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11일 일요일 오후 02시 06분 11초 제 목(Title): 한21/진중권 복거일, 소수를 위한 변명 진중권의 엑스리브리스 복거일 <소수를 위한 변명> “시장경제(는) 공해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근데 그러려면 그가 외치는 자유방임의 원칙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한다. 다 죽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대비 속에서만 설득력을 퍼올리는 복거일의 낡은 자유주의 버전은 이제 업그레이드돼야 한다. 왜? 그렇지 않으면 공해와 시장경제 사이에 “본질적 관련”이 있게 되니까. “공해를 막는 것은 이론적으론 간단하다. 깨끗한 물, 공기, 흙과 같은 공유자산의 값을 공해방지에 드는 비용보다 비싸게 만드는 것이다.” 복거일의 자유주의적 해법, 자연의 화폐로의 환산. 하지만 어떻게? 기업이 초래한 환경피해를 돈으로 환산해 부담시킨다? 그러려면 이미 공해는 발생해 있어야 한다. 또 자연에 어떻게 값을 매겨? 가령 멸종한 생물의 값은 얼마? “공해방지에 드는 비용보다” 좀더 많은 액수? 그게 자연의 값인가?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기업가들”이 환경파괴가 경제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고 자발적으로 공해방지 비용을 들일 거다? 현실의 경제주체는 제한된 정보토대 위에서 행동하므로 그 한계를 넘어 발생하는 사태엔 무력하다. 고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매크로 환경비용을 마이크로 경제영역에 넣어 계산한다는 건 이론적 난센스다. 시장의 가격 시그널이 생산요소 이동의 지침이 된다? 환경파괴가 시장에 가격 시그널을 울릴 때쯤이면, 파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일 게다. 시장경제는 ‘사적’ 수요나 구매가 없는 곳에선 작동하지 않는다. 근데 환경은 “공유자산”이다.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경제동물이 미쳤다고 오존 구멍 메우는 데 제 돈 쓰겠는가? “사회적으로 효율적인 요염도라 불리는 수치를 찾는 일”? 그 수치는 벌써 정치논리를 포함한다. 엘니뇨가 지구를 초토화해도 복거일이 “변명”하는 “소수”는 여전히 그게 “사회적으로 효율적”이라 우길 테니. 환경을 위해선 시장에 한계조건을 설정해야 한다. 이는 결국 국가의 역할로 남고, 그래서 참여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국가가 한갓 “소수”들의 이익조정 위원회로 전락하지 않도록. 물론 복거일은 이런 노력을 “민중주의”라 비난하겠지만. “공해를 막는 것”은 이렇게 “이론적으로”도 “간단하”지가 않다. 실천적으론 더 복잡하다. 왜? 복거일들이 놀고 있냐? 국가에서 경쟁자들에게 동일한 부담을 지우지 않는 한, 시장은 환경보호에 비용을 들이는 기업가를 처벌하게 마련. 근데 자유를 생명으로 아는 우익 자유주의자가 이 간섭을 참겠는가? 못 참지. 그래서 잿빛 뚜껑이 서울 상공을 덮고 황해가 죽음의 바다로 변하고 금수강산이 산성비로 다 죽어가도, 못 막는 거다.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던 지식인들이 대거 환경론자들로 변신했다.” 그 와중에도 빛나는 그의 우국혼. 빨갱이에 맞서 시장을 수호하는 “기사”님. 자유주의자는 쓸데없이 남의 신념의 색깔에 관심 갖는 거 아니다.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에 관심을 갖도록. 미국 대도시의 대기오염은 1년에 천명의 사망자를 낸단다. 서울은 오죽하겠는가? 얼마나 독한지, 금단현상이라 할까, 서울만 다녀 오면 난 며칠 동안 헤롱거린다. 간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왜 “대거 환경론자로 변신”했겠는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오직 한마음, 복거일씨가 깨끗한 공기 마시며 천수를 누리라는 뜻에서 그런 거다. got it?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