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2일 금요일 오전 11시 27분 20초 제 목(Title): 유중하/노신像에 대한 점묘 테마 서평/루쉰과 그에 관한 책들 우리가 '끌어다 쓴' 루쉰상(像)에 대한 점묘 유중하 ------------------------------------------------------------------------------- - I. 떠오르는 장면 두엇 1-1. 연전에 모 일간지에서 소위 한다하는 국내의 논객을 대상으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고전이 무엇인가 하는 기사를 낸 적이 있었다. 혹자는 플라톤의 {국가}를 들먹였고, 또 다른 혹자는 수시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늘 가까이 두고 마음이 억색할 때마다 펼쳐보고 평정을 되찾는다고 한다. 그런데 도서의 목록을 따라 훑어내려가는 내 눈이 한 순간 못이 박힌 듯 멈추고 말았으니, '루쉰'이라고 적힌 곳에 이르러서였다. 추천자는 바로 다름아닌 이영희 선생. 나는 기사의 그 부분을 대하는 순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영희의 필법이 바로 루쉰 필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국내에 그리 많지 않을 터이다. 공자가 자랑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이 어찌 루쉰의 필법에 감당이 되겠는가.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쳰리췬 교수가 루쉰의 글에서 단편들을 추려 모은 어록을 감히 {신논어(新論語)}라 이름하고 있는 것도 내게는 전혀 범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논어}라는 작명도 멋있지만, 공자의 그 '구(舊)'{논어}를 뒤집어 다시 '근대'라는 새로운 땅에 옮겨심은 루쉰의 그 어록들을 {신논어}라 이름한 것도 멋들어진다. 1-2. 1996년이니까 벌써 햇수로 이태가 된 셈인데, 중국 문학을 공부하는 몇 사람이 루쉰의 족적을 따라 기행을 한 적이 있었다. 난징의 모 호텔 커피숍에서 마침 일행 중의 한 분인 서울대학교의 송영배 교수와 단둘이 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별생각 없이 앉아 담배를 피워물고 있는 내게 느닷없이 송영배 교수가 이렇게 물었다. "유선생, 우리가 루쉰 같은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명색이 루쉰을 공부하는 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스쳐지나갔을 법한 의문이 벼락치듯 육박해온 것이다. '루쉰 같은 인간을 만든다'라. 루쉰 공부의 제일 마지작 장에서 대미를 장식할 그야말로 '열려진' 질문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1-3. 내 술친구인 이동옥형이 사귀는 연배가 지긋하신 술친구분이 있었다. 가당치 않게시리 학위 논문이랍시고 루쉰을 끄적거린 '것'을 그 술친구께 갖다 드리면서 한잔 얻어먹는 게 어떠냐는 이동옥형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고. 평소 루쉰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그분은 이미 환갑을 넘긴 은퇴한 언론인이었다. 그분 댁 좁은 거실에 차린 술자리에서 우리는 서로 수인사를 나누고 상대방의 맥을 짚어본 다음 곧바로 루쉰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눈 다음 자리가 파할 즈음 그분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유선생, 그런데 있잖아, 난 루쉰을 알고 나서 가장 불행했고, 가장 행복했어!" 우리는 그날 밤 대취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일순 술이 확 깨고 말았다. 그리고 그분은 며칠 뒤 우연찮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분은 당신이 소장하시던 유품 가운데 루쉰과 관계되는 몇 건을 내게 남겼다. 이따금씩 그분이 내게 물려주신 루쉰 관계 일본 서적들의 냄새를 맡곤 하는데, 이 글을 쓰느라 다시 들쳐보면서 그분이 붉은 색연필로 밑줄을 쳐놓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아마 가장 루쉰다운 구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넘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떠받치고 있는 일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세우는 일보다 훨씬 효과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넘어진 다음 다시 일으켜세우는 일이 넘어지려는 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보다 그들에게 훨씬 이득이 있을 터이니까 말입니다. II. 우리가 루쉰을 빚어온 경과 80년대 이후로 쳐서 그간 국내에서 발간된 루쉰 관계 서적들을 일별하니 10여 권을 넘어 헤아린다. 하고 많은 작가·작품 중에 루쉰을 왜 특별하게 대접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기도 하고, 또 반면에 할말이 너무나도 많다. 그 많은 말과 사연을 이 자리를 빌려 풀어낼 도리는 없는 것이고. 하지만 루쉰에 대한 우리네의 대접이 소홀해온 것은 사실이다. 물량으로 따진다면 책의 권수로 쳐도 그렇거니와, 소개의 체계도 허술하기 짝이 없으니 그 탓은 우리 중국 문학을 공부하는 인간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으렷다. 독자들에게 목록을 가이드할 겸 그 동안 햇빛을 쏘인 바 있는 단행본을 적으면 대충 다음과 같다: 1) 박병태, {노신 선생님}; 2) 마루야마 노보루(丸山昇), 한무희 옮김, {노신 평전─문학과 사상}; 3)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역주, 한무희 옮 김, {노신 문집}; 4) 이욱연 편역,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5) 유세종 편역,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서한집); 6) 왕스징, 신영복·유세종 옮김, {노신전(魯迅傳)─루쉰의 삶과 사상}; 7) 루쉰, 유세종 옮김, {들풀}; 8) 중국현대문학학회 엮음, {루쉰의 문학과 사상}; 9) 왕푸런, 김현정 옮김, {중국의 노신 연구}; 10) 유세종·전형준 편역, {투창과 비수}; 11) 전형준 엮음, {루쉰}. 위에 나열한 목록을 훑어보면서 보잘것이 없다 느끼면서도 그런 가운데로 묘한 맥락이 감추어진 채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도합 11권의 루쉰 관계 책들은 시기별로 세 단계쯤으로, 곧 80년대와 90년대 초입 그리고 다시 90년대 중반의 것들로 나눈다면 모양이 그럴싸하지 않을까 싶다. 2-1. 1)은 베이징 여사대 시절의 제자였다가 나중에는 사실혼의 관계로 발전하는 17세 연하의 한 여인, 곧 쉬광핑(許廣平)이라는 왈가닥 소녀와 그 스승인 루쉰이 주고받은 편지글 모음집이다. 전집 가운데 가장 최근판인 인민문학출판사의 1981년판 {루쉰 전집}은 루쉰이 주변 사람들과 나눈 사적인 서신들에 더하여 {양지서(兩地書)}로 11권을 꾸미고 있다. {양지서}는 전체가 3집으로이루어져 있는데, 제1집은 1925년 3월부터 7월까지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것으로, 루쉰이 베이징 여사대 재직 당시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 제2집으로 가면 루쉰이 베이징을 등지고 샤먼에 머무르는 동안 쉬광핑은 본가가 있는 광조우에 있었는데, 샤먼과 광조우 사이를 오간 편지이다. 이때는 이미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 사이였다고 보면 크게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제3집은 루쉰이 상하이로 옮겨와서 본격적인 결혼 생활로 접어든 이후 잠깐 베이징에 들를 기회가 있었는데, 그간에 두 사람이 나눈 편지글로 이루어져 있다. {양지서}라는 제목에서 '양지'라는 말은 {주역}의 [십익(十翼)] 가운데 하나인 [설괘전(說卦傳)] 가운데 "하늘은 셋이요, 땅은 둘(參天兩地)"이라는 구절에서 루쉰이 제목으로 끌어쓴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말로 옮길 경우 "둘로 갈라진 땅에서 주고받은 편지" 정도면 어떨까. 그러니까 1)에 수록된 35통의 편지는 40줄을 훌쩍 넘어버린 중년의 루쉰, 그것도 "모친이 자신에게 내린 선물"에 지나지 않지만 엄연한 본처 주안(朱安)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 집안을 들락거리던 혹은 학교에서 루쉰의 강의를 수강하던 한 겁 없는 처녀 사이의 기묘한 연애(?) 편지인 것이다. 제1집을 읽으면서 우리는 짐짓 스승으로서의 엄정함을 잃지 않으려는 루쉰의 비 상한(?) 노력과 그런 루쉰을 기묘한 방식으로 공략(?)하는 쉬광핑을 떠올리는 것도 1)의 또 다른 독법일 수 있다. 하지만 루쉰은 목석이 아니었다. {양지서}의 제2집이 번역되어 독자들이 그 편지글을 대하는 날 독자들은 쉬광핑의 연인으로 변신하면서 약간은 곰살맞게 변한 루쉰의 모습을 떠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을 터이니까. '바람'을 피우는 루쉰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1)에 서 바람둥이 루쉰을 떠올리려 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제대로 된 '바람'이라면 눈에 띄지 않게 부는 법이니까. 그리고 이런 두 땅을 오고 가는 '바람'결 속에 루쉰의 글 전체를 그 가운데서 끌어당기고 밀어내면서 장력을 유지시켜주는 동시에 삶을 받쳐주는 화두가 자리잡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화두는 1)의 제4신, 곧 쉬광핑에게 보낸 루쉰의 편지글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내 작품을 쭉 보아온 것 같은데, 나의 작품은 너무 어둡습니다. 나는 오직 '어둠과 허무'만이 '실재'하는 것임을 늘 느끼면서도, 오히려 그와 반대로 이렇게 절망적인 항전을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해온 탓에 편벽된 목소리가 많습니다(好像常在看我的作品, 但我的作品, 太黑暗了, 因爲我常覺得惟 '黑暗與虛無'乃是 '實有,' 却偏要向這些作絶望的抗戰, 所以多着偏激的聲音). 위의 구절은 훗날 왕후이에 의해 "반항절망(反抗絶望)"이라 정식화되거니와, 소설이나 잡문의 위세에 눌려 자칫 가장자리에 방치될 수도 있었을 이 {양지서}를 역자가 발굴해낸 의미는 적지 않다. 옮긴이 박병태는 이러한 점을 1)의 부록으로 붙인 [노신 소설론─{납함}에서 {방황}까지 정신의 궤적]이라는 글의 결론부에서 루쉰의 "작품에 패배와 절망과 죽음이 즐비한 것은, 그가 그 만큼 투철히 삶의 간난함과 현실의 고통을 깨달았다는 증거"라 적고 있는 것은 1)의 번역 및 소개에 대한 한 가지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박병태의 루쉰의 글쓰기는 아련히 머릿속으로 떠올려진 것이 아니라 다케우치 요시미가 보았던 대로 "몸부림치면서(G銳"얻어진 소산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1)은 그간 [아Q정전]이니 혹은 [광인 일기]니 하여 세계 문학 전집의 한쪽 끄트머리 말석에 앉혀진 채 수모를 당하거나 눈 밖에 나 있던 처지로부터 아연 루쉰을 새로이 주목하고자 시도한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자리매겨야 하리라. 2-2. 2)와 3)은 1)의 뒤를 이어 '80년대'적인 요구와 은밀히 손을 잡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아, 당시 우리는 루쉰을 읽고 또 번역하여 소개한다는 일 자체가 금제되고 있을 무렵에 살지 않았던가. {모시정전(毛詩正傳)}의 '모'라는 글자를 '마오쩌둥(毛澤東)'의 마오(毛)로 간주한 나머지 해외에서 반입된 서적이 연구자의 손에 전해지지 못했으며, 인민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거개 인민이라는 글자로 인해 무조건 국제우체국에서 압수당하는 나라에서 우리가 숨을 쉬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2)와 3)은 위험천만한 운명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유격전의 일환이거나 혹은 숨을 들이쉬고 내쉴 일종의 환기통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당시의 검열 당국이 만일 2)에서 마루야마의 루쉰론이 "혁명을 궁극의 과제로 삼고 살아간 루쉰(그를 형용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말을 훗날 그의 말 중에서 찾으면 '혁명인'이라는 것이 해당될 것이다)이 문학가 루쉰을 낳은 무한의 운동을 찾아가는 일이 나의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더라면, 그리고 다케우치의 {노신 문집} 5 권에 실린 [{이심집} 서언] 가운데 "후에 사실을 알고 신흥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야말로 장래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는 루쉰 자신의 술회를 꼼꼼히 읽고 거기에 주목했더라면 이 책들에 대한 대접은 아마도 달라졌을 것이다. 2-3. 그리고 '80년대'는 뿌리가 뽑혀 공중에 뜨고 말았다. "길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길이 끝나고 말았다"는 이야기들이 나돌 그 무렵 4) 5) 6)이 시중에 깔렸다. 4) 5) 6)이 나온 1991년과 1992년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단어가 한창 기세를 올리던 시절이 아니던가. 옮긴이들이 노린 것은 독자의 확보였던 듯싶다. 왜냐하면 2)와 3)이 죽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독서 풍토와 한국의 독서 풍토는 엄연히 달랐고, 기반도 달랐는데도 그것을 날것으로 삼키려다 소화 불량을 빚은 것이다. 2)를 읽으려면 루쉰에 대해 기본적인 안목을 갖춘 독자이어야 했으며, 3)은 우리네 문학 관념으로부터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고풍스런 옛 문인들의 '문집'의 틀을 빌리고 있지 않았던가. 일단 포장이 새로워져야 했던 것은 물론이다. 대학생 대중을 위한 교양 도서로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간 셈이라 할까. 더구나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이영희·신영복 두 분이 번역에 날개를 달아주었으니 중언부언 일러 무삼하겠는가. 그럼에도 이들 4) 5) 6)은 80년대와 90년대의 빈틈을 교묘히 포착하고자 한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4)의 옮긴이인 이욱연이 이전 시대의 루쉰의 의미와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독자들이 읽어낼 '의미의 사이뜸'을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벅차다. 다만 놓고 바라볼 뿐"이라고 했을 때의 착잡함이나 5)의 서문에서 신영복이 "비로소 이 시점에 있어서 뜻있는 삶을 이루어가기에 힘들어하는 오 늘의 모든 젊은이에게 이것은 참다운 위안이고 격려일 수 있으리라 믿는" 심경들이 공히 루쉰 특유의 고뇌와 맞닿고 있음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6)은 도래할 90년대에 대한 거부감의 소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공산주의적 사상가, 진화론에서 계급론으로 전신한 인물로서의 루쉰상은 80년대 초반만 해도 가장 신선했을 흉상이었을 터이나, 9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낡은 상으로 변해버린 아이러니컬한 현실에 대한 옮긴이들의 또 다른 "몸부림(G銳"의 소산 이었는지도 모른다. III. 루쉰 소개의 새 단계 3-1. 그리고 몇 년을 격하는가 싶더니 7) 8) 9) 10) 11)의 다섯 종이 선을 보였다. 7)은 옮긴이인 유세종 교수의 학위 논문([루쉰의{야초(野草)}의 상징 체계 연구])의 연장선 위에 익히 예견되었던 작업이다. 다만 루쉰의 가장 핵심에 다름아닌, 또한 혁명가와 사상가 그리고 문학인을 합친 개념에 해당되는 '시인 루쉰'의 진면목을 밝혀줄 만한 후속 작업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하는 숙제는 그대로 남겨져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서구 문학의 기라성 같은 시인들의 시적 성취에 결코 미달될 까닭이 없는 루쉰의 {들풀}이 어떻게 세계 문학의 장에서 객관화될 것인가 하는 것이 그 숙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더불어 8)의 경우는 종래 우리네 루쉰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들을 일정하게 집약한 것으로 논문을 게재한 연구자들 거개가 루쉰을 주전공으로 하고 있는 이들이다. 개별 연구자에 따른 다양한 접근법과 문제 의식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향후 루쉰 연구의 세계적 운동장에서 상대방과 자웅을 겨룰 연구의 가닥을 잡아나갈 것으로 기대가 된다. 특히 유병태 교수의 [루쉰 웃음의 인식론적 탐사]와 같은 글은 프랑스에서 루쉰을 연구한 연구자의 독특성이 배어 있어서 중국이나 일본, 혹은 미국의 루쉰 연구와는 자못 다 른 면모를 보인다. 중국의 전통적인 '문'의 체계를 최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탈근대적 사유들과 연결시키는 성취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음미할 만한 대목이 충분하다. 아울러 우리 문학과 루쉰의 접점을 간략하게 개관한 김시준 교수의 글은 비록 머리말의 틀을 빌리고 있음에도 비전공 독자로 하여금 8)의 자리가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가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비전공 독자들의 지남의 몫을 하리라 믿는다. 9)는 신중국 성립 이후 본격화된 루쉰 연구에 있어서 제2세대의 선두 주자 가운데 한 사람인 베이징 사범대학의 왕푸런 교수의 루쉰 관계 글들을 왕교수의 문하에서 훈도를 받고 있는 제자인 김현정이 옮긴 것으로, 장문의 [중국 노신 연구의 역사와 연황]은 저자인 왕교수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간사(簡史)로서의 루쉰 연구사가 아니라 사상사적인 윤곽의 모색이라는 의도에서 씌어진 글이다. 최근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사조유파론(思潮流派論)에 기대면서 네 시기로 루쉰 연구의 역사를 훑는 가운데 최근의 이른바 선봉파 비평과 영미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루쉰상의 변천을 종적으로 개관하고 있어서 학(學)으로서의 루쉰뿐만 아니라 사상으로서의 루쉰에 대한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3-2. 그러나 국내에서 햇빛을 본 기획물 가운데 가장 정격(正格)으로서의 품을 확보한, 다시 말해 그 자체로서 작품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역시 11)이라 하여야 옳을 것이다. 연전에 필자가 소속된 중국현대문학학회의 주최로 루쉰국제학술발표회가 열렸다. 학회의 연조가 그리 쌓인 편도 아니고 연구의 축적이나 성취가 국내의 여타 외국 문학에 비해 열악한 실정임에도 약간의 무리랄 까 만용을 부린 셈인데, 어쨌든 그 발표회를 통해 여러모로 소득이 없지 않았고, 지금도 그때의 장면장면을 떠올리며 모두들 흐뭇해하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 흐뭇했던 기억 가운데 하나로, 서울대학교 중문과의 서경호 교수가 발표회에 참여한 국내외 인사들의 면면을 훑어보고는 왈 "영양가 있는 인물들은 다 끌어다 모았네!"라고 지나가는 말로 추켜주던 일이 생각난다. 11)을 첫번 대면하면서 목차를 훑어보고 느낀 첫 소감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편자인 전형준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본격적인 작업이 아니라 "우리 나름의 정당한 루쉰 읽기를 위한 전초 작업"이라는 겸사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작가론'만큼은 서가의 한 귀퉁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쓸 운명에 빠 지지는 않고 루쉰 연구자 혹은 중국 현대 문학 연구자라면 늘 책상 가까이에 놓고 수시로 펼쳐볼 '물건'이겠다는 예감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3-3. 루쉰을 읽고 거기에 빠져들어 평생을 루쉰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자가 어디 한둘일까마는, 그럼에도 루쉰을 그저 바라보거나 쳐다보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거개일 테다. 보다와 보아내다, 읽다와 읽어내다의 차이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글을 문면 속에 내버려두거나 방치하는 것과 그 글에 생명을 불어넣어 살려내는 것과의 차이라 할까. 루쉰이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루쉰 일 수 있는 것은 그 첫 자리에 취추바이(瞿秋白)의 [{루쉰 잡감 선집} 서언](이하 [서언]이라 함)이 있기 때문이다. 루쉰을 살려냈다는 행위는 그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일개 작가론으로서의 루쉰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서언]이라는 글만으로 중국 현대 문학 사상사에 자리잡게 해도 무방할 만큼의 중량을 지닌다는 말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의 루쉰, 그 전(傳)을 제대로 수행한 인물이 바로 루쉰이라면 그 전을 보아내서 받아 이어준 인물이 바로 취추바이다. "신해 혁명으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사반세기에 걸친 치열한 투쟁의 고통스런 경험과 깊이 있는 통찰을 통해 얻어낸 고귀한 혁명 전통을 새로운 혁명 대오 내부로 전해주었다"고 보아내고 읽어낸 취추바이야말로 루쉰 전통의 진정한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게 한다. [서언]은 좌련(左聯)에 가담했지만 그저 한 명의 원로이거나 혹은 실세로부터 거리를 가진, 자칫하면 상징에 불과한 자리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루쉰의 입지를 바로잡게 해준 문학사적 쾌거에 다름아니다. 좌련의 결성 과정에서 노출된 소장 좌익 문인들의 급진성을 준열하면서도 점잖게 비판한 대목이 '혁명적 로맨틱'에 대한 훈도였다면, 당시로서는 유일무이한 '깨어 있는 현실주의자 (淸醒的現實主義者)'로서의 루쉰의 면모를 잡감에서 발견하여 주위의 거친 오해로부터 그를 구출하고 엄호한 글이 바로 이 [서언]이다. [서언]을 읽으면서 맛보는 준열함과 엄정함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추어진 따사로움은 어느 면에서는 팍팍하기만 했을 중국 현대 문학사에서 봄기운과 같은 훈기를 느끼게 하는 대목으로 가히 압권이 아니겠는가. 이런 글을 가리켜 제대로 된 지도 비평이라 불러 마땅하리라. 1896년생 취추바이라면 1881년의 루쉰보다 반세대의 연하가 아닌가. 기실 루쉰이 좌련에 휘말려들어간 것은 일정하게 대세 비슷한 것은 아니었겠는가. 좌련에 들고 나서 루쉰의 고뇌가 말끔하게 가셨다면 그것은 루쉰을 지나치게 단순한 인물로 이해하는 것일 게다. 루쉰은 [서언]을 읽고 중년에 쉬광핑과 만나 새로운 삶을 얻은 것만큼이나 힘을 얻었을 것이다. 여인네는 자기더러 예쁘다는 말을 들려주어 귀를 즐겁게 해주는 남정네를 위해 몸단장을 하고,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는 사마천의 경구를 루쉰은 새삼 떠올렸던 모양이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취추바이를 위해 루쉰이 우치야마(內山) 부부의 도움을 얻어 구해준 상하이 베이스추안로 취추바이의 처소에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 사람의 지기를 얻으면 족한 것을, 이 세상 그와 같은 가슴을 품고 보게시리(人生得一知己足矣, 斯世當以同懷視之)"라는 대련(對聯)이 루쉰의 필치로 걸려 있다. 그를 알아준 유일한 인물이 바로 취추바이였지 않았을까. 만약 루쉰이 죽기 전까지 잡문이라는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을 찾으라 한다면 바로 이 [서언]에서 말미암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언]은 루쉰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루쉰을 왼쪽으로 이른바 '견인(牽引)'하면서도 루쉰의 자리를 보존해주는 것이다. 이 대목은 결코 조직가나 이론가로서의 취추바이의 노회함의 발로가 아니다. 사심 없는 문학인 취추바이의 발로인 것이다. 루쉰은 어디까지나 무산 계급의 '벗'이요, 프로 혁명 문학의 '동반자'이다. 그럼에도 루쉰이 "그러나 나중에는 현실의 교훈을 통해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무산 계급을 통해서만 장래를 기약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물론 루쉰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계통의 저작물에 대한 학습과 반추를 거친 것이었을 터이지만, 그와는 다른 경로로 취추바이의 애정 어린 비판과 동시에 '견인(牽引)'이라는 행동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다시 말해 루쉰을 이용해서 빼먹은 다음 루 쉰을 차버리려 했다면 결코 [서언]과 같은 글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날의 중국 현대 문학사도 당연히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먹혀든 것이다. 먹혀들어 서로 되먹이면서 나온 것이 바로 [서언]이고 {해상술림(海上述林)}이다. 저명한 취추바이 연구자의 한 사람인 딩징탕(丁景唐) 교수는 그 [서언]을 "휘황(輝煌)한 논문," 곧 찬란한 글이라 적고 있다. 이 찬란한 글을 읽으면서 눈시울을 한번쯤 적셔보지 못한 자는 아직 중국 현대 문학사의 문밖에서 있는 자라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3-4. 이러한 취추바이의 자리를 잇고 있는 것이 마오쩌둥이라면 그 마오쩌둥이 빚어놓은 루쉰 흉상에 새겨진 '교시(敎示)'들을 충실하게 따른 것이 신중국 성립 이후 강단 루쉰학의 첫 세대인 왕야오(王瑤), 리허린(李何林), 린즈하오(林志浩) 그리고 탕타오(唐u)이겠다. 그리고 그 1세대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그 1세대의 껍질을 깨고 나온 것이 바로 제2세대인 쳰리췬과 왕푸런이며, 그들의 뒤를 곧바로 이어 이른바 인생 철학을 도입하여 노신과 니체를 결합하는, 당시로서는 파천황의 시도를 한 것이 바로 왕후이이다. 그들은 공히 기존의 '공산주의 전사'라거나 혹은 '사상가·문학인·혁명가'의 삼위일체로서의 루쉰상을 해체하는 전략을 견지한다. 예컨대 왕후이가 "생시몽, 쇼펜하우어, 니체, 키에르케고르 등의 개체 생명에 대한 사상은 20세기 생철학과 실존주의 철학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루쉰의 문학·철학 사상이 생성되는 데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안드레예프, 구리야가와 하쿠손, 도스토예프스키 등도 생철학 방면에서 루쉰에게 영향을 미쳤다. {들풀}의 인생 철학은 20세기의 산물로서 현대 인본주의 사조와 동일한 사유적·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라고 한 지적은 그의 박사 논문 지도 교수인 탕타오가 술회하고 있듯이 세월의 격절을 뛰어넘어 노신의 감추어진 또 다른 일면을 들추어낸 일대 전환점에 다름아니었다. 위에서 왕후이가 이야기 하는 '현대 인본주의 사조'란 바로 탈근대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왕푸런의 [[광인 일기] 자세히 읽기] 역시 "[광인 일기]가 현실주의 창작 방법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지적은 취추바이 이래의 그 관두에 붙이는 수식어가 사회주의가 되었건 혁명적이 되었건 혹은 맑게 깬(淸醒的) 현실주의자로서의 루쉰 이라는 관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광인, 곧 전통 봉건 문화에 대한 정신 반역자의 이 상태가 바로 사상 계몽의 과정"이라는 '계몽자' 루쉰의 발굴은 사상가·혁명가·문학인의 삼위일체로서의 루쉰상에 대한 치명적인 가격이 되는 셈이다. 종래의 '좌(左)' 경사로부터 '우(右)' 경사에 이르는 대단히 자연스런(?) 과정을 하나의 원둘레와 같은 입지를 제공함으로써 무난한 통합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 쳰리췬의 [사상가로서의 루쉰]이다. 그는 루쉰의 언어들을 {신논어(新論語)}로 격을 드높이는 가운데, 루쉰 사상의 원주(圓周)가 그리는 공간을 두 개의 축의 대립 구도로 설명한다. 곧 "중간물·반전통·계몽주의·비이성주의·실존주의·휴머니스트·개성주의자·계급 투쟁의 전사"라는 다양한 루쉰의 축들을 루쉰의 '정체성(整體性)' 가운데 통합을 시도하는 것이다. 나는 이들 세 사람, 곧 왕후이와 왕푸런 그리고 쳰리췬의 나이를 가만히 운산해본다. 각기 1958년, 1942년, 1938년생인 이들의 '우' 경사는 우리가 80년대에 '좌' 경사를 대표했던 인간들과 뒤집 어진 형국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왕후이의 맞은편에 혹시 김명인이 있는 것은 아닌가. 김명인의 맞은편에 물구나무서기를 한 왕후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 1942년의 염무웅과 1938년의 백낙청이 이들과 각기 마주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나만의 착시인가. 3-5. 일본에서의 루쉰학(學)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첫번째가 다케우치, 두번째가 마루야마이다. 이들 두 봉우리의 별명을 일본에서는 각기 '다케우치 루쉰(竹內魯迅)' '마루야마 루쉰(丸山魯迅)'이라 부른다. 첫 봉우리는 1944년 일본 평론사판 동양사상총서 18의 {루쉰}, 두번째 봉우리는 1964년 평범사의 동양문고 47의 제목 역시, '그 문학과 혁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루쉰}이다. 1944년판 다케우치의 {루쉰}은 그가 '대동아 전쟁'에 징집 영장을 받 고 쓴 글, 다시 말해 일종의 유서인 셈인데, 그래서 그런지 그 {루쉰}의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에 비감이 묻어나오는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다. 11)에 번역 소개된 [루쉰의 삶과 죽음]의 원판인 1944년 판본의 서장의 제목을 우리말로 옮기면 [사와 생에 관해서]이다. 생과 사가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루쉰에게 있어 죽음은 문학의 완성이다"라는 구절을 처음 읽으면서 나는 무릎을 쳤었다. 입인(立人)이니 구인(救人)이니 혹은 수인(樹人)이니 하는 표현은 루쉰에게 항용 사용되는 문구지만, 그럼에도 루쉰은 작품 속에서 늘 사람을 세우거나 구하거나 혹은 심었던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죽였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경우에도 반드시 죽이고 만다. 다케우치는 루쉰의 죽음에서 종교적 이미지를 발굴해내고 그 연장선 위에서 속죄의 염(念)을 읽어낸다. 여기서 우리는 대동아 전쟁이라는 '성전(聖戰)'에 이끌려가는 다케우치 자신의 모습과 부분적으로 오버랩되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가 루쉰의 죽음이라는 사안으로 자신만의 {루쉰}의 도입부를 삼는 데 '인동(認同)'하게 되는 것이리라. 훗날 태평양 전쟁으로 다시 명명되고야 마는 대동아 전쟁과 일본에서 중국 문학을 연구하고 거기서 노신을 발견한 다케우치라는 젊은 평론가는 역사적 채무감에 시달린다. 자신들의 시대에 결국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른바 국민 국가로 올바르게 정립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는 열패감 혹은 자괴감이 자연스럽게 {루쉰}에 스며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패전 후의 그들이 '국민문학 논쟁'의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뒷전으로 물리고 국민이라는 단어를 채택한 것 또한 일본 지식인 혹은 문학인들의 가해자로서의 채무감이 개입되어 있다고 보면 크게 빗나간 이해는 아닐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경우는 필시 우리의 경우 민족문학 논쟁 과정의 도립(倒立)된 형국일 터. 이러한 지적 열패감의 공간에서 중국이라는 거울은 자기 반성의 호기제로 대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전후(戰後)에 이르면 서구적 '근대의 초극'이 정초되며, 다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가 나오게 되는 것은 일견 정해진 수순을 밟는 듯한 인상을 준다. 3-6. 마루야마를 거론하면서 나는 그가 일본 공산당의 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이 단순한 흥미거리가 될 수 없음은 다음과 같은 그의 목소리가 그저 책상물림의 탁상공론이 아니라 그의 체중이 실린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나는 줄곧 루쉰의 핵심에 접근할 수는 없었고, 그 주위에서 전개된 이질적인 상황 속에서 루쉰 스스로가 지니고 있던 혁명에 대한 태도에 대해 탐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간략하나마 단언할 수 있다면, 그가 혁명을 현실에 대한 진정한 변혁으로 여긴 것과 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혁명'에 대한 담백하면서도 심각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언제라 도 루쉰에게 그 무엇보다 먼저 배워야 할 점이다. 일본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권위'로서 받아들여졌다. 나는 그것이 유일한 '과학'과 '세계관'이 된 것 이외에도, '혁명'의 과제를 처음으로 일본 사상사 속으로 끌고 들어와 중대한 작용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세계관'과 '과학'으로서 갖고 있는 계통적인 온전성과 논리에 부합하는 특징이 일면 '지적 권위'로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다른 면에 있어서는 '혁명'이라는 중요한 실천적 과제를 제기함으로써 인정과 도덕 방면에서 진보적 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이러한 견해는 지식인과 민중의 경우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이며, 여기엔 내용이 포함되지 않는다. 적어도 그것이 민간에 충분히 뿌리내리는 데 장애로 된 원인의 하나는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인용부가 어찌 일본만의 사정일손가. 마루야마의 이러한 지적은 우리의 머리통 위에 떨어지는 죽비의 소리가 아니겠는가. 1931년생인 그가 본격적인 연구자의 길을 걸을 당시는 주지하다시피 일본에서의 좌익이 급진에서 극좌로 나아갈 무렵에 해당된다. 학원의 일각에서 전공투에서 적군파로 나아가고 있던 무렵의 고뇌가 1965년판 {루쉰}에 스며 있으며, 나아가 [혁명 문학 논쟁 에 있어서의 루쉰]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강단에서의 연구와 실제 투쟁 사이의 거리를 마루야마는 루쉰으로 메운다. 그는 루쉰이 "'혁명'을 하나의 관념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로 받아들였다. 바꾸어 말하면 사상으로서 그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라 하여 다케우치가 일찍이 계몽자 루쉰을 부각시켰던 것과 마주선다. 아니, 다케우치를 도립(倒立)시킨다. 다케우치와 마루야마의 사이에는 물론 강단파 연구자와 현장 비평가라는 차이, 다분히 인상에 치우친 노신상과 엄밀한 실증에 기초한 노신상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차이는 사소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전전과 전후 세대의 자본주의적 근대를 극복하기 위한 발상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3-7. 미국에서의 루쉰 연구의 기초는 아마도 패트릭 하난Patrick Hanan이라든가 혹은 그보다 아래 세대로 레오 오우판 리Leo Ou-fan Lee 등 미국 국적의 중국인들에 의해 닦여졌다. 50년대에 펜타곤 예산이 중국 연구에 대거 투입되었음을 감안하면 이들의 초기 루쉰상 역시 동서 냉전 이데올로기로부터 과히 자유롭지 못했음을 규지(窺知)케 하며, 그 이후로도 그러한 경향은 폭넓게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루쉰이란 인물은 작가로서의 루쉰이지, 사상가이거나 혁명가로서의 아이덴티티에 대해서는 가급적 주목하지 않거나 소거시키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입장인 셈이다. 50년대에 펜타곤 예산이 가장 집중적으로 투하된 바 있는 예일 대학에서 중국 문학을 가르치는 마턴 앤더슨 역시 그러한 입장에서 소설가로서의 루쉰을 본다. 현금까지 집필 의도나 주 제 의식 따위를 놓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새로 엮은 옛이야기(故事新編)}를 그는 신시기의 몇몇 소설들과 연결지어 "지적·심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새로운 창조적 영감"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러한 '창조적 영감'의 일환으로 그는{새로 엮은 옛이야기}에서 노신이 구사하고 있는 '익살'이라는 '형식적 기제'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문맥에서 '익살스러움으로의 전락'은 더 이상 변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변호한다. 이른바 '유활지처(油滑之處)'를 포스트모더니즘과 결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루쉰에게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소를 적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루쉰에게서 발견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들이 창작상의 기교나 혹은 나방법의 측면을 넘어서서 루쉰 글의 창조성이 지니는 본령에 가 닿는다고 본다면 그것은 그릇된 이해로 떨어질 소지가 있다. 루쉰의 리얼리즘이야말로 마르케스로 대표되는 이른바 마법적 사실 주의를 너끈히 품에 안을 수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새로 엮은 옛이야기} 가운데서 최근의 SF 영화가 구사하는 그런 상상력의 수준을 넘어서는 [칼을 만들다(鑄劍)]야말로 리얼리즘의 정봉이라 보기 때문이다. IV. 나가는 글 이미 제한된 원고의 매수를 넘겨도 한참을 넘겼다. 끝으로 11)을 엮은 전형준 교수의 다음과 같 은 술회를 음미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없지 않을 듯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루쉰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외국 작가에 대한 관심에 그치지 않고 한국 문학과의 깊은 내적 연계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루쉰이 이처럼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데에서 우리는 깊은 암시를 받게 된다. 그것은 루쉰이 단지 중국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적 인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중국의 근대 속에서 탄생한 루쉰의 문학 적 생애는 한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를 비춰주는 하나의 거울인 듯하다. 중국의 특수성만을 지닌 거울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보편성에 가 닿는 그러한 거울 말이다. 전형준 교수는 [소설가로서의 루쉰과 그의 소설 세계]에서 "중국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동아시아는 그 착종 위에 근대 추구와 근대 극복의 동시성이라는 문제가 중첩되고 있거니와, 루쉰 소설은 그 중첩된 지평에서 재해석될 때, 동아시아 문학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좁히면 신해 혁명의 루쉰으로까지 좁아지지만 넓히면 그는 20세기의 루쉰"이라 일컫는다. 편자는 아마도, 중국 문학이 중국의 국민 문학 혹은 민족문학이라는 개별성의 영역에 머무른 채 폐쇄된 내부 회로에 갇혀 있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자국의 중화 중심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 문학의 장에서 새로운 인간 해방의 구심으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라는 특수한 매개 고리를 확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터이다. 그런 고리는 특히 서양 문학의 절대적인 우위에 시달려온(?) 우리네 문학판에 신개지(新開地)를 열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동시에 민족문학을 중심으로 한 외국 문학 전반과의 판도의 재구성이 이제 기지개를 켜고 있는 소리로 들려오는 듯도 하다. 그런 점에서 1)이 발간되기까지를 되새기는 일은 의미가 없지 않을 터이다. 고 박병태군이 군문에서 틈틈이 옮겨낸 유고를 모은 것을 필시 생시의 그와 생면부지였을 터인 김하림이 서문을 쓴 일, 그 일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박종한·한병곤 등 중국 문학을 공부하던 소장들이 초고를 손보아준 일 그리고 고인의 가장 지근 거리에서 동문수학하던 박희병이 후기를 쓴 일이야말로 순수 했던 한 시절의 미담의 수평을 넘어서는 한 전범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이 자리를 빌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 따름. ▨ [연세대 중문과 교수]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