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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01시 26분 11초
제 목(Title): 이종응의 서사록 1


[발굴연재] 100년전의 세계일주--이종응의 `서사록'① 




에드워드 7세 즉위 축하, 136일간 '배 타고 서양 여행' . 
♧ 4월 19일 한국을 방문하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증조부인 에 드워드 7세의 
대관식(1902년)에 다녀온 대한제국 축하사절단의 공식 보고서 '서사록'과 한글 
기행문, 영국 왕실에서 선물한 기념 메달 등 희귀자료 4종을 최근 사절단 일원의 
후손이 4월 11일 공개했다. 

조선일보사가 단독 입수한 '서사록('서양으로 배 타고 갔다온 기록' 이란 뜻)'은 
유길준의 서유견문보다 7년 후에 나온 희귀 사료로, 내용 면에서는 서유견문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당시 세계 를 주도하던 영국 등 구미 각국의 
선진문물을 배워 국가를 중흥시키기 위한 구한말 지도층의 열정이 곳곳에서 
배어나와 읽는 이를 숙연케 한 다. 

주간조선은 한학자 강성위 박사의 도움을 받아 서사록을 몇 회에 걸쳐 연재한다. 
강 박사는 서울대 중문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 재 경희대 중문과에 
출강중인 소장학자로, "동학들의 활발한 토론과 질책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 광무 6년, 임인년(1902) 여름 
5월은 대영제국의 대군주께서 즉위하 고서 대관의 예식을 거행하는 때이다. 
황제께서 의양군 이재각으로 하 여금 미리 가 대관식을 치하하게 하셨는데 나 또한 
동행하면서 비서의 책무를 맡게 되었다.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공적, 사적인문서와 
크고 작은 비용, 거쳐간 곳의 산천과 인물·풍속 등에 관한 특이한 견문 가 운데 
장관이어서 견문을 넓히기에 족한 것들은 적어두지 않을 수 없었 다. 심지어 
흐리거나 맑거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씨까지도 빠 짐없이 기록하였다. 
기록한 글이 비록 더할 수 없이 천속하고 비루하 지만 백방으로 바쁜 가운데 
생각을 모아둔 것이라 마침내 이를 책으로 엮게 되었다. 집안의 젊은이들이 보고서 
당시 신고가 어떠했는지를 알 게 하고자 준비한 것이다. 

임인년 7월 그믐, 이종응 광무 6년 1월 30일, 사신을 파견하는 조서가 철회되었다. 
이 무렵 에 완순군 이재완에게 미리 가 대관식을 치하하도록 명하였으나 일이 있어 
그러지 못하게 되자 다시 이재각에게 조서를 내려 명하였다.조서 에서 말하기를, 
"대영제국 대군주 겸 인도 황제께서 즉위하거소 대관 의 예식을 거행하는 
경사스러운 날이 멀지 않으므로 짐이 의양군 이재 각을 특명대사로 삼아 때에 
맞추어 미리 가 하례의 의식에 참여하게 하노라"고 하였다. 

광무 6년 2월 3일(음력 임인년 2월 13일) 특명부영대사 이재각 3월 22일(음력 
임인년 2월 13일) 특명부영대사 수원( 주1) 정삼품 이종응 예식원 번역(주2)과장 
고희경 참리관(주3) 김조현. 

○4월 5일(음력 임인년 2월 27일) 맑음 출국 이틀 전날 밤에 대궐에 들어가 폐하께 
하직 인사를 드리려 하 였으나네 사람이 대궐에 들어갈 무렵에 때마침 다른 공무가 
있어 서로 만나지 못해 들어가 모실 수가 없었다. 오후 7시반에 외부(주4)에서 
청첩이 있어 네 사람은 함께 그리로 갔는데 주조선 영국공사 주이전씨 또한 
오셨다. 

외부서리대신 유기환, 협판(주5) 최영하, 교섭국장(주6) 이응익씨 등과 만나 함께 
양식을 들며 인사를 나누고 정회를 편 뒤에 작별 인사 를 했다. 또 궐문으로 
나아갔으나 바깥문이 이미 닫혀있었다. 얼마 후 에 표신(주7)을 받들고 안으로 
들어가 폐하를 알현하였다. 

○6일(28일) 밤에 비가 오다가 개임 오전 2시에 네 사람은 폐하께 사직하고 친서 
한 통을 받들었다. 나 는 대사와 함께 칙명을 받들어 곧바로 표훈원(주8)으로 가서 
친서를 봉안하고 1박하였다. 11시에 돈의문 밖 정거장으로 나와 12시에 기차 를 
탔는데 외부대신 유기환, 협판 최영하 두 분과 고관들께서 전송해 주셨다. 친지 
10여명과 함께 기차를 타고 오후 2시에 인천항에 도착하 였다. 본서의 
감리하상기씨의 영접을 받고 이태여관에 들어가 짐을 정 리하였다. 이날밤에 
중추원(주9) 의장 김가진, 참서관(주 10) 서병숙 께서 비를 무릅쓰고 오시어 
간단하게 회포를 푼 뒤에 각기 숙소로 돌 아가셨다. 

○7일(29일) 맑은 뒤 짙은 안개 오전 9시에 네 사람은 여관을 나와 부두에 
도착하였다. 영국영사 칼복이 일행의 고문관 자격으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악수하고서 인 사를 나눈 뒤에 윤선(주11))에 오르자 총세무사 백탁안씨 및 
여러친지 들이 조그마한 배를 타고서 로니호라는 러시아 윤선이 정박하고 있던 
곳까지 와 전송하여 주었다. 작별을 하고 돌아간 뒤에 기적 소리가 두 번울리자 
배는 출발하였다…. 이에 네 사람은 각자의 선실안으로 들어 갔는데 선실의 침상과 
휘장의 배치가 자못 정결하였다. 약간 쉬고나서 선실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한가하게 거닐며 배에 장착된 웅장한 기계 와 빈틈없는 구조를 찬찬히 
살펴보았으나 어설픈 글로는 비슷하게도 묘사할 수가 없다. 얼마 후에 두번 방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는데 영 사 갈복씨가 와서 식사시간이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의관을 정제하고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식탁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릇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서양인 남녀, 아이들 수십명과 함께 모 
여 앉자 음식이 수차에 걸쳐 제공되었으며 차를 내고는 식탁을 치웠다. 

식당을 나가 흡연실에 앉아 한 차례 답답한 마음을 풀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하루에 
세번씩 있었다. 

매번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노라면 부지런히 애쓰며 밤낮으로 쉬지 않는 것이 
마치 지극한 정성을 멈추지 않는 도에 견줄만 하였다. 

"하늘이 하는 일을 사람이 대신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뿐이리라!. 

○8일(음력 3월 초하루) 맑음 오후 1시쯤 큰 비가 동이로 퍼붓듯 하였다. 네 
사람이 선실의 높은 곳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남쪽께에 몇개의 봉우리가 파도 위로 
출몰하 는 것을 보았다. 선원에게 물으니 제주도 한라산이란다. 

○9일(초이틀) 흐린 후 맑음 오전 8시에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하였다. 이 항구의 
순사가 군의 관 한 사람을 대동하고 배에 올라 여객들에게 의심스러운 병이 있는지 
여부를 살핀 뒤에야 하선을 허락하였다. 11시에 배에서 내려 주장기서 양인 여관에 
들러 대궐로 전보를 쳐서 보고드리고 집으로 보내는 편지 를 부쳤다. 

○10일(초사흘) 맑은 가운데 바람 해가 기운 뒤에 네 사람은 거리로 나가 한가하게 
돌아다녔는데 도 로에는 한 점의 먼지나 오물이 없었다. 작은 도랑과 큰 도랑의 
구획이 분명하고, 진귀한 나무와 아름다운 화초들이 가지런하게 정열되어 있 
었으며, 맑은 그늘은 땅에 가득하였다. 저자의 가게들은 서로 잇닿아 있었는데 
물건들이 매우 많았다. 노래 부르며 노는 곳에서는 남녀가 즐거워하며 기상이 
태평스러워 보였다. 항구 안의 배들은 갈대처럼 열 립하여 밤이면 선상과 수면에 
수백, 수천개의 등불이 번쩍거리며 눈을 어지럽게 하였다. 

<주> 1. 외국에 가는 사신을 따라가던 관원. 수행인 2. 번역과는 구한국 때 
외국어를 번역하기 위하여 설치한 부서임 3. 구한국 때 궁내부 예식원의 한 벼슬. 
외국어 통역과 번역에 관 한 사무를 맡아 보았음. 

4. 조선 고종 32년(1895) 외부아문을 고친 이름. 광무 10년(1906) 에 폐하고, 그 
사무를 의정부 외사국으로 옮겼음 5. 구한국 때 궁내부와 각 부의 차관 6. 
교섭국은 외부에 딸린 한 국이었으며, 그 수장은 참의(정3품)이 었다. 

7. 조선조 때 궁중에 급변을 전하거나 궁궐을 출입할 때 사용하던 문표 8. 구한국 
때 훈장, 기장, 상여 등의 업무를 맡아본 관청 9. 구한국 때 의정부에 딸린 
관아로, 내각의 자문기관이었음. 

10.구한국 때의 벼슬. 각 부서에 두었던 주임관 11. 수레바퀴 같은 것을 양 
옆구리에 붙인 배. 

----------------------------------------- 역자의 말 격정의 시대 우국충정 
곳곳에 가득 ----------------------------------------- '서사록'이란 '서쪽으로 
배 타고 갔다 온 기록'이라는 뜻이지만 실 은 북반구를 동쪽으로 한바퀴 돌아온 
여정을 기록한 세계일주기이다. 

그러나 사절단의 주 목적이 영국 국왕의 대관식 참석이었고, 영국에서 체류한 기간 
역시 가장 길었기 때문에 '서사록'이라는 제목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일기 식으로 적은 이 견문기는 양력을 위주로 하고 음력을 부기함 으로써 
의식적으로 서양을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드러낸 셈이다. 유려 한 한문을 
구사하면서도 서양의 생소한 인명과 지명을 애써 한글로 적 은 노력을 통해 
다변격정의 시대 한가운데서 우국충정을 가슴으로 다 지며 고뇌한 선각자의 뜻도 
읽을 수 있다. 

이런 기록들이 여태 장롱 속에서 좀 냄새를 맡으며 누워있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직무유기가 아닐까. 감히 이 글을 옮기면서 이 글을 쓰신 고인이나 유족들에게 
누가 되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서사록의 의의 세계 강대국 벤치마킹한 리포트 생생한 묘사 서유견문록보다 한수 
위 ---------------------------------------- 서사록은 축하사절단의 부대표였던 
이종응(1853∼1920)이 귀국 후 한문으로 작성, 고종황제에게 제출한 68쪽 분량의 
공식 보고서. 증손 인 이해남(78·서울 강남구 청담동·여)·해석(61·서울 구로구 
항동) 씨 남매가 오랫동안 집에 보관해오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방한을 앞두고 
공개됐다. 

당시 대한제국 축하사절단은 특명부영대사 의양군 이재각(1873∼?), 수행원 
이종응, 예식원 번역과장(예식원 번역과장) 고희경, 참리관 김 조현으로, 인천주재 
영국영사 칼복이 동행했다. 

서사록에 따르면, 축하사절 5명은 한국을 떠난지 60일만에 영국에 도착했다. 
1902년 4월 7일 인천항을 출발, 일본 요코하마∼밴쿠버∼퀘 벡을 거쳐 6월 5일 
영국 리버풀항에 도착한 것. 일행은 6월 26일 거행 된 대관식에 참석하고 7월 7일 
런던을 출발, 파리∼제노바∼나폴리∼ 
수에즈운하∼홍해∼콜롬보∼싱가포르∼홍콩∼상하이∼나가사키를 거쳐 8월20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4개월반에 걸친 여정을 담은 서사록은 단순한 견문기가 아니라, 당 시 
국가시스템을 재편하기 위해 세계 강대국을 벤치마킹한 리포트였다 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유길준 의 서유견문(1895년·미국 
방문기)과 민영환의 해천추범(1896년·러시 아 니콜라이2세 대관식 참석기)과 
비교할 때 서사록은 최신 문명의 현 장에대한 생생한 묘사력이 한수 위"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20세기 초 선진 문명을 직접 보고 그것을 후진들에게 상세하게 전해 
국권을 지키겠다는 눈물겨운 노력이 엿보인다"며 "축하 사절단이 영국의 중앙은행, 
조폐공사, 교도소까지 두루 돌아본 것은 사절단이 영국측에 요청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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