13초 제 목(Title): 함재봉/한국의 문화와 예의 재건 Posted By: artistry (요키에로타코) on 'Library' Title: 함재봉/한국의 문화와 예의 재건 Date: Fri Nov 27 13:04:05 1998 한국의 문화와 예의 재건 함재봉 ------------------------------------------------------------------------------ -- 1958년생. 80년 미국 카알톤 대학 경제학과 졸업. 92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정치학 박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현). <포스트모더니즘과 해방이론의 해체:푸코를 중심으로> <근대사상의 해체와 통일한국의 정치사상> <국가-시민사회의 관계에 대한 정치사상적 기반과 개념> <유교 전통과 인권 사상> 등 논저 다수. ------------------------------------------------------------------------------ -- 1. 서문 한국경제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들의 신임도 하락에서 비롯된 IMF 사태는 국가의 이미지가 경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 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객관적인 거시 경제지표와 정부의 개혁의지, 기업 구조의 합리성과 투명성 이외에도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외국인들의 일상적인 '이미지'가 한국에 대한 투자를 결정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상표와 상품에 대한 선호도 역시 그 나라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식과 이해가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이미지란 다름 아닌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막상 경제난을 겪고 보니 뜻밖에도 우리의 문화에 대한 인지도와 존경의 정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우리 나라의 문화수준을 제고하고 문화상품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들려 온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문화수준을 제고할 수 있는가? 문화수준을 높이는데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전통과 역사, 문화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정도를 높이는 일이다. 두 번째는 현대 한국 사회의 일상적인 문화수준을 제고하는 일이다. 우리 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높이고 나아가서 한국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일은 이 두 차원에서 동시에 진행되어야 성공을 거둘 수 있다. ------------------------------------------------------------------------------ -- 2. 문화재와 '이야깃거리': '왜 한국의 궁궐은 호화롭지 않은가?' 우리가 긍지를 가지고 내세울 수 있고 또 '상품화'시킬 수 있는 문화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 '유형문화재'로는 경복궁, 불국사, 종묘, 석굴암, 팔만대장경 등이 있다. 또 '무형문화재'로는 종묘대제, 판소리, 사물놀이, 굿 등이 있다. 이러한 문화재들은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고 일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이와 유사한 문화재들을 더 발굴해 내고 국내외로 소개하는 것이 한국의 문화수준을 제고하는 길인가? 과연 새로운 관광코스를 개발하고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길인가? 이러한 작업은 물론 문화진흥정책과 관광정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막연히 더 많은 구경거리를 개발하고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한국문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현재 우리의 문화정책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미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는 유무형의 문화재들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야깃거리'란 무엇인가? 이야깃거리란 우리의 각종 문화재들이 상징하고 있는 문화 또는 문명의 이상과 정신, 논리와 구조를 뜻한다. 문화재들은 특정한 삶의 방식, 가치관, 인간관, 윤리관의 외면적 표출물들이다. 따라서 문화재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담고 있는 삶의 모습과 이상을 알아야 한다. 경복궁이나 불국사의 건축물들의 지붕 모양에서 건물의 배치도, 단청 색깔과 담장무늬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판소리와 굿, 사물놀이 등의 무형 또는 공연 문화재 등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철학과 이념을 표출하고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복궁과 종묘, 사직이 상징하는 유교문명, 불국사와 팔만대장경이 보여주는 불교문명, 그리고 판소리와 굿 등이 보여주는 무속 또는 민중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유교, 불교, 무속 등 한국의 다양한 전통 문화들이 각기 어떠한 이상과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어떠한 형태로 서로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고 때로는 마찰을 일으켰는가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곧 우리의 사상과 역사, 이념과 삶의 이야기, 국가의 통치철학에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던 다양한 종교관과 철학을 깊이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한국의 문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외국인들에게 설명해 줄 수 없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국어만 열심히 공부하면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나 보다 크고 본질적인 문제는 한국인들 자신이 한국의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결여하고 있고 따라서 자긍심과 애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하물며 외국인들은 어떠하겠는가?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솔직히 말해서 중국의 자금성이나 불란서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한번 보고 나면 경복궁은 얼마나 초라한지 몰라. 아니 우리 조상들은 그래 좀 근사한 건물 하나 지어 놓지 못하고 무엇을 했나? 뭐, 사실 따지고 보면 워낙 가난하고 물자도 부족했으니까 그런 대국들처럼 크고 화려한 건축물이나 상징물들을 짓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말야." 사실 그렇다. 경복궁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복원한다 해도 결코 자금성의 규모나 화려함을 따라갈 수 없고 새로운 문화재들을 아무리 많이 발굴해 낸다 하더라도 결코 대만의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 호화찬란하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소장품들에 필적할 만한 것들은 나올 수가 없다. 일본에 유출되어 있는 한국의 문화재들을 모두 반환에 오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외국에 유출되어 있는 문화재들을 반환 받고 기존의 문화재들을 개-보수, 증축하는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한 정부 예산의 규모는 늘면 늘었지 결코 줄어들어서는 안된다. IMF가 아니라 더한 위기가 닥쳐도 문화재에 대한 투자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 문화재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 그것들이 대표하는 문명, 그것을 생산해 낸 문화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궁궐들과 박물관의 문화재는 중국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의 것들에 비하여 그토록 왜소하고 초라한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건국 이념인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주자 성리학은 계급론적으로 말한다면 '사대부' (士大夫) 라는 계층의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사대부란 어떤 사람들이었나? 사대부는 '사' (士) 와 '대부' (大夫)가 합쳐서 생긴 개념이다. '사'는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만 하더라도 귀족이나 왕족의 비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공자처럼 각종 예식을 치르는 방법을 연구하고 습득한 사람들로써 귀족과 왕조들이 각종 예식을 치르고자 할 때 자문을 해주던 '전문가'들이었다. 반면에 '대부'는 '공경대부' (公卿大夫), 즉 귀족을 말하였다. 따라서 '사'와 '대부'는 원래는 서로 전혀 다른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의 이념이었던 유교가 공자, 맹자와 같은 걸출한 이론가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중국문명의 중심적인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사'의 사회적 지위는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자에 이르러서는 '사'의 이념인 유교가 새로운 형이상학과 수신론, 교육론, 정치론, 체제론을 갖추면서 불교나 도교 등 그 전 까지만 하더라도 중국 사상계에서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던 '이단'들을 밀어내고 '정통'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는 '귀족'과 같은 지위를 확보하게 되면서 '사대부'가 되고 이들이 중국과 조선의 엘리트 계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1) 그러나 사대부는 여전히 귀족과는 달랐다. 귀족은 부와 명예, 지위를 세습하는 반면 사대부는 매 세대마다 각자의 노력을 통하여서만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었다. 더구나 국가 행정을 맡은 사대부들은 국가의 녹을 먹고사는 관료(bureaucrat)였지 결코 귀족(aristocrat)이 아니었다. 이들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철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고 특히 '도덕성'을 모든 인간의 가장 중요한 지향점인 동시에 척도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무력의 행사를 자신들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봉토와 권력을 세습하던 서양의 귀족과는 판이하게 다른 집단이었다. 또 이들은 왕족이나 황족과도 달랐다. 중국의 황제들은 진시황부터 시작하여 유가(儒家)보다는 법가(法家), 도가(道家) 또는 불가(佛家) 사상을 가까이 하였다. 그들은 항상 군주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인의예지' (仁義禮智)의 실천을 주장하는 유가 사상보다는 군주의 절대적인 권력을 인정하는 법가와 황제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약속하며 황제권을 신비의 장막으로 둘러싸 주는 도가, 그리고 열반과 극락을 말하며 실존의 문제를 유려한 철학으로 해결해 주는 불가 사상에 당연 심취하였다.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명(明)이나 청(靑)의 황제도 대부분의 경우 국가 통치 차원에서 유교의 유용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뿐 황실 내에서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유교의 철학을 신봉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유교와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노력한 중국의 황제들과 권문세족들은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렸다. 실재로 명태조와 같은 사람들은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사대부들이 황제 고유의 영역을 침입하고자 할 때는 무자비 한 탄압을 가함으로써 중국사에서 전제군주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중국의 황제들은 유자(儒者)들을 제어하는 방편으로 황실의 인척들에게 막대한 권력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환관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 완전한 중앙집권제를 유지하기에 너무나 방대한 영토를 가진 중국에서는 자연히 군벌(절도사)과 같이 황제는 물론 관료, 즉 사대부 계층과도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진 세력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국의 사대부들은 황실이나 군벌과 같은 계층들의 끊임없는 견제와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판이하게 달랐다. 조선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왕실에서 주자성리학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물론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KBS의 사극 <용의 눈물>에서 볼 수 있듯이 태종 이방원과 같은 왕들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이는 '신권' (臣權)을 그 핵심으로 하는 주자성리학과는 마찰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태종은 동시에 자신의 아들은 '문치'(文治)를 할 것을 강력히 원하였고 실제로 세종의 문치를 가능케 하는 토대를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치의 토대는 사대부 중심의 주자성리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역사는 사대부의 이념인 주자학이 왕실에까지 철저하게 그 영향을 미치는 정치 체제를 생산해 냈다. 세자와 군주가 매일 경연(經延)에 참여하여 사대부들의 강론을 경청해야 했던 것도 바로 사대부들의 힘과 철학의 군주권을 제압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왕들은 모두 자신들도 사대부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노력하였다. 궁궐 속에 사대부집의 모형을 지어 놓고 사대부의 삶을 배우고 익히려 노력한 왕은 조선 밖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2) 주자성리학에 심취해 있는 왕은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집을 지을 수도 없었고 백성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왕이라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궁궐이라도 왕으로써의 최소한의 위엄을 지킬 수 있는 정도 이상의 건물들은 허용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구한말 대원군에 이르러서야 복원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더군다나 백성과 동고동락했어야 하는 임금이 난리통에 도읍과 백성을 버리고 혼자 도망을 갔다고 하여 성난 군중들의 손에 약탈당하고 불태워진 궁이었다. 그리고 결국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경복궁을 복원하였던 흥선 대원군은 곧 실권하게 된다. 이러한 왕실에서 대만의 고궁박물관과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불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는 엄청난 보물들, 순전히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전제군주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하여 장인들이 수대에 걸쳐 만들어 내는 그러한 보물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조선의 왕실은 사대부들보다는 분명 한 단계 위였으나 그것은 자신의 종실만이 아니라 '사직' (社稷)도 아울러 대표하고 지키기라고 주어진 위치였다. 그러나 일상의 삶에 있어서 그리고 삶의 철학에 있어서 이들은 철저하게 사대부의 사상이 주자성리학의 영향하에 있었다. 조선의 왕궁과 보물이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검소한 이유다. 조선의 사대부 사상과 왕실과의 관계를 이처럼 장황하게 논하는 이유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한국의 모든 문화재들은 이러한 사상적,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 문화재들의 진가는 이러한 이야깃거리들이 곁들여 질 때 비로소 발휘될 수 있다. ------------------------------------------------------------------------------ -- 3. '문화' = '예' = '민족' 이상의 논의는 문화상품을 개발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국가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서 문화수준을 높이는 작업은 과거의 문화재들에 대한 발굴과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한국의 문화는 과거의 유산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문화란 곧 삶의 모습이다. 한국의 문화수준과 대외인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보여주는 문화수준 역시 높아야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일상의 문화는 큰 혼란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의 불편한 공존, 혼재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현재 엄청나게 많은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제도는 모두 서구의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이 땅에서 사라질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통해서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토착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문화수준을 높인다는 것은 이러한 새로운 외래문명의 요소들을 충분히 소화해 내면서 새로운 형태의 고유 문화를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문화형태를 창출하고 높은 문화를 구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점잖은 양복을 입고 음악회와 극장, 박물관을 다니며 고급스러운 음식 문화를 즐기는 것을 뜻하는가?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문화 생활'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돈을 쏟아 붓더라도 그 모든 것이 가장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문화와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당사자들에게는 불편하고 어색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꼴사나운 가식으로밖에 안 비친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차원의 문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예'(禮)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예절을 배운다.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은 특정 유형과 양식을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각 문화권마다 다르다. 그런데 각 문화권 고유의 행동양식이 곧 나름대로의 예의범절이다. 따라서 특정한 예절을 공유하는 것은 같은 문화권에 속함을 뜻한다. 역으로, 같은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은 같은 예법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같은 예법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민족'이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가 보통 '우리 문화'라고 할 때의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이에 대한 가장 쉽고 당연한 답은 당연히 '한민족'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민족'은 누구인가? 한민족은 다름 아닌 한국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공동체이다. 다시 말해서 문화와 민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개념들이다. 어느 한 민족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에 의해서 규정이 되고 또 문화는 특정 민족이 창출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문화는 우리 민족이 공유하는 문화인 동시에 우리 민족이 하나의 공동체일 수 있는 정체성을 제공해 준다. 그렇다면 한민족의 문화를 규정하는 것은 곧 민족의 범위를 동시에 규정하는 일이 되고 거꾸로 민족을 얘기하는 것은 그 민족의 문화를 얘기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민족'을 생각할 때는 그것이 '피'로 연결된 일종의 혈연집단, 즉 '단일 민족', '같은 혈통'을 가진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한민족은 '배달민족',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고 우리는 흔히 말한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혈통'은 곧 가족, 가문, 문중에서부터 민족, 국가에 이르기까지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이다. 분명 한민족은 좁은 지리적 여건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생활해 옴으로써 피를 '나눈' 경우들이 다른 민족에 비해서 월등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얼마전 미국의 공군 사관학교에 다니던 성덕 바우만군이 백혈병에 걸렸을 때 골수 이식을 위하여 같은 유전자 구조를 가진 사람을 찾은 일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그때에 미국 내에서는 공군사관생도들은 물론 전국에 걸쳐서 바우만군의 것과 일치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찾는 캠페인이 벌어졌지만 실패하였다. 그 때에 의사들은 한국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 왔기 때문에 동일한 구조를 가진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고 실제로 결국 한국의 한 청년이 생면부지의 한국계 미국인 청년에게 자신의 골수를 이식해 주었다. 뜨거운 민족애를 확인하는 동시에 그 민족이 같은 유전자 구조, 그야말로 골수까지 내려가는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과연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사실 바우만 군과 같은 구조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찾는 일은 국내에서도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한 사람을 찾아냈을 뿐이다. 국내외의 의사들이 말한 것도 한국 내에서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고 하였지 꼭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과 같이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도 수많은 골수 이식 수술이 이루어지고 있고 또 다른 민족과 인종간에 골수의 교환이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동일한 구조의 유전자 보유자를 찾는 것은 결국은 확률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민족이라는 것이 비슷한 유전자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확률이 더 많은 사람들의 집단이란 말인가? 그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은 무엇인가? 민족은 같은 문화, 즉 예법을 공유하는 공동체다. 한번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자. 중국의 인구는 현재 13억에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인구의 92% 가량이 '한족'(漢族)이고 나머지가 50여 개가 넘는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듣고 있다. 따라서 '한족'의 인구는 어림잡아 10억이 넘는다. 전 인류의 4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동일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어떤 의미에서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과연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분명 아니다. 우리는 북경이나 만주에 사는 한족과 광동, 운남성과 같이 중국 남부에 사는 한족들이 겉으로 보기에도 다르게 생겼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또, 이들은 같은 문자는 공유하지만 지역에 따라 서로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수많은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고 음식과 풍습도 각양 각색이다. 더욱이 중국의 역사가 북방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동화의 과정이었고 또 중국의 영토가 본격적으로 양자강 남쪽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도 송나라 때부터임을 상기해 볼 때 중국의 '한족'이 같은 '혈통'을 가진 집단으로 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같은 민족이게끔 하는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10억이 넘는 중국의 한족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예식'이다. 즉, 같은 형식의 장례식과 결혼식을 치르고 음력설과 추석에 같은 예식을 치른다는 점에서 이들 10억 인구는 한 민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예식들은 한족들의 사상,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고 또 그것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정형화된 표현이다. 이들이 예식에 참여하고 그것을 거행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곧 중국 한족의 문화를 배우는 과정이고 한족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문화의 핵심은 예식이다. 인간은 특정 문화가 갖고 있는 예식에 어려서부터 참여하고 그러한 절차와 예식을 배움으로써 그것이 담고 있는 정신과 가치관도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문화를 얘기할 때 '정신', '혼', '사고방식' 등의 차원에서 얘기한다. 어떤 특정한 가치관, 세계관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문화와 민족은 분명 '정신적'인 차원에서 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고 또 많은 경우에는 혈연으로 엮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철학과 사상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철학과 사상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출하는 방법, 즉 예식이 있음으로 해서 구체적인 삶 속으로 스며들 수 있다. 또 우리는 같은 문화를 말할 때 공유하는 언어를 전제로 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였듯이 "한 언어를 생각하는 것은 곧 특정한 삶의 형태를 생각하는 것이다." 언어도 역시 특정한 행위, 즉 예의 범절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예식들이 사라지는 것은 곧 그것이 담아 내고 표현하던 문화가 사라짐을 뜻한다. 반대로 새로운 문화의 창출은 곧 새로운 예식을 정립시킴으로써 가능해 진다. 한국의 문화와 예의 재건 ------------------------------------------------------------------------------ -- 4.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에서 동방무례지국(東方無禮之國)으로 유교는 바로 이러한 혜안을 바탕으로 한 문명이다. 따라서 유교문명은 예를 종교적인 행사, 결혼, 장례식 등 특별한 경우를 위해서만 정한 것이 아니라 삶의 구석, 구석, 일상의 차원에까지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유기적인 예의 체계는 존댓말을 배우고 아침마다 마당을 쓸고 어른께 문안을 드리는 것과 같은 일상에서의 예의범절을 배우고 실천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의를 특별한 경우, 조상님들의 제삿날, 추석이나 설 같은 절기상의 특별한 날, 또 동네 사람들끼리의 공동체성을 확인하는 동제, 그리고 국가차원의 종묘대제와 사직단에서 임금이 지내는 제례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예의 체계를 갖추고 유교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을 교육시키고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예의 사상과 체제는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통하여 그 극치에 달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예를 숭상하고 정립시켜 나아갔고 그 결과 '예송'(禮訟)이라는 유교 국가 중에서도 초유의 정치적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무슨 '예절' 문제를 가지고 정쟁을 하고 사약을 받고 하는가 묻지만 사실 올바른 예 만이 올바른 공동체를 형성시키고 유지시킬 수 있다는 확신과 소신을 갖고 있던 조선 중기의 사람들에게 '예'의 문제는 곧 정치의 문제이고 따라서 궁극적인 인간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구한말까지도 '동방의 예를 갖춘 나라'로서 조선의 위상은 드높은 것이었다. 얼마전 한 일간지에는 조선의 예가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라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기사가 실렸었다.(3) 기사는 최근에 발견된 『이왕가 비사』라는 제목의 일본 책자에 실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1907년 이토 히로부미가 영친왕을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보내려고 하자 고종 황제는 황태자가 인질로 잡혀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토는 황제를 안심시키는 방편으로 궁중의 상궁 여럿이 영친왕과 동행할 것을 제의했고 고종은 이를 수락하였다. 그 결과 상궁 7명이 영친왕과 동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에 3주일 가량 머물면서 일왕을 예방하고 온천 등지로 관광도 다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일본인 저자는 상국들의 기품 있는 행동과 태도에 경탄해 마지않으면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상궁들은 나이가 60이 넘었는데도 미목이 수려하고 풍만한 외모로 젊게 보였다. 정숙한 화법, 우아한 태도는 늙었어도 조선 미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했다." "조선의 여인들은 남에게 살갗을 드러내지 않는 관습이 있어 궁내청 관리들의 안내로 하코네 온천에 갔을 때는 탕에 들어갈 때도 반드시 얇은 비단으로 발을 가렸다. 이들은 황궁을 예방했을 때나 어딜 가든 바른 예법과 언행으로 처신해 조선이 과연 예의의 나라라는 평이 자자했다." 상궁들은 비록 나이가 많이 들었고 기울어져 가는 왕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넘쳤다. 그렇다. 500년 동안 동방예의지국의 예의 정점인 왕실이 완성하고 실천하던 예는 국운이 다해 가는 시기에도 그것들 체득한 개인들을 통하여 여전히 외국인을 포함한 뭇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일합방은 이러한 예의 체제를 허물어뜨리기 시작하였다. 우선 조선조의 예의 정점이었던 왕실의 몰락은 곧 조선사회의 가장 크고 중요한 기틀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각 집안의 가례에서 출발하여 종묘와 사직의 예로 이어지는 통합된 예의 체제의 유기적인 일체성이 무너지면서 조선의 예는 파편화되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올바르고 정확한 예의범절을 모범적으로 실천하고 끊임없이 연구 개발하는 왕실과 예조와 같은 제도적 기반이 사라지면서 조선의 예는 무너져 갔다. 그리고 수 백년에 걸쳐 형성된 조선민족의 정체성 역시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추석과 설 같은 명절에 치르는 차례는 사실은 각 집안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만백성'(萬百姓: 백만 개의 성씨)을 하나의 예로 엮을 수 있는 보다 큰 제사의 체제, 즉 종묘사직 (宗廟社稷)의 체제 속에서 일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예식절차들이다. 그러나 이제 '종묘와 사직'이 무너진 후로는 이처럼 각 집안마다 자신들의 조상들만을 위하여 모시는 차례만이 남게 되었다. 차례가 그 원래의 맥락을 상실하였음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한국사람들이 해마다 치르는 귀성전쟁이다. 한국인들의 대부분은 분명 명절때 마다 고향을 찾아 조상님들께 차례를 드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교통의 혼잡을 겪는다. 물론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의 가족주의와 예의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반면에 이것은 한국인의 생활이 이제 더 이상 가족의례를 자연스럽게 치를 수 없는 구조를 갖추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거대한 도시에서 핵가족 단위로 생활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온 문중이 같은 집성촌에 모여서 생활할 때 치르던 그러한 예식을 때마다 치르고자 한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무리일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은 이제 더 이상 전통적인 예를 가능케 하고 그러한 예를 위하여 생활하던 그러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였다. 이제 가정의 예를 올바로 치르기 위해서는 국가 전체가 며칠씩 모든 일을 중단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중과세'의 철폐는 물론 모든 공휴일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공휴일이 있어야만 전통적인 예를 치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의 한국인들이 처해 있는 문화의 모순적 구조, 전통과 현대의 부조화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 맞는 새로운 예법과 예절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혹자는 한국이나 동양에만 예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서양의 모든 국가들, 안정된 사회와 개성 있는 문화를 갖고 있는 국민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잘 정립된 예를 갖고 있다. 영국이나 일본과 같이 아직도 왕실이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대관식, 왕족의 결혼식, 장례식 등이 수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절차 즉, 예법에 따라 치러진다. 그리고 이러한 예식들은 온 국민이 하나가 됨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의 장을 제공하여 준다. 그러나 예식은 이처럼 왕실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같이 지극히 현대적인 나라도 수많은 '전통 예식'을 갖고 있다. 크게는 대통령 취임식, 국가원수의 장례식이 있다. 우리 나라는 매번 대통령 취임식을 치를 때마다 새롭게 절차와 방법을 고안해 내느라고 부산을 떨지만 미국의 대통령들은 벌써 30여대에 걸쳐 대통령을 취임시키면서 고안해 낸 나름대로의 절차가 있다. 물론 이러한 절차는 미국 특유의 간소한 면을 갖고 있고 매우 '캐주얼'(casual)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화려하지 않다고 해서 예를 안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인들은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절차들을 고안해 냈으며 그것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 특유의 예절,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수많은 반복과 훈련을 통해서 습득된 의도적인 자연스러움 (studied casualness)은 미국인들의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길가다가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건네거나 'hi'라는 한마디로 인사하는 것에서부터 대학교의 자유분방하면서도 감동적인 대학 입학식과 졸업식, 결혼식과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미국인들이 공유하는 수많은 예의범절들은 모두 미국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준다. 또 미국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개인의 권리를 지키는 보루인 사법부는 판사의 의복에서부터 철저하게 정해져 있는 절차를 통해서 모든 재판을 치른다.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미국의 재판 장면은 바로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가장 첨예한 이해의 문제와 예를 결합시킨 가장 좋은 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적'인 차원의 예와 사법 절차상의 예는 앞서 언급한 대통령 취임식 외에도 독립기념일, 추수감사절, 성탄절, 신년일 등의 '공적'인 예로 엮어 지면서 하나의 유기적인 예의 체제를 형성함으로써 신앙심과 애국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해 준다. 5. '동방무례지국' (東方無禮之國)에서 다시 '동방예의지국' (東方禮儀之國)으로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식민지 경험과 뒤이은 급격한 근대화와 서양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전통의 예를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예를 받쳐 주는 체제와 제도를 잃었다. 서양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수입한 외국의 예 역시 전혀 정착이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입학식과 졸업식을 보라. 과연 어디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고 공동체감을 느낄 수 있는가? 그러한 예식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 우리의 실존, 세계관과 동떨어진 예절들은 그 예절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느낌을 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살아 있는 예절들이 아니다. 허례허식이란 더 이상 감동을 줄 수 있고 공동체성을 느낄 수 없으면서 무조건 반사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하는 행위를 일컬음이다. 따라서 의미 없는 졸업식에 참여하느니 그 시간에 차라리 가족이나 친구, 선생님과 사진이라도 찍음으로써 무엇인가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사회문제가 되다시피 하는 고등학교 졸업식장의 밀가루 뿌리기와 같은 근본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행태들도 이처럼 의미를 상실한 통과의례 속에서 그나마 기억에 남을 수 있는 행위와 순간을 만들어 보려고 저지르는 무모하고 허무한 몸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행태는 결혼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의상을 입고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절차를 순식간에 치르고 나면 본인들이나 하객들이나 어딘가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음식만 잔뜩 차려 놓고 하객들은 아예 식장으로는 들어가지도 않고 식당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이러한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신랑을 자동차에 매달고 달리는 것과 같은 광적이고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한국의 결혼식은 서양적인 의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식 자체는 예식장이나 교회, 성당과 같은 현대식 건물에서 서양적으로 또 현대적으로 치르기는 하지만 곧바로 '폐백실'로 자리를 옮기고 전통의상으로 갈아입은 후 전통적인 폐백식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한국 결혼식의 이러한 이중 구조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맞는 결혼 문화가 없음이다. 장례식에서도 예를 들어서 일부 개신교파에서는 망자에 대하여 절을 하지 못하게 한다. 어른에게 절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존경과 사상의 표현이라고 배웠으며 오랜만에 찾아 뵐 때마다, 그리고 명절 때마다 절을 하던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나 산소 앞에서는 절을 할 수 없는 것이 일부 한국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이중 문화구조의 현주소이다. 얼마 전에 개봉된 축제와 학생부군신위와 같은 영화들은 우리가 잃어 가고 있는 전통 의례, 그리고 그 의례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애정 어리고 향수에 어린 회고록이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우리의 전통 장례의 미학과 철학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분명 사라져 가는, 앞으로는 더 이상 실천하기도 보기도 힘든 예절에 대한 고별인사다.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도 우리 사회의 예가 사라졌음은 도처에서 느낄 수 있다. 휴지와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고 건물 내부에서조차 침을 뱉는 행위들은 물론 누구나 경험하고 느끼는 무례의 극치다. 일례로 교통문화를 보자. 자동차가 대중화되기 시작한지 20년도 채 안돼는 기간 동안에 우리는 어느덧 1,000만대의 차를 보유하는 국민이 되었다. 그러나 예의범절이 설정되어 있지 않은 한국의 대도시와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는 것은 불쾌함과 위험의 연속이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에서 운전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운전실력'이 월등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들이 공유하는 운전 에티켓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운전을 이제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돼는 나라에서 운전 예의범절이 안 갖춰져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마냥 지체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우리도 하루 빨리 우리 나름대로의 '운전예법' 즉, '운전문화'를 정립해야 한다. 예의 정립문제는 국가의전 차원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면 청와대에 외국 국가 원수를 위한 만찬이 있을 때는 서양악 실내악단의 연주가 공식 행사의 배경 음악을 제공하는 것을 보았다. 최근에 와서는 전통음악이 연주되는 것을 보고 무척 고무되었던 적도 있다. 또 국가 원수들이 공항에 도착하여 사열을 할 때 우리의 군대가 전통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이는 분명히 매우 바람직한 변화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국가의 의전이 서양식으로 치러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서양식 만찬을 할 경우에는 서양의 의전 절차와 에티켓에 맞춰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우리식의 의전을 개발해야 한다. 의전이란 상대방을 편하게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예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것은 의도적이다. 사람은 어느 정도 상대방에 대하여 불편함과 어려움을 느낄 때 조심하게 되고 상대방을 살피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예가 의도하는 바이며 철학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렵게 느끼게 하고 우리의 예법을 배우고자 노력하게끔 하는 것이 의전이다. 물론 예는 불편하게만 해서는 안된다. 예는 서로가 갖출 때 평상시에는 맛볼 수 없는 하나됨,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리고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집안 식구 끼리든,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든, 학교와 직장에서든, 국가와 민족의 차원에서든, 그리고 나아가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간에도 사람을 엮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우리의 예가 있을 때, 외국인들이 와서 불편해 하고 조심할 정도로 한국 특유의 아름다운 예법이 있고 그것을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볼 때 한국문화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을 고안해 내는 것은 엄청난 노력과 정성을 요한다. 우리에게는 고작 하여 '의전실'만 있지만 조선은 '예조'(禮曹)를 설치하고 '육조'(六曹)의 으뜸으로 세웠다. 조선의 후예인 현대 한국인들로써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 -- 6. 결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현재 갖고 있는 문화적 이중구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전통과 현대의 예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문화를 정립시켜야 하는가? 이 글을 쓰는 동안 나가노 동계올림픽의 개막식이 방영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가장 일본적이고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예식들을 연출해 냈다. 물론 88올림픽 개막식 역시 우리의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울림으로써 전세계인을 감동시켰던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시의 그러한 정신과 분위기를 이어 나가지 못했다. 그러한 행사가 있을 때만 이러한 문제에 신경을 슨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맛나는 사람들, 엘리베이터에서 맛나는 사람들, 차를 운전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 도시 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30년밖에 안되었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서로 다 아는 마을에서 살던 한국인들이 현대 '시민'(市民)의 에티켓과 예의범절을 모른다는 것은 당연하다. 또, 서구식 학교와 대학의 입학식과 졸업식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결혼식과 장례식을 어떻게 치러야 좋을지 모른다. 이제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예를 재정립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삶에 형태를 주고 의미와 방향성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의 공동체성, 하나됨을 확인할 방법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조선 초의 모든 국가적 역량은 편찬사업에 투입되었다. 세종대에 절정에 이르고 성종대에 이르러 일단락 되는 조선의 편찬사업은 바로 새로운 예법을 정립시키는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편찬된 『국조오례의』에서 『경국대전』에 이르는 법전들은 구체적인 예법을 설명하고 설파하는 '법전'이었다. 우리의 전통 문화인 조선 특유의 문화와 '동방예의지국'은 이렇게 건설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편찬사업'을 시작해야 하고 '신 경국대전'을 써야 한다. 사회의 각부문에서 필요한 예를 복원 또는 새롭게 발명해 내면서 한국 고유의 현대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동서고금의 예를 다시 찾아보고 비교 연구해 보면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을 찾아내고 새롭게 고안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동서고금의 예가 표현하고 있는 삶의 철학, 그리고 그러한 철학을 실현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던 정치, 경제, 사회적 제도에 대한 이해를 함께 도모할 때 가능해질 것이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