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5월 5일 수요일 오전 05시 02분 02초 제 목(Title): 함재봉/아시아적가치논쟁의 정치학과 인식� Posted By: artistry (요키에로타코) on 'Library' Title: 함재봉/ 아시아적가치논쟁의 정치학과 인식론 Date: Fri Nov 27 12:26:49 1998 아시아적 가치 논쟁의 정치학과 인식론 함재봉 ----------------------------------------------------------------------------- --1958년생. 80년 미국 카알톤 대학 경제학과 졸업. 92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정치학 박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현). <포스트모더니즘과 해방이론의 해체:푸코를 중심으로> <근대사상의 해체와 통일한국의 정치사상> <국가-시민사회의 관계에 대한 정치사상적 기반과 개념> <유교 전통과 인권 사상>등 논저 다수.---------------------------------------------------------------------- ------- - - --1. 서론 어느 사이엔가 ‘아시아적 가치’론이 우리 지성계의 중심적인 화두로 자리잡았다. 이 논쟁은 그동안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국가들이 눈부신 경제발전 경험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 체제의 당위성과 정당성, 그리고 우월성을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촉발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미국식 자유시장경제와 북구식 복지국가에 대한 ‘대안’ 내지는 ‘도전’이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 발전모델론’ 과 ‘아시아적 가치론’은 학자들은 물론 전세계의 언론인과 정치인,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각종 사회단체, 정부, 국제 기구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국제 사회에서는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일기 시작한 이 논쟁은 냉전 종식 이후 ‘체제’와 ‘이념’을 둘러싼 중심적인 논쟁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주지하다시피 냉전 기간 동안의 체제논쟁은 미국과 소련이 각각 대표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간에 벌어졌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는 미국식 시장경제와 북구식 복지국가 간의 체제논쟁이 일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미-소의 이념대립과 체제경쟁이 종식되면서 논쟁의 축이 ‘동양 대 서양’으로 바뀐 것이다. 70년에 걸친 힘겨운 체제경쟁에서 자유주의를 수호하면서 결국 주적(主敵)인 소련을 붕괴시킨 미국으로서는 채 승리를 만끽하기도 전에 ‘동아시아 체제와 가치’의 도전을 받기 시작한 셈이다. 물론 아시아의 경제발전은 처음부터 미국 또는 서구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계획되거나 인식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이 공산주의와의 냉전을 치르는 전략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권장한 것이 일본과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의 경제발전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기대이상의 성공을 거두고 관련 사회주의권이 갑자기 붕괴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동아시아와 서구간의 체제적 동질감이나 친화성보다는 차이와 이질성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경제개발에 있어서 국가의 선도적인 역할, 국민들의 높은 질서의식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안정, 국민들의 높은 성취의욕과 노동윤리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교육열, 강력한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의식 등의 특성을 갖고 있는 동아시아 모델은 미국과 서유럽의 모델과 근본적으로 다르면서도 우월한 것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97년 말에 아시아를 강타한 경제위기는 이 논쟁을 처음과는 전 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기 시작하였다. 원래 동아시아의 경제적, 정치적 성공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동아시아 발전모델론과 아시아적 가치론은 이제 오히려‘동 아시아 경제의 좌절’, ‘정실 자본주의의 몰락’을 설명하는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동아시아의 경제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그 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어 온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체제와 ‘미국적 가치’가 집중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체제와 가치가 이토록 적극적으로 부각되고 권장되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와 냉전 중 미국의 이념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이후 처음이다. 아시아의 경제위기는 아시아적 가치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한편 다시 한번 미국식 체제와 가치의 장점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국내에서도 정부, 정치권, 경제의 구조조정을 논하는데 제시되는 기준은 개인과 조직의 능력과 경쟁력, 효율성을 시장이라는 기제를 통해서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미국식 제도와 가치들이다. 그렇다면 아시아적 가치와 동아시아 발전 모델은 과연 그 효능과 적실성을 상실하였는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대안은 미국식 경제체제와 가치관을 적극 수용하는 길뿐인가? 이 글은 ‘아시아적 가치’ 와 ‘미국적 가치’의 적실성 문제를 역사적, 인식론적 맥락에서 포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 -------------------- - --2. 크리스 패튼 대 리콴유' 최근 출판된 두 권의 책은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관심 을 끌고 있는 주제인가를 가늠해 준다. 하나는 대영제국의 마지막 식민지였던홍콩의 마지막 총독을 지낸 크리스 패튼(Chris Patten)이 낸 『동양과 서양: 중국, 권력, 그리고 아시아의 미래』(East and West: China, Power, and the Future of Asia)다. 이 책은 출판도 되기 전부터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문제의 발단은 원래 책을 출판하기로 하였던 하퍼콜린스(HarperCollins) 출판사가이 책이 중국의 통치자들에 대해서 너무 비판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출판 의사를 번복하면서 부터였다. 하퍼콜린스 사는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의 언론제국의 일부분이며 현재 중국에서 사업을 급속히 확장하고 있는 머독은 이 책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출판사에서 출판될 경우 중국정부와의 관계가 껄끄러워 질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하퍼 콜린스의 편집장은 초고를 읽어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출판준비를 서둘렀지만 결국 사주 머독의 압력에 못 이겨 출판을 포기하였다. 그 후 편집장은 사표를 내고 머독을 상대로 편집권 유린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였고 패튼 역시 하퍼콜린스 사를 상대로 계약위반 소송을 냈다.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머독은 진화에 나섰고 급기야 얼마 전 잘못을 시인하는 사과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패튼의 책은 끝내 하퍼콜린스사에서 나오지 않고 결국 타임즈북스(Times Books) 사에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출판되기도 전부터 치른 유명세 덕분에 이 책에 대한 관심은 극도에 달하였고 책이 출판되자마자 주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패튼은 영국의 정치인으로 13년 동안 영국의 ‘하원’(House of Commons)의원을 지내면서 보수당 정권의 각료를 지냈다. 패튼이 몸담고 있던 시기의 영국 보수당은 ‘대처리즘’(Thatcherism)으로 불리는 철저한 시장주의에 입각하여 복지국가의 ‘원조’인 영국의 복지체제를 철저히 해체시키던 때였다. 그 결과 영국은 유럽의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복지국가 모델을 포기하고 미국식 정치경제체제를 채택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패튼은 1992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신은 13년 동안 지켜 온 지역구 의석을 잃었다. 이 선거를 치르는 동안 그는 당의장을 겸하면서 메이저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이 계속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메이저 총리는 당의 승리에 기여는 하였지만 갈 곳을 잃은 패튼을 중국으로의 반환이 임박한 홍콩의 마지막 영국 총독에 임명하였다. 아시아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패튼은 대영제국의 마지막 식민지인 홍콩의 마지막 총독이라는 지위와 명칭, 그리고 그 화려한 역사적 상징성을 십분 의식하면서 그 직업을 흔쾌히 승낙한다. 그리고 홍콩은 사상 최초로 ‘노련한 중국전문가’(Old China hand)가 아닌 총독을 맞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될때까 지 마가렛 대처 수상이 건설한 ‘신보수주의’ 정당의 핵심 정객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패튼은 홍콩에 부임하면서 홍콩의 민주화를 급속히 추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책은 중국으로의 반환 이후 홍콩을 통치하게 될 북경정부의 능력과 저의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홍콩인들의 심리와 맞아떨어지면서 순식간에 효과를 보기 시작하였다. 중국정부는 물론 이러한 정책에 대해서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중국과 영국간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북경정부가 보기에 이는 홍콩의 순조로운 반환을 저지하기 위한 방해 공작으로 보였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새로운 정치질서를 반환을 불과 5년 앞둔 시점에서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들로써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정부는 물론 일반 중국인들의 입 장에서 볼 때 홍콩은 자신들의 치욕적인 근세사의 상징이었다. 19세기초부터 영국은 청과의 무역에서 계속 적자를 보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불법적으로 팔기 시작하였다.이를 막기 위해 청나라 정부가 1839년 아편 20,000상자를 압수하여 불태우자 영국은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결국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1849년 8월 29일)을 체결한다. 조약의 내용은 중국이 영국에 전쟁보상비를 지불하는 것은 물론 5개의 항구를 열고 영국인들의 거주를 허용하며영국 인들은 영국 법정에서만 재판할 수 있다는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홍콩 섬을 영국에 영구히 양도하는 조항을 포함하였다. 그 이후 영국은 1860년에 구룡 반도를 양도받고 1898년에는 235개 섬을 포함한 신계(新界, New Territories)를 99년 동안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홍콩의 역사는 곧 중국 주권의 유린과 국치의 역사였다. 1997년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홍콩반환은 신계에 대한 임대 계약이 끝나면서 신계가 없는 홍콩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영국이 남경조약을 통해서 영구히 빼앗은 홍콩 섬도 마치 선심 쓰듯이 되돌려 준 사건이었다. 중국으로써는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었으면서도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게 빼앗겼던 고토를 되돌려 받는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영 국은 반환을 앞두고 갑자기 홍콩의 ‘민주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들이 통치하던 150년 동안(신계는 100년) 한번도 홍콩의 중국인들에게 참정권을 주거나 민 주체제를 설립할 생각을 않던 식민통치자들이 느닷없이 홍콩 현지인들의 정치적 권리 를 들먹이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실로 아니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 정부 가 ‘천안문 사태’를 저지른 죄로 인하여 서방국가들에게 ‘인권유린 정부’로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홍콩 민주화 정책은 국제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빼앗겼던 국토를 돌려 받는 중국 정부는 홍콩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홍콩인들의 민권도보장 해 준다는 약속을 수 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반대로 남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그 영토를 돌려주면서 온갖 생색을 다 낼 수있었 던 것이다. ‘중국정부는 과연 우리가 만들어 놓은 홍콩이라는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망치지 않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중국에 반환된 홍콩은 중국인민군의 군화발에 짓밟히면서 군부독재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영국과 서방의 언론들은 이러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였다. 이들은 주로 홍콩의 엄청난 외환 보유고를 고스란히 양도받는 중국 정부는 얼마나 큰 횡재를 하였는가, 그리고 과연 중국이 홍콩을 영국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이 활력 있는 경제가 건설될 수 있었을까 하는 등의 논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패튼의 책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홍콩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미래에 대한 걱정,그리고 중국정부의 부패와 무능,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영국 보수당의 정객답게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우월성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책의 대부분을 ‘아시아적 가치’는 일고의가치 도 없는 주장에 불과하며 중국이나 싱가포르 같은 독재정권들이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내 놓은 궤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다른 한 권의 책은 싱가포르의 ‘국부’인 전 수상 리콴유(Lee Kuan Yew, 李光耀)의 자서전, 『싱가포르 이야기』(The Singapore Story)다.1) 이 책 역시 패튼의 책과 마찬가지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첫 장이 시사주간지 『타임』에 전재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대영제국의 일개 항구에 불과하였던 소도시 싱가포르를 당대에 금세기 최고의 경제개발 성공 사례로 만들어 낸 리 전 수상이 자신의 유년시절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리는 싱가포르가 독립한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수상을 지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싱가포르를 세계 최대의 무역항, 세계 3위의 정유시설, 세계굴지의 다국적 첨단산업 생산기지, 가장 앞선 정보화 인프라를 갖고 있는 나라로 성장시켰다. 싱가포르가 이처럼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리콴유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1990년 이후 리는수상 직을 사임하고 현재로는 ‘원로 대신’(Senior Minister)라는 직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전세계를 순회하면서 싱가포르식 정치, 경제, 사회 체제를 홍보하고 ‘아시아적 가치’의 중요성과 우월성을 설득하고 다니는 일이다. 가난에 찌든 항구 도시를 세계 굴지의 산업기지로 육성한 경험과 개인적인 청렴성, 그리고 캠브리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배경 등은 그의 말에 많은 무게를 실어 준다. 1994년 포린 어페어스 지에 실린 후 이미 ‘고전’ 이 되어 버린 인터뷰에서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체제를 강력히 옹호한 바 있다. “미국 을 다른 나라들이 따라야 될 모델로 생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동아시아인의 한 명으로 미국을 바라볼 때 나는 매력적인 점도 발견하고 또 나쁜 점들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사회신분, 인종, 종교적 차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교류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다. 그리고 특히 공산주의와 비교했을 때 미국의 좋은 점들이라고 생각하였던 것들을 저는 아직도 좋아한다. 예를 들어서 무엇이 사회를 위해서 옳고 그른가에 대한 개방된 논의, 공직자들의 책임성(accountability), 공산정권의 전형적인 요소인 비밀성과 공포정치가 부재하다는 점 등 말이다. 그러나 체제 전체를 보았을 때 저는 절대로 받 아들일 수 없는 체제라고 생각한다.총기, 마약, 폭력범죄, 무질서, 공공장소에서의 무 례한 행동,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의 붕괴 등 말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의 확장은 결국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는 질서 있는 사회의 건설이 다. 이러한 자유는 질서 있는 국가에서나 가능하지 투쟁적인 자연의 상태나 무정부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2) 그는 패튼을 위시한 서구의 거의 모든 정치지도자들이 비판 하는 중국의 체제도 적극 옹호한다.: 북경의 정권은 중국 내에서 형성될 수 있는 다른 어떤 정부보다도 안 정적이다. 만일 천안문에서 학생들이 승리해서 새 정부를 수립했다고 가정해 보자. 천안문에있었 던 학생들은 프랑스와 미국 등지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후 줄곧 서로 반목하면서 다투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중국은 어땠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소련보다도 못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은 거대하고 다양한 나라다. 강력한 중앙권력 이외의 대안은 없다.3) 리콴유는 현재 ‘아시아적 가치’의 가장 강력한 주 창자다. 리콴유 전 수상은 자서전에서도 동양인들 특유의 가치관과 동아시아가 구축한 정치경제체제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서구적 가치관의 위선과 체제의 한계를 들춰내고 있다.그리 고 앞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리콴유는 기존의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것에그치지 않는다. 그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미래 발전 방향에 있어서, 그리고 추구하는 이상 사회에 있어서도 ‘동아시아적 특성’이 유지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서구 사회와 체제에 대한 이러한 과감한 비판, 그리고 권위주의적 정권과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옹호는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 --------- - --3. 인권과 아시아적 가치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과거 식민지를 경험했던 국가로써 빼앗겼던 영토를 되돌려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감격스러운 일인가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절감하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경험했던 중국인들과 동병상련을 느낄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과거의 제국주의자 영국의 통치자들 편에 설 것인가? 남의 영토를 침범하고 약탈을 일삼던 사람들이 그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는 마당에 그것을 어떻게 다스리라고 훈계하고 충고할 자격이 있는가? 만일에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해서 빼앗은 영토라도 그것을 아주 잘 다스렸다면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일인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다른 어떤가치 보다도 우월한 것인가? 영국의 홍콩반환은 이러한 문제들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제기하는 사건이었다. 자유민주주의자이며 시장경제주의자인 과거 식민제국의 총독이 권위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중국 정부를 질타하는 구도야말로 아시아적 가치논쟁의 구도를 가장 극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제국주의자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주창하고 민족주의자가 자국의 권위주의정치 체제와 정부주도형 경제체제를 극구 변명, 옹호해야 하는 구도가 바로 아시아적 가치 논쟁의 국제정치적 구도이다.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국제 논쟁은 비엔나 국제 인권회의에 앞서 이에 대한 준비단계로 1993년 4월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유엔 아시아지역 인권회의(United Nations Asia Regional Meeting on Human Rights)를 통해서 더욱 구체화되고 격화되었다. 이 회의에서 한국을 포함한 40개 아시아 국가가 채택한 『방콕인권선언』(The Bangkok Declaration on Human Rights)은 인권은 ‘본질적으로 보편적인 것’이지만 국가와 지역적 특성,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종교적 배경의 맥락 속에서 고려되어야 하며 원칙과 가치들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고 덧붙였다. 선언문은 정치적인 권리(political rights) 이외에도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역시 존중되어야 하며 특히 ‘개발 할 수 있는 권리’(Right to Development)는 인권의 보편적이고핵심 적인 부분(universal and integral part of fundamental human rights)임을 천명하였다. 이 선언문은 또 경제적, 사회적 발전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돕는다 는 점을 강조하였다. 서구의 정부와 인권단체들은 민주주의란 아무런 선결 조건 없이 어떤국가에서나 즉각적으로 실시할 수 있고 또 실시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주주의의 즉각적인 실시를 거부하는 것은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방콕 선언문에 조인한 아시아의 정부들은 민주주의에도 선결조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리 역시 사회, 경제적 발전과 함께 중산층과 시민사회의 성숙, 그리고 정치제도와 과정의 성숙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구의 많은 지식인들과 인권단체들이 볼 때 인권유린은 정부에 의해서만 용인되거나 자행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반면에 아시아의 정부와 지식인들은 많은 경우에 인권이란 의식주와 같이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안보권(right to security)이라고 주 장한다. 예를 들어서 자유주의자들이 볼 때 범죄는 인권유린의범주에 들지 않는다. 그 러나 아시아적 가치론자들이 볼 때는 범죄로부터 보호받을수 있는 권리야말로 가장 중 요한 인권의 하나이며 이러한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와 정부의 존재이유이다. 이들이 볼 때 서구사회의 높은 범죄율과마약 문제, 빈부간의 격차 등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인권유린의 사례들이다. 아시아의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강력한 경찰력과 군대, 사법제도 등은 기본적인사회 질서와 기강을 유지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안정된 삶을 제공하여 주고 범죄 등의 사회불안 요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해 주는 기제들이다. 그러나 서구의 자유주의자들과 인권단체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자국민을 억압하고 민주화를 지연시키며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끝으 로 방콕 선언은 인권옹호는 정부간의 대립이나 비판, 무역과 경제원조에 대한조건제한 (conditionality)을 통해서 보다는 협력과 합의를 통해서 추구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미 의회가 중국에 대한 최혜국지위(Most Favored Nation Status) 부여 여부를 매년 재고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통상압력을 상대국 내의 인권신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특정국의 민주화세력과 인권단체들을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면서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회, 정치불안을 보다 나은 정치체제의 구축을 위한 ‘창조적 불안’(constructive instability)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많은 아시아의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무책임한 이상주의이거나 불공정한 내정간섭이다. 아무튼 미국의 압력으로 인하여 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유일하게 서명하지 않은 이 선언문은 서방국가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고 국제사면위(Amnesty Internationa l)는 이 선언문의 채택을 ‘일보 후퇴’ 한 것이라고 하였다. --------------------- -------------------------------------------------------- - --4. 아시아적 가치 논쟁의 유래 아시아적 가치론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경제발전을 정치발전에 우선하는 가치로 두는 국가주도형 경제발전모델이 지난 30년간 동아시아가 경험한 경이적인 경제발전의 근본요인이었다는 것이다. 개발국가론(Developmental State theory)으로도 대표되는 국가주도형 개발모델은 경제개발에 있어서 강력한 정부의역할 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사회질서와 안정, 그리고 안보를 국가의 최우선적인 과제로 설정한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의 국가들이 실제로 이러한 체제하에서 산업화에 성공하였고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국가들은 선발 신흥공업국들의 모델을 의식적으로 모방하면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동아시아발전 모델의 핵심은 강력한 국가가 산업정책을 통해서 전략산업을 지정, 육성하면서 국내 산업기반을 구축해 나아가는 동시에 수출을 통해 국부를 늘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국내 시장을 철저하게 걸어 닫음으로써 국내 기간 산업들을 기술과 자본, 마아케팅 능력이 월등한 외국의 기업들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전략 산업과 기업들은 파격적인 금융과 세제, 그리고수출 지원을 통해서 짧은 기간 내에 국제경쟁력을 갖추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수 조건이 있다. 우선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원을 몇몇 전략산업에 집중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부가 필요하다. 두번째로는 부족한 자원과 기술,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효율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지식과 식견, 판단력을 가진 정치지도자와 관료가 필수적이다. 세번째 요소는 국가의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에 따르고자 할 뿐만 아니라 농업중심에서 산업중심 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을 소화해 낼 수 있는 규율과 근면성, 기강과 교육열을 갖고 있는 국민이다. 20세기 세계경제 발전사가 보여주는 것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추고 그것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키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드문가를 보여준다. 아직까지도 이러한 모델을 바탕으로 성공한 경우는 일본과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에 불과하다. 이 모델을 처음으로 채용한 일본은 19세 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시대에 비-서구권 국가로써는 유일하게 선진국으로 발 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가 부상하기 전까지는 후발개도국에서 출발하여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는데 성공한 마지막 사례이기도 하였다. 일본이 명치유신 이후 불과 30여 년만에 러일전쟁(1904∼05)에서 승리하면서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이후 ‘선진국’의 반열에 합류한 나라는 20세기가 끝나가는 오늘날까지 없다. 오늘날의 ‘G7’ 회원국 명단은 20세기 초반의 강대국의 명단과 동일하다. 물론 일본의 성공이후 수많은 나라들의 자립적인 산업기반을 마련해 보고자 애썼다. 그러나 그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20세기 초반 한때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남미국가들은 곡물과 육류가공수출에 힘입어 일부 대도시에서는 유럽 선진국 수준에 버금가는 생활 수준을 누렸다. 당시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는 ‘남미의 파리’로 불렸다. 그러나 1929년 미국의 증시 폭락과 함께 불어닥친 세계대공황은 남미의 경제를 철저히 파괴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신생국들이 탄생하면서 사람들은 이들 중 새로운 경제선진국이 탄생할 것을 기대하였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등지의 나라들은 캠브리지와 옥스퍼드, 소르본느 등에서 교육을 받은 세련되고 ‘세계화’된 지도자들과 영국과 프랑스 등이 남겨 놓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관료행정체제, 그리고많은 지하자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중 어느 한나라도 자립적인 경제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196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이 시도한 ‘수입대체산업’을 통한 경제개발은 또다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역시 70년대의 석유파동과 곧 이어 전개된 국제 부채파동(international debt crisis)으로 또 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70년대에는 전세계적인 석유파동을 야기시키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산유국들이 미래의 산업강국으로 떠 오르는 듯 하였다. 특히 팔레비 국왕이 강력한 근대화정책을 추진하던 이란은 이중 대표 주자로 각광 받았다. 그러나 그의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 정책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반동에 부딪치면서 침몰하였고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에 ‘제2세계’를 형성하고 있던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은 자본주 의식경제발전 그 자체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소멸은 역사의 필연적이며 공산주의가 경제발전의 최종단계라는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제3세계 국가들이 자본주의 방식의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개발도상국가들에게 사회주의 방식을 쫓는 경제발전을 종용하였다. 냉전은 경제발전 방식에 있어서 제1세계와 제2세계가 제3세계 국가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고자 벌인 전쟁이었다. 남북한이 ‘체제경쟁’을 벌인 한반도는 이러한 점에서도 냉전을 철저하게 반영하였다. 사회주의권의 논리는 한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듯 했다. 이들은 자본주의 국제체제가 결코 제3세계 국가들의 자립적인 경제발전을 용납할 수 없는 제국주의적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일본이 경제발전에 성공한 이후에 단 한 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데 성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제2세계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 줬다. 또 실제로 여러번 선진국의문턱 에까지 갔다가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던 남미에서는 많은 지식인들이 자본주의 국제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반복되는 경제발전 실패 경험을 통해서 이들이 얻은 결론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란 강력한 ‘중심부’의 국가들과 이들 중심부에 값싼 노동력과 자연자원을 공급해 주는 ‘주변부’ 국가들로 형성되어 있으며 중심부에 대한 주변부의 ‘종속’은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종속이론’과 ‘자 본주의 세계체제 이론’ 등은 국내에서도 좌파 지식인들과 학생 운동권에 의해서 채택되면서 1980년대 반체제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이들이 보기에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와 이를 떠 받치고 있는 권위주의 군부통치 체제는 자본주의 국제체제에 종속되어 있는 제3세계 국가의 전형이었다.따라 서 한국경제의 자립 여부가 명확히 판가름나지 않고 있던 80년대에는 이러한 이론들이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 - --5. 동아시아 발전 모델의 세계사적 의미 그러나 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좌파의 제국주의 이론과 종속이론은 급속히 적실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소련과 동구가 자발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폐기처분하는 동시에 시장경제체제를 앞 다투어 도입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70년을 지탱해 온 사회주의권이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자진해서 사회주의를 버리기 시작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중국의 등소평과 구소련의 고르바쵸프 같은 지도자들이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일찍이 간파하고 적극적으로 개혁과 개방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한 것이 사회주의권의 몰락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즉, 체제 내부의 모순이 그한계 에 도달한 시점이 198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과 동구권의 급속한 몰락은 체제 외적인 요인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미국이 주도한 군비경쟁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소련 경제에 엄청난 압력을 줌으로써 붕괴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흔히 간과되고 있는 또 다른 요인은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급속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상이었다. 구소련과 동구권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선진국들이 높은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적 평등에 있어서는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에 앞서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 수준이 제3세계 국가들의 생활수준보다는 높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한국과 같이 미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주구’ 노릇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신식민지’ 국가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립적인 경제개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이러 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88 서울 올림픽이었다. 1981년 스위스의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차기 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되었을 때 전세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국제사회에 있어서 그 존재가 지극히 미미하였고 비록 경제발전 사례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때였지만 초기 개발도상국의 수준을 간신히 벗어난 정도밖에 안 되는 경제력을 갖춘 한국이 과연올림 픽을 제대로 개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7년 후 한국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올림픽을 훌륭히 치러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국은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특히 당시 소련과 동구, 중국 등의 사회주의권이 받은 충격은 컸다.4)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소련이나 동구권은 ‘철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갈 수 없는 적성국가들이었다. 요즈음은 불과 한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중국 상해, 두시간이면 날아갈 수 있는 북경 역시 ‘죽의 장막’ 뒤에 숨겨져 있는 미지의 ‘적진’이었다. 당시 한국과 동구권, 한국과 중국 간의 교류는 수십 년간 단절되어 있었고 쌍방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격렬한 이념전쟁의 산물이었던 선전을 통한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동구권과 중국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만큼 그 지역의 사람들 역시 한국에 대한 편견을 가졌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88 서울 올림픽은 이들이 전세계와 함께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리고 미제국주의자들의 압제 밑에서, 군사독재하에서 신음하고 있다고만 들었던 한국이경이 로운 경제발전을 이룩한 현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일본이 19세기 말에 경제발전에 성공한 이후 실로 100년만에 다시 한번 후발국가가 자립적인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쾌거였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는 제3세계 국가들이 결코 비종속적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없다던 제국주의 신식민지 이론과 종속이론이 틀렸음을 보여준 실증적인 예가 한국의 경제발전 성공사례였고 88 서울 올림픽은 이것을 만방에 과시한 축제였다. 중국의 학생들이 부정부패 척결과 정치개혁을 외치면서 야기되었던 천안문 사태, 그리고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의 집단 붕괴가 모두 88서울 올림픽이 끝난 지 채 1년이 안되어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한국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의 성공은 맑스주의자와 종속이론가들만 설득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이론가들인 시장경제주의자들 역시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유효성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93년 9월 세계은행이 발표한 “동아시아의 기적: 경제성장과 공공정책”(The East Asian Miracle: Economic Growth and Public Policy)이라는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동아시아 경제발전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들 경제를 보면 예외 없 이 발전을 촉진시키고자 정부가 체계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경제에 개입하였다. 정책 개입은 특정 산업에 대한 금융지원, 산업의 이윤과 소득을 높여주기 위한 낮은 이자율과 대출 금리 상한선 유지, 수입대체 산업의 보호 육성, 사향산업에 대한 지원, 정부 은행의 설립과 재정 보조, 응용기술에 대한 공공영역의 지원, 기업과 산업의 수출 목표 설정, 수출 마케팅 담당 제도의 구축, 그리고 사적 부문과 공공부문간의 광범위한 정보 교환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자본주의 시장은 수많은 법적, 제도적 뒷받침을 필요로 하는 고도로 세련되고 민감한 장치이다. 시장이 인간들의 물욕과 소유욕에 의해서 저절로 아무데서나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은 시장주의자들의 선전에 불과하다. 현대의 자본주의 시장만큼 수많은 규칙과 규정, 규범 그리고 규제가 필요한 정교한 기제는 없다. 따라서 시장은 적극적으로, 그러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서는 정부에 의해서 매우 근심스럽게 육성되어야 한다. 또 경제 후진국의 시장은 그 초기 형성단계에서는 자칫하면 국내, 국제 기업들이 독과점과불공 정 거래를 통해서 적나라한 생존경쟁과 수탈을 일삼는 무정부 상태로 전락해 버리기 쉽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시장의 잔혹성을 방지하는 한편 기술을 개발하고 부족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분배, 할당함으로써 안정된 경제개발을 꾀할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의 재무차관인 로렌스 서머스(Lawrence Summers) 교수도 드롱(Bradford J. DeLon g) 교수와 공동집필한 논문에서 “정부는 개인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경제구조를 바꿈으로써 산업화 과정을 촉발(jump-start)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5)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시장개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인과 관료의 비전과 식견, 판단력과 기강이 필수 조건이다. 정부가 자신에게 주어진 엄청난 힘을 ‘지대추구’(rent-seeking)에 탕진하지 않고 효율적인 자원배분과 성장의 촉진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물론 서구 ‘신고전주의’학파의 시장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반대한다. 그들에 의하면 시장의 기강(market discipline)과 효율성만이 경제발전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정부가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아시 아의 개발도상국 정부들이 시장주의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에 있어서 순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의 위민사상(爲民思想)에 기반한 정부의 강력한 책임의식, 관료-지식인의 철저한 민본주의(民本主義)가 국민과 기업인들의민족 주의가 합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위민사상과 민본주의에 입각한 유교정치철학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인식을 배태시킴으로써 서구의자유 주의 세계관에서와는 달리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용인하는 동아시아 특유의정치문화 를 창출하였다.: (동아시아인들은) 조직과 정부에 대하여 훨씬 더 긍정적인 인식을 갖 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 이전에 중국인들은 이미 관료제를 발명하였다. 그들은 국가가 백성들의 안위를 책임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구휼을 베풀기보다는 복지를 창출하는정부 기관들을 설립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동아시아의 정부들은 생산을 장려하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였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한 경제정책에 국민이적극 적으로 동참하도록 유도하였다. 여러 측면에서 동아시아의 사회들은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현대사회에 매우 적합한 점이 있다.6) 또한 유교전통은 동아시아의 근세사와 맞물리면서 동아시아 발전모델을 가능케 하였다. 동아시아의 근세사는 동아시아인 들에게 정부의 간섭과 억압보다는 나라를 잃은 서러움, 약한 군대와 낙후된 경제가 가져다주는 전쟁과 가난의 비참함과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각인시켜 주는 역사였다. 따라서 동아시아인들에게 있어서 바람직한 사회란 정부의 역할이 최소화되고 시장의 자율성과 개인의 절대적인 권익이 보장되는 자유주의적 사회라기 보다는 독립된 주권과 민족자결을 담보해 줄 수 있고 적극적인 경제개발을 통해서 민생의 문제를해결 해 주고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국가와 정부가 존재하는 사회다. 방콕선언이 제시하고 있는 ‘아시아적 인권론’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홍콩의 마지막 영국 총독 패튼과 중국의 지도부, 그리고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간의 견해 차는 이러한 사상적, 역사적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 - --6. 아시아의 경제위기와 동아시아 발전 모델의 미래 1997년 말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불어닥치면서 ‘아시아적 가치’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비록 일부 경제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 기업인들이 경고해 온 바 있는 것이었지만 그 범위와 심각성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예상을 초월한 아시아의 경제위기는 동아시아 발전 모델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계기를 제공하였다.7) 그리고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성공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었던 ‘아시아적 가치’는 이제 아시아의 경제위기를 설명하는데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한때 경제학 이론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할 만큼 경기 순환을 타지 않고 지속적인 발전을 구가하던 아시아의 경제가 급속히 수축하기 시작하자 그 동안 수세에 몰리고 있던 시장주의자들이 동아시아의 국가주도형 경제발전 모델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미 1994년에 포린어페어스 지에 기고한 “The Myth of Asian Miracle”이란 글을 통하여 앞서 언급한 1993년 세계은행의 보고서를 비판하면서 동아시아 경제개발의 허점을 고발한 바 있는 미국 MIT대학의 크루그만(Paul Krugman)교수는 아시아 경제위기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현재 위기를 겪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는 공적(public)인 것과 사적(private)인 것사이의 구분이 모 호하다. 장관의 조카나 대통령의 아들들은 은행을 개설하고 자국민과 외국 투자가들의 돈을 모을 수 있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이들 은행들의 든든한 정치적 배경을 믿으면서 자신들의 돈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정부가 은행예금 을 보장해 주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관행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장은몇 개의 조건을 수반한다. 은행의 소유주들은 최소한의 자금요건을 충족해야 하며(즉, 자신들의 돈을 걸어야 한다), 지혜로운 투자를 해야 한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특권을 누리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었기에 ‘땅 집고 헤엄치는’(heads I win, tails somebody else loses) 장사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은행 대출은 매우 위험한 부동산 투자와 어이없을 정도로 과욕적인 기업확장에 이용되었다.8) 아시아의 경제위기는 동양 특유의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과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조장함으로써 초래되었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경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방안도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의 방지와 ‘정실자본주의’의 타파에서 찾고 있다. 즉, 시장의 활성화를 통해서 ‘시장 규율’을 확립하는 것만이 올바른 투자 결정을 가능케 하고 도덕적 해이를 방지할수 있다는 주장이다. 결국 아시아의 경제 위기는 국가 주도형의 동아시아 경제모델의 해체와 ‘신보수주의’ 정책의 채택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80년대의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와 대처리즘(Thatcherism)으로 대변되는 시장중심주의적 경제운영이 미국과 영국의 경제를 회생시켰고 현재 미국이 누리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호황을 가능케 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그 결과 이제는 ‘아시아적 가치’대신 ‘미국적 가치’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보수주의 적 개혁이 과연 아시아, 특히 한국의 경제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미국의 모델과 미국적 가치관은 과연 바람직 한 것이고 한국에 적용 가능한 것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 우선 미국의 신보수주의적 개혁의 내용과 그 결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신보수주의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의 뉴딜 (New Deal) 정책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 --7. 미국식 모델의 한계: ‘뉴딜’과 ‘위대한 사회’ 미국은 전통적으로 시장의 역할을 유달리 중요시 하여 왔다.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종주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부터 미국인들은 자유와 자주, 자치를 가장 신성한 가치로 받아 들였다. 이러한 자유주의 정신은 비단 외부의 침략자나 억압자만을 상대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적용된다. 미국의 자유주의 정신은 국가와 정부를 극단적으로 불신하는 데서 출발한다. 비록국방 과 치안 등 정부가 맡아 주어야만 하는 부문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이 역시 ‘필요악’으로 간주할 따름이다. 국가와 정부는 최소한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필요하지만 조금이라도 과도한 권력을 갖게 되면 억압과 압제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의 핵심이다. 따라서 국민들은 늘 국가와 정부가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을 감시하고 제어해야 한다. 그렇다면 경제, 사회, 문화, 복지 등의 영역은 어떻게 운영되는가? 이는 물론 철저하게 개인의 자율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개인의 자율성을 유지해 주는 기제가바로 시장이다. 시장은 개인들이 자율적인 계약을 통해서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장이다. 여기에는 그 누구의 개입도 없이 오직 개인의 의사와 판단,그리 고 책임이 있을 뿐이다. 자유주의 사상의 정치체제적 발현이 주(州)와 지방정부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미국의 연방제라면 철저한 시장이야말로 정부의 간섭을 배제시키면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기발현과 이익추구를 가능케 해주는 핵심 기제이다. 미국인에게 ‘시장’이란 국가의 하위부문이거나 정부가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서 관장하는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를 지켜 주는국가 와 정부보다 우월한 기제다. 시장이란 그저 효율적인 경제정책의 수단이라, 인간의 자유와 자율을 지켜 주는 그 자체로써 존엄하고 이상적인 제도다. 이러한 세계 관은 개인의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자율성에 대한 무한한 신념에서 출발하는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능력과 자율에 대한 확신은 역설적으로 복지문제를 등한시 하는 전통을 배태시켰다.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에 의하면 가난은 게으름의 소치일 뿐이다. 무한하게 열린 영토와 비옥한 땅,무한 의 자연자원을 갖추고 있으며 ‘프론티어 정신’(Frontier Spirit)에 의해서 건설된 미국에서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미국은 유럽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복지국가 건설에 나서던 시절에도 철저히 시장주의적 사고방식을 고수하였다. 그런데 미국의 자유주의, 시장주의에 대한 신념을 뒤흔드는 대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1929년 미국과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었다. 시장주의를 유지해 오던 미국은 늘 경제순환에 따라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어 왔다. 그러나 대공황은 그 이전까지 미국이 경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1929년의 증시 대폭락으로 시작된 공황은 미국 경제를 급속히 붕괴시켜 나갔다. 공황 3년만에 미국의 실업률은 25%까지 치솟았고 미국은행의 절반이 파산하였다. 미국의 농업 역시 완전히 붕괴하면서 스타인벡(John Steinbeck)이 『분노의 포도』에서 처절하게 그려낸 유랑민들이 대량 발행하였다. 이러한 미증유의 시장실패상황에 직면한 미국은 1932년 국가의 강력한 시장개입 정책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건국 초부터 유지해 오던 시장주의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집권 첫 100일 동안 수십 개의 법안을 미 의회에 상정, 인준을받아 냄으로써 ‘뉴딜’(New Dea l), 즉 미국 최초의 본격적인 복지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집권 초기에는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동진보행정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WPA)), ‘민간보존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 (CCC)) 등을 설립하였고 산업기반의재건 을 위해서 국가복구청을 설립하여 임금, 노동시간, 청소년 노동, 단체교섭 등에 관한 새로운 산업 규범을 확립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금융부문에 있어서는 1929년도의 금융대란의 재발을 방지하고 금융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에 가입한 은행의 예금을 연방정부가 보장해 주는 ‘연방예금보험회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 (FDIC))를 설립하는 한편 ‘주식 거래 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SEC))를 통하여 증권시장의 불공정 거래를 뿌리뽑고자 하였다. 이 밖에도 농업을 재건하기 위해서 ‘농업구조조정청’(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 (AAA))을 설립하고 그 유명한 ‘테네시계곡청’(Tennessee ValleyAuth ority (TVA))을 통하여 일곱 개 주에 값싼 전기를 공급하고 홍수를 막으며 수로를 확장하고 비료를 생산하도록 하였다. 1935년에는 ‘와그너 법안’(Wagner Act)을 통하여 연방정부가 노사관계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노조의 결성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국가노동관계청’(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 (NLRB))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복지정책은 1935년과 1939년 2차에 걸쳐 제정된 ‘사회보장제도’(Social Security)를 통하여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12년간 장기집권한 루즈벨트 정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지제도는 미국에완전 히 뿌리내리지 못한다. 이미 출범 초기부터 뉴딜정책은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사회주의’적인 정책이라고 비난받았고 미국의 강력한 자유개인주의와 시장신봉주의 전통에 밀려 수많은 복지정책들이 후퇴를 하고 만다. 그리고 불어닥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은 미국 군수산업의 유례없는 활황을 초래함으로써 미국을 불황의 늪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결과 역사상 최초로 국가가 주도한 복지정책은 전쟁의 발발로 미국경제가 공황에서부터 벗어나게 되자 뿌리를 내릴 기회를 상실한 채 미완의 과제로 남게되고 만다. 전쟁특수 로 인하여 야기된 미국의 활황은 196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는 뉴딜정책의 미완성으로 인하여 그 동안 방치된 채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수많은 문제들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계층간의 극심한 빈부격차문제, 도시빈민문제는 흑인들의 인권운동과 폭동을 통하여 그 실상이 만천하에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에서부터 해방된 흑인들이었지만 이들은 줄곧 미국의 ‘하층민’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노예제 철폐 직후에는 남부 대농장의 가난한 소작인으로써, 또 이들 농장이 기계화 되기 시작한 후부터는 대도시로 쫓겨나면서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흑인들은미국 복지정책의 실패가 인종차별적인 요소와도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면서 미국사회의 ‘부정의’(injustice)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지속적인 불평등과 가난 의 문제에 직면한 미국은 1960년대 초에 다시금 케네디에서 존슨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정권을 창출함으로써 ‘뉴딜’정책에서 시작한 복지정책의 완성을 꾀하게 된다. 케네디의 암살 이후 대통령직을 이어 받은 존슨은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라고 불리는 대규모 복지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또 다시 국가의 시장개입을 통하여 사회의 불평등구조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존슨 행정부는 ‘빈곤과의 전쟁’(War Against Poverty)이라는 구호 아래 막대한 복지예산을 지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당 정권의 노력은 월남전이라는 복병을 만나 침몰하게 된다. 동남아시아의 적화를 막고 ‘자유세계’의 수호를 위해서 시작한 전쟁은 월남의 민족주의에 부딪치면서 미국에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정적 출혈을 가져다준다. 그렇지 않아도 막대한 재정지출이 요구되는 복지정책을 수행하면서 지속적인 재정적자를 감수하던 미국은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하여 엄청난 부와 국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경제난에 봉착하게 된다. 그 결과 존슨은 1968년 대통령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공화당의 닉슨은 존슨 대신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험프리를 누르고 대선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닉슨은 재정지출의 삭감, 월남전의 종결을 통하여 미국재정의 회복을 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1971년의 제1차 세계석유파동으로 인하여 정치적, 경제적 타격을 받으면서 도중하차하게 되고 그의 부통령이었던 포드가 잔여임기 2년을 채우는 사태가 벌어진다. 1976년 당선된 민주당의 카터는 또 다시 복지정책의 확대를 시도해 보지만 오랜 세월동안 누적되어 온 재정 적자,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야기된 극심한 인플레이션, 그리고 경기불황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결국은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이 이끄는 공화당에게 패하고 만다. ------------------------------ ----------------------------------------------- --8. 신보수주의의 등장 레이건의 당선은 1932년 루즈벨트의 당선 이후 유지되어 온 미국의 정치경제 운영방식의 획기적인 전환을 의미하였다. 레이건이 후보로써 제시한 정강정책은 공화당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매우 과격한 시장주의를 표방하였다. 레이건이 대표하는 ‘신보주의’는 루즈벨트가 시작하고 케네디와 존슨, 카터가 이어온 뉴딜식 복지정책의 철저한 거부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미국의 신보수주의는 60∼70년대 미국이 겪은 경기침체와 사회불안은 과도한 복지지출과 방만한 연방정부의 운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경제학에서는 하버드와 MIT 경제학과를 주도하면서 정부의 시장개입과 복지정책의 추구를 주장하던 케인지언 학파 대신에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 등 ‘통화주의자’(Monetarists)라고 불리는 시카고 대학의 자유시장주의자들과 루카스(Lucas) 등 정부의 모든 재정, 금융정책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합리적예측이론’(Rational Expectations Theory)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특히프리 드먼은 부인과 공동집필한 『선택의 자유』(Free to Choose)라는 책에서 모든사회보장 제도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면서 광범위한 독자층과 막대한 영향력을 획득하였다. 정치이론에서는 합리적 선택이론을 이용하여 복지정책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하던 존 롤즈(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 대항하여 극단적 자유주의(libertarianism)를 주장하고 나선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의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Anarchy, State, Utopia)가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흐름을 바탕으로 레이건은 과감한 규제철폐와 세금 인하를 통하여 시장에 대한 정부개입을 줄이면서 시장의 기능을 활성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뉴딜정책을 통하여 탄생한 미국의 막강한 노동조합들과 정면대결을 벌였다. 그는 1981년 전국의 항공관제사들이 일제히 총파업에 돌입하자 이미 은퇴한 관제사들과 공군 관제사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노조에 가담하고 있던 모든 관제사들을 전원 해고시켜 버렸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서 그는 결국 AFL-CIO와 같은 거대 노조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그 결과 미국의 노조들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복지축소 정책은 미국의 중하류층과 빈곤층에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뉴딜’과 ‘위대한 사회’ 등의 대규모 복지정책을 통해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오던 도시빈민층과 농촌의 하층민들의 생활수준은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정책의 실현으로 그나마 받고 있던 혜택마저도 축소 또는 철폐되면서 더욱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레이건의 시장중심적 정책은 미국의 사향산업에 대한 과감한 포기를 수반하면서 미국의 전통적인 중공업부문인 철강, 조선, 기계, 자동차 등에 종사하던 수많은 ‘블루칼러’(bluecoll ar) 노동자들을 직장으로부터 내몰았다. 일본과 한국 등의 급격한 부상을 통해서 경쟁력을 상실해 가던 이들 부문의 노동자들은 ‘시장의 규율’(market discipline)을 강조하던 레이건의 정책 때문에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펜실베니아주의 탄광촌과 제철소에서 오하이오와 일리노이, 그리고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단에 이르는 미국 산업력의 상징인 ‘산업벨트’(Industrial Belt)는 80년대를 지나면서 ‘녹슬은 벨트’(Rust Belt)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1980년대 미 국의 지식인 사회는 ‘미국의 쇠퇴’,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 당시 학계를 휩쓴 책 중의 하나는 강대국들이 필연적으로 쇠락하는 이유를 설명한 예일대학의 사학자 폴 케네디(Paul Kennedy) 교수의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Grea t Powers)였다. 그리고 미국경제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서 일본식 경영기법과 도요다식 생산방식을 도입하고자 하는 운동이 산업계 전반에 걸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종신고용제를 도입한 일본의 기업경영방식과 노동자들의 의사를 생산라인에서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쾌적하고 효율적인 조업환경을 창출한 일본의 생산방식은 테일러-포드 생산체계의 한계를 극복한 미래형 경형-생산방식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사회 내에서 지배적이었다. ‘미국적 가치’가 ‘아시아적 가치’ 앞에서 맥없이 침몰해 가던 때였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가족 중심주의, 사회기강의 유지, 건전한 노동정신 등은 중국의 전통 사상인 유교의 영향권에 속하는 태평양 연안국들의 장점이다. 한국,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은 아시아의 전통 문화가 후진 경제에서 선진 산업국의 대열에 들어서는 과정을 수월하게 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오히려 미국은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중요성에 대해 회의를 품는 듯하였 지만, 같은 때에 태평양 연안국들은 유사한 노동정신을 철저히 발휘하여 날로번창하였 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평양 연안의 수백만 가구들이 이와 같이 자진해서 열심히 일하며 희생하는 정신을 발휘하게 하였던 것을 우리는 ‘유교적 노동윤리’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9) 그러나 1992년부터 미국 경제가 회복기에 접어들고 일본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급속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1992년에서 1998년 사이에 미국은 역사상 가장 길게 지속된 경제활황기를 맞고 있는 반면 일본은 역사상 가장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1997년 말에는 급기야 아시아의 외환위기가 불어닥치면서 갑자기 미국식 경제와 동아시아식 경제모델에 대한 그간의 평가는 역전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미국은 미국식 모델, 시장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미국적 가치의 저력을 과시하는 한편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게 자국의 모델과 가치관의 채택을 강요하고 있다. IMF가 이들 나라에 금융원조의 대가로 요구하고 있는 다양한 구조개혁은 바로 다름 아닌 미국식 신보수주의 정책, 미국적 자유주의와 시장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동아시아 모델을 버리고 아시아적 가치 대신 미국적 가치와 경제모델을 채택해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미국경제가 ‘컴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고 또 그러한경험 이 다른 한국과 같은 국가에서도 반복될 수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 ---------------------------------------------------------------------- - --9. 미국경제의 부활과 그 그늘 미국은 어떻게 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후반까지 20여 년에 걸친 불황의 늪에서 탈출하면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 채용할 수 있는 모델인가? 미국경제 부흥에는 우선 여러 가지 외부변수들이 작용하였다. 소련의 붕괴로 인하여 군비경쟁이 막을 내리고 국방예산의 삭감이 가능해졌으며 석유의 과잉공급으로 인하여 산유국들의 힘이 약화되면서 전세계적인 유가안정이 지속되는 등 60∼70년대 미국경제를 어렵게 하던 요인들이 사라졌다. 또 대내적으로는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정책이 경쟁력을 상실한 산업과 기업의 퇴출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나머지 산업과 기업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의 현재의 활황은 정보통신산업이란 새로운 분야의 급속한 부상에 힘입은 바 크다. 1980년대 초반부터 일기 시작한 미국의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은 18∼19세기에 걸쳐일어 난 영국의 산업혁명에 필적할 만한 또 하나의 산업혁명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웬만한 가정과 직장에 필수적이다 못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PC, 즉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그 개념조차 일반화되지 않았었다. 최초의 PC는 스티브 좁스(Steve Jobs)와 스티브 워즈니액(Steve Wozniack)이라는 두 청년이 창업한 애플 컴퓨터사(Apple Computers)가 1977년에 시장에 내 놓은 애플 II 였다. 당시 세계 최대 컴퓨터 회사였던 아이비엠(IBM)은 1981년에야 IBM PC를 내 놓으면서 개인컴퓨터 시장에 뛰어 들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중대형 컴퓨터만 고집하던 IBM이 개인컴퓨터의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 처리 장치)로 채택한 것은 인텔(Intel)이란 회사의 8088 칩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IBM PC의 운영체계로는 그당시 까지만 하더라도 무명이었던 빌 게이츠(Bill Gates)라는 한 대학교 중퇴생이 만든 Microsoft Disk-Operating System, 즉 MS-DOS 가 채택되었다. 후발업체인 IBM의 추격을 받기 시작한 애플은 1984년에 모타롤라사의 칩을 채택한 매킨토시(MacIntosh) 컴퓨터를 시장에 내 놓으면서 최초로 그래픽 인터페이스(graphic inter-face)를 선뵈었다. 얼마 전 제네럴 모터스 사(General Moto rs, GM)를 제치고 세계최대 회사가 된 마이크로소프트사, 그리고 오늘날 미국 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인텔과모터 롤라 사 등은 모두 1980년대 초에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기업들이다. 이 회사들은 정보통신 산업이란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면서 미국 산업의 중심지를 디트로이트에서 실리콘 밸리로 옮는 관련 미국 경제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그 이후 데스크탑 컴퓨터 이외에도 랩탑, 노트북, 그리고 팜탑 컴퓨터는 전화나 TV, 냉장고와 같이 일상적인 가전제품이 되어 버리면서 미국산업의 총아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 CD-ROM의 발명, 컴퓨터 통신의 대두, 인터넷의 보급, 네트스케이프(Netscape)가 대표하는 정보검색소프트웨어 회사의 등장으로 인하여 정보통신 업계는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미국 경제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 낸다. 그리고 불과 10년만에 전통적으로 중공업이 주도하던 미국의 산업구조는 이제 완전히 정보통신 산업이 주도하는 구조로 바뀌어 버렸다.미국 의 정보통신 산업의 지속적인 역동성은 경쟁상대가 전혀 없다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이 발명한 산업혁명, 즉 석탄과 석유, 증기와 철을 이용한 중공업 산업화는 다른 나라들이 비교적 쉽게 모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독일과, 프랑스, 미국, 그리고 일본 등이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영국을 능가하는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이 부상할 때까지 중공업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화에 성공한 국가는 한동안 없었다. 그러나 일단 한국과 같은 신흥 공업국들은 후발국가로서의 이점을최대 최대한 활용하면서 전세계 중공업 시장을 무서운 기세로 잠식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1980년대 초반부터 발명한 정보통신이 주도하는 산업화는 아직 까지아무런 경쟁상대도 없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모타롤라, 아이비엠 등의 회사들이 자기 분야에서 갖고 있는 경쟁력과 효율성은 그 어느 국가의 어떤 기업체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다. 미국의 증시가 1980년대 후반1,00 0 포인트 대에서 오늘날 9,000포인트 대 까지 경이적인 상승세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정보통신 산업이 국가의 기간산업 역할을 해 낼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을 발명하고 주도하는 기업체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결국 미국경제의 화려한 컴백은 정보통신산업이란 새로운 분야의 실로 눈부신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미국의 정보통신 산업이 보인 생산성의 향상은 초기 산업혁명시기의 영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다시는 되풀이되기 힘든 현상이다. 후발 국가들이 쉽사리 모방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미국 특유의 사회, 문화, 교육, 산업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미국 경제의 재기는 모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화려함 뒤에 감춰진 어두운 단면들을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 미국경제의 변신은 실로 많은 대가를 지불하였고 아직도 지불하고 있기에 가능하였다. 신보수주의 정책은 저효율 산업의 퇴출을 용이하게 하면서 미국경제의 유연성을 제고하여 주었지만 반면에 빈부격차의 심화, 중하층민들의 생활수준 저하를 가져왔다. 효율성과 유연성의 제고라는 기치아래 직업안정이라는 전통적 가치 역시 퇴출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대규모 고용창출을 가능케 하던 중공업의 붕괴와 이 부문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의 대규모 실직은 중하류층 가족의 붕괴로 이어지면서 가치관의붕괴 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신보수주의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던 기간 동안 미국의 각 종 범죄율과함께 이혼율, 미혼모 출산율, 마약 복용율, 문맹율 등이 급증하였다. 가장 중요한범죄의 증가율만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미국 통계청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1984년에서 1994년 사이에 강력범죄율은 46.4% 증가하였다. 이를 범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살인이 24.6%, 강간이 21.3%, 도난이 27.6%, 그리고 폭행이 63.5% 증가하였다. 이러한 범죄 발생률은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다. 또 미국 인구의 13%를 차지하고 있는 흑인은 강력범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미국의 감옥은 범죄자로 넘쳐흐르고 있으며 1백만 명이 넘는 죄수들을 수용할 시설이 없어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대부분의 범죄자들을 형기를 채우기 전에 석방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1991년 통계에 의하면 미혼모 출산은 전체 출산의 30%에 육박하고 있다. 이혼으로 인한 결손 가정 역시 30%에 달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미국경제는 정보통신과 같은 새로운 산업이 있음으로 해서 중공업 등 전통산업의 붕괴로 인한 사회계약의 파괴와 가정의 파괴, 복지의 축소가 가져오는 고통을 어느 정도 감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미국은 뉴딜이래 민주당이 대표하는 진보진영이 그나마 정착 시켜 놓았던 복지제도 마저 축소시켜야 했다. 1992년 클린턴의 당선은 미국민들이 다시금 복지와 분배정책의 필요 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의회 상, 하, 양원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민주당으로서 새로운 복지정책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집권 전반기에 클린턴은 의료보험제도의 확대실시를 시도하였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는 물론 한국에 비해서도 훨씬 낙후되고 불공평한 의료 보험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를 경험한클린 턴은 본래의 진보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시장주의적 시각을 대폭 수용한 신-신자유주의(New Neo-Liberalism) 라는 정체불명의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경제의 활황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득의 재분배를 요하는 복지제도의 구축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미래의 경제상황에 대한 낙관이 지배하고 있는 만큼 복지정책의 시급성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전통적으로 시장의 효율성과 생산성에 대한 남다른 신념을 갖고 있는 미국민들이다. 그러나 미국 경제도 언젠가는 하향국면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시장의 자율적인 조정기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경제체제일수록 활황기간에는 놀라운 생 산력을발휘하지만 불황기에는 실직과 가난 등 복지의 문제 역시 더욱 심각하게 체험할 수밖에 없다. 복지제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미국이 불황기에 접어들었을 때 미국사회의 전통적인 병폐인 빈부격차, 흑백간의 갈등, 범죄와 마약 등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 질 것은 자명하다. ------------------------------------------ ----------------------------------- - -- 10. 한국적 발전모델의 유효성 따라서 미국적 가치와 제도가 한국의 선택이 될 수는 없다. 역사와 전통, 문화와가치 관이 판이하게 다른 미국의 가치와 제도가 우리에게 시사해 줄 수 있는 것들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 미국적 가치와 제도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항상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도 불분명하다. 우리가 취해야 할 가치관과 제도는 지금까지 우리의 성공을 가능케 해 주었던 요소들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수정하고 개혁해야 될 점들은 과감하게 고쳐 나아가는 길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이나 사상으로 볼 때 미래의 국가체제는 여전히 강력한 국가를 요구한다. 특히 경제에 있어서 지난 30년간의 급속한 경제성장이 생산해 낸 가장 강력한 경제 주체인 재벌과 노조를 견제하면서이끌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정부다. 현재 상황에서 ‘시장중심적’ 개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재벌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키우는 결과만 낳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 또 재벌의 구조조정을 강요하거나 유도할 수 있는 주체 역시 정부밖에 없다. 반면에 노동조합을 설득하고 때로는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주체 역시 정부뿐이다. 물론 정부 자체가하나 의 이익집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이것이 아시아적 가치를 비판하는 사람들, 특히 국가와 정부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는 시장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부와 관료의 부패와 비효율성은 국가전체의 경쟁력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재상황에서 정부의 힘을 분산해서 약화시키고 정부의 주도적인 입장을 포기하는 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현금의 경제위기는 정부부문의 도덕적 해이와 함께 경제에 대한 통제력 상실, 또는 무책임한 방임이 그 근본 원인이었다. 한국경제 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정부의 잘못된 규제완화조치와 경제기획과 조정 기능의 조급한 포기였다. 특히 외환보유고의 허술한 관리, 잘못된 외환자율화 조치로 인한 무차별한 해외 차입, 그리고 산업정책의 포기 등은 동아시아 발전 모델의 가장 기본적인 틀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경제위기를 초래하였다.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을추구 하는 국가에서 외환보유고의 제고와 지속적인 관리는 필수적이다. 현재 대만과 중국 등 세계 최고의 외환보유고를 자랑하는 국가들은 우리가 겪은 것과 같은 외환위기를 겪지 않고 있다. 높은 외환보유고로 해외 투기성 단기자본이 금리와 환율을 농락하고 국가의 신인도를 추락시키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경제구조개혁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 있지만 외환보유고 덕분에 IMF에 손을 벌리거나 해외 자본에 밀려서 구조개혁을 강요당하고 있지는 않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고갈되기 시작하고 수출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지는데도 고환율정책이 유지된 데에는 ‘개인 소득 만불‘이라는 신화와 환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결과 한국민들의 소비는 급격히 늘고 해외여행과 외국사치품 수입이 극에 달하면서 국제수지를 악화시켰다. 결국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좌우하기 시작하면서 60년대 경제발전에 시동을 건 이후 신성시 되어 오던 외환보유고의 관리가 돌이킬 수 없이 허술 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OECD가입을 위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금융자유화 조치 역시 동아시아 경제발전 모델의 핵심부분의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열악한 경제환경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개발도상국가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국내재산의 해외도피를 막고 외국 투기 자본의 국내 금융시장 잠식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된 외환관리법의 조기 폐기는 국제금융질서의 논리를 미처 체득하지 못한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철저히 농락 당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국제금융시장의 낮은 금리, 정부의 고환율정책, 한국경제의 높은 신인도, 그리고 국내기업들의 대규모 설비투자는 국제 단기 투기성 자본, 세칭 ‘헷지펀드’의 급격한 국내유입을 초래함으로써 한국경제를 대규모 외국자본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그리고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한국의 국가신인도가 하락하기 시작하자 이들 자금이 급격히 빠져나가면서 한국의 외환위기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 역시 ‘동아시아 발전 모델’이 지속되었다면방지 될 수 있었던 일이다. 산업정책이야말로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경제개발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던 한국의 산업정책은 ‘문민정부’가 들어 서면서 폐기되었다.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경제발전의 방향과 역점사업을 명확히 제시함으로써 모든 경제주체에게 예측가능한 경제환경을 제공하여 주었던 산업정책의 포기는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하면서 한국경제를 벼랑끝으로 내몰았다.한국 의 대외신인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힘으로써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던 한국경제를 위기로 내몰았던 한보와 기아사태는 산업정책의 실종이 빚어낸 결과였다. 한국경제발전의 원동력인 동시에 상징이었던 철강과 자동차 산업에서 일부 재벌기업들이 국내와 국제 시장의 현실을 무시한 채 추진한 과잉설비투자는 결국 대규모 부도사태를 초래하였고 이로 인하여 ‘대마불사’라는 신화를 믿으면서 한국경제에 투자를 계속하던 해외 자본이 급속히 빠져나갔다. 정부의 규제완화 정책이 재벌에 대한 조정의 기능까지도 마비시켜 버림으로써 경제위기를초래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하면서도 책임성을 갖춘 동시에 효율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따라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시장중심적’ 개혁 역시 정부를 포함한 각 경제주체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방향에서 추진하되 그것이 결코 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시장중심적’ 개혁 역시 정부가 국력을 신장시키고 국부를 늘리기 위한 또 하나의 정책수단으로 이용하여야 한다. 우리는‘정 부’ 또는 ‘국가’ 자체를 의심하고 늘 견제하며 그 역할을 가급적 축소하고그 대신 시장에 의존하려는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국가 그 자체가 문제이기보다는 부패하고 비능률적인 정부와 국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것을 유교사상의 맥락에서도 풀이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정치전통은 정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사회를 건설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하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가의 역할은 위민사상과 민본주의에 입각해서 백성 또는 국민들의 안위와 복지를 보장해 줌은 물론 도덕적, 윤리적 모범을 보이면서 ‘덕치’(德治)로써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재야’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극 권장함으로써 정부의 부정과 부패를 항상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체제와 정부는 이처럼 전통정치 이상에 입각하여 강력하면서도 청렴하고 투명하며 효율적인 정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문제는 아시아적 가치, 또는 우리의 전통가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고 매사에 공명정대한 관리들이 조정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정부가 있는 체제야말로 우리가 실현시켜야할 이상이다. ------------------------------------------ - --11. 후기: 아시아적 가치논쟁의 인식론 이러한 논의를 하다보면 흔히 두 가지 비판을 접하게 된다. 첫번째는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하는 것은 이미 적실성을 상실한 전통의 무비판적인 복고를 주장하는 보수반동적인 사조라는 비판이고 두번째는 이와는 반대로 아시아적 가치 운운하는것은 서양이 만들어 놓은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역 오리엔탈리즘’을 범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첫번째 비판은 ‘아시아적 가치’나 ‘동아시아 경제발전모델’을 얘기하는 것은 곧 ‘유교자본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는 유교를 미화시키고 옹 호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유교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 역할과 의미가 아직도 모호한 사상을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두번째 비판은 유교자본주의나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서양의 학계가 발명한 주제이고 논쟁인 만큼 이를 수입하는 것은 서양에 대한 학문적 종속을 심화시키는 비주체적인 행위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의가 전제하고 있는 ‘유교’나 ‘아시아’에 대한 이해는 서구인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인만큼 이를 그대로 수입하는 것은 우리자신에 대한 묘사를 서양학자들에게 의존하는 지극히 ‘식민적’인 사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아시아적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너무 전통적인 동시에 너무 서양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비판은 왜 나오는 것일까? 한국에서는 동양사상과 전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논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물론 동학이나 불교, 노장사상, 그리고 민간신앙에 대한 논의는 인문학적으로 또 사회과학적으로 많이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유독 유교만은 과거의 사상가들의 이론을 해석하는 것을 빼고는 사회과학에서 다루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이는 왜 그럴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유교가 그만큼 아직도 우리의 정치의식, 사회구조, 가치관을 철저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만일 유교가 이미 사라진 과거의 것이거나 정치의식과 구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면 그토록 의식적으로 피하고 불편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지식인의 매우 불편한 자아의식을 반영한다. 한국의 지식인은 진보적이어야 한다. 진보란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아무튼 ‘전통’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전통 중에서도 유교는 전통정치질서를 떠 받쳐주던 이념으로 가장 ‘반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아시아적 가치론은 이러한 유교가 사라지기는커녕 아직도 우리사회 내에서 작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진보와 발전은 전통파괴와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근대의 진보적 역사철학을 아직도 수용하고 있는 수많은 학자들에게 이러한 시각은 매우 곤혹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된다. 그러 나 자신의 전통을 부정하게끔 하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는 서구 사회과학의 사관(史觀)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며 극치이다. 서구의 독특한 역사와 경험에서 도출한 역사철학과 사회과학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한국의 과거와 현재에 적용시키면서 오히려 전통사회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현대사회 속에서 전통이 순기능을 하는 점에 천착하는 것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의 불행한 지식인 상이다. 자신의 문화와 전통사상 속에서 발전과 진보의 동력을 찾고 미래의 지향점을 모색하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도록 학문적 훈련을 받은 뿌리 없는 지식인이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상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한국과 동양의 전통사상과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전통을 논하는 학자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로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 이들이 그나마 알고 있는 전통사회의 구조는 맑스주의적 계급이론 아니면 우파적 자유주의의 도식을 통해서 바라본 것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민족’과 ‘민중’은 사랑하면서 자신의 역사는 사랑할 수 없고 전통을 부정하면서 미래에 대한 비젼과 이상은 외국 사상가들의 역사의식에 의존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많은 한국지식인의 인식론이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오히려 유교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서양학문의 노 예가 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은 유교에 대한 본격적인 재평가와 연구가 한국학자들이 아닌 외국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서양학자들은 서구의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동양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을 시작하였고 중국학자들은 새로운 중화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유교에 대한 담론을 활성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사실이다. 유교자본주의에 대한 논쟁은 대만계 미국인인 하버드 대학의 뚜웨이밍 등이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의 ‘사주’를 받아서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중국정부 역시 이 논쟁에 뛰어들면서 유교를 극구 옹호하기 시작한 것을 볼 때 유교자본주의 운운하는 것은 대만과 홍콩,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퍼져 있는 화교들을 묶을 ‘대중화권’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라는 비판도 일면 수긍할 수 있다. 따라서 아시아적 가치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양의 학문적 제국주의 아니면 중국의 패권주의적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는 많은 문제가 있 다. 우선 특정 이론이 어느 나라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 일 것인지 아닌지를 가른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요즈음 같이 학계가 국 제화되어 있는 시대에 ‘순수 토속 이론’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그런 이론 이 설사 찾아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현실에 대하여 어떤 얘기들을 해 줄 수 있 을까?백번 양보하여 아시아적 가치론이나 유교론이 서양에서 수입된 담론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보주의와 자본주의는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민족주의(nationalism) 역시 서양에서 수입된 이론이지 않는가?오리 엔탈리즘의 역사와 구조를 파헤치고 통렬히 비판함으로써 비-서구인들에게 서구 학문의 지적 헤게모니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주는데 누구보다도 크게 공헌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철저하게 서양교육을 받은, 서구 학문세계의 산물이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던 팔레스타인계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이집트의 영국인 학교를, 고등학교는 미국의 사립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은 프린스턴을 나왔으며 박사학위는 하버드에서 받았고 학위취득 후 줄곧 미국 콜롬비아 대학 영문학과에서 가르쳐 왔다. 그는 자신의 말로는 31세때 이스라엘과 아랍국 간의 ‘7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자신의 팔레스타인 ‘뿌리’에 대하여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 그는 1969년 골라 메이 당시 이스라엘 수상이 “팔레스타인은 없다”(There are no Palestinians)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천착 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철저하게 서양인이다. 그의 모든 유년기 , 청년기 경험이 그랬고 그가 배운 학문과 방법론이 모두 철저하게 서구적인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오리엔탈리즘 비판 역시 서구 학계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다시말해서 우리에게 서구학문의 식민주의에 대하여 경고해 주고 있는 가장 강력한 이론인 오리엔탈리즘 비판 그 자체가 서양학계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리엔탈리즘 비판 그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가? 그리고 서양 학문을 무비판적으로수용 해야하는가? 오리엔탈리즘적 인식론 자체가 서구적이라면 우리는 어떤 인식론적 위치를 확보해서 서양 학문을 비판해야 하는가? 아니, 왜 비판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를 끝없이 추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처럼 황당한결론 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론의 문제에 너무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 을 경계해야 한다. 인식론과 방법론적 논쟁은 늘 허무하게 끝난다. 특정 이론이 어디에서 왔는가가 더 이상 그 이론의 적실성의 기존이 될 수 없다. 특정 이론이 적실성을 갖는지의 여부는 오직 그것이 현실을 얼마나 잘 설명해 주고 또 공감할 수 있는 당위를 제시해 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서로의 정치적 의도, 인식론적 지평을 지레짐작하고 공격하는 것은 깊이 있는 학술적 논쟁을 죽이는 길이다. 물론 학문의 순수성과 객관성을 강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특정한 사상과 제도를 그 이데올로기적 의미 때문에, 그 정치적 의미 때문에 연구하는 것을 금기시 한다면 우리는 또 교조주의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된다. 학문에 대한비판 을 하되 그 학자의 인식론적, 이데올로기적, 계급적 배경을 분석하고 비판하기보다는 그의 학문, 구체적 주장, 역사와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분석하고 비판해야 한다.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국내의 정치적, 사상적 맥락에서 갖는 의미는 매우 복잡하다. ‘진보 대 보수’, ‘좌 와 우’ 등의 구도에 익숙해 있 는 우리 사상계가 과연 ‘동양과 서양’ 또는 ‘아시아 대 미국’ 등의 색다른 인식론 적 구도를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논쟁이 미처 소화되기도 전에 경제위기가 불어닥치면서 아시아적가치 론의 인식론적 구도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인식론적인 차원의 논쟁에 경도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인식론이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가를 따지고 있기보다는 우리의 이론이 현실을 얼마나 잘 설명해 주고 비젼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현재 한국의 지식인들 앞에 놓여 있는 이론과 사상들 중에서 한국 근대화의 경험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그 논리와 지향점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것은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유교론’, 즉 아시아적 가치론과 동아시아 경제발전론, 그리고 유교자본주의론이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